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테를지와 울란바토르 여행기
넓은 벌판의 초원에서 밤이면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볼 수 있는 나라, 몽골! 오래전부터 그 너른 들판에 말을 타고 달려보고 싶은 꿈을 꾸었다. 그런데 마땅한 기회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해, 올해는 꼭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함께 가자고 제의했더니 여름에는 덥고, 게르가 불편해 가고 싶지 않다며 혼자 다녀오라 했다. 그래서 몇 친구에게 문의해 보았지만 동행할 친구가 없었다. 일정이 맞지 않아 그럴 수 있지만 최근에 코로나의 감염자가 다시 늘어나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20여 년 전에 함께 문단 활동을 했던 동료가 함께 여행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몽골은 여름철에만 관광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번에 다녀오고자 몽골의 코로나 상황을 알아보았다. 몽골에서는 이미 오래 전, 코로나에 많은 국민이 감염되었으나 지금은 잦아들었다고 한다. 여행사에 문의하니 근래에 몽골 여행 후 귀국 시, 코로나의 감염으로 인하여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 사례는 없었다고 했다. 만약, 몽골에서 코로나의 양성반응이 나오면 잔류하여 치료할 각오를 하고, 동료와 함께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에 신청했다. 이 상품은 여러 여행사에서 신청한 사람들을 모은 패키지 상품인데 일행은 모두 17명이었다. 그들과 한 팀이 되어 4박 5일의 일정으로 몽골 여행을 하게 되었다. 8월 17일 오전 11시,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토르로 출발, 5일 간의 여행을 마치고 21일 오후에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1. 몽골 초원에서의 별 관찰
티웨이 비행기의 창가 쪽에 앉게 되어 창밖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중국 상공에서는 마을과 집들이 많이 보였는데 몽골에서 언뜻 보니 넓은 사막이 보였다. 사람은 물론 집, 나무, 길조차 없는 삭막한 들판과 넓은 고원지대가 보였다. 몽골은 인구밀도가 ㎢ 당 2 명 내외로서,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임이 실감났다.
울란바토르에 도착,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에 승차한 후 바로 고르히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출발했다. 그 가이드는 대학에서 국제관련학과를 전공한 23세의 몽골 아가씨였다. 한국말을 대학 3학년 때부터 특강으로 배우고 졸업, 한국 관광객들의 가이드를 하게 되었다는데 이번이 두 번째 가이드로 나선 초보자라고 했다. 그녀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았고, 경험이 적어 당황하거나 말을 번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절하게 안내를 했고, 외모가 한국인과 비슷하여 친근감이 들었다.
테를지국립공원으로 가다가, ‘칭기스 칸 마상 동상’을 보았다. 그 동상은 울란바토르에서 54 km 떨어진 전진불독(Tsonjin Boldog) 초원 지역에 있는데 2010년에 세워졌다. 외형은 은색 스테인레스로 보였다. 동상의 아래에 있는 기반의 건물 높이가 10m, 그 건물 위에 세워진 동상의 높이가 무려 40 m다. 동상의 높이가 50 m나 되는 높고 큰 조형물이다. 그 동상 아래의 건물에는 기념품 가게, 엘리베이터, 계단이 있는 넓은 공간이다. 여행 일정에는 외부만 보는 계획이었으나 일행 모두가 그 동상의 내부도 들어가 보자 하여 관람료 5,000원(달러로는 4불)을 더 내기로 하고 입장했다. 실내가 좀 어둡더니 정전이란다. 전기를 러시아에서 수입하여 쓰고 있는데 전기가 부족하여 가끔 정전이 된단다. 정전이라 엘리베이터도 작동되지 않아 무려 5층 이상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계단과 통로가 좁고 어두워 휴대폰 불빛을 이용하여 조심조심 올라갔다. 그 계단 끝은 동상의 몸체 중 복부(腹部)인데, 그 복부(배꼽 부분)에 출입문이 있어 밖으로 나가, 테라스 같은 곳에서 너른 들판을 볼 수 있었다. 전망이 좋았다.
