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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소식란 스크랩 천왕과 부처님이 만나서 방답진을 가면
문은형 추천 0 조회 46 11.05.02 22: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방답진성

성안팎에는 외지에서 온 관원들을 대접하여 묶게 하였던 객사, 방군들이 기거하는 위사, 성안에서 적과 싸우기에 알맞게 만들어 놓은 어변정(禦邊亭), 흉년에 백성을 구하여 주기 위한 곡식 저장 창고인 진휼창(賑恤倉), 방군들의 식당인 군사고, 포탄이나 화약을 보관하는 화약고, 무기를 보관하는 병고, 유사시 물품을 보관하였던 유군기고(留軍器庫), 수군 병참물을 보관하였던 수군기고(水軍器庫) 등이 있었다. 동헌(東軒)은 지금까지 남아 있어 읍사무소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객사는 지금의 우체국 자리로 광복 후까지 남아 있었으나, 1972년 2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읍사무소 동편에 군관청(軍官廳)과 서기청(書記廳)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방답진성은 돌로 쌓았고, 규모는 둘레 661m, 높이 3.9m이며, 위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다.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인 여장, 여첩(女堞)이 205개소가 있다. 창고 20칸, 연못 1개소, 동문과 서문, 남문 등 성문 3개소가 있다. 서문터 밖으로는 조그만 만(灣)이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을 보호하거나 즉시 출동시킬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깊게 판 굴강(掘江)이 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3척의 거북선 중 하나인 방답진 거북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도 성곽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① 동문 기단석 일부, ② 군내교회 뒷산 중턱 기단석 일부, ③ 동문 북쪽 기단석 일부, ④ 군내리 277번지 정태현 댁의 서문 북쪽 기단석 일부, ⑤ 군내리 562번지 윤계배 댁 남문 왼쪽 성곽 일부, ⑥ 군내리 475번지 우명주 댁 남문 왼쪽 성곽 일부, ⑦ 군내리 554번지 김태웅 댁 남문 오른쪽 성곽 일부, ⑧ 박종문 댁에서 길로 쓰고 있는 남문 오른쪽 성곽 일부, ⑨ 군내리 422번지 고종빈 댁 서문 남쪽 성곽 일부, ⑩ 군내리 939번지 박성식 댁에 높이 6m 이상 거의 원형에 가까운 서문 남쪽 성곽 일부, ⑪ 서문 남쪽 도금터로 넘어가는 곳에 성의 기단석, ⑫ 군내리 476번지 나계순 댁에 남문(영남루) 주춧돌이 남아 있다.

 

 

돌산 군내항과 갈치조림

돌산항은 1971년 12월에 안도항과 같이 국가항으로 지정되었다. 돌산항에는 여수앞바다에서 양식장에서 키운 활어를 위판하는 위판장이 있어 전국의 활어 운반 차량이 몰려들고 있다. 옛날에는 남면으로 떠나는 여객선이 기항을 했지만 지금은 송도로 드나드는 도선만 터미널이 있다. 이곳 바닷가 음식점에서 맛있게 감자를 집어넣고 고추가루를 뿌려서 조린 갈치 조림으로 저녁 식사를 한다.  

 

 

여수풀꽃사랑은 5월 7일 돌산 천왕산과 은적암, 방답진성을 답사한다. 미평동 미평초등학교 건너 육교옆 정류장에서 오후 1시 40분경에 출발하는 109번 성두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난다. 비가 올 때는 부득이하게 1주일 연기를 한다. 특히 5월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 주민들이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경상도로 떠난 때이고, 부처님 오신 날이 들어있어서 천왕성을 거쳐 은적암과 방답진성을 답사를 하기로 하였다.  

 

 

천왕산(天王山)을 오르는 길

지리산에 천황봉이 있다면 여수 돌산에는 384.9m 천왕산이 있다. 바로 옆에 봉황산도 있으니까 대단한 의미의 산이 버티고 있는 곳이 돌산도이다. 원래는 천황(天皇)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천황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자(自)'자를 떼고 천왕(天王)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무튼 신성스러운 이름의 산이 있다는 것이 반갑다. 이 천왕산의 귀한 이름을 살려주는 은적암이 동쪽 중턱에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천왕산을 오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봉양고개에서 삼장마을로 가서 삼장재를 넘는 방법과 송시동과 군내리, 예교마을, 은적암 등에서 오른다. 우리는 삼장마을에서 삼장재를 거쳐 오른다.

