氷の上に立つように - 얼음위에 서있는 것처럼….
For. 치우
얼음위에 선다는 건 그다지 좋은 느낌이 아닐 게 뻔했다. 얼음이 깨져도 깊은 물이 아니고 서 있다가 다쳐도 손만 들면 구해주러 달려오는 요원이 대기하고 있는 스케이트장 따위가 아닌, 도와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고 딛고 있는 얼음은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것처럼 금이 가고 있고 벗어날 방법 따윈 없는 그런 곳에 서 있는 거라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면 좋은 기분으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딛고 선 얼음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주길 바라기도 하고, 모두 다 깨져서 끝나주기를 바라기도 할 것이다.
나는, 얼음위에 서 있었다.
익숙한 건물을 빠져 나오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최근에야 겨우 손에 익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단축번호를 누르자 익숙한 대기음이 들려왔다. 대기음이 끊겨서 상대가 빨리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길 바라기도 하고 영영 대기음만 들리기를 바라기도 한다. 뭐라고 말을 꺼내는 게 좋을까, 를 다시 한 번 고민하며 생각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런 생산적인 생각이 아닌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잡생각만 하며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신이치?”
몇 번의 대기음이 더 들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들려왔다. 녀석의 친구들에게-이를테면 하쿠바 탐정-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와 말투였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따뜻하다. 난 오랫동안 사랑했던 란의 손을 놓고 녀석의 손을 잡았다. 내가 원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 란의 마음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잡은 손을, 그 마음을…,
이제는 믿을 수가 없다.
“끝났어?”
대답을 안 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재촉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말도 받아들이겠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상냥한 말투다.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 올라 선 얼음 중 가장 많이 녹고 가장 많이 갈라진 곳으로 날 몰아넣는다.
“아직. 증거가 안 나와서 꽤 걸릴 것 같아.”
…사건은 무사히 해결했다.
범인이 걸어놓은 함정에 제대로 걸려서 꼼짝 못하던 경부지만, 그래도 이상한 점이 자꾸 걸린다며 나를 불렀었고, 나는 트릭을 밝혀내고 범인을 찾아냈다. 사건이 일어나고 3일이나 지났지만 다행이도 범인이 눈치 채지 못한 증거가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다.
고맙다며 추켜 세워주는 경시청 사람들에게 밋밋한 웃음만 던지고 돌아서려 하자, 데려다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전의 카이토라면 경찰들에게 전화를 걸어서라도 신이치를 잘 데려다 주라고 신신 당부를 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고, 그 웃음은 호의에 대한 사양으로 이어졌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걸어 나온 참이었다. 어쩐지 구질구질해지는 날씨가 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단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쥐어짜서 녀석에게 전했다.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괜찮아, 나도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가니까.”
한숨이 나올 만큼 전형적인 패턴이다. 거짓말은 할수록 늘었지만 요령은 늘지 못했다. 연기에는 능숙했고 머리는 나쁘지 않았기에 적당한 거짓말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다. 들키지 않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럴싸한 거짓말도 못하고 어제와 같은 변명만 하고 있는 자신이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더 이상은 장담할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응, 그럼 내일 보자.”
어제와 똑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듣는 건 어쩐지 씁쓸하다.
어째서 집에 못 들어오느냔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론 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이 위태로운 얼음장은 아주 쉽게 무너지고 날 삼켜 버릴 것만 같아서. 손을 뻗어도 녀석에겐 닿지 않을 게 뻔하니까. 언젠가 무너져야만 할 거라면 최대한 늦게, 조금만이라도 늦게 무너져주길. 그렇게 어리석게 바라고 있는 나였다.
“밥 잘 챙겨먹어.”
“…너도.”
전화는 끊어졌다. 사랑한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듣지 못했는데 그냥 그렇게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은 쉬어도 다시 전화해서 굳이 그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녀석이 아껴둔 사랑한단 말은 지금 녀석의 곁에 있는 다른 사람이 들을 것이다. 그 팔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껴안고 다른 사람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잠시나마 내 생각은 깨끗이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원망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런 관계였으니까.
