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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개정 ‘제주4·3특별법’ 공포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24일 개정·공포됐다. 2000년 제정·공포된 지 7년 만에 개정된 이 특별법은 4·3사건과 관련한 희생자의 범위를 기존의 사망과 행방불명, 후유장애에다 수형자를 추가하고, 유족의 범위도 배우자 및 직계비속, 형제자매에서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 4촌 이내의 방계혈족으로 제사 봉행과 분묘 관리를 하는 유족 등도 포함했다. 또 집단학살지 및 암매장지 조사와 유골의 발굴·수습, 희생자의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의 지급 결정 등을 4·3중앙위원회의 심의사항에 추가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주4·3사료관 및 평화공원의 운영·관리·추가 진상조사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는 재단에 기금을 출연할 수 있도록 했다. 허호준 기자 /한겨레 2007-01-24 오후 06:10:44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186276.html
2007 - 개성에 우표수집가 상점 등장 달라진 개성시내 - 개성 시내는 지난해 5월 방문 때보다 더화사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북쪽이 본격적으로 개성 관광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하기도 했다. 아스팔트는 피치를 다시 깔은 듯 깔끔했다. 상당수 상점의 간판들은 아크릴로 장식한 ‘반짝이 간판’으로 갈았으며, 살림집의 깨진 유리들도 새 유리로 바뀌어 있었다. 개성상점 등을 비롯해 몇몇 건물은 분홍빛 페이트로 단장돼 있었다. 상점들도 몇개 늘어났다. 고려민속박물관 앞에는 남쪽 손님을 겨냥한 것처럼 보이는, ‘우표수집가상점’이라는 새 건물이 들어섰다. 북쪽 판매원은 “오늘 문을 열었다”며 우표책을 사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또 시내에는 개성고려인삼판매소도 들어섰다. ‘군밤·고구마 상점’이란 간판을 단 빨간색 간이건물도 새롭게 눈에 띄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현대아산이 북쪽 실무진과 개성관광을 계속 얘기해 왔다”며 “올봄에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발췌) 이용인 기자 /한겨레 20070124 22:21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186388.html
2006 - 영국의 지질학자, 기후학자 섀클턴(Shackleton, Nicholas) 사망 섀클턴 [Shackleton, Nicholas John, 1937.6.23~2006.1.24] Sir Nicholas John Shackleton FRS (23 June 1937—24 January 2006) was a British geologist and climatologist who specialised in the Quaternary Period. He was the son of the distinguished field geologist Robert Millner Shackleton FRS and great-nephew of the explorer Ernest Shackleton. ... http://en.wikipedia.org/wiki/Nicholas_Shackleton
빙하기 존 그리빈, 메리 그리빈 저 김웅서 역 사이언스북스 지구의 숨겨진 역사를 밝히다 3장 「바다는 알고 있다」는 과거의 이론들을 토대로 한 증거를 찾아내기까지의 시간을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제임스 크롤에서 비롯된 해저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과학에서 한 이론이 정립되기까지의 시간은 처음 시작된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적절한 기술이 확보되는 시간―크롤의 경우 100년―을 뛰어 넘어야만 한다. 바다는 육지와는 달리 안정된 바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생명체의 잔해들과 기후의 변화에 따른 퇴적층의 변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저 퇴적물에 대한 연구는 빙하기의 증거를 수집하는 일과도 같다. 이것은 지구가 겪어 온 수천만 년의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질문이다. 3장에서는 이러한 연구를 수행해 온 존 임브리와 니콜라스 섀클턴을 통해 지질학적 연대를 밝혀내고, 다양한 화석에서 발견되는 생물 개체군의 변화를 살펴보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반복되는 주기를 통해 빙하기의 주기를 추론해 본다. 퇴적층과 해수의 온도 변화는 빙하기의 반복되는 천문학적 주기를 밝혀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http://www.yes24.com/24/goods/1947983
- '97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기념 (1997.1.24. 발행)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97년] 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 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가 1997년 1월 24일 무주리조트내 점핑파크에서의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일간 개최됐다. `젊음을 한곳에, 세계를 품안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제18회 동계유니버시아드에는 49개국 1천621명의 세계 각국 대학생 선수들이 출전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동계스포츠 국제종합대회였던 이 대회는 무주와 전주로 나뉘어 성공리에 치러져 동계스포츠 `불모지`였던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조선닷컨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07_0003
1993 -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지휘자 구스타프 에르네삭스(Ernesaks, Gustav) 사망 에르네삭스 [Ernesaks, Gustav, 1908.12.12~1993.1.24] Gustav Ernesaks Gustav Ernesaks (12 December 1908 in Peningi, Governorate of Estonia, Russian Empire - 24 January 1993 in Tallinn, Estonia) was an Estonian composer and a choir conductor. He played an integral role in the Singing Revolution and was one of the father figures of the Estonian Song Festival tradition; one of his songs, set to Lydia Koidula's poem Mu isamaa on minu arm, became an unofficial national anthem during the years of Soviet occupation; ironically, he was also the composer of the Anthem of Estonian SSR used between 1945 and 1990. A statue of him was erected in 2004 on the Tallinn Song Festival Grounds.