동상에서 전망을 보고 난 후, 버스에 승차하여 가다가 테를지 입구에 있는 고개 위에서 내렸다. 고갯마루에 샤머니즘의 상징물인 오워가 있다. 언덕 위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그 가운데에 장대를 세워 여러 종류의 천들을 휘감아 놓았다. 그 돌무더기의 아래쪽에 지폐(紙幣)와 동전이 많이 놓여있다. 그 돌무더기 옆 한쪽에는 골동품을 파는 천막 가게가 있는데 점원은 없다. 천막의 승용차에 앉아 있는 여자가 가게를 보는 사람 같은데 차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서쪽을 내려다보니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톨강, 그 강줄기가 보이고 강변에는 많은 나무들이 강을 따라 도열해 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나무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여기는 강변과 산 위에 있는 나무들이 많이 보였다. 강물은 초목들의 젖줄이었던가 보다.
다시 버스로 테를지 공원의 한쪽, 숙소인 게르 마을에 도착했다. 게르는 20여 동, 세면실을 겸한 화장실이 두 곳, 게르 옆 한쪽에 양옥 건물의 식당이 있다. 식당으로 가서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숙소로 한 게르에 4명씩을 배정했는데, 나와 동료는 부산의 사업가, 수원에서 온 제조업 대표와 함께 4명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게르 안에는 4개의 침대가 가장자리에 붙어 있고 가운데에는 난로와 간단한 탁자가 전부였다. 게르와 식당 사이에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우리나라의 히어리나무처럼 단풍나무 씨앗같은 꼬투리가 여러 개 매달려 있다.
저녁 식사와 샤워를 마치고 게르 안에서 룸메이트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동행한 동료와 부산의 사업가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동료는 피곤하다며 먼저 침대에 누워 명상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었고, 부산의 사업가, 제조업 대표와 셋이서 빗소리를 들으며 담소하다가 자정 무렵에 잠을 청했다.
다음날에도 숙소인 게르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샤워 후, 제조업 사장과 둘이 식당 앞 계단으로 나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름이 끼어 밤하늘이 깜깜했지만 구름이 벗겨지고 별이 솟아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구름은 하늘을 가리고 끝내 비켜주지 않더니 자정 무렵, 부슬비가 내렸다.
게르 안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하현 반달이 청명하게 떴다. 하늘 중간의 구름 사이로 달이 떴는데 어찌나 밝은지 대낮 같았다. 서쪽 하늘 구름 사이로 별이 몇 개 보였으나 달빛 때문인지 그 별빛이 너무 약해 의미가 없었다. 기대했던 별 보기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난로의 불이 꺼져 옆 게르에서 판자 쪼가리를 몇 개 얻어 다시 불을 피웠다. 아침에 일어난 동료가 그제 밤은 너무 덥더니 오늘 새벽은 너무 추웠다고 했다.
2. 넓은 초원, 그 동경의 꿈도
울란바토르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테를지 공원이 몽골 여행의 시작점이었고, 센터 같았다. 그 테를지를 중심으로 관광명소를 오가는 동안 몽골의 초원지대를 충분히 보았다. 넓은 들판과 완만한 능선, 분지를 이룬 것처럼 둘러싼 산과 비포장 도로, 분지 가장자리에 솟은 바위의 능선과 침엽수, 광활한 초지에서 풀을 뜯는 양, 소, 말, 털이 길게 늘어진 야크도 보았다. 몽골의 5대 가축은 소, 말, 양, 염소, 낙타라 한다.
