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기아광주산악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개인산행사진& 여행사진 스크랩 여행사진 남도답사일번지-강진 무위사,백련사,다산초당
산신령(최순조) 추천 0 조회 311 15.01.29 17:2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누가 : 기아자동차 문화해설사 과정27명(대형버스1대)


♣ 언제 : 2015. 01.25일(일) 08시 경정비주차장

 

♣ 어디 : 광주 - 나주국립박물관 - 영암 군청앞 점심 - 강진 무위사 - 백련사 - 다산초당 - 광주 녹차유황오리 저녁

 

♣ 주관 : 김명수해설사,김종윤해설사

 

♣ 날씨 : 약간 흐린 겨울날씨.저녁에 비

  

♣개요 : 작년에 있은 회사에서 주관한 문화해설사 기초과정에서 함께한 학우들과 현장학습을 다녀왔습니다.


           27분의 기초과정을 함께한 분들과 가족분들이 함께한 이번 행사는 해설사과정에서 오래동안 경험이 풍부한 


          김명수,김종윤 두분의 사내해설사님의 주관으로 나주국립박물관,강진 무위사,백련사,다산초당등 남도답사일번지 강진을


          주무대로 하여 평소에 경험해보지 못한 마한시대의 유적들과 조선시대후기 실학사상의 집대성으로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다산 정약용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청자골 강진의 백미를 둘러보고 무사히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광주에서 여유있게 1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나주국립박물관


입구 안내판




국립나주박물관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처음 와보는곳이고 또 개관한지가 2년도 되지않아


해설사님 두분 빼고는 다들 처음이라고 한다.






국립나주박물관(國立羅州博物館)은 영산강과 나주지역 고대문화의 형성, 발전, 소멸의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기 위하여 설립된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속기관으로 2013년 11월 22일 개관하였다. 국립나주박물관장은 학예연구관(4급 상당)으로 보한다.


 초대 관장은 박중환 학예연구관이 임명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에 위치한다. 


개관일 8개월 만에 10만명을 돌파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탐스러운 우리나라 고유의 농산물인 호박류들을 전시해 놓아


포근한 고향내음을 느끼게 한다.


호박 사세요..호박..우리 일행인 두 아낙이 장난삼아 호박을 팔아 본다.





라남도를 가로지르는 영산강은 예로부터 풍요로운 삶의 터전을 제공하여 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영산강 유역에 
사람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때는 약 8만 년 전으로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이
 발전하면서 세력을 키운 여러 집단들이 모여 작은 나라를 이루게되었습니다.





우리의 선조인 백제시대 이전의 마한의 본거지였던곳이 이곳 나주였다고 한다.









나주박물관 해설사님을 따라 박물관을 둘러 보는 일행들









실내에서의 카메라 작동법이 익숙치가 않아 후레쉬를 터트리니 빛이 안내판에 반사되어


눈부신현상이 발생 되었다.













백제시대의 독널들





신라와 백제의독널 유적


 

널은 토기가 처음 만들어진 신석기시대 이래로 계속 사용되어 왔는데 선사시대에는 일상에서 쓰던 토기를 그대로 널처럼 

이용하였으며 모두 유아, 소아만이 묻혔다. 그러나 역사시대로 들어오면 어른을 위한 독널무덤도 만들어지게 된다. 

특히 여기에 전시된 대형 독널은 백제시대(5~6세기)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서 무덤 전용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독널 무덤이 주된 묘제였으며봉분이 높고 큰 무덤(고총, 高塚) 속에 묻혔던 

주인공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추정된다. 





독널은 현세로 치면 시신을 담는 관에 해당된다.