1993 -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흑인 판사 마셜(Marshall, Thurgood) 사망 마셜 [Marshall, Thurgood, 1908.7.2~1993.1.24]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93년]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흑인 판사 마셜 사망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원 판사를 지낸 더굿 마셜이 1993년 1월 24일 심장병으로 워싱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1908년 볼티모어에서 출생한 마셜 판사는 1950년대와 1960년대 흑인 민권 변호사로 활약했다. 그가 인권변호사로서 거둔 가장 큰 승리는 1954년 흑·백인을 다른 학교에서 교육하는 인종분리 학교는 위헌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낸 것이다. 이로써 1896년 이래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미명 아래 합법적으로 비호돼 온 교육에서의 인종차별이 무너지게 됐다. 그는 이 판결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민권운동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또한 1973년의 임신중절 합헌판결을 비롯해 언론자유의 강화 등 1970년대의 잇따른 진보적 판례를 남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마셜은 1933년 흑인들의 하버드로 불리는 하워드 법대를 수석 졸업한 뒤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마셜판사는 1961년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항소법원 판사에 임명됐으며 이어 린드 존슨대통령 정부에서 법무차관을 지낸후 1967년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이후 대법관 재직기간 동안 일관되게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했던 그는 적극적인 사형폐지론자였고,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편에 서왔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625_0025
1989 - 설날 부활 [어제의 오늘]1989년 설날 부활 ㆍ민중의 저항으로 ‘복권’ 군사독재정권시절 당국자들은 재야인사나 운동권 대학생들만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음력 1월1일 설날을 ‘구정(舊正)’으로 깎아내리면서 음력설을 쇠는 사람들을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조장하는 무지몽매한 무리’쯤으로 은근히 매도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을 오늘이래요’라는 동요를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구정’을 지켰다. 섣달그믐을 뜻하는 ‘까치설’을 정부당국이 권장하는 양력 1월1일 ‘신정(新正)’으로, ‘우리설’은 구정으로 해석했음은 물론이다. 음력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는 당연히 음력 1월1일이 설날이었다. 그러나 1894년 김홍집 내각이 이른바 갑오개혁 조처로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면서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은 최초의 시련를 맞게 된다. 고종은 1895년 음력 11월17일을 양력 1896년 1월1일이라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전통 설을 일컫는 ‘구정·음력설’이란 말과 새로운 설을 가리키는 ‘신정·양력설’이라는 말이 생겼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경향신문 2009-01-23 16:51: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1231651395&code=100100&s_code=ap005
역사속 오늘[1986년 1월 24일] 천왕성의 위성 10개 발견 1986년 오늘, 태양계의 7번째 행성인 천왕성의 위성이 10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2020년까지는 우주에 관한 자료를 계속 보내오도록 돼 있다. /YTN 2013-01-24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85년] `디스커버리`호 발사 미국 국방부의 신형 정찰위성을 탑재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1985년 1월 24일 오후 2시50분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우주왕복선으로는 최초의 군사전용비행으로 본격적인 군사이용의 개막을 의미했다. 미 공군이 3억달러를 투자해 개발한 신세대 정찰위성은 디스커버리로부터 발사된 후 2단식 소형 로케트를 분사해 소련령을 감시할 수 있는 고도 약 3만6천미터의 정지궤도로 진입했다. 이 정찰위성은 소련이 발사하는 각종 미사일 실험의 원격조정 통신내용과 마이크로웨이브 중계에 의한 장거리 전파내용 등을 포착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2개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어 하나는 기밀내용을 탐지하는데 이용됐고 나머지 하나는 이를 다시 미국에 있는 감시소에 전달하는데 사용됐다. 발사 3일 만인 27일 전원이 군인으로 구성된 5명의 승무원들은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다. 우주왕복선 개발은 1972년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우주왕복선 개발 계획을 승인을 받아 1976년 엔터프라이즈라는 시험용 우주왕복선이 개발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최초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호가 1981년 4월 12일 우주비행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우주여행 시대를 개막했다. 두번째로 개발된 우주왕복선은 챌린저호. 그러나 1986년 1월 28일 10번째 비행에 나설 때 폭발하는 바람에 7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챌린저에 이어 세번째 우주왕복선으로 개발된 것이 디스커버리호이다. 1984년 8월 30일 처녀비행에 나서 총 비행횟수 26회를 기록한 디스커버리호는 주로 통신위성이나 군사위성의 발사를 맡았고, 돈을 받고 외국위성을 쏘아올리거나 외국 우주비행사를 태워주는 일을 했다. /조선닷컴 2017-01-24
1984년 애플은 매킨토시를 발표했다. 매킨토시는 슈퍼볼 경기 중계방송에서 방영된 유명한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알려졌다. '1984'로 알려진 이 광고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이다. 150여만 달러를 들인 이 광고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을 맡았고 슈퍼 볼 XVIII 기간이던 1984년 1월 22일에 방송되었다. 광고를 통해 애플은 IBM PC가 빅브라더이고 매킨토시는 바로 그 빅 브라더를 타도하는 영웅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매킨토시를 성공으로 이끌게된 실제적인 계기는 훌륭한 인쇄 품질의 레이저라이터와 페이지메이커의 출시였다. 이를 통해 본격적인 전자출판의 시대가 열렸다. 레이저라이터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출시된 최초의 레이저 프린터여서 훌륭한 출력 품질을 만들수 있었고 WYSIWYG형 전자 출판 소프트웨어인 페이지메이커는 본격적인 전자 출판용 솔루션이었다. 이후 전자출판 시장이 확장됨에 따라 애플의 판매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현재 까지도 쿽익스페레스와 매킨토시를 이용한 솔루션이 인기를 끌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A0%ED%94%8C_(%EA%B8%B0%EC%97%85)
