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 강의노트 (6)> B 어떻게 쓰는가 ― 이호철의 <탈향>
소설을 ‘어떻게 쓰는가’와 관련하여 기성 작가들의 설명을 듣는다.
작가 자신의 작품 중 한 편을 택하여 그 창작 과정에 대한 직접 설명한 것을 읽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어떻게 쓰는가’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대상 작품을 찾아 읽고 설명을 읽기를 권한다.
소설 창작 과정 (2)
체험, 거짓말, 문장쓰기 그리고 예술가적 자세
― 이호철의 <탈향>
이 호 철
어느 작가를 막론하고 픽션으로서의 소설 속 무대와 그 작가가 직접 겪은 현실과의 상관관계는 예외 없이 어슷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르포르타주나 논픽션이 아닌 한, 소설 속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픽션으로서의 현실이지, 실제 현실은 아닌 것이다.
단편 <탈향>의 무대는 부산의 제3부두이다. 그 점, 실제로 필자가 겪은 경험과 정확히 맞먹는 것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네 사람, 화자인 나를 비롯하여 광석이, 두찬이 그리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하원이, 이들도 실제의 모델이 있다. 바로 고향 마을에서 같이 피난 나온 사람들이다. 물론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는 광석이가 죽지만, 그 실제 모델은 고희의 나이로 지금 경기도 평택에 살고 있고, 거꾸로 소설 속에서 광석이를 어린 나와 하원이에게 남겨 둔 채 밤중에 저 혼자만 내뺐던 두찬이는 50년대 말엽 서울에서 품팔이를 하다 거의 굶어죽다시피 죽었다.
고향 마을에서 50년 12월 별안간 월남해 온 이 네 사람이 부산의 3부두에서 부두 노동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작품 <탈향>의 주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로 작가인 필자의 체험과 맞먹는 내용은 이런 정도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즉 그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전말의 대부분은 픽션에 속한다는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의 등장인물 네 사람은, 북의 고향 마을에서 같은 시기에 월남하여 부산의 3부두에서 함께 부두 노동을 한 일은 있지만, 화차살이를 한 일은 없었다. 단지, 그 당시 방을 못얻은 피난민들 일부가 더러 화차살이를 하는 것을 본 일은 있다. 화차에서 피난민 한 식구가 잠자다가 한밤중에 기관차가 느닷없이 매달고 서면까지 끌고 가 무척 당황했었다든가, 어쨌다든가,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은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겪은 일마냥 써먹은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알맹이를 이루는 부분은 완전히 픽션이다. 애당초 화차살이를 한 일이 없었던 만큼 이 네 사람이 그런 비슷한 일조차 겪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광석이가 잠결에 화차에서 뛰어내리다가 앗차 실수로 팔이 끊어졌다는 둥, 그때 두찬이 혼자서 비겁하게 내뺐다는 둥 하는 식의, 이 작품의 그야말로 중심 축을 이루는 부분들이 몽땅 허구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뒤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도 자연히 꾸며진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광석의 시체를 맞들고 화차가 듬성하게 서 있는 틈을 빠져나가면서 나와 하원이가 주고받는 대화들도 당연히 몽땅 꾸며낸 이야기 즉, 거짓말이다. 그런데 40여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읽어주었던 황순원 선생께서 유독 그 대목을 집어내어 매우 생동감이 있다고 칭찬을 해주시어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말로 나로서는 생판 거짓말 투성이로 만들어 낸 대목을 유독 집어내서 칭찬을 해주시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데 소설의 본령은 역시 픽션에 있다. 현실의 실제 국면과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속에서는 제대로 생긴 소설이 태어날 수가 없다. 막말로, 대담무쌍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무작정한 ‘거짓말’이 아니라, 그 작가의 내부에서 일정기간 발효를 거쳐 숙성될 대로 숙성한 뒤, 완전히 그 작가의 영혼 끝머리까지 이르러 혈육화되어 뽑혀 올라온 것이어서, 그것은 이미 그 작가에게는 결코 단순한 ‘거짓말’일 수가 없고, 시정(市井) 속에서 어쩌다가 겪는 그 어떤 사실보다도 훨씬 더 진짜배기를 담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탈향>을 쓰면서는 제목을 ‘어둠 속에서’라고 했고, 원고지 45매 정도의 분량이었다. 사건의 내용인즉, 함께 화차살이 하다가 어느날 밤에 끌려가는 기관차에서 잘못 내려 광석이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같은 동갑내기인 두찬이는 그냥 혼자서만 내빼버려, 그래서 나하고 하원이하고 화차에 올려놓고 부두에 일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와 보니까 죽어 있더라, 그래서 저녁에 둘이서 삽이며 곡괭이를 구해 가지고 들것에다가 시체를 싣고 나가서 묻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날 두찬이가 돌아와 운다, 하원이도 눈치가 있으니까, 나까지 도망가지 않도록 항상 불안하게 애걸조로, ‘고생하다가 고향 갈 때는 같이 가자’, 이렇게 나오지만, 나는 속으로, 너하고는 못살아, 이 바닥에서 나는 나대로 살아야겠어, 말하자면 이런 소설이다.
