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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미스 정과 헤어지고 K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에 입력된 전화번호부를 검색한다. 여기 녹동항인데, 좀 나와 줄래요? 간절한 말이 혀끝에서 맴도는데 정작 전화번호부에는 K의 연락처가 적혀 있지 않다.
송은 여객선터미널 입구에 세워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도를 본다. 소록도 너머로는 완도 금당 섬들이 쌀겨처럼 흩어져 있다. 송은 <중간섬>의 위치를 알아볼 요량으로 안내판에 바짝 다가선다. 빨간색 점선으로 고흥과 완도를 구분 짓고 있는데, 깨알 같은 섬에 역시 깨알 같은 글씨로 <중간섬>이라는 지명이 표기돼 있다. 중간섬은 K 말대로 두 지역의 경계인 점선에 놓여 있다. 섬도 작고, 지형의 기복을 알리는 등고선 표시가 없는 걸로 보아 그곳은 무인도임이 금방 들통난다. 송은 여객선터미널로 가서 해로를 따라갈 수 있는 배의 목적지를 확인한다.
선창에는 올 초 운항을 시작한 제주행 카페리호가 위풍당당하게 정박해 있다. 또 다른 여객선은 중간섬 너머 금당도가 최종 목적지다. 송은 여객선터미널 매표소로 가서 “고흥 다도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은데…” 말한다. 그들은 3시에 유람선이 뜰 것이니 예약하라고 일러준다.
오후 3시, 유람선은 열다섯 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바다 위를 질주한다. 뱃머리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는 지대한 호흡 장애를 일으켜 등으로 바람막이를 하고 포말 자국을 떨어뜨리는 배의 뒤쪽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년에 박이 이름 붙인 <바위섬>이 송 앞으로 다가온다. 송은 문득 바위섬에 걸터앉아 낚시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갈고랑이에 미끼도 꿰어 달 줄 모르는데…. 송은 배의 속력 때문에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바위섬을 보면서 강태공을 꿈꿔 본다.
낚시로 말하자면, 그것도 능력인 양 부장은 막 건져 올린 생선의 배를 회칼로 가르고 포를 떠 즉석에서 초장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한다. 꺼억! 송은 날것을 먹을 때마다 부장의 입에서 연거푸 트림이 나오던 걸 기억한다. 매달 <풍광> 발행이 끝나면 사흘 정도의 여유가 직원들에게 찾아온다. 부장은 사무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저곳에서 낚시와 유람을 해봤으면…” 아쉬워한다. 미스 정이 떠나 버려 부장은 그림을 보면서 떠벌릴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한다.
중국 서호에 비치는 아름다운 저녁노을 위에서 사공이 나룻배에 몸을 싣고 있다. 오늘 하루 치 장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유유자적 노를 젓고 있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과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이곳에서 벼슬을 할 때 제방을 쌓은 덕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백제(白堤)와 소제(蘇堤)도 보인다. 서호의 풍경은 가히 ‘시인의 호수’라고 할 만하다. 송은 풍경화를 볼 때마다 사공이 젓는 배에 올라타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한다.
커트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가이드 덕에 송은 중간섬에서 내릴 수 있었다. 보름 정도 머물 예정이라고 하자 커트머리는 난처하다는 듯 ‘여긴 무인도 아닌가요?’ 묻는다. “아마 그렇지 않을걸요.” 송은 뒤돌아서 출발하려는 배를 보며 씩 웃는다.
K의 집은 설탕가루 같은 고운 모래가 일 킬로나 이어져 있는 해변에서 도보로 오 분 거리에 있다. 송은 바위 부스러기 같은 것이 풍화해 형성된 듯한 돌길을 걸어간다. 어디선가 물새 떼가 날아와 한가로운 몸짓으로 해안선을 향해 하강하거나 하늘로 비상한다.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지 오후의 잔양마저 쨍쨍하다.
돌길이 끝나고, 산자락을 파 들어간 곳이라서 무성한 초목들이 사방에서 유혹의 손길처럼 잠입하는 거기, K의 집은 그대로 있다. 돌담불로 담벼락을 친 K의 통나무집은 석조 건물처럼 견고해 보인다. 통나무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K는 작년보다 풍성한 물이 괸 옹달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샘물을 들이켜며 식수 걱정을 안 해도 되니 무인도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벗어난 곳이 아니냐고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집 주변으로 올해 일군 것으로 보이는 텃밭이 두어 개쯤 더 자리를 잡았다. 텃밭마다 싱싱한 푸성귀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우묵한 샘 안에는 몸집이 거대한 거북이가 가오리처럼 납작 엎드려 있다. 족히 백 년은 살았으리라. 오래된 갑옷처럼 보이는 거북의 등딱지가 녀석의 수명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송은 세면도구만 들어 있어 솜털처럼 가벼운 륙색을 등에서 떼어낸다. K가 송을 금방 알아본다. 송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 전연 아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주라도 사 오는 건데, 송은 입맛을 쩝쩝 다신다. 요즘 들어 자신을 나락에서 구원해 주었던 건 술밖에 없었다고 송은 단정한다.