이원수 [李元壽, 1911.11.17~1981.1.24]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81년] 아동문학가 이원수씨 별세 동요 `고향의 봄`으로 널리 알려진 원로 아동문학가 이원수씨가 1981년 1월 24일 구강암으로 작고했다. 향년 71세였다. 1911년 경남 양산에서 출생,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14때 소파 방정환이 주재하던 `어린이` 잡지에 `고향의 봄`을 발표해 문단에 입문하게 됐다. 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회장과 경희대 강사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아동문학가협회를 창립한 후 작고 전까지 회장직을 맡아왔었다. 1973년 한국문학상과 대한민국 문학예술상을 비롯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현대아동문학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아동문학이론을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해왔다. 또 1940년대의 율동적이며 감각적 경향을 벗어나 현실의식이 짙은 아동소설에 주력해 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동시집 `종달새` 아동소설집 `숲속의 나라` `오월의 노래` `참새 잡던 시절` `구름과 소녀` `메아리 소년` `꽃바람 속에` 등이 있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22_0051
1977 - 일본 만화 은하철도999, 소년화보사의 소년 만화 잡지 《소년 킹》 에 연재되다. 《은하철도 999》(일본어:銀河鉄道999긴가테쓰도 스리나인)는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가 창작한 만화 또는 이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의 숫자 '999'는 원작에서는 '쓰리 나인'(Three-Nine), 한국판에서는 '구구구'라고 읽는다. 만화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소년화보사의 소년 만화잡지 《소년 킹》 에 연재되었다. 애니메이션은 후지 TV를 통해 1978년9월 14일 부터 1981년 4월 9일까지 2년 6개월에 걸쳐 요약편을 포함하여 모두 113화가 방영되었다. 1979년과 1981년에는 린 타로가 감독한 극장판이 제작, 상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1년10월 4일부터 1983년1월 16일까지 문화방송에서 일요일 아침시간대에 방영되었다. 개요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은하철도의 밤(銀河鉄道の夜)》에 등장하는 은하철도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열차의 운행 체계의 세부 사항은 일본의 옛 철도를 본땄다. 원작자 스스로 은하철도의 밤과 증기기관차에 타고 동경에 갔던 젊은 시절의 체험이 기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宇宙海賊キャプテンハーロック)》과 함께 애니메이션화가 될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않다가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戦艦ヤマト)》가 갑자기 인기가 높아져 두 작품 모두 애니메이션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우주전함 야마토, 새로운 여행》도 TV로 방영되었다. 만화판은 1977년부터 만화 잡지 《소년킹(少年キング)》'에 연재되어 잡지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1981년에 연재가 종료되어, 당시에는 이것으로 완전히 완결되어 속편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6년부터 소학관(小学館)의 잡지에 속편을 연재하기 시작하여, 해당 잡지를 거쳐 웹상에 불규칙하게 연재하여 999화까지 그리기로 하였다. 신작은 41화까지 그려진 상태이다. 여기에서는 극장판 2편의 설정이 들어가 있어 만화판으로부터의 속편은 아니다. 하지만 단행본으로는 만화판 연재로부터 계속되는 번호가 붙여져 간행되고 있다. 신작에서는 세계관이 확대되고 설정이 적극 변경되어 다른 작품인 《우주해적 캡틴 하록》, 《퀸 에메랄다스》, 《천년여왕》, 《니벨룽겐의 반지》와 이야기가 복잡하게 이어졌고, 메텔과 에메랄다스의 관계도 이전의 라이벌에서 자매로 바뀌었다. 줄거리 배경은 은하계의 각 행성이 은하철도라 불리는 우주공간을 달리는 열차로 연결된 미래 세계(TV 애니메이션에는 서기 2221년으로 설정)이다. 우주의 부유한 사람들은 '기계의 몸체'에 정신을 옮겨 기계화 인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기계의 몸을 얻을 수 없는 데다가, 기계화 인간에게 박해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료로 기계의 몸을 준다는 안드로메다의 별을 목표로 주인공인 호시노 데츠로(星野鉄郎,한국명 철이)가 신비의 여인 메텔(メーテル)과 은하초특급 999호에 탑승하게 된다. 각 편은 기차가 머무르는 역(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진행되고 마무리되며, 별도로 전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위키백과
1973 - '집배원의 날'을 '체신의 날'에 통합 [정보통신의 날 유래 및 연혁]
- Gibraltar, 50 Pounds (Banknote)
처칠 [Churchill, Winston (Leonard Spencer), 1874.11.30~1965.1.24]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65년] 영국 정치가 처칠 사망 20세기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윈스턴 처칠경이 열흘동안의 투병 끝에 1965년 1월 24일 서거했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초인적인 역량을 보인 그는 그의 생애는 투쟁으로 시작됐듯이 그 종말 역시 병에 대한 투쟁으로 장식됐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장교와 종군기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1901년에 처음 국회에 진출했고 1차 세계대전 직전에 해군 제1장관에 임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기 즉, 독일군이 유럽을 짓밟고 있던 1940년에 노르웨이작전 실패를 계기로 총리 체임벌린 대신에 총리에 취임해 영국을 바꾸어 놓았다. 단호하게 그는 하원에서 “나는 피와 눈물, 노력, 땀 외에는 내놓을 게 없다” 고 말했다. 전쟁에서 영국이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그 침공을 두려워하며 홀로 저항했던 암울한 수개월간 언제나 입에는 시가를 물고 승리의 ‘V자’ 를 치켜든 처칠은 불굴의 상징이었다. 1946년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의 연설에서 ‘철의 장막’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1945년 총선거에 패배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그리고 이때 ‘경(Sir)’ 의 칭호를 받았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491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63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협상 개시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동경올림픽에 대비해 1962년 9월 1일까지 남북단일팀을 구성하라는 요구를 해옴에 따라 KOC(대한올림픽위원회)는 8월 14일 단일팀 구성을 위한 모든 통신연락을 IOC를 통해 한다는 조건으로 남북한단일팀 구성에 동의, IOC에 통고했다. 남·북한은 이에 따라 1963년 1월 24일 IOC주재로 IOC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회담을 개최, 올림픽에 사용할 국가(國歌)를 8.15이전의 `아리랑`으로 할것과 임원과 선수 선발을 동·서독단일팀구성원칙에 따른다는데 합의했다. 뒤이어 4월 19일 한국은 올림픽대회장에 게양할 국기(國旗)를 오륜마크 밑에 KOREA로 표시하는데 합의했다. KOC는 선수단의 호칭문제를 비롯, 선수선발을 위한 예선장소와 일시 등 더 구체적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63년 7월 26일 홍콩에서 제2차회담을 열기로 했으나 북한측이 정치적인 발언을 계속해 회담자체가 결렬됐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489