독널무덤은 영산강유역 고분의 특징  


 

큰 독(甕)을 널로 사용한 무덤으로,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독널(甕棺)이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시체, 즉 주검이나 뼈를 묻은 토기를 말하고 있다. 넓은 의미로는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든지 흙으로 빚어 구운 것에 주검을 묻는 것을 일컫지만 대체로는 일상용이나 널로 쓰도록 만든 토기에 주검이나 뼈를 묻는 것을 말한다. 한편 뼈만을 추려서 묻는 것을 뼈단지(骨壺), 기와를 사용하였으면 기와널(瓦棺), 집이나 신발·배모양의 네모진 형태의 것은 도관(陶棺)이라고 부르고 있어 좁은 의미의 독널과는 구별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인 앙소(仰韶)문화의 西安 半坡村이나 洛陽 王灣 유적에서 집단적으로 발견된 바 있고, 일본에서도 신석기단계인 죠몽(繩文)시대 중기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부 신석기시대의 독널무덤이 알려지고 있다. 즉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인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신석기시대 독널이 알려졌다.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독널무덤 유적으로는 부여 송국리, 공주 송학리·남산리, 익산 석천리 등 주로 금강유역에서 주된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거창 대야리에서도 조사되었다. 이 시기의 독널무덤은 바닥이 납작하고 몸통이 배가 부르며 목은 없으나 아가리가 약간 밖으로 꺾인 듯한 소위 송국리식의 토기를 바르게 세워 묻고 위에 뚜껑을 덮은 형식이다. 토기의 바닥이나 몸통의 아랫부분에는 일부러 조그만 구멍을 뚫고 있는데 이 구멍은 배수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독널무덤에 부장되는 유물은 나주 반남면 고분에서처럼 화려하고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하나 대체로 빈약하며 유물상도 일정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 영산강유역의 독널무덤에서는 독널의 내부에 머리와 가슴부위에 귀걸이·목걸이 등의 장신구가, 허리부분에는 손칼이나 도끼, 덩이쇠(鐵鋌) 등이 부장되고 토기로는 작은 단지나 뚜껑접시 등이 1-2점 부장되고 있다. 독널의 외부에서는 이음부분이나 작은 독의 아래쪽에 2-3점의 항아리나 단지 등이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데 일부 구슬, 가락바퀴(紡錘車), 손칼(刀子), 토기가 출토된 예도 있다. 









산강유역에는 마한인들이 남긴 수백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 무덤에는 독널무덤 즉, 거대한 항아리 2개를 붙여 
만든 관이 부장되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이러한 독널 안에서 발견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봉황장식이 
달린 큰 칼, 창, 화살 등은 마한의 문화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널무덤의 발전과 소멸은 영산강 지역 마한의 성쇠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휴일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온 회원들도 두루 있어 참 좋은 문화답사 같다.





우리지역 영산강 유역의 인류가 태동해서 현재까지 살아온 연대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역사 공부하기에는 안성마춤이다.













나주박물관위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 주변 고분과 자미산성등을 둘러보며 마한시대 선조들의

생활상을 다시한번 들어 봅니다.


화창한 날씨는 아니지만 시원한 겨울바람에 탁트인 조망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합니다.




자미산성


산성이라고는 하는데 동네 뒷산같은 곳입니다.다음에 오게되면 한번 둘러보고

가야겠네요.


사진을 찍을때는 몰랐는데 밭을 일구는 농부 한분이 계셨습니다.





나주자미산성

羅州紫薇山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8호. 나주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있어서 사방으로의 시계가 좋다. 해발 94.5m의 자미산은 구릉에 불과하나, 

산정은 편평한 대지로 되어 현재 헬리포트(heliport : 헬리콥터의 이착륙 설비가 되어 있는 곳)가 조성되어 있다.


성벽은 본래 안쪽으로 호를 파고 내탁식(內托式)의 성벽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며, 둘레가 약 740m이다. 성문은 3개소의 단절부가 있으나, 

지표에 문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성안에는 건물터와 ‘용왕샘(龍王泉)’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성내에서는 백제토기편과 고려 및 조선시대의 유물도 수습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도 산성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접전을 벌였던 곳으로, 견훤은 자미산성에 성을 쌓고, 왕건은 약 4km 떨어진 

영암 신북면의 갈마산에 주둔하고 싸워 견훤이 패하였다고 하며, 삼별초(三別抄)의 군사가 주둔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의 주변에는 대안리고분군·덕산리고분군·신촌리고분군 등의 대규모 고분군이 있어서 이들 고분군을 만든 집단들이 

이 산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백제시대 대표적인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지금은 성벽이 토석 혼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제 나주박물관을 다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강진 무위사로 가기에 앞서 영암군청앞에 있는

식당으로가 점심을 먹기로 합니다.