「생일 축하해, 신이치.」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종료 버튼을 길게 눌러서 핸드폰을 꺼버린다. 녀석과 같은 기종의 핸드폰이다. 파란색과 은색으로 장식된 핸드폰줄도 녀석과 맞춘 것이었다. ‘KK’와 ‘KS’, 쿠로바 카이토와 쿠도 신이치를 뜻하는 이니셜은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았고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자신에게 잘 맞는 장식이었다. 핸드폰과 함께 저번 달에 있었던 생일에 받은 선물이었다.
「사실은 반지를 주고 싶었는데.」
중얼 거리던 목소리가 생생했다. 기억이 바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무뎌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란을 버리고 녀석에게 갔던 나처럼, 녀석에게도 그런 변화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반드시 그랬겠지.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단 게 이상한 거니까. 게다가 난 그다지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니고. 녀석이 내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툴툴거리며 불평하기만 했다. 순수한 호의도 친절도 상냥함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토를 달고 쓸데없는 트집만 잡았다. 질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피곤할 테지, 멀미가 날 테지, 지겨워질 테지. 그러니 떠나는 걸 테지.
떠나는 사람을 붙잡을 권리는 내게 없다. 잘못을 한 나는 그냥 지켜봐야 한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주길 바래야 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녀석이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아주길 바라는 이기심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이기심을 없애는 법을 모르는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되겠지.
착잡한 마음을 아무렇지 않은 듯 위장하는 건 쉬운 일이다. 탁탁 털어내고 일어서는 것도 넘어져서 까진 무릎에 묻은 흙을 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까진 무릎엔 여전히 상처가 남겠지만, 상처는 나을 때까진 줄곧 아프다가 흉으로 남겠지만. 그런 사소한 상처에 신경 쓸 내가 아니니까. 다친 일은 수도 없이 많고 크고 작은 상처는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다.
이겨낼 수 있어.
“그럼, 갈까.”
어깨에 힘을 넣고 주문 같은 한 마디를 내뱉으며 어께에 둘러맸던 가방을 고쳤다. 발걸음을 내딛으며 꺼진 채로 여전히 내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을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가방 안에 처넣었다.
「좋아해, 신이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았다면 조금은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믐달이다.
지고 있는 달인 그믐달은 그 것만으로도 그다지 기분 좋은 대상이 아닌데, 오늘은 소나기라도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꼈기에 먹구름에 반쯤 가려진 그믐달은 말 그대로 어디선가 늑대인간이나 유령이 튀어나올 것은 음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걸 보고 있는 마음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물론 늑대인간이나 흡혈귀가 나돌아 다닌다고 믿기엔 장소가 어울리지 않았고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는 타입도 아니었기에 걱정은 없었다.
더 이상은 올라가지 않으니 내리라고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초록색 비상등만이 빛나는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보통 높은 건물의 옥상은 잠겨있기 마련이고 그 옥상 문을 딸 재주도 없고 열쇠도 없었지만 걱정은 없었다. 문은 반드시 열려 있을 테니까. 만에 하나 열려 있지 않다고 해도 부수고 들어갈 정도의 힘은 있으니까.
문을 부숴야 할 수고는 덜었단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하얀 정장을 입은 녀석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워진 바람에 망토가 멋들어지게 날렸고 녀석은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등 뒤에서 옥상 문이 철컹하고 닫혔다.
“안녕하세요, 명탐정.”
“안녕.”
괴도키드가 도주경로중 하나로 선택한 곳이었다. 녀석은 경시청이나 전시관에 보내는 예고장엔 도주경로 따위를 적어놓진 않았지만, 내게 따로 보내는 초대장엔 그걸 암호로 적어서 보내오곤 했다.