1961 - 독일의 축구선수, 감독 부흐발트(Buchwald, Guido) 출생 부흐발트 [Buchwald, Guido, 1961.1.24~ ] Guido Buchwald (born January 24, 1961) is a German former football defender and manager. The best game of Buchwald's career was probably the final of the 1990 FIFA World Cup when he effectivelly marked the skilled footballer, Diego Maradona, earning him the nickname 'Diego'. He was also part of Germany's disappointing 1994 FIFA World Cup squad. Buchwald began his professional soccer career in 1983 with VfB Stuttgart. He played 325 games in the German Bundesliga for this club, scoring 28 goals. The low-point of his career was in 1986 when coach Franz Beckenbauer did not include him in his team for the World Cup in Mexico. The same year Stuttgart lost the final of the German Cup against FC Bayern München and in 1989 the final of the UEFA Cup was also lost, but they managed to win two German championships (1984, 1992). His personal highlight in his Bundesliga-Career was on the last day of play in the 1991/1992 season, when he scored the deciding goal against Bayer Leverkusen that won Stuttgart the game and the Championship - just 6 minutes before the games' end. In 1994 he signed with the Japanese team Urawa Red Diamonds before returning to Germany in 1998 to help the Karlsruhe avoid relegation. He could not save the team and after one more season playing in the second division he retired but stayed with the club as a director of sports. After a stop with the Stuttgarter Kickers (again as director of sports) he went back to Japan where he was managing his old club. He has become somewhat of a cult figure in Urawa and has recently lead his team to the 'closing' championship. Buchwald has just returned to Germany to become manager of Alemannia Aachen. After five months on duty he was fired by club management on November 26, 2007. Accra, June 16, GNA. Ghana has reportedly contracted Buchwald as the new coach for the Black Stars. A 'supreme' source at the Ghana Football Association (GFA) told GNA Sports that Buchwald has signed a two-year renewable contract to manage the Black Stars. The GFA is expected to announce the new coach next week with Buchwald favourite to take over from Claude Le Roy. The source said both parties agreed on contractual terms when the coach was interviewed in Accra by his employers a fortnight ago. The GFA appointed Serbian Coach Milovan Rajevac instead of Buchwald on August 12, 2008. http://en.wikipedia.org/wiki/Guido_Buchwald
아문센-스콧기지[Amundsen-Scott South Pole Antarctic Station] 남극점 기지라고도 한다. 미국탐험대에 의하여 모든 물자를 공수해서 1957년 1월 24일부터 남극점에 설치한 관측기지로, 극점(極點) 첫 도착을 경쟁한 아문센과 스콧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얼음의 두께 2,800m, 연평균기온 -49℃이며, 해마다 20명 내외의 대원이 월동한다. /naver
조선 선조 때 의관 허준에 의해 저술(著述)된 [동의보감(東醫寶鑑)] 목판이 1948년 1월 24일 전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동의보감은 동방 의학의 백과 사전격인 경전이며 세계적인 의학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내과에 관계되는 내경편 4권, 외과에 관한 외형편 4권, 유행 성병.급성병.소아과.부인과 등을 합친 잡병편 11권, 탕액편 3권 등 25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mpas) /Google 이렇듯 활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편찬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이 그 어떤 의서보다도 충실하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권위있는 동양의학서로서 일찍부터 일본과 중국에 소개되었다. 이 책은 1613년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로 인쇄되었는데, 이때의 초판본 완질 25책은 남아 있지 않고, 뒤에 전주와 대구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된 것이 완전하게 전승되고 있다. 우리나라 책으로 이 책만큼 외국에서 거듭 출판된 것도 드문 일인데, 출판된 지 115년 뒤에 일본에서 완질이 출판된 것을 비롯해서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7번 출판을 거듭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볼 때 의서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허준과 동의보감-네이버 지식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46년] 유엔, 원자력위원회 설치 결정 1946년 1월24일, 런던에서 열린 제1차 유엔총회에서 ‘원자력위원회(UNAEC)’ 설치가 결정됐다. 세계 11개국이 참가한 첫 회의가 6월24일 뉴욕에서 열려 명칭을 ‘국제원자력개발기관(IADA)’으로 바꿨지만, 원자력 관리에 대한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거부하는 바람에 결론을 맺지 못하고 폐회됐다. 미국의 안은 세계각국이 원자력을 무기로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미국은 보유하고 있는 원자폭탄을 파기할 용의가 있고, 이를 담보하기 위해 원자력개발에 관한 모든 과정을 ‘IADA’ 관리하에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이 사찰명목으로 소련의 원폭제조상황을 파악하려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일주일 뒤인 7월1일, 남태평양 비키니섬에서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감행해 소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유일한 핵보유국 미국이 아직 원폭을 보유하지 못한 소련에 대해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다. 3년간 갑론을박하다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1949. 8.29)하자 유엔안보리는 1949년 11월에 미국의 안을 부결시켜 약화된 미국의 위상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가운데 1952년 10월 영국이 원폭실험에 성공하자 원자력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양국의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핵보유국 소련도 이제는 미국의 안이 솔직하게 느껴졌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57년 7월에 발족된 것이 오늘날의 ‘국제원자력기구(IAEA)’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487