반남(潘南) 고분군에는 대형 옹관고분 수십 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지상에

분구를 쌓고 분구 속에 시신을 안치한 커다란 옹(;항아리)을 매장하는 방식이다.

 이 고분양식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등과 구별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고분 양식이다.

대형옹관고분은 나주 반남 일대는 물론 영암, 함평, 무안 등 영산강을 따라 형성되고

있으며 이 지역 고대 세력의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반납리 고분





기찬멧길의 고장 영암군청입니다.





수없이 올랐던 월출산이 왜 안오냐고 부르고 있습니다.





월출산 자락 강진 무위사


월출산에 오르면서 한 두어번 스쳐간적이 있는 무위사에 처음으로 솔살을 들여다보러 왔습니다.

제가 산에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사찰과 불상을 봐온지라 그냥 사진을 담기위한 수단으로 사찰과 대웅전을 스쳐갔지만,

그절이 그절같고 그불상이 그불상 같아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문화해설사 과정을 조금 맛을 보면서

그절의 내면에 숨어있는 스토리를 이해하니 그맛또한 깊은맛이 깃들여

있어서 관심이 가게 되었네요.





오늘 문화답사를 주관하신 김명수해설사님



과거에 산악회에서 같이 활동했는데 지금은 국토순례단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동호회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시기에

같이할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작년 문화해설사 기초과정 강의를 함께 들어서 다시 만나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여년 넘게 문화해설에 대한 공부를 해오셔서 지금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명품 해설사가

되어 있습니다.





리나라 절은 원효대사,의상대사가 거의 다 이름을 올리는데 이곳 무위사도 원효스님 이름이 들어 갑니다.


이곳 무위사는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태조왕건의 첫번째 부인이 이곳 나주 호족출신이고,왕건이 이곳 나주에서 10여년동안 생활하면서 기반을 다지며

새나라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선각대사 형미스님도 태조 왕건을 도와서 고려를 세우는데 일조를 하고 궁예에게 죽임을 당하여 후일

태조 왕건이 공을 치하하여 선각대사비를 세우게 하여 그넋을 위로 했다고 합니다.





무위사의 백미인 극락보전으로 향합니다.




기에는 허름한 극락보전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2개의 국보와 3개의 보물이 숨어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건물입니다.


극락보전 안에서는 사진찰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다른분 블러그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전남 강진군에 있는 무위사(無爲寺)에는 한 건물에 2개의 국보와 3개의 보물이 있다.

 

 

 1,강진 무위사 극락보전(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종   목 : 국보 제13

지정일 : 1962.12.20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94번지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2.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종   목 : 국보 제313

지정일 : 2009.09.02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2구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7(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아미타여래삼존벽화



3.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종   목 : 보물 제1312

지정일 : 2001.08.03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



4.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無爲寺 極樂殿 白衣觀音圖)


종   목 : 보물 제1314

지정일 : 2001.08.03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 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극락전 백의관음도





극락전 백의관음도



5. 무위사 극락전 내벽사면벽화(無爲寺 極樂殿 內壁四面壁畵)


종   목 : 보물 제1315

지정일 : 2001.08.03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를 포함하여 총 29점이다.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

진열되어 있다.이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 주악비천도 6,

연화당초향로도 7, 보상모란문도 5, 당초문도 1,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삼존불화는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과 여섯 비구를 배치하였다. 배경으로는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본존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입고 있는 옷주름은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이들 벽화 중 삼존불화와 아미타래영도 2점과 15세기 추정의 관음보살도, 당초문도 2점 등 4점은 특히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주악비천도



 








국보와 보물의 차이가 뭘까?


