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고려의 40년 대몽항쟁!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제패한 최강 몽골군에 대적해 두 차례나 몽골군을 격퇴한 고려의 영웅이 있었다. 그는 바로 김윤후〔金允候〕
몽골군의 총사령관인 살리타를 처인성에서 사살하고〔1232년〕 몽골 황족인 에쿠의 주력부대를 70일간의 항쟁 끝에 퇴각시킨다.〔1253년〕
대몽항쟁의 영웅, 김윤후 역사 속에서 잊혀진 그의 업적을 한국사 傳이 새롭게 조명한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
김윤후의 첫 승전지인 처인성. 이곳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대몽항쟁의 치열함을 증명하듯 화살촉과 칼이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 칼로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매우 드문 발견이다. 처인성에서 출토된 고려도검은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도검을 통해 처인성 전투의 흔적을 취재했다.
▶다인철소 - 고려시대의 포항제철
김윤후의 두 번째 승전지인 충주, 이곳에서 용광로와 숯가마, 그리고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슬래그(강재, Slag)가 다량 발견됐다. 충주 야철 유적 지표 조사에 의하면 총 41곳의 야철지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35곳이 다인철소 지역이다. 다인철소는 충주시 이류면 일대의 대규모 수공업소로 금, 은, 동, 철이나 종이, 도자기와 같은 수공업생산물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고려시대 다인철소의 철물 주조기술은 질과 생산량에 있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다인철소는 오늘날의 포항제철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사 傳 제작진이 고려시대의 첨단 무기 제작소인 다인철소를 집중 취재했다.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다.
김윤후.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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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강력한 정복전쟁이 몽골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몽골은 30여 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는데. 몽골이 결정적인 패전으로 고려에서 철수한 경우는 단 두 번 뿐 이었다. 바로 처인성 전투(1232년)와 충주성 전투(1253년). 그런데 이 두 전투를 이끈 지휘관이 놀랍게도 동일인물이다! 그는 바로 고려 대몽항쟁의 영웅 김윤후. 백현원의 승려인 김윤후는 어떻게 두 번이나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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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승전(1232년) : 몽골의 총사령관 살리타 사살
처인성 전투 : 화살 하나로 풍전등화의 고려를 구하다
1232년, 고려가 대몽항쟁의 의지를 밝히며 강화도로 천도하자 몽골은 2차 고려 침략을 단행한다. 고려 침략을 이끈 몽골의 장수는 살리타(撒禮塔). 살리타는 몽골군의 총 사령관으로, 당시 세계 최강대국으로 급부상 하고 있는 몽골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고려를 침공해 내려오던 살리타의 운명을 뒤바꾼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용인군 아곡리에 위치한 처인성. 살리타는 제대로 된 군사조차 남아있지 않은 처인성을 공격하면서 방심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살리타와 몽골군을 향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매복한 처인성 부곡민들의 기습 공격이었다. 처인성 안으로 피신한 부곡민들을 모아 매복 전투를 계획하고 적장 살리타를 사살한 인물, 바로 김윤후였다.
******고려인 김윤후, 조선시대까지 그 명성을 펼치다******
1592년,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국토를 유린하고 있었다. 관군이 대패하고 관료들이 명나라 망명을 준비하던 때, 임진왜란 의병 운동의 선구자인 ‘조헌’은 의병 모집 격문에 한 선례를 들어 거국적인 민중 봉기를 이끌어낸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돼지를 맞혀 죽여 황성에서 몽병을 물리쳤으니 (金允侯一箭豕?退蒙兵於黃城) - 조헌의 중봉집 -
바로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영웅 김윤후였다. 여기서 돼지로 묘사된 사람은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 리타. 김윤후는 3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의병운동의 상징으로 부활한 것이다. 세계 최강 몽골 군을 격퇴한 김윤후, 그는 세대를 초월한 백성의 영웅이었다. |
▶두 번째 승전(1253년) : 충주산성, 그 70일의 기록
충주산성 전투 : 노비문서를 불태워 백성의 힘을 하나로 모으다
1253년,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출륙 환도하라는 몽골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자, 몽골은 황족인 에쿠(也窟)가 직접 지휘하는 최정예병을 고려에 투입한다. 몽골군은 고려 정벌을 끝내겠다는 각오로 한 층 더 잔인하게 고려를 도륙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까지 밀어 닥쳤다. 당시 충주에는 살리타를 사살한 처인성 승첩의 주인공,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있었다. 끝까지 항전하는 김윤후와 몽골군의 싸움은 70여일을 넘겼다. 그 사이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투항을 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김윤후는 결단을 내린다. 그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고 노획한 소와 말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김윤후의 결단에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한다. 결국 몽골군은 충주에서 퇴각하고 만다.
고려가 몽골을 결정적인 군사적 패배로 철수시킨 사례는 대몽항쟁 기간 동안 단 두 차례. 처인성과 충주산성 전투뿐이었다. 이 두 곳에 바로 김윤후가 있었다.
▶고려 백성을 지킨 진정한 영웅. 김윤후
역사에서 잊혀진 대몽항쟁의 영웅, 김윤후
대몽항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지역민들의 신분이 단체로 승격된 지역은 모두 네 곳. 그 중 무려 두 곳의 지휘관이 바로 김윤후이다. 바로 처인성과 충주 지역, 그러나 이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김윤후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는 왜 역사 속에 잊혀진 것일까?
몽골 침략 30여 년 동안 고려의 전 국토는 초토화 됐다. 부인사 초조대장경, 흥왕사 속장경 등 불교 문화재가 소실되고,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으로 추락해 몽골이 세운 원(元)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세기 동안 원의 간섭을 받는다. 이 기간 동안 몽골에 대한 항전은 곧 반역과 모반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고려 멸망 후 세워진 조선은 유교를 받아들여 승려 출신인 김윤후는 건국이념상 드러낼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만다.