애당초 첫 문장은 ‘그 무렵 나와 두찬이와 광석이와 하원이는 부두 노동을 하고 있었다’로 시작하였다. 소설의 핵심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어서, 독자들은 ‘그래, 너희 넷이서 부두 노동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제부터 어쨌다는 이야기야?’ 이렇게 읽기 시작할 터이니 한 40 장 쓸 때에는 산뜻하니 기분이 좋았다. 황순원 선생께서도 이제 됐다, 추천해 주마, 원고지 쓰는 법도 가르쳐 주시고,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필자의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 철학도 좀 넣고, 어려운 인생론도 좀 지껄이고 싶고 그래서 의욕을 가지고 한 250매 정도로 고쳤다. 그러나 첫 문장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다시 60장 정도로 줄여 놓았지만 역시 똑같았다.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쯤부터 필자 자신이 지겨워졌는데, 이를 읽어보신 김동리 선생께서 서술체가 좀 걸린다고 예리하게 지적을 하셨고, 황순원 선생과 김동리 선생께서 내 소설을 읽어보셨다는 데에서 벌써 나는 고양된 기분이었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첫 문장이 떠올랐다. ‘하룻밤 신세를 진 화차칸은 이튿날에는 곧잘 어디론가 없어지곤 했다’라는 문장이었다.
이것이 바로 첫 문장이 지닌 구성상의 특색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문장으로 모아진 유기체인데, 처음 썼던 문장은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만, 뒤에 가서 다시 쓴 문장에 비하면 너무 빤하다.
이 문장이 떠오를 때까지 세 번 고쳤다. 제목도 <암야(暗夜)>에서 다시 <탈향>으로 고쳤다. 한 2년 동안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했기 때문에, 필자는 이제 작중 인물들은 완전히 꿰고 있는 상태여서 첫 문장이 새롭게 떠오르자 흥분이 되기까지 했다.
저녁 식사 후, 잉크병하고 펜하고 원고지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서 여덟시부터 밤 두시까지 내리 썼다. 묘사체로 바꾸면서. 종전에는 단락이 셋 정도로 나뉘어지면서 죽 이어져 갔는데, 새로 쓸 때는 금방금방 잘랐다. 단락이 늘어났다. 그렇게 문체가 달라지니까 대목대목 보태지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했다. 이렇게 써서 황순원 선생께 보였더니 아, 훨씬 좋아졌다고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요즈음 신인들, 문학 예술하는 자세의 타락을 볼 수 있다. 사회가 그런 식으로 되었다지만 정말 혼신의 힘으로 대어드는 예술가적 자세가 많이 바래지고 희석되었다. 자기의 어떤 머리끝까지 가려는 자세가 없어졌다. 문제는 쓰는 사람의 자세, 어떻게 대어드느냐, 어디까지 대어드느냐, 이 점이다. 대강대강 휘적휘적 써서 넘기고, 이런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흔히 비평가들이 소설 설명하는 것 보게 되면, <탈향>의 주제가 뭐냐? 말하자면 고향을 벗어나온 사람이 부산에 떨어져, 아, 나는 나대로 여기서 살아야겠다, 이제 고향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그 어떤 느낌으로 나는 벌써 하원이를 버리고 있다. 물론, 그것도 아직 뚜렷하지는 않고, 또 그 사실이 혼자서 슬프다. 그런 것들이 하나의 정감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는 처음부터, 나는 이런 것을 쓰자, ‘재래적인 농촌공동체에서 살다가 6.25라는 타의에 의해, 네 명이 부산이라는 타지에 떨어진다. 여기서 재래적으로 길들여진 그것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므로 이 새 상황 속에서는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다. 이 모습을 쓰자.’ 이렇게 됐을까? 말하자면 이론을 등에 업고, 농촌공동체가 어쩌구, 분명한 주제를 정해놓고 이것을 쓰자, 그랬을까?
소설은 그런 식으로 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런 도식적 접근에서는 뭔가 뻐득거리고 공연히 심각해지고, 자연스럽게 나가지가 않는다. 처음부터 테마를 정하고 쓰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내 체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살이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소설은 역시 픽션이다. 픽션 쪽에 큰 의미가 있고,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위 이론적인 접근, 유식한 문자 섞인 분석적.학문적 접근으로 소설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이란 자기 삶의 끝머리와 보통 사람들이 사는 삶하고 연결되는 대목에서 뽑아내 가지고, 그것을 김치 익듯이 익혀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유기체로서, 그래서 정서와 영혼으로 와 닿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아기를 낳듯이, 그렇게 온몸으로 들어왔다가 나올 때 완전한 유기체로서의 작품이 나온다. 물론 머리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머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
(이 글은 『이호철의 소설창작강의』(정우사,1997.10) 97 - 117 쪽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 이병렬 외 엮음,<소설, 나는 이렇게 썼다>,평민사,1999.10) 중에서
[출처] <소설창작 강의노트 (6)> B 어떻게 쓰는가 ― 이호철의 <탈향>|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