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담긴 5월 하늘빛 / 정선례
이처럼 싱그러운 계절이 있을까? 상큼한 자연이 푸르게 물드는 계절, 그 어디에서나 꽃향기로 물큰하다. 미풍이 목덜미에 휘감겨 오는 5월은 절로 은혜롭다. 살랑이는 은빛 바람을 가르며 풀숲으로 새 한 마리 날아든다. 제 각기 다른 모양의 구름이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멎어 바람이 명주실처럼 한없이 부드럽다.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계절. 꽃말이 기쁜 소식인 아이리스, 작약이 신비로운 자태로 화단 가득 볼록볼록 꽃을 피워낸다. 그중에 주렁주렁 매단 흰 버선코 닮은 아카시아꽃 향기는 단연 으뜸이다. 내 유년기의 어슴푸레한 추억이 묻어 있어서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20리, 흙먼지 폴폴 나는 비포장 산길을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 쉬게 해 주었다. 아카시 나무 그늘에서 싱그럽고 달큼한 꽃을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일부러 숨을 깊게 들이켜지 않아도 향내가 몸 안에 물씬 스며들었지.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늘로 떠난 이가 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서 만났던 어느 환자다, 그녀는 우리 방 맞은편의 위암 환자로 도통 말이 없었다. 물으면 단답형으로만 대답할 뿐. 항상 모자를 썼다. 예전에 그녀와 이웃으로 살았다는 어떤 환자가 말하기를. 아프기 전에는 고등학교에서 급식 일을 했다고 한다. 완치 시기를 놓쳐 유방암 확진 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어서인지 1인실을 사용했다. 간호사 외는 그 방을 들고 나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녀가 힘없는걸음으로 식판을 들고나올 때만 스치듯 볼 수 있었다. 다인실인 우리 호실에서는 환자들인데도 과일과 빵, 음료를 나눠 먹으며 웃음소리가 밖으로 들릴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어쩌다 구운 계란을 들고가 건네며 먹어보라 했지만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 말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도통 먹으려 들지 않았다.
5월의 밝은 햇살에 우리는 다 같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나는 방안에만 있는 그녀도 맑은 공기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고 싶어 밖으로 나가자고 문을 두드렸다. 힘없는 몸짓으로 겨우 일어나 우리와 함께 나갔지만 얼마 못 가서 저 뒤로 쳐져 따라왔다. 돌아오는 길에 병원 건물 위쪽 정자에 다다를 무렵 행운이 꽃말인 크로버가 방석처럼 깔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누가 먼저 찾나 내기라도 하는 듯이 쪼그리고 앉아 관찰했다. 어느새 그녀도 우리 옆에 다가와 유난히 흰 손목을 내보이며 네잎클로버를 찾는다. 그녀의 깊은 눈매가 일순 빛나는 걸 나는 보았다.
햇살이 그녀의 등에 쏟아진다. 겨우 몸을 지탱할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산책하러 나갔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지 어느 날부터 간병인이 딸렸다. 남편은 어쩌다 얼굴 내비치고 자녀들은 통 볼 수 없었다. 눈부시게 날이 좋을 때면 나는 자꾸 그 방에 눈길이 갔다. 싱그러운 바람과 햇볕을 느끼고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져 가는 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휄체어에 앉혀 산책시켜 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 실천하지 못했다. “5월의 맑은 하늘과 신록을 마음에 담아 갈 수 있도록 휄체어에 앉혀 밖으로 데리고 나올걸." 회색빛 벽과 하얀 침대가 아닌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초록빛 산과 저녁나절이면 노을이 물드는 광경을 눈에 넣어 주지 못했다. 나도 환자의 몸이라서 기운이 없기도 했지만, 왠지 조심스러웠기에 머뭇거려졌다.
봄날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몹시 불던 날 그 환자는 다시는 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났다. 그날은 오후부터 바람이 일더니 저녁쯤에는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로 그 기세가 세졌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팔을 다친 연세 지긋한 옆 침대 어른이 말하기를 ”정을 떼려고 무섬증을 주느라고 이렇게 바람이 무섭게 부는 것이라고 했다. 몇 해가 지났지만 쪼그리고 앉아 풀밭을 들여다보며 네잎클로버를 찾던 그녀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녀에게서 간절한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하늘이 눈부시게 맑을 때면 우리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은 그들이 다 누리지 못한 내일이기에. 5월 하늘빛이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