술을 잘 못 하는 송이 용케도 취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머그컵에 소주와 사이다를 일정 비율로 섞어 마시는 것이다. 마실 때는 영락없이 사이다 맛이지만 기분은 금방 몽롱해진다. 술을 마시면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혼란을 잠재우는 건 송에게 있어 획기적인 발견과도 같다.
아내는 매일같이 소주와 사이다 한 병씩을 사 오는 송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하지만 실직하는 가장이 꽤 많다는 사실을 매스컴에서 접하고 어느 정도 묵인을 한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 박이 부장으로 승진하고 며칠 동안이다. 박의 아내는 두 살이 많은 송의 부인과 절친한 사이다. 송과 박이 동창이라는 이유로 결혼 후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씩 만날 양이면 박의 아내는 허물없이 송의 부인을 언니라고 불렀다. 하지만 박의 아내는 남편의 승진 이후로 거짓말처럼 송의 집에 발길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송의 부인은 무진장 화가 났다. 송의 부인은 그 이유에 대해 제멋대로 상상했다.
언니, 형부가 승진을 못 한 건 순전히 언니 탓이야. 밤만 되면 허구한 날 그 짓거리만 하지? 언니와 형부는 정말이지 기계적이고 본능적인 사람 같애….
그런 생각이 들자 송의 부인은 치가 떨리고 머리가 살살 아파왔다. 송의 아침 식탁에 메마른 빵과 우유 한 잔만이 올라온 건 다음 날부터였다. 식탁은 며칠 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밤새 술을 마신 탓에 해장국이 필요한 송의 아침 메뉴가 너무도 잔인했다. “이게 뭐야?” 급기야 송의 인내가 폭발했다. “내가 뭘요? 당신도 승진만 되어 봐요. 식탁엔 만수성찬만 가득할 거예요.” 아내의 짜증이 정당한 것으로 느껴지자 송은 견딜 수가 없어 냉장고 문을 열고 술병을 꺼냈다. 하지만 소주는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자정이 넘었기 때문에 멀리 있는 편의점까지 술을 사러 가는 것도 무리였다. 결국 오랫동안 음미하면서 마실 요량으로 글라스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사이다를 가득 부었다. 그렇게 해서 몇 잔을 마시자 금방 취기가 올라왔던 것이다.
K는 볕이 잘 들지 않는 툇마루로 송을 안내하면서 동료와 같이 안 오는 거냐고 물어본다. 이번에 승진을 했기 때문이라고 송이 말하자 “승진을 하면 모두들 바쁘지요.” 축하해 줄 일이라며 K가 반색한다. 툇마루에는 다섯 칸짜리 함석 책장이 있다. 거기에는 무수한 책들이 판형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식물도감, 보물섬 이야기, 걸리버 여행기, 살아남는 법…. 첫 번째 칸에는 주로 여행과 풍물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다. 송은 다섯 번째 칸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훑어 나간다. 저 삼백 권이나 되는 책들을 K가 죄다 읽었을까? 송은 궁금해서 물어보기로 한다.
“교양서적인데요 뭐.”
K가 씩 웃으며 칡차를 끓이기 위해 냄비를 준비한다.
서쪽 수평선 위에 빨간 왜청으로 풀어놓은 듯한 저녁노을이 나타났다 사라지면 밤은 금방이었다. 송과 K는 저녁을 먹을 때까지 몇 마디밖에 주고받지 않았지만 교감이라도 한 듯 눈끼리 마주칠 양이면 씩, 멋쩍게 웃곤 했다.
K는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송을 불렀다. 송과 마찬가지로 탐색전은 그쯤 해서 끝낼 모양이었다. 낮의 이른 더위와는 달리 밤공기는 스산했다. 송이 땔감으로 사용하는 통나무를 깔고 앉자 어디서 났는지 K가 소주와 구운 오징어를 내왔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온 교감이 현실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자 송은 긴장감과 통쾌함이 교차해 몰려왔다.
“술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송은 K가 따라준 소주를 마시고 오징어를 뜯으며 말했다.
“저 술 잘 마셔요. 가끔 녹동에 나가 사 오곤 한답니다.”
“그렇군요.”