  • 국보:법령에 의해 국가적인 보물로 지정된 최상급 유물

    보물:유형문화재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국보 다음으로 높은 문화재



      • 국보(國寶)와 보물(寶物)

         

        문화재 보호법상 '지정 문화재'는 문화재 청장이 지정하는 국가 지정 문화재와 특별시장·광역시장 또는 도지사
        가 지정하는 시도 지정 문화재가 있다. 형태에 따라서는 유형 문화재, 무형 문화재, 기념물, 민속 자료로 분류
        된다. '국가 지정 문화재'는 국보, 보물, 중요 민속 자료, 사적, 명승, 사적 및 명승, 천연 기념물, 중요 무형 문
        화재로 분류된다.

         

        '보물'은 건조물, 전적, 서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고고 자료, 무구 등의 유형 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문화재 청장이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다.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중 인류 문화의 견지
        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다.

         

        즉,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특히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거나 제작 연대가 오래고
        특히 그 시대의 대표적이거나 제작 의장이나 제작 기술이 특히 우수하여 그 유래가 적거나 형태, 품질, 제재,

        용도가 현저히 특이하거나 특히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을 국보로 지정하고 있다. 국보
        1호는 숭례문이며, 보물 1호는 흥인지문이다.

         


        국보(國寶)

         

        유형 문화재 및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文化財) 중 인류 문화(人類文化)를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입장에서 역
        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 가치가 크고 제작 연대(製作年代)가 오래되며 특히 그 시대에서 대표적이거나 제작 의장ㆍ

        기술이 특히 우수하여 그 유래가 드문 것을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것이다. 국보(國寶)의 지정 번호

        는 가치의 고저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순서를 말하고 있다. 국보는 보물의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 시기

        가 오래 되고 그 시대를 대표하거나, 전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계 있는 것을 지정

        다. 국보 1호는 1400년대에 지어진 숭례문(남대문)이었으나, 현재 전소되어서 복원 중에 있다.


         

        보물(寶物)

         

        유형 문화재 중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ㆍ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자문 기관인 문화재 위원회의 심사와 토의를
        거쳐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 국보의 가치만큼 시대를 대표하거나 독특한 것이 아니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계가
        없더라도, 일반적인 지정의 기준에 미치면 보물이 된다. 그래서 보물의 수는 국보보다 많고 사물의 성질, 모양,

        형식 따위가 서로 같은 것들이 많다. 보물 제1호는 1800년대에 지어진 흥인지문(동대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보는 2백86점, 보물은 1천2백37점이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 안내문





무위사 삼층석탑 안내문


삼층석탑은 국보도 아니고,보물도 아닌 문화재로 등록 되어 있습니다.




강진 무위사 삼층석탑 ( 문화재 자료 제76호 )



무위사삼층석탑(無爲寺三層石塔)



문화재자료  제76호 (강진군)


1984.02.29 에 지정되었다.


위치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 극락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은 현재 극락전 오른쪽 선각대사 편광탑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양식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석이 연결되고 있는데,

각구를 2구로 나누고 중앙에는 탱주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사이에는 안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었으며 하대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하면에 1단 괴임을 상면은 가벼운 경사를 주고 역시 1단의 각형괴임을 조각하였다.

 

상층 기단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고

동서면에 벽판석이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으며,

갑석은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을 각출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몸체부는 몸체와 옥개석이 각 1매씩으로 각 몸체의 양면에 모서리 기둥이 목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와 너비를 줄여 알맞은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물 흐르는 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보륜, 보주가 완전하게 남아있다.

 

이 탑은 3층 지붕돌과 1층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

그 외의 부채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조성연대는 옆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6년)와 같은 시대이거나 아니면 이 연대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고려초기로 추측된다

 





옆면에서 바라본 삼층석탑과 극락보전





선각대사 형미스님의 탑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종   목 : 보물 제507

지정일 : 1969.06.16

 

소 재 지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94번지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1550) 태감(太甘)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미륵전


미륵전에는 무위사와 썩 잘 어울리는 석불이 모셔져 있다.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토속적인 불상이 있기 마련인데 이 석불이 

이 지역의 얼굴을 대표하는 석불이 아닌가 싶다. 인근 수암마을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 석불을 보고 있으면 이 지방의 

아주머니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눈두덩과 입술이 두툼하고 전체적인 얼굴이 웬만한 시련은 얼마든지 견디어 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상이다.