몽골의 국토는 한반도의 7 배, 남한의 15배나 되는 156만 ㎢다. 그러나, 고원과 사막을 제외하면 무려 80 %가 초지다. 그 초원에 말을 타고 달려볼 기대를 가지고 몽골에 갔다. 그런데, 그 들판 대부분이 사막과 같은 마른 땅이었고 풀이 자란 초지에는 작은 풀들이 듬성듬성 난 정도여서 골프장과 같은 푸른 초원이 아니었다. 완만한 산지에 나무가 없어 벌거숭이 산이거나 벌판이 대부분이었지만 능선은 높낮이가 적어 부드러웠다. 넓은 초원마저 풀빛이 진하지 않아 몽골 여행에 동경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가 머문 게르 앞, 초지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어 풀밭을 유심히 보았다. 풀밭에는 키가 작은 풀들과 꽃잎이 작은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있다. 쑥부쟁이로 보이는 보라색 꽃이 가장 많았고, 에델바이스와 비슷하여 솜다리 같은 꽃, 좀 작지만 하얀 구절초꽃, 빨간 패랭이꽃, 양지꽃처럼 노란 꽃들이 뒤섞여 피어있다. 눈에 띄는 야생화들을 촬영해 놓았다. 그런데, 소들이 떨구고 간 똥도 적지 않아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게르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부터 아침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 조반을 먹고 휴식 시간에 혼자서 우비를 입고 바위가 솟은 봄바트산에 올라갔다. 다음 프로인 ‘초원길 걷기’가 있어 빨리 다녀오려고 바위 쪽으로 서두르며 오르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털이 길게 자라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털을 씻지 않아 들개인 것 같아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길을 안내하듯 앞서 걸었다. 그런데 산 위에 오른 잠시 후, 그 개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그 개는 이 게르 마을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산에 빨리 다녀오느라 무리했는지 사흘이나 정강이가 아팠다.
정상의 바위에서 공원 사방을 돌아보니, 산을 등지고 점점이 놓여진 게르가 하얀 안개꽃처럼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다. 아파트의 단지처럼 여러 개의 게르 마을이 테를지 공원 안에 군락을 이루었다. 그 게르의 대부분은 관광객용 숙소인 것 같은데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적어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오니 일행들이 모여 있다. 잠시 후, 걷기 프로에 참여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초원길을 걷는다더니 내가 다녀온 그 산을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산을 두 번이나 오르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산에 오르지 않았을 텐데, 공연히 부지런 떨다가 다리만 아프게 되었다. 산마루에 올라 사진을 촬영하고 정상의 바위 봉우리를 돌아 숲길을 지나 게르로 돌아왔다. 비는 멎었는데 바지와 운동화가 빗물에 젖어 빨아 널었다. 간단한 산행이었지만 넓은 테를지 공원의 대부분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오후에는 ‘승마체험’으로 한 시간 말을 타고, 원주민 마을로 갔다. 게르 안에서 원주민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했다. 방 하나에 모든 생활도구가 다 들어있다. 장롱(한국의 단스와 비슷함)과 가재도구가 있다. 손으로 돌리는 재봉틀도 있다. 한쪽 벽에는 가족사진을 넣은 액자도 걸어놓았다. 원주민의 삶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마유와 마유주를 맛보았다.
그 다음, 다른 일행들은 숙소로 돌아갔지만 나와 룸메이트였던 제조업 사장과 승마를 추가로 개별 신청하여 둘만 다시 한 시간 동안 말을 탔다. 10대로 보이는 마부가 내가 탄 말과 룸메이트가 탄 말, 두 필의 고삐를 잡고 개울가로 말을 타고 앞서 갔다. 가이드는 혼자서 우리 뒤에 말을 타고 따라왔다. 여행객의 안전을 위해 가이드는 항상 같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해 질 무렵, 개울가를 지나며 물을 건너기도 하면서 운치 있는 산동네 길을 산책하듯 넷이서 1시간쯤 말을 탔다.
