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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경에 아반떼가 녹동 읍내로 들어선다.
송은 미스 정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버스정류장 옆에 차를 세운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터치한다. 834-261×. 신호음이 서너 번 울리고 저쪽에서 여보세요? 한다. 늦잠을 잤는지 다소 어눌한 미스 정의 목소리다. 송은 까닭 없이 반가워 환호성을 터트릴 뻔했다.
“미스 정? 나야.”
“어머 송 계장님, 어쩐 일이세요?”
“그냥 보고 싶어서…. 그동안 잘 지냈지?”
“옆에 누구 있어요? 부장? 아니면….”
“나 혼자야. 여기 버스 정류장이야. 다도해의 모습 좀 담아가려고 내려왔어.”
“그래요? 우리 집이 바로 옆인데…. 잠깐만 기다려요. 옷 좀 걸치고 금방 나갈게요.”
십 분 후에 미스 정이 나오고, 그들은 녹동항 주변을 부랑아처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닌다. 소록도가 코앞에 있고, 낙지 멸치 장어가 잘 잡힌다는 득량만이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저 바다요, 이곳 어민들과 완도 금당, 장흥 회진 사람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하기도 해요. 해상 자원의 보고로 알려진 곳이거든요.”
송은 미스 정의 얘기를 듣고 카슈미르 지방을 떠올린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에 걸쳐 있는 엄청난 면적의 비무장지대…. 종교 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줄기차게 독립을 요구했었다.
과음을 하고도 잠을 못 이루던 날 밤에 송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시청했다. 현실의 차폐감이 목울대까지 차올라 견디기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 자신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땅이 이 지구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송은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는지 모른다.
한때 무정부 상태였던 카슈미르.
저녁이면 노을 때문에 붉게 물들곤 하던 카슈미르의 강 산 들판 호수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알 수 없는 무연한 정서 같은 게 느껴졌다. 주변국의 군사력과 정치력이 미치지 못했을 때 그들은 누구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갔을까?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게 어렵다면 죽어서 카슈미르의 강산이 되고 싶었다.
송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최선과 정의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런 지배도 받지 않는 낯선 공간으로 떠나고 싶었다.
미스 정은 방파제 입구에 놓인 <길목음식점>으로 송을 이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일행이 홀에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냉콩국수와 메밀국수를 시켜놓고 미스 정이 묻는다.
“회사 사정, 나쁘지 않아요?”
미스 정은 마치 출산 문제로 삼 개월쯤 연가를 내놓고 집에서 푹 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상하게 보지 말아요. 계장님 그렇게 하고 내려온 거 보니까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잖아요.”
미스 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은 온몸을 훑어본다. 추리닝 바지에 땟국처럼 보이는 얼룩과 씹지도 않은 껌 쪼가리들이 눌어붙어 있다.
“사무실 안에서는 계장님이 무정하기 짝이 없는 냉혈 동물로 보였는데 여기서는 정말로 정이 많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인 게…, 참 이상하죠?”
백토로 구워 만든 사기그릇에 2인분은 됨직한 콩국수를 은쟁반에 받쳐오며 종업원이 메밀국수는 5분만 기다리면 나오는데요, 라고 자신 없는 말을 한다. 두부 한모만 한 얼음덩어리가 면발을 빈틈없이 덮고 있다.
“먼저 드실래요?”
미스 정이 자기 쪽에 놓여 있는 사기그릇을 송 앞으로 내민다.
“난 메밀국수를 시켰잖아.”
송은 얼음이 서서히 녹아 물의 양이 많아지는 그릇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나무젓가락을 쪼개서 굵은 면발을 찍어 먹는 미스 정을 본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국수를 먹어치우는 모습이 호주머니에 음식값은 고사하고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빈털터리가 분명해 보인다. 박이 사무실 벽에 커다란 그림을 걸어놓자 “우리 부장님은 정말로 엉뚱하셔” 하며 깔깔거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미스 정이 회사를 그만둔 이유가 문득 궁금해지는군. 인사도 없이 아침 일찍 도둑고양이처럼 사무실로 들어와 사직서 내놓는 사람이 어디 있어?”