 본인은 배우지 못하였으면서 갖은 고초를 다 겪어 외아들을 훌륭히 키워 낸 굳센 남도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은 배우지 못하여서 그렇지 사리가

 분명하고 자기 주관 또한 또렷하여 외모만 보고 막대하였다간 크게 무안을 당할만한 대찬 여성이다.





저안에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는줄도 모르고 나는 밖에서만 돌고 있었네요.ㅎ


혼자 다시가야 겠습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을 둘러보고 나오는길에 단체사진을 한장 남겨 봅니다.


처음 보신분들도 있고 예전에 알고 지내는 분들도 있고..그냥 좋습니다.





김명수해설사님은 무위사 삼층석탑에 대해 해설을 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곁에서 내용을 듣는것도 좋치만 먼발치서 이렇게 바라보는모습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한참 그 빛을 발하는 동백도 잠시 기울려 보고..





무위사를 둘러보고 제일 후미로 나오다가 오랜만에 호찬동상을 만나서


한컷해 봅니다.


서로 하는일이 많아 함께하지는 못해도 통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

.

.

강진 무위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차량으로 30여분 이동하여 남도답사일번지 강진 만덕산 백련사로


달려 갑니다.




예전에는 없었는데 

새롭게 지었는지 깔끔한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





강진만을 사이로 좌우 기둥을 두고 강진읍이 사람으로 치면 낭심에 위치해 있어서 명당중에 명당인지라


오랜 세월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피빛 동백


아직 실력이 멀게 느껴 집니다.





예전에 비해 깔끔하게 다듬어진 백련사 일주문을 지나고 천년고찰 백련사로  향합니다.


정부에서 지원이 많은지 이곳 저곳을 많이 고치고 리모델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백련사, 다산초당 안내문


예전에는 현재 다산 수련원쪽에 기념관이 함께 있었는데,지금은 별도 다산 기념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진  백련사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으며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 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백련사 대웅보전


또 공부좀 하고 갈까요?



대웅전과 대웅보전의 차이


대웅전(大雄殿) 현판은 석가모니부처님 좌우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세 분을 모실 때 사용하고, 대웅보전(大雄寶殿)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미타부처님 약사여래부처님 세 분을 모실 때 사용됩니다.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인데, 석가모니부처님은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큰 힘이 있어 마군의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대웅전(大雄殿)은 위대한 깨달음을 구한 큰 영웅인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입니다.


대웅전석가모니부처님과 그 분의 협시보살인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모셔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수인(手印: 손 모양)은 대체로 오른손을 무릎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으로 

마군을 항복 받았던 모습을 나타내나,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 설법인 · 여원인 · 시무외인 등 다른 수인의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식과 양어깨를 덮는 통견식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왼쪽에 모셔진 분이 문수보살로 부처님의 지혜(智慧)를 상징하는데 여의주나 칼 또는 

청련화(靑蓮花)를 들거나 청사자를 탄 모습으로 조성되며, 또 보현보살은 오른쪽에서 부처님을 모시며 부처님의 

행원(行願)을 상징하며, 흔히 연꽃(연꽃 위에 경책을 얹기도 함)을 들고 코끼리를 탄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므로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봉안한다.

 

석가모니부처님 오른쪽에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이며, 조상의 극락왕생과 내생의 행복이 직결되는 아미타부처님과 

왼쪽에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이며, 고통받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는 자비의 약사여래부처님의 삼세불을 

모시는 경우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부릅니다. 


삼세불을 모신 대웅보전은 삼세불의 탱화가 봉안됩니다.













만경루에서 바라본 도암만





백련사 대웅보전의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이곳이 고향인 김종윤해설사님이 백련사 외벽에 그려진 탱화들을 인간들의 삶과 비유 하여


재미있게 설명을 해줍니다.


















◈문화재명: 강진 백련사 사적비

 

◈지정번호: 보물 제1396호

 

◈소재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7

 

◈문화재 안내: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이다. 