김좌진 [金佐鎭, 1889.12.16(음력 11.24)~1930.1.24(음력 1929.12.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30년] 김좌진 장군 피살 애국계몽운동가이자 1920년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이 1930년 1월 24일 중국 하얼빈의 집 근처에서 괴한에게 피살됐다. 41세의 나이였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 장군은 서당 공부 외에 정규교육으로는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이지만, 19살에 ‘한성순보’ 이사가 됐고 오성학교 교감을 맡기도 했다. 또 신민회, 기호흥학회와 같은 단체에 가입해 애국교육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이나 언론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느낀 김 장군은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붙잡혀 2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919년 3·1운동 후 임시 정부의 지원금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하고 이듬해 홍범도 장군과 연합해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했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485 - 250th Anniversary of Leningrad
2003년 개도3백주년을 치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옐친이 1991년 소비에트를 해체, 러시아로 복원시킨 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됐다. http://weekly.hankooki.com/lpage/column/200709/wk2007090413112237660.htm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이다.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Петроград, 1914년 – 1924년)와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1924년 – 1991년)로 불리기도 했다. 차르표트르 대제가 1703년에 세운 이 도시는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2002년 현재 469만 4000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둘째로. 유럽에서는 넷째로 큰 도시이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 주의 행정 중심 도시이다. /위키백과
- 'Portrait of Dedie' - 'Woman with Blue Eyes'
- 'Portrait of Alice' - 'Figura de mujer'
- 'Portrait of Paul Guillaume, 1916' - 'Blaise Cendrars, Poet, Novelist' 모딜리아니 [Modigliani, Amedeo Clemente, 1884.7.12~1920.1.24] 오늘의 역사 (1월 24일)[1920년]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 사망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가 1920년 1월 24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36세였다. 고흐처럼 살아 생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불행한 화가 모딜리아니는 자선병원에서 "이탈리아!...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이탈리아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딜리아니가 화가로 입신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파리에 입성한 것은 22세때였다.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피카소의 권유로 몽마르트언덕에 정착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 그는 금방 퇴폐한 예술가의 무절제한 생활에 함몰된다. 미남인 그에게 뭇 여자들이 따랐고 그녀들은 스스로 옷을 벗어 보수없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어떤 날 밤에는 술에 취해 미친듯이 화를 내는 주정뱅이가 되었으며, 또 어떤 날 밤에는 격노해서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데생을 갈갈이 찢어버리곤 했다. 모딜리아니가 그의 미술의 본령인 초상화와 나체화를 본격적으로 그린 때는 1904년부터였다. 이날의 죽음으로 그의 활동기간은 고작 16년에 불과한 셈이다. /조선닷컴 2017-01-24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30_0013 -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 No. 34'
1915 - 미국의 화가 로버트 머더웰(Motherwell, Robert) 출생 머더웰 [Motherwell, Robert, 1915.1.24~1991.7.16] 미국의 화가. 워싱턴주 애버딘 출생. 11세 때 오티스미술연구소, 17세 때 캘리포니아미술학교에 다녔다. 그 후 스탠퍼드대학교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그르노블대학(프랑스),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배웠다. 1941년 다시 회화에 전념하기로 결심,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감화되어 오토마티슴의 실험을 꾀하고, 후에 일정하지 않은 추상형태를 뜯어맞추어,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풍을 전개하였다. 현대미술의 이론가로서 미국 미술계에서 계몽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표작에 연작(聯作) 《스페인공화국에 바치는 애가(哀歌)》가 있다. /네이버
1908년.1.21 삼림법 공포(최초의 임야조사측량) 법률 제1호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 법부대신 조중응은 삼림법을 공포하다. 이는 삼림에 대한 최초의 지적규정으로 1911.9.1 폐지되었다. 조선임야조사령 제10조에 구삼림법 제19조에 의하여 ?堧?로 간주된 임야는 구소유자 또는 상속자에게 소유권을 되돌려주다. (무모한법이기는 하나 이로 인하여 측량강습소, 측량사무소가 생겼고 측량교과서가 편찬되어 나오다.) (한국지적 백년史)(user.chollian.net) /Google
1908. 1.24 "地籍"용어의 첫 등장 삼림법 제정내용에 "삼림산야의 소유자가 삼림법 시행 일로부터 3개년 이내에 그 地籍 및 면적의 견취도를 첨부하여 농상공부대신에게 신고하지 않을 경우에는 모두 국유로 간주한다". (지적제도의 변천)(user.chollian.net) /Google (대부분 자료에 1월 24일 삼림법 공포라고 나오나, 1월 21일이라는 자료도 있네요.. ^.@)
역사속 오늘[1907년 1월 24일] 보이스카우트 결성 청소년의 건전한 시민정신과 야외생활 기술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소년 조직 보이스카우트가 1907년 오늘, 영국에서 결성됐다. /YTN 2013-01-24 (참고) 1908년 11월 16일 - 영국, 보이스카우트 창설 스카우트 운동은 1907년 영국의 베이든 포엘경(Lord Baden Powell)에 의해 시작되었다. 베이든 포엘경은 1889년 남아프리카의 마페킹 전투에서 어린 소년들에게 척후활동을 시켰고, 그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한몫을 하였다. 이 군인생활에서 그는 소년들의 민첩성과 용감한 활동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귀국 후 소년들을 위한 훈련법을 연구, 1907년 브라운씨섬에서 야영을 실시, 스카우팅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소년을 위한 스카우트 활동](Scouting for boys)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1908년 영국에서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하였다. 스카우트(Scout)란 명칭은 <척후>를 뜻하는 말이다. (즐거운 학교/오늘의 역사, njoyschool.net) /Google