 

 

여수의 다랭이논 삼장마을

여수에서 출발하는 성두행시내버스를 타고 속전마을 지나 윗동네앞에서 내린다. 봉양고개에서 오르는 길보다 예쁜 황토 흙집을 구경하고 가기 위해서 쌍둥이집펜션을 거친다. 황토 흙과 통나무를 이용해서 흙집을 여러 채 지어서 관광객을 위한 펜션으로 빌려주고 있다.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서 주말이면 방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몸에 좋은 황토집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직접 짓고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여행을 하면서 즐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고개를 넘어서면 여수에서 가장 긴 다랭이논을 볼 수 있다. 몇 가구 살지 않고 있지만 여수의 오지 중의 오지인 삼장마을이 나타난다. 천왕산과 봉황산 사이 삼장골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은 큰길가에서 보이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살기에 좋을 것 같다. 돌산 군내리쪽보다는 봉양쪽에서 임도를 타고 들어서면 된다.

 

 

'어쩜 저렇게 길쭉하고 가느다란 논에다 농사를 지을려고 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다랭이논이 산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다. 사철마다 심어놓은 작물이 커가면서 멋진 색깔을 연출하여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랭이논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삼장마을이 새롭게 변해가고 있다. 퇴직을 하고 깊은 산속에 흙으로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여유를 즐기는 분도 있고, 귀한 나무를 심어서 가꾸고 닭과 염소 등 가축을 키우는 농원도 생겼다.

 

 

 

 

이름값 못하는 천왕산 정상

이곳 삼장마을이 해발 300m정도로 워낙 높은데 있어서 천왕산을 오르는 길은 그리 높지가 않다. 돌산에서 드물게 오르는 길에 옹달샘도 있어서 목을 축일 수도 있다. 천왕산 정상 헬기장에서 다도해를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무가 가려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군내리쪽에서는 가파르지만 은적암쪽으로 내려가면 완만한 편이어서 구불구불 좁은 길을 따라 달리듯이 내려간다.

 

 

풀숲을 헤치면서 내려가면 사방이 잘 보이지 않아서 자꾸 뒤돌아보게 되지만 어릴적 숨바꼭질하는 재미가 있다. 혹시 뱀이라도 지나갈까봐 조바심이 생기지만 뱀이 사람을 피해가는 세상이어서 안심해도 된다. 은적암 바로 뒤는 가파르기 때문에 한참을 돌아서 내려가다가 터벅터벅 돌무더기를 딛고서 내려가면 은적암이 나타난다.

 

 

 

금오도 송광사와 은적암

절 입구에는 '은적사'라고 되어있지만 여수사람은 아직도 '은적암'이 더 귀에 익숙하다. 은적암과 금오도 송광사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보조국사가 1195년(명종 25) 금오도에 송광사를 짓고 돌산에서 쉬어 가는 곳에 세운 것이다. 큰길에서는 위에 절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숨어있는 절이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암자 뒤편에 깎아지른 바위가 병풍을 두르고 있고, 절 앞으로는 몇백년이나 되었을 커다란 소나무와 후박나무, 동백나무 숲이 있어서 절을 꼭꼭 감추고 있다. 대웅전을 들어가는 입구에 천왕산을 타고 내려온 암반수 음수대가 있다. 

 

 

은적암에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명루·칠성각·요사체가 있다. 대웅전은 3칸 건물로 지붕은 팔작집인데 특이하게도 오른쪽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였다. 은적암에는 봉려 스님이 그린 붉은 색 바탕에 노란색 선으로 된 아미타삼존탱화가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그리고 가섭과 아난존자만 등장시킨 단조로운 그림이다.