귀부(龜趺), 비수(碑身), 이수(이首)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부는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비신과 이수는 1681년(조선 숙종 7)에 조성되어

 각기 서로 다른 건립연대를 보이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地臺石)과 더불어 화강암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다. 용두(龍頭)는 목을 움츠리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입은 상·하 7개의 가지런한 이빨로 꽉 다문 모습이며, 하단에는 길게 수염이 흘러 목주름까지 늘어져 있다. 위 입술은 약간 들려 눈은 

삼각형의 구도 안에 동그란 눈동자가 볼륨있게 표현되었다. 용두의 뿔은 목 뒤로 흐르며 2조로 갈라지며 비좌(碑座)에 연결되어 있다. 

귀부의 등면은 너비 30㎝의 음각선으로 곽을 조성한 후 내부에 당초문(唐草紋)을 양각했다. 귀갑문(龜甲紋)은 6각형으로 내부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네 발은 모두 5개의 발가락을 지녔으며, 꼬리는 왼쪽으로 틀어 올렸다. 귀부의 중앙 상면에는 비좌가 조성되었는데,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이 양각되었고, 상면에는 118㎝×15㎝ 규모의 비신공(碑身孔)이 마련되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의 크기는 227㎝×190㎝×110㎝이다.





백련사 원구형 부도



백련사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사리탑으로, 사리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탑은 네모난 기단(基壇)위로 공 모양을 한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특히 탑신의 맨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둔 구슬띠를 새겨 놓아 시선을 모은다.

이 절내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양식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일행중에 창을 전문으로 배우신 소리꾼이 있어서 부도전 동백나무숲 아래에서 


구성진 우리가락 소리를 막걸리 한잔과 더불어 듣고 갑니다.


심청가 한대목 같았는데 잘 기억나지가 않네요.ㅎ









백련사 동백림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백련사 동백림은 도암면 만덕리 소재 백련사 위의 경사지

  4.3㏊면적에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m쯤 되고 줄기 아래부터 가지가 갈라져 관상목으로 된 것이 많으며

  주위에는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기온에 따라 한두송이씩 피고 지기를 계속하면서 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좋은 경관수로 조선시대에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

  라 하여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이곳 백련사의 동백은 꽃잎을 따 녹차, 밀, 수수, 찹쌀, 보리 등의 가루를

  이용하여 전을 부쳐 전차(錢茶)와  함께 간식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썼다는

  동백화전은 그 역사가 수백년에 이른다고 전한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곳에 해월루라는 명품 루각이 나오는데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여 


그냥 지나쳐 가버립니다.


그래서 자료사진으로 대신 올려 봅니다.





만덕산 해월루(海月樓)



해월루는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강진군의 다산 정약용 실학성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신축되었는데 만덕산 오솔길 정상에 

2층 십자형 누각으로 4억여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뽐내며 세상에 드러낸 해월루는

서울 북한산의 중흥사 비석거리 앞에 세워진 ‘산영루’의 형태를 재현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오솔길 중간에 세워진 해월루는 차(茶)에 심취했던 다산선생이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주역사상

 등을 교유하며 산길을 걸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했다.




황칠나무


이길에 예전에는 없었던 황칠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군에서 특화사업으로 식목을 한것 같네요.





금부터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배지로 주무대였던 다산초당으로 넘어 갑니다.

워낙 유명하고 조선시대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위인이죠.

 


다산 정약용선생이 실학정신을 꽃피운 숲길


정약용 선생은 천주교 박해로 시작된 총 18년의 유배기간중 반 이상을 다산초당에서서 머물며, 그의 저서인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였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이어지는 숲길 초의선사와 함께 시국담을 나누며 자주 거닐었던 유서 깊은 숲길로 전해진다.

 숲길 초입에는 천연기념물인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군락지가 원형 그대로 존재하고 있고,

숲길 주변에는 수령 100-300년,  동백나무 1500본과 참나무류를 비롯하여 ,

소나무 ,차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가시나무 등이 천연 혼효림을 이루고 있다.





이곳이 고향이신 김종윤해설사님이 자신이 어렸을때 이곳에서 뛰어놀던 시절의 일화들을 곁들이며,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명한 업적들을 소상히 설명해 준다.


