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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창고 안 마을이라는 뜻 그대로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고내마을에는 조선시대 세곡을 보관하던 조양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지금은 주춧돌 흔적만 있는 조양창 터에 이순신(李舜臣)이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창고 터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이름만 수군 총사령관이지 이순신(李舜臣)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버리고 간 곡식을 줍다시피 모으고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하물며 무기 보급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보성 관아에서 수습한 4마리의 말에 실은 무기와 120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미약하지만 전투를 준비하던 이순신(李舜臣)은 추석 저녁 뜻밖의 어명을 받았다.군사를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왜 느닷없이 수군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 것일까?
조정에서는 배도 없고, 무기와 군인도 턱없이 부족한 수군을 권율이 이끄는 육군의 지원병력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李舜臣)의 생각은 달랐다. 바다의 적은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순신(李舜臣)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유명한 '한산도가'라는 설이 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다시 시름을 더하네
한산도가를 읊은 날이 정유년 중추인데, 바로 조정에서 수군 철폐 명령을 받은 날이다.
고심 끝에 이순신(李舜臣)은 수군 철폐를 반대하는 비장한 결의를 담아 장계를 올리고, 이 장계로 조선 수군의 명맥은 유지된다.
🌹 13척 VS 133척-명량대첩(鳴梁大捷)
1597년 8월 18일, 이순신(李舜臣)은 남해안의 중요한 수군 방어 기지 가운데 하나였던 장흥 회진포에 도착했다.
이 포구에서 이순신(李舜臣)은 남은 12척의 배와 새로 합류한 배 1척, 모두 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조직했다.그러나 문제는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였다. 결전을 앞두고 이순신(李舜臣)은 휘하 장수들과 군사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결의를 다졌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16일에 그날의 긴박한 접전의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군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나머지 배들도 겁을 먹고 진격하지 못했다."
1597년 9월 7일 해남의 어란진 앞바다에 일본은 133척의 전함과 보습선, 연락선 등 총 500 여 척의 대선단을 집결시켰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133척의 일본 대선단은 9월 16일 이른 아침 어란진을 출발했다. 일본 전투 선단의 목적은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우수영으로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 이었다.
같은 시간, 우수영의 조선군 수군기지로 일본 대선단이 어란진을 출발했다는 정찰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조선 수군 전력의 전부인 13척의 함대는 133척의 일본 대선단을 맞아 싸우기 위해 조용히 명량 해협으로 나아갔다.
돌격해 오는 일본의 대선단을 맞아 13척의 조선 수군 전함은 울돌목에 일렬로 포진했다.
조선 전함 13척 가운데 이순신(李舜臣)의 전함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 적선과 맞섰다. 명량대첩(鳴梁大捷)의 막은 이렇게 올랐다.
그러나 이 전투는 불과 2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전투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난중일기'에는 이순신(李舜臣) 전함의 피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사상자는 모두 합쳐 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순신(李舜臣)이 사상자의 이름, 부상의 정도까지 직접 기록할 만큼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적었다.
남은 13척의 함대를 모두 추정해 볼 때 전사자가 약 30명, 부상자가 약 40명으로 모두 70~100명 미만의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계산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은 그 피해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불타고 부서진 배는31척, 약 90척은 심하게 파손된 채 달아났다. 격침된 배의 전사자는 최소 3,500명으로 추산되고 도주한 배의 사상자는 4,500명 가량으로 추산되어 일본군의 인명 피해는 총 8천 명으로 계산된다.
반면 조선 수군의 전함은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으니, 13척 대 133척의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화적인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鳴梁大捷) 이다.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불멸의 금자탑(金子塔)이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것으로, 실제 이순신 장군과는 거리가 먼 쇳덩어리이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초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서책을 참고하면 용모가 단아하고 병약한 문관 스타일에 맨날 아팠다고 한다. 키도 크지 않아 140~145 c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불안해서 점도 쳤고, 고향 식구들을 걱정해서 잠을 설쳤다.
자, 이제 그만 이순신 장군(李舜臣)을 차가운 구리 속에 가두어 놓지말고 우리 옆에 따뜻한 피를
가진 구국의 영웅으로 되돌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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