3. 우리와 비슷한 몽골인
몽골에 와 보기 전에는, 그들은 머리와 키가 조금 크고, 몸통과 종아리가 굵고, 광대뼈가 조금 솟고 볼이 약간 붉은 인종으로 여겼다. 그러나, 몽골에 와서 직접 보니 그런 나의 고정관념은 잘못이었다. 나의 예상했던 모습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우리와 비슷한 용모였다. 남자의 평균키가 180 cm쯤이고 몸통도 커서 한국인보다는 체격이 컸다. 한번 보고 몽골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한국인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또 늘씬한 체형의 멋진 여성도 많이 보았다. 지나가는 차를 자세히 보니 여성 운전자가 상당히 많았다. 분명히 몽골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의 가이드, 운전기사, 가게의 점원이 우리 관광객들을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가이드에게 한국인에 대한 몽골인들의 반응을 물었다. 중국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한국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라고 했다. 몽골인이 약 350만 명인데 취업이나 유학으로 한국을 다녀온 사람이 약 5만 명 이상이라니 몽골인의 상당수가 한국을 다녀온 것이다. 또 한국 드라마의 영향도 컸을 거라 했다.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어 몽골인들이 많이 보았다 한다. 그리고, ‘방탄소년단’, ‘싸이’ 등의 가수와 탈렌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버스 기사는 한국에서 3년 일해 번 돈으로 아파트를 두 채나 샀다고 자랑했다. 그렇게 코리아 드림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좋은 나라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가이드도 1년 뒤 한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매우 진취적인 아가씨다. 한국에 오면 도움을 줄테니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었다.
귀국 전날 저녁, 몽골 전통 공연을 관람하였다. 동영상의 배경이나 마두금 연주, 전통악기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관현악의 협주가 환상적이었다. 남녀의 율동과 무용, 독창과 합창, 특히 혼자서 고음과 저음을 동시에 내는 흐미 소리가 이색적이었다. 서커스 단원처럼 물구나무를 섰다가 발로 활을 쏘는 몸매 예쁜 여자, 어떻게 몸을 그렇게 변형시킬 수 있는지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 공연에 출연한 협주자들과 가수, 무용가들 역시 한국인과 너무나 비슷해 외국인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탈춤의 춤 동작은 우리나라의 탈춤과 비슷한 게 많았다.
관람객의 80%가 한국 관광객인 것 같다. 몽골 관현악단이 아리랑을 연주하자 관람석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따라 불렀다. 10여 년 전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몽골문화촌 몽골민속공연장에서 이번 공연과 유사한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때 특이한 목소리가 저음과 고음의 이중음으로 노래하는 흐미 소리였다. 그 신기한 노래에 대해 인상이 깊었는데 여기서 다시 듣게 되었다.
4. 아리야발 사원과 거북바위, 복트 칸 궁전
아침을 먹고 30분쯤 버스를 타고 바위산 기슭에 있는 아리야발사원으로 갔다. 가는 동안 넓은 들판과 산야(山野)를 보았는데 거의 나무가 없었다. 그런데 이 사원의 진입로 주변에는 활엽수인 샤스레나무, 침엽수인 이깔나무와 히말리아시다 등의 나무가 잘 자라있다. 산 아래로 물이 흐르는 덕택일 것이다. 사원의 관문으로 들어가 완만한 경사로를 걸어가는데 길 양쪽에 야생화들이 많이 피어있다. 듬성듬성 자란 보라색 쑥부쟁이꽃이 가장 많았고, 남색의 용담, 노란 양지꽃 같은 꽃들이 함께 피어 있다. 풀밭을 자세히 보니 산마늘꽃, 빨간 패랭이꽃도 작지만 선명하게 피어있다.
사원까지는 약 2km. 완만한 길이지만 더워서 겉옷을 벗어 허리에 묶고 올라갔다. 길 양쪽에는 입간판 같은 판넬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그 판에는 러시아 문자로 쓴 문구들이다. 산 위로 오르다 오르막의 굽은 길가에서 큰 돌판에 산신령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바위 앞에 지전과 동전이 많이 놓여있다. 지키는 사람도 없는데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가 보다. 약 1 km를 지나니 작은 개울에 걸쳐놓은 구름다리가 있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건너가니 드디어 사원에 오르는 계단이 나왔다.