송은 머쓱해진 기분이다. 바보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닌 K가 술을 못할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만히 잠재웠다. 송이 어떤 상상을 하든 K는 그 이상으로 파격적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잘 손질된 머리 모양과 깔끔하게 면도한 얼굴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문명을 거부하는 게 절대 아니니까.
“근데 웬일이죠? 이번에도 풍랑에 떠밀려 왔나요?”
K의 말에 송은 난감해졌다. 그 질문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교감이고 묵계라고 치부했는데…. 하지만 컵에 담긴 말간 술을 비우고 나자 송은 뭐든지 까놓고 얘기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이번에 휴가를 냈어요. 산이고 바다고 배낭 챙겨 떠날 준비를 하는데 승진을 한 친구가 그러대요. 이왕이면 중간섬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오랫동안 망설였죠. 아직도 K가 그곳에 살까? 친구에게 물어보진 않았어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금은 걱정했죠. 괜히 갔다가 K마저 떠나 버렸으면 어쩌나 싶은 게….”
작년에 이곳을 떠나고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지만 매일 대면한 것처럼 K의 영상이 송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오곤 했다. 설령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K가 이곳을 버리진 않았을 거라고 송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적중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 차례군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작년에 왔을 때, 노형을 보고 이곳을 쉽게 버릴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죠. 도대체 이런 곳에서 왜 살아가나요?”
“한번 맞춰 봐요.”
“신비주의자나 자연인을 꿈꾸나 보죠?”
“난 로빈슨 크루소도 프란체스코도 아니에요.”
K가 사뭇 비장한 눈빛으로 너울거리는 불꽃을 바라본다. 마른 사철나무 잎들이 타타―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다.
“어렵군요.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걸 보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것도 같은데….”
송은 허탈하게 웃는다.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이곳까지 온 심정을 응석처럼 받아줄 것 같던 K가 딴사람처럼 느껴지자 송은 자신의 일탈 행위가 더없이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거짓말을 늘어놓았던 자신의 마음을 K가 꿰뚫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K에게서 용기를 얻기 위해 송은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집 안으로 들어간 K가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왔다. 소주 두 병이 바닥났지만 차가운 밤공기 탓인지 송도 K도 취하진 않았다. 송이 빈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는 동안 K는 뒤꼍으로 가 장작을 가져오더니 모닥불 위에 얹어놓았다. 그런 다음 잠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별도 있고 달도 있었다.
“가끔 마당으로 나와 밤하늘을 봐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늘처럼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면 무력감에 빠져요. 정신없이 소주를 마시죠.”
종이컵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켠 K가 엉뚱한 얘기를 한다. 송은 왠지 불투명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돼 있어요. 죽는다는 건 가슴이 미어질 만큼 끔찍하죠. 불치병으로, 뺑소니로, 자살로 요절이라도 했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구천을 떠돌 겁니다.”
어느새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오기는커녕 박 부장에게 당했던 일들이 송의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도 제명에 못 죽는 것만큼이나 억울하죠.”
“….”
“이 사회는 썩어 있어요. 인간은 누가 뭐래도 이기적인 동물이니까.”
“사회적인 동물이기도 하죠.”
“난 그런 인간들을 이길 수가 없어요. 좀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시기하고 아부하고…. 어제의 동료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까 적이 돼 있더군요. 차라리 그들의 출세를 위해서 내가 양보하고 말지. 눈꼴사나워서 못 보겠어. 그놈의 천성은 어쩔 수가 없나 봐요. 하지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았어. 갑자기 우상이 생겨났거든.”
“우상?”
K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취기 때문인지 모닥불 때문인지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바로 노형, 당신이야. 내 말 이해하겠어요? 난 노형을 구세주처럼 믿어 왔어요. 노형이 날 버리면 갈 데가 없어져요. 이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도전할 용기가 이젠 나에게 없어요. 날 죽게 내버려 둘 건가요?”
흥분과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왔지만 송은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K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러는 송을 아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중간섬을 찾아온 것도 충분한 수긍이 간다. 하지만 송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거라고 K는 안타까워한다.
“이 세상이 날 버렸어요. 내가 의지할 데라곤 여기뿐이야.”
모든 걸 내려놓고 살아온 듯한 K에게 자신의 일상을 의탁하려는 의지, 그것이 죽음과 맞먹는 용기라는 걸 송은 부정할 수 없다.
“취한 것 같군요. 오늘은 그만 자요.”
“아뇨. 난 말짱해.”
“이곳도 속세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노형 말곤 아무도 살지 않는데…. 구차하게 굴지 마요. 법과 권력의 지배가 없는 곳이잖아. 사람들은 노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겠지. 신선놀음에 빠졌다고도 할 테고.”
송은 K의 이마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가만히 속삭인다. 노형과 이곳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