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쁜꽃향 2002-01-18
추운 날씨에 아들녀석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하려고
영어, 수학 그룹 과외를 우리집에서 한다.
그 시간대가 저녁이다 보니
우리 부부의 퇴근 시간과 꼭 맞물린다.
때로는 수업에 방해될까 봐
둘이 안방에서 숨을 죽이고
TV를 보거나
밥상을 방안에 가져다 저녁을 먹는 경우도 있다.
마누라만 있으면
장난질을 즐기는 남편 땜에
큰 소리로 웃지도 못하고
킥킥거리는 때도 있다.
하여간 아파트라는 곳이 아무리 넓다 해도
한 천장 아래에 위치하다 보니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머무른다는 게
결코 편한 건 아니다.
어제는 새로 맞는 선생님과의 첫 수업이라니
언니가 꼭 집에 있어야 한다는
극성 후배의 간곡한 청에
평소보다 빨리 귀가 했다.
아침에 늘어 놓고 출근 해 버린 주방은
그야말로 난장판이고
밥솥에는 밥도 없는데
수업에 방해될까 봐-압력 밥솥이라서-
별 수없이 늦은 저녁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가 고픈데 수업중일 거 같으니
날더러 밖에서 먹자는 전화였다.
옳다꾸나싶어 잽싸게 나갔다.
한창 진행 중인 다이어트는 안중에도 없이.
오늘따라 남편은 갈비가 먹고 싶다 한다.
평소 같았으면 일식이나 횟집을 찾았을 것을,
어차피 난 다이어트 중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냥 먹는 시늉만 하리라
내심 굳게 다짐하며
남편 취향대로 가 주기로 했다.
갈비집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방학 중이라서인지 거의 가족 단위의 모습이다.
숯불에 열심히 갈비를 뒤집던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네? 당신이 누군데 감히 내 마누라를 바꾸라는 거요?"
아니, 저게 뭔 말이여???
누가 하필 남편 전화로 날 찾지?
게다가 내용으로 보아 필시 남자인 거 같은데...?
아무리 곰곰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대체 당신이 누구냐구요~?"
어째 점점 분위기가 심상찮은 거 같아 괜시리 불안해지려 한다.
"아~니, 나한테 말하라니깐요,
왜 내 마누라를 바꾸라 마라 하느냐구요."
에고. 이게 또 뭔 사단이란 말여.
평소에 마누라 일이라면 유난히 신경을 쓰는 남편을 아는지라
도대체 무슨 일인가 드디어 불안이 엄습해 온다.
"전화 받아 봐.
끝내 바꿔 달라네."
눈으로 대체 누구?하고 바라 보았다.
조심스레 모기만한 소리로 "여보세요"
아들녀석이다.
뭐여 이 녀석은, 괜히 쫄았잖아.
가슴을 쪽 펴고 당당한 목소리로 "응, 왜?"
"엄마, 가스에 뭘 올려 놓고 가셨어요?
사골 올려 놓고 갔지?
다 타 버렸어요."
에구머니나~~~
언제 내가 또 가스불을 켜 놓았지?
남편은 유난히 뭘 태우는 걸 싫어 한다.
온 집안에 냄새가 배어
거의 일주일을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집 태울 일 있느냐며
여간 신경을 곤두 세우는 터라
이건 또 큰 사건일 밖에.
내 표정을 보던 남편은
"무슨 이야긴데 무조건 엄마만 바꿔주라 하지?
끊지 말고 전화 이리 줘 봐"
남편은 아들에게서 열심히 사건 전말을 듣고 있다.
"으응~, 요새 네 엄마가 쪼끔 건망증이 심해져서
깜박하신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
뒤이어 나올 말을 예상하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아니, 남편이 밥 먹자니까
너무 좋아서 불 끄는 것도 잊어버린거야?"
"당신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 알아?
전에도 몇 번 물주전자 올려 놓고 부저가 울려도 모른 체
안방에서 꼼작도 않고 TV만 보던데,
혹시 치매 초기 아니야?"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비유를 해도 치매씩이나...?
"내가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살면 깜박깜박 할까?"
주부들 거의 건망증이 있다더라
그래도 난 아직 전호 수화기를 냉장고에나
세탁기에 넣어 본 적은 없다는 둥 자기변명에 급급했지만
그리고 건장증과 치매의 차이를
유머러스하게 열심히 설명해 보지만
내심 참으로 자신이 한심스럽단 생각 뿐이다.
사무실에서도 무슨 물건 하나를 찾으려면 몇바퀴를 도는 게
요즘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이렇게 버려가는 건가.
'컴퓨터'니 '박사'로 통하던 내가 이렇게 한심하게 되어 버리다니...
다이어트고 뭐고 그냥 먹어 버렸다.
마음도 별로 편칠 않고
집안에 또 얼마나 냄새가 배어있을까,
그리고 까맣게 타 버렸을 냄비를 또 버려야만 하나
여러가지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질 않는다.
전에 친점 엄마가 냄비를 태우셨을 적
난 얼마나 화를 냈었던가.
불 옆에 안 계시려면 아예 하시지 좀 말라고 성질을 부리며...
이젠 내가 그렇게까지 되어버리는 건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예상보다 훨씬 더 냄새가 지독하다.
에구.
이 건망증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까맣게 다 타버린 냄비 속만큼 내 속도 새까맣게 타 버린 거 같다.
이궁~ 정말 속 상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