아리야발 사원 건물은 코끼리의 얼굴을, 그 계단은 코끼리의 코를 상징한다는데 계단의 수효가 108개라 한다. 그 10층 정도의 계단을 오르며 세 번이나 쉬었다. 오를 때는 힘들었지만 높은 곳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다워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40분 정도 걸어 올라온 길,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출구인 관문을 보았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그 하늘에 떠 있는 뽀얀 구름, 그 단순한 모습으로도 마음이 설레었다. 공기가 맑은 하늘이라 그토록 색상이 곱다. 그렇게 선명한 하늘과 구름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50년 전에는 우리나라도 그런 하늘과 구름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회지의 산에서 하늘을 보면 매연 같은 검은 스모그가 띠를 이루고 있다.
사원의 건물이나 내부의 법당은 현란한 색상과 너저분한 물품들 때문에 약간 음습했다. 몇 명의 몽골인이 부처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합장했다. 한국에서 보지 못한 부처의 쌍까풀, 몽골 남자들의 대부분은 쌍까풀이 있어 인상이 부드러워 보인다. 건물 사방에 매달아 놓은 돌림대들을 한 번씩 돌리며 나왔다. 사원 뒤로는 커다란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나무가 없는 암벽으로 솟아 황망한 산인데 어인 일로 이런 곳에 사원을 지었을까. 잠시 전망을 보다가 계단을 내려와 하산했다.
버스를 타고 거북바위에 갔다. 커다란 암반 위에 거북등 같은 바위, 그 앞으로 거북머리 모양의 사각 바위가 붙어 거북이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 같다. 바위 옆 광장에서는 독수리 조련사가 독수리 한 마리를 팔에 얹고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관광객들이 독수리를 팔이나 어깨에 얹고 사진을 촬영하면 그는 2불씩 받았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면 크기가 2 미터나 된다. 그야말로 새 중의 왕이다. 그렇게 날개가 크기에 여우를 낚아채 하늘로 가볍게 날아오를 것이다.
점심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둥지’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쌀밥을 먹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과 김치에 익숙해 있다. 일행들은 모처럼의 한식이라 맛이 있는지 공기밥을 추가로 주문하여 배불리 먹었다.
울란바트로 시내로 와서 복트 칸 궁전에 들어갔다. 가이드가 몽골 마지막 왕이 살았던 궁전이라 했다. 기둥이나 지붕에 도색을 하지 않아 방치된 건물처럼 퇴색했다. 고풍스럽긴 하지만 골동품을 보는 것 같다. 관문을 3개쯤 통과한 뒤, 박물관으로 쓰는 궁(宮)에 들어가 몽고인들의 옛 물품들을 보았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데 가이드와 떨어져 다니다보니 설명을 듣기가 어려워 전시한 물품에 대한 가치를 몰라 수박 겉핥기식 관람이었다.
5. 자이승전망대와 이태준 기념공원
버스에서 내려 고층 빌딩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을 올라갔다가 자이승 전망대를 향하여 걸어서 올라갔다. 1 km나 되는 가파른 계단이다. 무릎이 약하여 천천히 올라가기 위해 울란바토르 시내를 자주 돌아다보거나 사진을 촬영하며 쉬었다. 이 전망대는 산줄기가 시내를 가로막은 곳 앞에 있어 시내를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올라가기가 상당히 힘들었지만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는 경치가 펼쳐졌다. 좋은 경치를 보려면 그렇게 땀좀 빼야만 한다. 좋은 경치는 쉽게 볼 수 없는가 보다.