김윤후. 그는 비록 역사 속에서 잊혀 졌지만, 대혼란 속에서 조국을 두 번 지킨 대몽항쟁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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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봤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이 방송이 나가기 전 까지 김윤후 장군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몽골과의 항전 이라는 대목에서는 항상 삼별초만 기억을 하고 있었던 지라.. ^^ 그런데 위의 항전을 묘사한 그림에서 백성들의 복장이 조선시대 복장 닌가요?
몽골군 전선사령관을 최초로 죽인 나라!! 고려~~... 그렇기 때문에 몽골은 고려를 다른나라보다 더 핏박하였죠.
핍박
1차 침입 때의 귀주성 전투는 왜 빠진 걸까요???(지휘관이 다르긴 하지만 이 전투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가져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해요.
고려가 8차례나 몽골과의 싸움을 어떻게해서든지 생존했기 때문에 그 치열한 저항이 나중에 강화조약에서 몽골의 대칸이 너무나 기뻐할정도라는걸 상기했을때 고려군의 전력이 어느정도였는지를 보여줄수 있다 봅니다. 최소한.. 몽골항전에서 몽골에 대한 피해는 몇몇 침공의 경우 최소화 할수 있었는데 안한 멍청한 최씨정권이 기가막히더군요.. 고려 정규군만 제대로 활약했어도 그 몇몇경우의 피해조차 최소화할수 있었는데 말이죠..
그러나 생존의 댓가 치고는 그 댓가는 너무 비참했죠^^ 저는 대몽골전쟁을 2차까지만 하고 최씨정권이 강화를 했으면 어떠했을가 싶네요. 총사령관까지 죽여버렸으니 몽골도 분하긴 하겠지만 우리가 스스로 머리를 숙였다면.... 함부로 하지 못했을텐데요... 차라리 태자라도 보내서 고개를 숙이고.. 인질 및 과다한 공물은 거절했다면? 고려말기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겠죠.
왠지 궁금한게 무신 정권이면 말 그대로 무신들, 군의 수뇌부들 아닌가요? 근데 왜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는 지......
스스로 머리를 숙이는 자에게 왜 더관대하게 대한다고 생각하죠? 과다한 공물을 요구할것이고 거절하면 전쟁이죠 과다한 공물을 받치면 그다음은 더큰 요구를 할수 있지 않을까요? 고려가 몽골에 무릎을 꿇다니 이것보다 비참한게 어디있는가요
몽골이 고려침공에 동원한 군사의 수는 초반을 제외하면 만명을 넘지 않았고, 침공목적도 정복보다는 고려를 지속적으로 괴롭혀서 항복을 받으려는 것에 있었죠... 어쩌면 고려정부가 강화도에서 무관심하게 노는 걸 보고 몽골정부에서는 이것들이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며 즐겼을지도 모르죠..-_-; 정부의 생존을 위해 백성들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쓸만큼 고려정부가 가치있는것이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분명히 고려의 뛰어난 장군들을 칭송해야 마땅하지만.. 그 이전에 그저 견제용으로 보낸 소수의 군대에 고려의 전 국토가 완전히 박살났다는 사실은 결코 자랑스러워 할 만한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무신정권만 안일어났다면 고려는 그런 견제용 군대쯤이야 충분히 최전선에서 막아냈을거라고 봅니다.
제 생각이지만 만약에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 안에서만 있지 않고 자신들의 우수한 사병집단들을 잘썼으면 고려의 대몽항쟁의 구도가 어떻게 ?을지가 궁금하네요
이거 한국사전 몇화에요?
위에 나온 김윤후의 영정(표준영정 같네요) 말입니다. 꼭 '관복' 을 입은 모습이어야 할까요? 승려 김윤후가 관직생활을 대단하게 한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그를 기리는 공적도 '관료' 로서의 공적도 아닌데 왜 관복을 입은 모습이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것도 일종의 관 우월사상의 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짧은 생각입니다만, 김윤후가 충주에서 방어전을 승리한 이유는.... 수동적인 '백성'과 '노비' 를 일시적으로나마 '시민' 으로 재조직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백성이나 노비에게 전쟁은 '어르신들의 이야기' 일 뿐, 적에게 적극적으로 항전해야 할 이유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짜피 없이 살거나 자유롭지 못하다면, 지배자가 누가 되든 그들에게 특별히 더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고대적 의미의 시민, 즉 '자유' 와 '재산' 을 가진 존재는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최소한 자기 근거지의 '방어전' 에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이 있습니다. 일찌기 마키아밸리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전쟁에서 간파한 것처럼 방어전에서는 도망치거나 항복해도 그만인 용병보다 지킬 게 많은 시민군이 더 잘 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 김윤후의 경우, 투항을 원하는 여론이 높아질 때 소와 말(재산)을 분배하고, 또 노비문서를 소각하여 빈농과 노비를 일시적으로 자유와 재산을 가진 존재로 만들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너희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라는 일종의 고대적 시민의식을 잠시나마 심어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쟁에서 질 경우, 네가 지금 얻은 재산과 너의 자유는 적에 의해 다시 박탈당할 것이다... 라는 두려움을 갖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그리고 그
두려움을 '시민으로서 외적에 대한 저항' 으로 결집할 수 있었다면, 그의승리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던 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상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
그래도 그런 일을 한 사람이 김윤후니까 주목을 하는 거겠죠.... ㅎㅎ
이거 옛날에 올린건데 왜 요즘 글이랑 섞여서 올라왔는지..ㅡㅡ;ㅋ
정말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영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