미스 정의 개념 없는 행동을 직원들은 당최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이해 안 되는 일은 없지. 이유는 간단해. 명절이다 휴가다 하면서 한 번씩 고향에 내려가면 보름을 잡아먹고 오는 여잔데…. 자책감이 없다면 그것도 인간은 아니지.”
부장은 언제 미스 정을 예뻐해 주었냐는 듯이 그녀의 부재를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송은 생각한다. 파경 직전까지 온 부장의 가정불화가 미스 정 때문에 생겨났다는 걸…. 그녀도 그 문제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고 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공교롭게도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 이유로 고향에 내려가서 족히 한 달은 잡아먹고 올 텐데…. 그냥 속 시원히 사직서를 내는 게 편하다고 생각한 거죠.”
얼음이 완전히 녹아 버린 국물을 미스 정은 들이켠다. 근무 중에 부장이 미스 정을 한두 번 불러낸 것에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송은 잘 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현관까지 십 미터가 안 되는 거리도 비를 맞기 싫었던지 미스 정에게 우산을 가져오라고 전화한 적이 많았으니까.
“홀어머니밖에 없겠군. 결혼을 빨리 해야 되겠어.”
식충이처럼 그렇게 허겁지겁은 아니지만, 메밀국수가 나오자 미스 정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송은 내용물을 먹어치운다.
“결혼이요? 결혼 같은 거 안 해요.”
그녀는 쥐구멍의 통로를 버젓이 지키고 있는 수고양이처럼 가소로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버지 죽고 나니까 많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중3 시절 도시로의 진학이 아버지의 불호령 한마디에 좌절되자 내 인생까지도 좌절된 기분이었어요. 그때 저보다 공부 못한 친구들 대도시에 있는 여고에 들어가서 괜찮은 대학까지 나왔지만 그렇게 잘된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명절 때 그들 입에서 서클 활동이니 동아리 모임이니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전 아버지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 하루가 멀다고 마을가게 앞 평상에 앉아서 술을 마셔댔어요. 엄청난 술값을 탕진한 거죠. 그 돈으로 절 얼마든지 도시에 진학시킬 수 있었거든요. 일흔을 넘기고 아버지는 술을 자제했죠. 당시 돈 때문에 진학 못 시킨 일을 죄책감으로 생각했던지 자식이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을 때도 빨리 결혼하라고 채근 안 했죠. 눈을 감으면서 단지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을 뿐….”
미스 정은 이제 그건 한낱 과거에 불과할 따름이니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고, 어쩌면 자조 섞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5분 늦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송은 미스 정보다 5분 먼저 국수를 먹어치우고 카운터로 걸어가 값을 지불한다. 미스 정이 티슈로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송은 밖으로 나왔다. 선창가에는 인근 섬으로 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주위에 보이는 몇 안 되는 섬이 그들의 행선지라고 하기에는 꽤 많은 수다.
“저기 보이는 섬이 소록도예요. 너무 심심하게 보이죠? 겉은 저래도 속은 꽤 알차요.”
금방이라도 섬 구석구석을 안내할 것처럼 미스 정이 얘기한다. 송은 미스 정의 친절과 배려가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라고 생각한다.
“업무차 내려온 거 거짓말이죠? 그냥 내려온 거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계장님 얼굴에 전부 씌어 있어요. 십 년 동안 회사를 위해 죽어라고 뛰어다녔다. 결근 한번, 심지어 조퇴나 지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가가 고작 이거냐? 그런 심정으로 내려온 거 아니냐구요?”
송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맞아. 때로는 이런 일탈도 필요하다고 봐. 병신처럼 일만 하고 사는 거,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거지 난 이제 아니야.”
“그렇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바람 좀 쐬고 바로 올라가세요. 무단결근, 그거 안 좋은 거예요. 제가 해봐서 알아요.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맘껏 지배하는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면 다들 그러게요.”
그녀는 달맞이하러 갈 때나 입으면 제격인 열두 폭 스란치마를 펄럭거리며 저 멀리 걸어간다. 속세에 욕망이 없기 때문에 번뇌도 없어 보이는 순수하고 무연한 걸음걸이로 계속해서 포구 주변을 거닐고 있다. 서른 해까지 오는 동안 인생살이에 달관한 건지 회의를 느낀 건지 문득문득 내비치는 그녀의 무위한 뒷모습에서 송은 중간섬에 갇혀 지내는 K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