특이하게도 전망대 봉우리에 원형으로 만든 벽이 있다. 그 벽에는 러시아 군에 대한 몽골인의 우호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러시아와 협력 관계 유지를 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도심지, 중앙에는 도색이 잘 된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상당히 있었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색상이 산뜻하다. 좌측의 서쪽으로는 연기인지 수증기인지 하얗게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시내 쪽으로는 우리나라 70~80년대쯤으로 여겨지는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맞은편 산 위에는 우리나라의 개발 시대 산동네처럼 집들이 산등성이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시내에 다니는 승용차들은 거의 일제였는데 대부분이 도요타 차량이었다. 한국차가 드물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한국 차는 트럭과 버스가 좀 있다고 했다. 유럽에 가면 우리나라 승용차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아직도 몽골과의 교역이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
몽골은 근래 많이 변화한 것 같다. 또 외국인과 외국 문화가 불어오고 있어 머지않아 많은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일행 중 어떤 이는 가이드에게, ‘돈 벌어 땅을 사놓아. 나중에 큰 돈이 될거야.’ 하고 충고했다. 몽골은 아직 개발이 덜 되었으니 앞으로 발전의 여지가 많으므로 땅을 사 놓으면 부자가 될 거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몽골인에게 투기를 조장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은 땅이 넓어 땅 투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몽골도 땅이 넓으니 투기로 부자가 된다는 건 무리한 기대인 것 같다. 그러나, 유목민들도 말보다는 오토바이를 선호한다니 몽골 사회도 빠른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자이승 전망대를 내려와 곧장 길을 건너 이태준 열사의 기념공원에 들어갔다. 연세의전을 졸업하여 몽골에서 의사 생활을 했던 이 열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또, 몽골인들의 병을 치료하며 신임을 얻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했다. 도산의 추천으로 청년학우회에 가입한 적이 있고,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죽을 때까지 헌신했다. 당시에 몽골 국왕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독립운동 지사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고 독립 자금을 지원했다.
몽골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몽골 1등급 훈장을 수여했고, 그의 기념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공원에 잔디와 정원수를 심어 조경을 조성해 놓았다. 또,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한국 전통 양식의 팔각정인 대암정(大岩停)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키가 1 미터 이상의 회양목을 정원수로 줄지어 심어 놓았다. 아담한 그의 기념관에서 그의 업적과 활동에 대한 내용과 사진을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몽골에서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다니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러시아의 악명 높은 군에 의해 교살되었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6. 간등사원과 수호바토르 광장
아침을 먹고 호텔에서 간등사원으로 출발하기 위해 버스를 탔다. 몇 명이 약속된 시각에 오지 않아 가이드가 찾으러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의 룸 번호를 적어놓지 않아 애를 먹었나 보다. 키 카드를 배부할 때 적어놓지 않고 눈에 띄는 대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잠시 후에 젊은이들이 버스에 올라 타 죄송하다고 인사했다. 어제 밤 시내 구경을 나갔다가 늦게 자, 늦잠을 잤다는 것이다.
간등사원 주차장에서 내려 각자 사원을 돌아보고 11시까지 오라고 했다. 동료와 함께 조그만 사원의 실내로 들어가니 어떤 의식을 치르고 있는지 엄숙하게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 의식을 지켜보던 동료는 부처상 앞에 10불을 시주하고 왔다.
사각형 시멘트 건물 위에 처마가 2층인 간등사원으로 갔다. 울란바토르에서 가장 큰 사원인데, 1930년대 라마교 탄압시대에도 유일하게 법회가 열렸다 한다. 법당 안에는 24m에 이르는 불상이 우뚝 서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 한다. 이 불상은 한 쪽에 두 개씩 네 개의 팔이 있는데 양쪽 두 개는 일반적인 불상처럼 손을 마주잡고 있는데 양쪽으로 벌린 두 개의 팔에는 긴 천을 들고 왼손에는 향로, 오른손에는 거울 같은 걸 들고 있다.
부처의 얼굴은 평온한 표정인데 큰 눈이 매우 선(善)해 보인다. 쌍꺼풀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 불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눈매다. 머리 위에는 여왕이 쓰는 티아라를 쓰고 있어 우리나라의 관음보살상 같다.