천일각을 지을때 알바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백련사 가는 오솔길


찌뿌듯한 하늘이 맑게 갠 어느 봄날, 냉이 밭에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자 다산은 자기도 모르게 초당 뒤편

나무꾼이 다니는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들판이 시작되는 보리밭을 지나며 그는 탄식했다.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

백련사에 혜장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혜장은 해남 대둔사 출산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화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 경지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두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동백숲과 야생차가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일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 


친구를 찾아가는 길의 행복...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퉁이' 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이곳에서 다산선생이 강진만(구강포)을 바라보면서 시름을 달랬을거라고 하는데  지금은 소나무들이 

자라서 조망이 시원하지  못하다.





천일각에서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고 다산선생의 고독했던 유배시절을 조금이라도 음미해보고


본격적인 다산의 유산속으로 들어 갑니다.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 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 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집자(集字) : 필요한 곳에 쓰기 위해 글자를 모으는

♣모각(模刻) : 원본을 모사(模寫)하여 판목(版木)에 새기는 것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 초당 옆에 있는 연못으로 1808년 봄 다산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만든 연못으로 

연못 가운데 조금만 봉을 쌓아'석가산'이라하고 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산속물을 떨어지게 만들어 '비류폭포'라 하였다)










편한 자세로 다산초당 마루에 걸터앉자 정약용선생의 이곳에 10년동안 기거하면서 18명의 제자와 500여권의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후학들을 가르쳐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 다산초당



  강진만이 한눈으로 굽어 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일경 정석









다산3경 다조


차를 끓이던 부뚜막으로 썼던 바위라고 합니다.













다시본 연지석가산





얼굴을 크로즈업 할려고 한번 댕겨 봤는데,글쎄 별로 잘나오지가 않은것 같네요.ㅎ













다산선생의 초상화





이곳에 상주해 계신 문화해설사분인데 김종윤해설사님의 해설 내용중 다소 다른 부분이 있어서


옳바르게 정정해 주신다.













조금 이르지만 활짝핀 동백꽃이 곧있으면 올 봄을 노래하는것 같다.













예전 같으면 이길을 쭉 따라서 다산수련원 방향으로 가서 다산기념관 유물을 구경했는데,지금은 다산수련원과 별도로


이곳 아래 마을근처에  다산기념관을 만들어 놓아 구경을 하고 가기로 했다.





귀여운 토끼 녀석은 배가 고프는지 연신 호박을 갈아 먹고. .





다산유물 전시관





개관한지가 얼마 되지않아 아직 입장료는 받지를 않은것 같다.









다산의 연대기





다산의 가계도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다산 정약용선생





다산이 거쳤던 행로





다산이 집필한 책들과 편액들









다산의 부인 홍씨가 다산선생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






고대 마한의 본거지였던 반납고분군,나주국립박물관과 남도답사일번지 강진의 무위사,백련사,다산초당등

동백꽃향기와 역사 향기가 어우러져 최고의 힐링 여행지였던 강진문화탐방은 육체적 수련못지않은

정신적 수양과 뜻을 함께한 좋은벗들과의 멋진 하모니가 조화를 잘 이루어

가슴 가득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하루였습니다.


산은 위,아래가 없고 문화는 높고 낮음이 없듯이 적절하게 등산과 문화를 겸비하여 폭넓은 견문을

높일수있는 좋은 시간이었던것 같습니다.


문화탐방 기획을 훌륭히 잘 마무리해주신 김명수님,김종윤님께 감사 드리며 함께하신

27분의 문화여행의 동반자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산  신  령~




 
다음검색
댓글
  • 15.02.02 18:02

    첫댓글 아~~ 부회장님께서도 문화해설사과정 마치셨네요~~~
    여행기 죽 읽어보니 그 어느 해설사보다 꼼꼼하시고 멋지네요^^
    제가봐도 멋진 문화해설사는 조만간 부회장님의 자리인것 같습니다*^^**

  • 작성자 15.02.03 20:55

    시간이 나서 한번 따라 갔는데,새로운 사실도
    알게되고 나름 재미도 있는 답사여행였습니다.
    우리나라 산 어느곳을 보아도 경치 좋은곳에는
    항상 절이 위치해 있는데 조금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