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강공(文剛公) 이사균(李思鈞)은 곧고 뻣뻣하여 시속에 맞추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기묘년의 사류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전주 부윤으로 나갔었다. 조광조ㆍ김정(金淨) 등이 죄를 입자,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당시의 정권을 잡은 무리들의 생각으로는, 이사균이 반드시 저 사람들에게 감정을 품었을 것이라고 여겨 불러 승진시킨 것이었다. 들어오자 사직하며 아뢰기를,
“조광조 등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하여 신은 자세히 모르오나, 반드시 일을 하려 하는데 중도에 지나친 점이 없지 못하여 미워하는 자가 많아서 그리 된 것입니다. 또 조광조 등에게 내리신 전교를 보고 삼가 생각건대, 위에서 만약 이 사람들이 다만 국사를 위하고 다른 생각이 없는 줄을 아셨다면, 그 죄를 감면해야 할 것인데도 감면하지 아니하시니, 아마도 전하의 마음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상벌은 비록 보통 사람에게 대하여서도 만약 남용되면 임금의 덕에 크게 누가 됩니다. 옛 사람은 한 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치게 한 자가 있었지만, 보잘것없는 신과 같은 자가 어찌 전하의 마음을 돌릴 힘이 있겠습니까? 사직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사균은 다만 남곤(南袞) 등의 의론에 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힘껏 조광조 등을 구하니, 정언 조침(趙琛)이 탄핵하여 관직을 떠났다. 뒤에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또 김안로에게 거슬려서 경상 감사로 나가는데, 김안로가 당시 정승으로 있으면서 흥인문 밖에 나가 전송하려 하였다. 이사균이 듣고는 숭례문으로 나갔다. 그 꼿꼿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