간등사원 주변에는 여러 개의 작은 절과 스님들의 기숙사가 있다. 또 사원의 부설로 계단을 높게 지은 불교대학이 왼쪽에 있다. 버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촉박하여 주차장으로 가려 하니, 동료가 그 대학 건물도 보고 가자 했다. 오른쪽으로 가서 계단을 올라가 산뜻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도 컸지만 실내 역시 무척 넓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곳에서도 큰 행사가 진행 중인지 많은 사람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다. 실내의 중앙에서는 불교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잠시 보고 나오는데 가이드에게서 재촉 전화가 왔다고 동료가 말했다. 서둘러 잰걸음으로 주차장에 갔다. 버스는 주차장에서 나와 길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먼저 승차하여 일행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다음은 수호바토르 광장으로 갔다. 몽골 혁명의 아버지인 수흐바토르가 1921년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1946년에 울란바토르에 그의 동상을 세웠는데, 그때 붙인 이름이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시의 중심부에 있는 역사적인 광장으로서,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과 비슷하다. 수흐바토르는 몽골의 독립을 쟁취한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몽골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몽골을 독립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으로서 몽골인들이 칭기스칸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다. 광장의 중앙에는 말을 탄 수흐바토르의 기마상이 우람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광장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출발하여 광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리스의 고대 신전처럼 여러 개의 기둥이 있는 의사당의 넓은 계단에서 큰 행사가 있는지 많은 사람이 모여 어떤 의식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졸업식이라 했는데 성인인 것으로 보여 대학생들인 것 같았다.
수흐바토르 동상 앞에서 많은 이들이 사진을 촬영하는데, 그중 몽골 전통 복장을 갖춘 중년층의 어른들이 눈에 띄었다. 키도 크지만 배가 많이 나온 거구의 남녀들이 느슨한 전통 옷을 입어 몽골인의 전통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쪽으로는 오페라 극장이 있고, 그 옆에는 거대한 돛배의 돛과 같은 모양으로 사방이 유리창으로 된 우람한 신식 빌딩이 있다. 그 건물에서 우측으로 여러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는데 아이들 몇 명이 분수대를 헤집고 다니며 장난치고 있다. 그 옆 차량의 간이판매점에서 동료와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잠시 쉬었다.
다음은 몽골 역사문화박물관으로 갔다. 최근에 만들은 박물관인데 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과 몽골 역사에 관련된 전시품을 전시해 놓았다. 말을 타고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 독특한 문화와 그들의 생활방식, 오래된 생활용품 및 보석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칭기즈칸의 많은 유물과 예술품, 군사 장비 및 무기들도 보았다.
여러 가지 전시품들을 보다가 복도에서 머리에 얹어 보는 기기를 통해 홍보 영상물을 보았다. 몽골의 자연환경, 대표적인 건물, 민속공연 등의 내용을 3분 정도 볼 수 있는 내용인데 잘 편집되어 있어 다음 사람이 기다리는 데에도 끝까지 다 보고 그 기기를 내려놓았다.
다음으로는 몽골 국영백화점(STATE DEPARTMENT STORE)에 들렀다. 안으로 들어가니 겉보다 실내가 더 고급스러웠다. 상당히 큰 백화점이다. 기념품이나 쇼핑할 수 있도록 자유시간을 1시간이나 주었다. 백화점은 간단히 돌아보고 밖으로 나와 길 건너 행사 천막 부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일상용품들을 파는 행사였다. 부스를 지나가니 10여 명의 청소년들이 킥보드로 점프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전동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볼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드물었다.
일행들을 만나기로 한 시각이 되어 백화점 앞으로 갔다. 햇볕이 따가워 한쪽 그늘에 서 있는데 취한 몽골인이 우리 일행에게 손을 내밀며 “마니 마니” 하며 구걸을 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이나 행동이 위협적이어서 피하자 더 심하게 달라붙으며 손을 벌렸다. 일행 중 시의원이라는 분이 1달라 지폐를 주고 가라했다. 그러나, 계속 “마니 마니” 하고 일행들에게 치근거렸다. 그때 우리의 버스 기사인 몽골인이 그를 저지하려고 손을 잡고 밀자 그는 더 세게 밀면서 싸울듯한 기세였다. 적절히 대응하기 어려웠다. 모두 버스로 가자고 가이드가 일행들을 인솔했다. 그는 우리를 따라오면서 계속 행패를 부렸다. 신호등을 두 번 건너 백화점 앞에서 멀어진 후 보니 따라오지 않았다. 몽골에서 처음 겪는 불쾌한 일이었다.