“뛰어왔나 보네요.”
답답해서 조금 끌어내린 넥타이는 헐렁했고 셔츠단추도 두 개쯤 풀어놨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었고 숨은 거칠다. 단추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키드와는 다르다. 놓칠까봐 두려운 나는 잡으려고 하고 녀석은 잡을 테면 잡아보라는 듯 여유 있게 서 있었다. 하지만 난 녀석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조급하게 만든다. 지고 있단 생각이 든다. 다르다는 사실이, 더 이상은 기쁘지 않았다.
“응. 나한텐 그 하얀 날개가 없으니 별수 없잖아?”
나와 네가 다른 입장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말에 괴도는 곤란한 미소로 대답하곤 하얀 손수건에 싼 보석을 툭 던졌다. 마치, 확인이 끝나서 쓸모없어진 사냥감 따윈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듯 조금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 보석을 내가 잘 받아낼 거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던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 보석도 돌려줬으니, 공적인 일은 끝났다고 봐도 될까요?”
녀석은 가볍게 웃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방금 전까지는 정말로 괴도와 탐정. 훔친 보석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정도의 관계로만 생각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싱긋 웃으며 다가온 녀석은 내 손에 들린 보석을 도로 가져가선 내 주머니에 넣어줬다. 멍하니 서 있는 내 허리에 팔을 둘러오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흠칫하고 몸을 떨자 허리를 끌어안은 팔은 좀 더 단단해졌고 입술은 콧등을 타고 내려와 내 입술에 닿았고 그대로 깊게 이어졌다.
“여기서 할 생각?”
“이제 와서 빼는 겁니까?”
“좀 있으면 비도 올 것 같은데.”
하늘은 어둑어둑했고 하늘 가득 낀 먹구름은 반쯤 보이던 그믐달마저 쉽게 삼켜버렸다. 비가 올 것 같단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말을 증명하듯 빗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뭐, 은신처를 밝히고 싶지 않다면 호텔이라도 가자고. 변장은 네 18번이겠지?”
키드는 감 잡을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곤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방금 전 내 눈앞에 있던 사람은 하얀 정장에 하얀 실크햇과 모노클로 얼굴을 가린 남자였는데, 지금은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평범한 고교생으로 변해 있었다.
“기왕이면 그 얼굴도 바꿔주지 그래.”
내 얼굴과 똑같은 얼굴, 카이토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을 노려보며 말하자 녀석은 그냥 싱긋 웃을 뿐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란이나 카이토의 소꿉친구-애인일지도 모르지만- 변장을 해보이며 ‘이게 더 좋아?’라고 물을 녀석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비가 오니까 빨리 가잔 말만 할 뿐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거리를 그냥 조용히 걷고 있었다. 항상 하얀 행글라이더로 여유 있게 날아가던 녀석과 발을 맞춰 걷는 건 어쩐지 낯설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허리에 둘러진 손이 녀석을 생각나게 했기에 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녀석은 눈치가 빨랐고 머리가 좋았고 배려가 깊었기에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침묵에 동참해 주고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비는 거세져 간다. 추워졌기에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걸 후회하며 터벅터벅 걷자 녀석이 괴도키드의 망토를 어디선가 꺼내더니 몸에 둘러줬다. 거절하려고 손을 들었지만 녀석의 표정을 보고 그만 뒀다. 어쩐지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녀석은 비를 맞고 있어서인지 더 처량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까만 밤에 하얀 망토를 두르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걱정이 됐다. 녀석은 잘도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도둑질을 해댄다고 속으로 조금 감탄하기도 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보통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살금살금, 보이지 않게 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녀석은 일부러 눈에 띄는 하얀 정장을 입고 하얀 행글라이더로 하늘을 날고 화려한 쇼로 사람을 끌어 모은다. 경찰을 불러서 농락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했지만, 녀석을 보다 보니 다른 걸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보석을 훔치고 달에 비춘 뒤에 돌려준다. 잠깐 확인하는 정도라면 예고장을 보내서 경계를 하게 하거나
“은신처로 데려올 필욘 없다고 했잖아.”