- Heinkel HE-111
1888 - 독일의 항공기 설계자 하인켈(Heinkel, Ernst) 출생 하인켈 [Heinkel, Ernst Heinrich, 1888.1.24~1958.1.30] [역사 속의 인물] 세계 최초의 제트기 설계자 하인켈 오늘날처럼 빠른 비행기는 언제부터 하늘을 날아다녔을까. 오늘날 비행기는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엄청난 속도로 지구촌을 더 가깝게 만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빠른 비행기가 등장한 것이 그리 오래된 과거는 아니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만든 플라이어호가 12초간 37m를 비행한 이후 하늘을 나는 인간의 꿈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후 1차 세계대전 직후 항공업계는 속도 비행과 장거리비행에서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에른스트 하인켈이다. 슈투트가르트 테크놀로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며 항공산업에 눈을 떴다. 1910년 자신의 이름을 딴 하인켈 항공사를 설립했으며 1939년 세계 최초의 터보제트기인 He 178기의 비행에 성공했다. 단발의 터보제트엔진을 장착, 최대 속도 598㎞/h 항속거리 200㎞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민간 항공기의 속도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는 성능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독일의 주력 폭격기로 활약한 He 111기 등도 개발했다.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체포되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풀려났다. 1888년 오늘 독일 그룬바흐에서 태어났다. 홍헌득 특집부장 /매일신문 2014.01.24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680&yy=2014
워튼 [Wharton, Edith Newbold, 1862.1.24~1937.8.11] 그녀가 태어난 미국 상류 사회의 생활을 다룬 소설로 유명하다. 1885년 보스턴의 은행가 에드워드 훠턴과 결혼했고 몇년 뒤 소녀 때 시도했던 문학수업을 재개했다. 초기 걸작은 〈가장 좋아하는 것 The Greater Inclination〉(1899)에 수록되어 있다. 첫 장편소설 〈결단의 계곡 The Valley of Decision〉은 1902년에 출판되었고, 이어 1905년에 〈즐거운 집 The House of Mirth〉을 발표하여 작가적 명성을 굳혔다. 그뒤 20년 동안 〈암초 The Reef〉(1912)·〈한 국가의 관습 The Custom of the Country〉(1913)·〈여름 Summer〉(1917) 등을 발표했는데, 그중에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순진한 시절 Age of Innocence〉(1920)이 가장 유명하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던 프롬 Ethane Frome〉(1911, 오닌 데이비스에 의해 1936년에 극화됨)는 매사추세츠 주 레녹스의 별장에서 관찰한 뉴잉글랜드 지방의 우울한 농장생활을 잘 묘사한 작품이다. /브리태니커
[책갈피 속의 오늘]1858년 멘델스존曲웨딩마치 첫 연주 수많은 신랑 신부들이 두 손을 맞잡고 힘차게 걸어 나간다. 트럼펫 도입부에 이어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연주가 결혼 서약을 한 남녀의 행진을 북돋운다. 하객들의 박수가 터진다. 지금도 지구촌 어느 곳에선가 울려 퍼지고 있을 ‘결혼행진곡’. 이 곡이 처음 연주된 것은 영국 왕실의 결혼식이었다. 1858년 1월 24일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 왕자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는 결혼식 때 연주할 두 곡을 직접 골랐다. 바그너의 가극 ‘로엔그린’ 중 ‘혼례의 합창’은 입장할 때,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 중 ‘결혼행진곡’은 퇴장 때 연주할 곡으로 정했다. 이 곡들은 결혼식 분위기와 잘 어울려 이후 유럽 상류층 여성들이 앞 다퉈 따라했으며, 결혼식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한여름 밤의 꿈’은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이 작곡한 곡이다. 음악도 유명하지만 많은 이들은 ‘한여름 밤의 꿈’ 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떠올릴 것이다. 멘델스존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환상적이고 기이한 분위기에 깊이 매료돼 곡을 쓰기 시작했다. 첫 곡인 서곡을 썼을 때 멘델스존의 나이는 불과 17세. 그는 이후 15년에 걸쳐 13곡을 만들었다. 작품의 ‘한여름 밤’이란 6월 24일, 1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 무렵의 성 요한제 전야를 가리킨다. 유럽에서는 이날 요정들이 기묘한 사건을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작품 내용도 환상적이다.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와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타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마을 처녀 헤르미아와 라이샌더가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헤르미아의 아버지를 피해 숲으로 도망간다. 여기에 헤르미아를 짝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가 둘을 쫓고, 드미트리어스를 짝사랑하는 헬레나가 따라간다. 복잡한 사각관계를 해결해 주고자 요정 왕 오베론이 사랑의 묘약을 쓰지만, 시종 퍼크의 실수로 아무도 좋아하지 않던 헬레나를 드미트리어스와 라이샌더가 사랑해 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신부 입장 때 연주되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연인의 이별이라는 비극으로 끝나는 데 비해, ‘한여름 밤의 꿈’은 해피엔딩이다. 헤르미아와 라이샌더가, 드미트리어스와 헬레나가 화평하게 맺어진다. ‘결혼행진곡’은 무대곡 중 10번째 곡으로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성혼을 축하하며 연주되는 곡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아닷컴 2007-01-24 02:58:00
- Discovery of Gold in California, Centenary, 1948.1.24
1848 - 캘리포니아에서 금광 발견, 골드 러시의 발단 캘리포니아는 19세기 초만 해도 ‘문명세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오지였다. 백인보다는 인디언의 인구수가 10배가 넘었으며 대부분의 땅들은 멕시코계 농장 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무역이 주종을 이루던 당시 해안에서 벗어난 내륙 지대 땅들은 관리하기도 힘든 쓸모 없는 곳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곧 바뀌게 된다. 1848년 1월24일,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을 40마일 떨어진 시에라네바다 구릉지대 플레이서빌(Placerville) 인근에 있는 서터스 밀(Sutter’s Mill)의 목수인 제임스 마샬이 비상하게 큰 금덩어리를 발견했다. 계속 찾아보니 광석이 더 발견되었고, 곧 “저기 언덕에 묻혀있는 돌 속에 금이 있다”(There’s gold in them those hills)라는 말이 캘리포니아 전역에 메아리쳤다.