다음으로는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시내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변두리의 아파트형 오피스텔에 있는 업소였다. 대기실이 좁아 계단에서 기다렸다가 침대로 갔다. 마시지 받을 옷으로 갈아입으라는데 세탁하지 않은 것 같아 찜찜했다. 나의 전신을 마사지한 여성은 약 50분쯤 능숙하게 절차에 따라 시원하게 했다. 성의 있는 마사지는 아니었지만 평이하여 불만이 없는데 어느 분은 마사지가 엉터리였다고 불평하는 분이 있었다.
몽골 민속공연장으로 가는데 차량 정체가 심했다. 몽골의 국민소득을 고려하면 의외로 차량이 많다. 토요일 오후라서 더 심했던 것 같다. 공연장에 도착, 입장하니 관객이 좌석의 절반 정도 앉아 있다. 되도록 앞쪽에 앉고 싶었으나 앞에는 빈 좌석이 없어 중간쯤에서 동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가장자리에 앉았다. 개막 전 좌석이 가득 찼는지 늦게 온 사람들이 빈 자리를 찾기 위해 빈 좌석을 찾느라 우왕좌앙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몽골의 자연과 문화적인 내용이 홍보 동영상으로 떠올라 시선을 사로잡았다. 동영상이 끝나자, 화려한 복장으로 등장한 무희들의 역동적인 춤, 초원에 말 달리듯 힘차게 부르는 가수들의 노래, 커다란 탈을 쓰고 기괴하게 추는 탈춤, 물구나무를 섰다가 발로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서커스 같은 묘기, 너른 초원에 떠도는 바람처럼 나오는 고음과 저음의 이중음인 흐미 소리, 마두금을 중심으로 몽골 전통 관현악단의 연주, 우리나라 관객을 위해 연주한 아리랑 등, 아름답고 신기한 공연을 보다 보니 금세 두 시간이 지났다. 이 환상적인 공연이 이번 여행 중 최고의 클라이막스였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렸다. 우리를 태울 버스 기사가 가져온 우산을 받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여러 버스가 길을 막아 한 줄로 가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호텔에 가서, 내일 귀국 전에 음성을 받아야 하는 코로나 PCR 검사를 했다. 한국인 식당에서 삼겹살로 저녁을 먹었다. 일행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 함께 건배도 하고 작별의 인사말을 나누며 흥겨운 식사를 했다.
이번 여행으로 몽골 여행에 대한 오래 전부터의 소망은 이루었다. 그러나, 쏟아질 듯 찬란하다는 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별볼일 없다’는 말처럼 싱거운 밤을 보냈다. 말 타고 넓은 초원도 달려보고 싶었으나 두 번밖에 타지 못했다. 더구나 남한의 15배나 넓은 나라를 버스 타고 겨우 왕복 200km 정도만 오가며 보았으니 너무 아쉽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더니, “여행이란 환상을 깨러 가는 것이다.” 라는 말처럼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다.
그러나, 룸메이트였던 부산의 사업가, 제조업 회사의 대표, 그 외 몇 분과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 외의 일행들 17명, 그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닷새 동안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자니 상당히 아쉬웠다.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으랴만 다시 만나자는 인사로 섭섭함을 달랬다. 그렇게 헤어짐이 아쉬워 “헤어질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하고 싶다.”고 시를 쓴 이도 있을 것이다.
다시 몽골을 가게 된다면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다시 보고, 말의 고삐를 잡고 초원을 달려보고 싶다. 그리고, 넓은 나라 몽골의 더 많은 것들을 살펴보고 싶다.
첫댓글 일생에 추억으로 남을 여행을 하셌네요~^^
좀 아쉬운 것은 글 중간중간에 사진을 첨부 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