은신처란 단어에서 흔히 떠오르는 건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별장…이었는데, 녀석이 날 데려간 곳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맨션이었다. 녀석은 괴도키드고, 맨션의 방을 구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이런 호화맨션의 유지비도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역시 생각과는 다른 배경에 솔직히 놀라고 있는 나였다.
물론, 더더욱 놀라운 건 녀석이 날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이지만.
“아무데서나 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거실에 있는 욕실을 쓰라고 했다. 방에 딸린 욕실과 거실에 있는 조금 큰 욕실이 갖춰져 있다. 거실도 주방도 전부 크고 널찍했다. 평수가 넓은 맨션인데다 어딜 봐도 깔끔했지만 그 만큼 사람 사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은신처인 주제에 잘도 좋은 곳을 얻었단 생각을 하며 비에 젖어 눅눅해진 교복마이부터 벗었다. 주려면 젖어버리기 전에 주던지, 생각하며 하얀 망토를 노려보기도 했다. 별로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느릿느릿 넥타이를 풀고 셔츠단추를 끌르며 욕실에 들어갔다.
“저 녀석, 훔친 보석 중에 몇 개는 홀랑 먹어 버린 거 아냐?”
욕실도 널찍하고 고급스러웠다. 괴도 키드의 수입을 떠올리며 수상쩍다고 생각했고 돌아가자마자 괴도키드가 돌려주지 않은 보석이 있는지 조사하자고도 생각하며 키득대다가 따뜻한 물로 채워진 욕조에 들어갔다. 비 때문에 차가워졌던 몸이 따뜻해졌고 절로 찾아오는 나른함에 이대로 자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아쉬웠지만 적당히 몸을 데우고 나와서 샤워를 했고 거울을 보며 주문 한 마디를 내뱉고 선반 한 구석에 놓여 있는 가운을 몸에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괜찮아.’
걸어봤자 별 소용이 없는 주문을.
손에 든 흰 수건으로 머리를 거칠게 헝클며 나오자 녀석은 물이 따뜻했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나와 같은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을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편안해 보이는 면 바지와 따뜻해 보이는 셔츠를 입고 주방에서 뭔갈 하고 있는 녀석은 나를 부르며 밥을 먹자고 했다. 계속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는 녀석을 이상한 듯 바라봤지만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식탁 앞에 앉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먹은 게 없었다. 아침엔 바빠서 그냥 나왔었고 점심엔 식욕이 없었고, 저녁은 사건 때문에 바빠서 못 먹었고 그 뒤론 바로 이 녀석을 만나러 달려왔기 때문에 물 한 모금 마시질 못했다.
“도둑질만 잘하는 건 아니었네. 쓸모 있는 걸.”
“맛있다니 다행인데.”
뜨거운 장국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딱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고 녀석이 차려놓은 밥상은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비싼 접시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식단이었지만 따뜻하고 맛있었다.
“도둑놈한테 밥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는데. 어쩐 일이야?”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을 뿐인데, 그것에도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말투는 딱딱했지만 표정은 장난스러웠다. 란이었다면 ‘먹기 싫음 마’라며 밥그릇을 빼앗아갔을 테지만 녀석은 그러지 않고 그냥 나를 빤히 쳐다봤고 시선에 민망해진 내가 물을 마시자 도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차가웠던 녀석이 갑자기 친절해진 이유가 몹시 궁금한 나였지만 밥이 맛있었고 녀석이 말하려 하지 않았기에 한숨 한 번만 쉬고 식사에 집중했다.
「초대장을 받으면 내가 말한 곳으로 와.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명탐정? 끝까지 오지 않겠다고 우기면 네 애인이 무사하지 않을 테니까. 뭐,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지만 난 세상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좋은 녀석이 아니니까 날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다간 곤란해질 거야.」
그렇게 말했던 녀석이었다.