- 'Self-portrait', 1913 - 'The Boyar Morozov Going into Exile'
- 'Capture of a Town in Winter'
- 'Merchikov and Beresov', 1887 - 'Self-portrait', 1913
1848 - 러시아의 화가 수리코프(Surikov, Vasily) 출생 수리코프 [Surikov, Vasily Ivanovich, 1848.1.24~1916.3.19] 19세기 러시아의 화가. 1848년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시베리아 카자크 가계 태생인 그는 186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1875년까지 그곳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875년 졸업작품 과제 《사도 바울이 아그리파 황제와 그의 여동생 베르니케, 페스트 총독 앞에서 믿음을 설파하다》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 모스크바로 가서 1878년까지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사원 벽화 채색작업에 참여했다.
- 'L'Amour' - 'The Bather', Sevre Porcelain
- 'Statue of Peter the Great'
1791 - 프랑스의 조각가 팔코네(Falconet, Etienne-Maurice) 사망 팔코네 [Falconet, Etienne-Maurice, 1716.12.1~1791.1.24] 프랑스의 조각가. 산뜻하고 친밀감있는 로코코 양식의 이상에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고전적인 양식을 결합한 작품을 제작했다.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을 받아 루이 15세 당시 취향의 정수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목수 밑에서 도제살이를 하다가 그뒤 조각가 J. -B. 르무안의 제자가 되었다. 1757년 세브르 도자기 공장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세브르 도기의 모형을 많이 만들었으며, 이 영향으로 인해 〈목욕하는 사람 Bather〉(1757,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듯이 세련되고 우아한 작품경향을 갖게 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디드로의 권유에 따라 그를 부름으로써 1766~78년 내내 러시아에 머물렀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 표트르 대제의 인상적인 청동 기마상을 제작했다. 1781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1783년 병으로 쓰러진 뒤로는 작품을 전혀 만들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호프만 [Hoffmann, Ernst Theodor Amadeus, 1776.1.24~1822.6.25] 호프만은 독일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작가이다. 프로이센의 법률가 집안에 태어난 그는 음악과 미술에 조숙한 재능을 보였다. 법학교육을 받고 법률관이 되었으나,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패함으로써 관료제가 해체되자 음악·미술·문필 등 다방면의 재능을 밑천 삼아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했다. 1814년 다시 법률관으로 취직된 후에도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짧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 독특한 작품들을 썼으며 인간 심리의 이면을 밝히기 위해 그로테스크하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자크 오펜謨揚?<호프만의 이야기 The Tales of Hoffmann>, 레오 들리브의 <코펠리아 Coppelia>,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 등은 모두 호프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브리태니커
"그는 시인이자 화가이자 음악가로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울증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극단으로 내몰렸다."
- 월터 스콧
- 'Coronation of King Gustav III', by Carl Gustaf Pilo
- Sweden, 50 Kronor (1990, Banknote)
구스타브 3세 [Gustav III, 1746.1.24~1792.3.29] 구스타브 2세의 아들로, 1771년 즉위하여 '자유의 시대'의 정쟁(政爭)에 종지부를 찍었다. 1772년 의회를 통해 왕권강화의 새 헌법을 채택하였고, 계몽전제군주로서 많은 관세를 철폐하였다. 곡물자유무역을 취하는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비롯하여 문예의 보호, 아카데미의 설립, 해군의 강화 등에 힘썼다. 1788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싸웠고, 1789년 덴마크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1790년 스벤스쿠스드의 해전에서 러시아에 완전 승리하여 '구스타브시대'로 불리는 전성시대를 구축하였다. 1792년 프랑스에 대한 반(反)혁명동맹의 결성에 노력하던 중 스톡홀름의 극장에서 저격을 당하여 사망하였다. /naver
보마르셰 [Beaumarchais, Pierre-Augustin Caron de, 1732.1.24~1799.5.18] 파리 출생. 시계상의 아들로 태어나 시계제작과 하프 연주의 재주를 인정받아 궁정 출입을 하게 되었다. 또 실업가 뒤베르네의 총애를 받아 투기로 재산을 모으고, 작위(爵位)를 사서 드 보마르셰라고 이름하였다. 희곡 《외제니》(1767) 《두 친구》(1770)로 극작을 시작하였으며, 뒤베르네의 유산소송에서 드러난 재판의 부패를 다룬 재기(才氣) 넘치는 《비망록 Memoires》(1773∼1774)으로 명성을 얻는 한편,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 Le Barbier de Seville》(1775 초연)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루이 16세의 밀사(密使)로 각지를 여행하였으며, 미국 독립전쟁에도 개입하였다. 또한 프랑스 작가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활약하고, 볼테르 전집(全集)의 감수를 맡기도 하였다. 걸작 희극 《피가로의 결혼 Le Mariage de Figaro》(1781, 1784년 초연)은 기지(機智)에 찬 종복(從僕)이 연애에서 주인인 귀족을 이기는 주제에다 사회풍자를 담음으로써, 프랑스혁명 전야의 시민정신에 들어맞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혁명 중에는 이유 없이 투옥되었으며, 그 후 혁명정부에 협력했으나 결국은 국외로 피신, 집정관(執政官) 정부시대에 파리로 돌아와(1796), 몇 해 후에 사망하였다. 그 밖의 작품에 철학적 오페라 《타라르》(1787)와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과 더불어 3부작을 이루는 희극 《죄 있는 어머니》(1792)가 있다. /naver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1712.1.24~1786.8.17]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이라 불린다. 