 

 

천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물이 짧지만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여수에 이렇게 깊숙하게 파인 계곡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주변의 숲이 가려서 하루종일 해를 가려주어서 여름에는 얼음짱 같이 시원하다. 밤이면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만 크게 들려 수도하는 스님들의 적적함을 달래주고 있다.

 

 

산사를 감싸고 있는 숲은 풍수지리상 기운을 감추고 비보를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절 입구에 멋있게 옆으로 뉘어있는 소나무는 그 크기와 모양에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든다. 깊은 숲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아서 절 이름이 ‘숨을 은(隱)’자와 ‘고요할 적(寂)’자에 걸맞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뒤를 돌아보아도 금방 곁에 있었던 절은 보이지 않는다.

 

 

 

돌산 향교와 돌산군

향교는 1 시.군에 1 향교이지만 이곳 돌산읍이 옛날 돌산군이었기 때문에 향교가 있다. 돌산군이 생겨난 것은 여수군보다 1년 앞선 1896년이다. 백제시대에 돌산현이라 불렀고, 통일신라시대에 여산현을 거쳐 고려시대에 다시 돌산현이 되었다. 1896년 돌산군이 생기면서 두남면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돌산군이 없어지고 여수군 두남면이 되었다. 1917년 두남면이 다시 돌산면으로 이름이 환원되었다. 1980년 여천군 돌산읍으로 승격되었고, 1998년 3려통합하면서 여수시 돌산읍이 되었다. 

 

방답진과 고돌산진

'태종실록'에 보면 태종 8년 정월조에 돌산포만호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돌산진(古突山鎭)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여수반도에는 상암동에 '진례만호'와 화양면 용주리에 '돌산포만호'가 왜구 방어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1423년(세종 5)에 '진례만호'는 국동으로 옮겨 '내례만호'가 되었고, 내례만호는 다시 1480년(성종 11)에 '좌도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 '돌산포만호' 역시 전라좌수영 관할이 되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남해안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돌산도 방답진'을 새로 설치하면서 돌산포의 군선을 모두 옮기고, '돌산포만호진'을 없앴다. 나중에 왜구 침범이 잦아지면서 1611년(광해군 3)에는 옛날 '돌산포만호진'을 '고돌산진'으로 고쳤다.

 

 

 

돌산읍 군내리는 옛날 방답진이 있었던 곳이다. 이 곳은 외적이 쳐들어오는 요지이기 때문에 1523년(중종 18) 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방답진을 설치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았다. 성 안에는 관아가 즐비했고, 1895년(고종 30)에 폐진될 때까지 약 370여 년간 존속하였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 보면 방답진에는 전선 2척과 병선 2척, 협선 4척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당상 종3품인 첨사(僉事) 1명과 수군 장교인 군관이 50명, 기와 방패를 든 기패관(旗牌官)이 25명, 민심을 진정시키는 진무(鎭撫)가 45명, 관인을 보관 날인하는 지인(知印)이 25명, 전선의 노를 손보는 군로(軍櫓)가 25명, 깃발로 부대를 나타내고 통신하는 기수(旗手)가 50명, 관청에서 심부름하는 사령(使令)이 25명, 대포 기술관인 화포장(火砲匠)이 22명, 대포를 쏘는 포수(砲手)가 68명, 배 키 운전에 능통한 타공이장병(舵工耳匠屛)이 18명, 노를 젓는 능로군(能櫓軍)이 302명, 국방에 힘쓰는 방군(防軍)이 1,620명으로 총 2,981명이었다. 이를 보아 방답진은 그 규모가 매우 큰 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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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이순신이 방답진 첨사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도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같은 이름의 이순신(李純信)이 방답진 첨사였다. 자는 입부, 시호는 무의. 본관이 전주 이씨, 장창을 자유자재로 쓰고 바위보다도 과묵한 사내다. 임진왜란 당시 방답 첨사로 이순신 휘하에서 중위장·전부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옥포·당포·한산·부산 등에서 왜적을 대파했다. 공신교서에 보면 1등 선무공신 충무공 李舜臣, 3등공신에 무의공 李純信으로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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