「왜 이정도로 떨고 그래. 애인하고도 많이 했잖아? 네가 두려워하지 않게 일부러 이런 얼굴로 왔으니까 조금은 내 생각도 해달라고.」
그런 행동을 했던 녀석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녀석은 설거지를 했고, 그걸 옆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나는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녀석을 위협했다. ‘괴도 키드가 설거지하고 있는 충격적인 모습입니다~’ 따위의 얘기도 열심히 늘어놨다. 물론 녀석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싱거워진 놀이를 열심히 하다가 욕실에 들어가서 양치를 하고 나왔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녀석에게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녀석은 아무 말 않고 침대에 앉았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쿠로바…군은 여전히 여자와 함께 있습니까?”
녀석의 옆에 걸터앉자 녀석이 물어 보며 창밖을 바라봤다. 커튼으로 가려놓지 않은 창밖으론 도쿄의 야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집은 도쿄 한복판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주택가였고 근처엔 집도 몇 채 없었기에 이런 야경은 볼 수 없었지만 그다지 감성적이지 않은 난 불빛이 반짝이는 밤거리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키드인 이 녀석은 언제나 저 캄캄한 거리를 하얀 날개로 날아다니니까 친숙하게 느낄 수도 있고 언제나 쫓기는 신세이기에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감상에 젖은 녀석은 침대 위에서 하는 대사 치고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말을 꺼냈다.
“난,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야.”
“여전히 좋아한단 말이군요. 자신이 미련하단 생각은 안 드나요?”
“이건…집착이 아니야.”
녀석은 고개를 떨궜고 나는 그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카이토와 똑같은 얼굴이 앞에 있다. 똑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똑같은 다정한 말을 내뱉는다. 그 마음도 카이토처럼 상냥하고 다정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절대로 범행 장소론 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30분이 지나도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그렇게 말한 녀석을 기억하고 있다.
“…싫지 않아.”
여전히 붙잡고 있던 뺨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며 녀석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녀석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고 나는 눈을 감았다. 녀석도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 녀석의 어깨를 끌어안자 녀석은 날 침대위로 눕혔고 가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생일 축하해.”
“고마…”
녀석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고 나는 조용히 입을 열고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시계를 흘끔 보자 12시가 넘어 있었기에 딱 맞춰서 축하해주진 못했다는 생각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축하한다고 하자, 녀석은 싱긋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하려고 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괴도 키드. 아니…”
고맙다고 말 하며 웃으려던 녀석은 키드의 생일을 내가 알고 있을 리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테고, 우연히 카이토와 키드의 생일이 같은 것뿐이라고 변명할 여유조차 없어 보이는 저 경악한 표정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쿠로바 카이토.”
“어, 어떻게….”
숨을 한 번 쉴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말 하자 녀석은 녀석 답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날 무시하는 거야?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카이토 널 보자마자 알았다고. 물론 증거는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잡았지만.”
“그러면, 어째서 아는 척 하지 않았어?”
내 위에서 내려와 침대위에 주저앉은 녀석을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하자 녀석은 당연히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내가 속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계속해서 속아주는 척을 한 거야? 라고, 조금 원망 섞인 질문이었다.
“네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름에서 풍기는 수상쩍은 냄새와 마술이며 온갖 행동거지가 키드와 닮아있었지만 녀석은 나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카이토에게선 키드의 버릇이나 행동을 없애려고 했고 키드에게선 카이토의 장난스러움을 깨끗이 없애고 점점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키드의 범행과 카이토가 집을 비우는 횟수가 계속 일치하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카이토는 집에 다녀온다던 핑계에서 학교가 바쁘다는 둥 뭘 해야 한다는 둥 하더니 나중엔 나를 떼어놓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여자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키드가 카이토를 걸고 내게 협박했을 땐 속으로 웃고 있었다. 카이토는 절대로 위험해질 일이 없다. 키드는 카이토니까. 키드의 속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무척이나 필사적으로 내게서 카이토를 떼어놓으려고, 내게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직 날 믿을 수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과대망상으로 미쳐버리기 전에 사실을 얘기해.”