소년시절에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문화를 경멸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문학과 플루트 연주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그를 엄격한 무인(武人)으로 키우려는 부왕(父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여움을 샀으며, 18세 때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으로 탈주하려고 하다가 잡혀 감금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형집행을 면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였으나, 이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이 무렵에 라인스베르크별궁(別宮)에서 독서와 음악으로 울분을 달랬고,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그의 지도하에 《반(反)마키아벨리론(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준열한 현실 정치가, 엄격한 군인의 일면을 발휘하여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풍부한 국고와 방대한 군대를 활용하여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제위상속(帝位相續)을 둘러싼 분쟁에 편승하여 슐레지엔 전쟁(제1차, 제2차)을 일으켜서 경제적으로 요지인 슐레지엔을 병합하고 그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다. 그 무렵 베를린에 학사원(學士院)을 부흥시키고,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조영하여 내외의 학자 ·문인들을 초청, 학문 ·예술을 토론하였다. 볼테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대왕과 충돌하고 3년 후에 떠나가 버렸다.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의 탈환을 꾀하여 숙적인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러시아 여제 엘리자베타도 대왕을 미워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고립상태에 빠졌다. 때마침 영국 ·프랑스 간에 식민지 전쟁이 일어나자 대왕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기선을 잡아 작센에 군대를 침공시킴으로써 7년전쟁(1756∼1763)이 일어났다. 대왕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의 3대 강국을 상대로 잘 싸웠으나 군사력의 부족으로 전황이 불리해졌고, 영국의 원조마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몹시 궁지에 몰렸으나, 1762년 러시아의 앨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자,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 후 폴란드분할(1772)에 참가하고, 바바리아 계승전쟁(1778)에 참전한 외에는 대외 평화정책을 지키면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대왕은 ‘군주는 국가 제1의 머슴’이라는 신조하에 국민의 행복 증진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그 정치가 전제정치였음은 그 시대의 다른 군주들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으며, 계몽전제군주의 한 전형(典型)이었다. 다만, 종교면에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naver
- Winston Churchill, Birthplace Blenheim Palace
1664 - 영국의 건축가 밴브루(Vanbrugh, John) 출생 밴브루 [Vanbrugh, John, 1664.1.24~1726.3.26] 영국의 바로크 양식 건축가. 옥스퍼드셔에 블레넘 궁전을 지어 영국의 바로크 양식을 정점으로 끌어올렸으며 왕정복고시대 풍속희극을 쓰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플랑드르 상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잉글랜드 체셔 주 체스터에서 사탕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린 밴브루는 전통에 따라 이곳의 킹스 스쿨에 입학했다. 1686년 보병연대의 장교로 임관했고, 1690년 프랑스 칼레를 방문하던 중 영국 첩자라는 혐의로 체포당해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첫번째 희극 초고를 썼다. 1692년 석방된 뒤 6년 동안 다시 군인으로 복무했으나 실제로 전투를 치른 적은 없는 것 같다. 1705년에는 말버러 공작인 존 처칠에게 발탁되어 옥스퍼드셔 주의 우드스톡에서 궁전 설계를 맡았다. 이 건물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영웅에게 국가가 주는 선물이었다. 말버러가 승리를 거둔 가장 유명한 블렌하임 전투의 이름을 따서 블레넘이라 부르게 된 이 건물은 앤 여왕시대 건축의 정점이었다. 호크스무어는 또다시 밴브루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다. 즉 블레넘 궁전은 이들 공동의 걸작품인 것이다. 이 건물의 힘있는 구성요소 모두가 호크스무어의 구상인 듯 하지만 그 계획안과 대체적인 개념은 밴브루의 착상이 분명하며, 건물의 크고 무거운 효과는 군인 건축가인 그가 이 영웅을 숭배한 결과로 생긴 것이었다. 공작은 이 계획안에 찬성했지만 공작부인이 반대했다. 건축비용과 보수지급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겼고 결국 공작부인 때문에 밴브루는 해임당했다. 그는 조지 1세 때인 1714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715년에 다시 감사관이 되었다. 축성술과 엘리자베스 1세 시대 건물의 영향을 받은 그의 마지막 걸작들은 도싯 주의 이스트버리 궁전, 노섬벌랜드 주의 시턴 델러블 궁전, 링컨셔 주의 그림소프 궁전 등이다. 호크스무어 없이 혼자 설계하면서 몇 가지 기본형태들을 대담하게 사용, 본질적으로 간단한 양식을 취했고 시턴 델러블 궁전(1720)에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주택으로 자기 양식의 정점을 이룩했다. /브리태니커
- 칼리굴라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동전
41 -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 암살 칼리굴라 [Caligula, 12.8.31~41.1.24] [오늘<1324>(1월24일)] 칼리굴라 서기 41년 1월24일 로마제국 제3대 황제 칼리굴라가 근위대 장교에게 암살됐다. 29세였다. 칼리굴라는 조카이자 로마제국 제5대 황제 네로와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꼽히는 군주다. 네로는 칼리굴라의 누이동생 소(小)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칼리굴라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황제(옥타비아누스)의 손녀인 대(大)아그리피나(위프사니아 아그리피나)고, 아버지는 무용(武勇)으로 이름 높던 장군 게르마니쿠스다. 그래서 칼리굴라의 본명도 카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다. 아버지의 양부였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일찌감치 칼리굴라를 제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래서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살해된 서기 37년에 제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선정을 펼쳐 원로원과 군대, 일반 시민들로부터 폭 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이내 자신이 신(神)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폭정을 일삼다가 살해되었다.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 /200501/h2005012318544625340.htm&ver=v002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