차라리 키드가 카이토라는 걸 영영 모르는 채로, 카이토가 하는 말을 믿고 키드가 하는 행동만 그대로 받아들인 채 카이토와 헤어지고 키드에게서 벗어났다면 편했을지 모른다. 카이토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고 생각하는 편이 카이토가 날 믿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보단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실을 강요하고 있었다.
“버림받기 싫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키드라는 걸 신이치가 알게 된다면, 분명 그걸로 우리는 끝일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언제나 키드를 그다지 곱게 보지는 않았다. 실력을 인정했고, 일반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은 적은데다, 훔친 것들은 모두 돌려줬고 착한일도 제법 하는 녀석이기에 할 수 없지 정도로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카이토를 알고 키드를 좀 더 알아가면서 다른 생각을 했었다. 홈즈도 모든 범죄자를 경찰에 넘기진 않았다는 생각. 홈즈의 기준이었다면 녀석은 분명 정상참작이 가능한 녀석이었을 거라고. 진실을 추구하는 나는 겉만 보고 선입견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단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녀석을 응원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말했잖아. 난 키드도 싫어하지 않아.”
“그리고…, 위험해 지는 게 싫었으니까.”
녀석이 거짓을 말하며 나를 밀어내려 했던 건, 나를 생각해서, 나를 위해서라고 했다.
“아악!”
“난 네가 생각한 만큼 약하지 않아.”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때리자 비명소리가 들렸고 눈 끝에 눈물방울을 단 카이토가 날 바라보자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약하지 않고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날 생각하고 정말 날 위해주고 싶다면.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줘.”
카이토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녀석에게 계속해서 화를 낼 수 없었기에 몸을 일으키고 녀석을 안아줬고 녀석은 내 볼에 입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신이치.”
“왜.”
“여태까지 아무 말도 안하다가 왜 이제야 솔직해질 마음이 생긴 거야?”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녀석의 선물로 줄 걸 생각지 못했기에 낮에 함께 고르러 가자고 약속까지 한 참이었다. 불을 끈 방엔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가득했다. 비는 오래전에 그쳐있었고 달빛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제와 다름없이 시린 빛이 조금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건, 손을 잡아주는 따뜻함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이 손을 기쁘게 잡기 위해선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모험이 필요했었다.
“자존심 때문에 말은 못했지만, 언제 잃게 될지 모른단 생각이 드니까….”
이어질 말은 그냥 삼켜버렸지만 카이토는 알아들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입을 맞춰왔다.
“사랑해, 신이치.”
저녁에 전화를 끊으면서 듣지 못해서 안타까웠던 그 말은 짧은 입맞춤 뒤에 달콤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카이토.”
얼음위에 서 있던 우리는 서로에게서 멀어지려고 발버둥 치면서도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발밑의 얼음이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도 우리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서 만난 곳이 가장 깊은 강의 얼음 위라고 해도 우리는 함께 있기에 두렵지 않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지금 당장 발밑의 얼음이 깨져서 함께 강에 빠진다고 해도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이제는 괜찮다고. 두 번 다시는 바보 같은 생각 때문에 잃는 일은 없다고. 그렇게 다짐하면서. 드디어 만난 우리는 지금 잡은 이 손을 결코 놓지 않을 거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바라면서.
첫댓글 둘다 예뻐요, 키드라는 사실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신이치가 좋습니다.ㅠㅠ자신의 남편은 자신이 잡는 법이니까요![..]
오오~~ 신이치 참으로 대단한 연기력이네^^ 카이토가 못알아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