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태동 역사 - 31- 교육을 통한 세계 선교 사업의 문호를 열다
교육을 통한 세계 선교 사업의 문호를 열다
교육이 장차 번저남은 명확한 주지의 사실이다. 엘렌 화잇은 교육이라는 책에서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네 가지 면에서 다루고 있었다. 네 가지란 1. 인간의 본성 2.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의 목적 3. 악에 대하여 아심과 변화된 인간 상황의 변화 4. 하나님께서 인류를 교육함으로써 당신의 영광스러운 목표 성취에 대한 계획 등이다. 여기에 대한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닮게 함이고,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하여 신의 형상이 파손되고, 모든 것들의 능력이 감소하고 쇠퇴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되어졌으나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기초하여 구속의 기회가 마련되어 본래의 형상으로 회복케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졌는바 이에 대한 것을 바로 잡고 알리는 것이 교육의 참 목적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런 과업을 위하여 교사가 필요한 것인바 저들의 최우선 일은 학생들을 예수와 그의 원칙으로 유도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씀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온 세상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원대한 사상에 인류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세계 선교에 대하여 기독교가 눈을 뜨게 된 때가 19세기였다. 근대 선교 운동은 윌리암 캐리라고 하는 분이 1792년에 인도에 그의 발을 내딛었음이 시작이다. 그는 1834년 인도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처음에 전도하여 얻은 영혼은 별반 없었다. 그러나 그가 40년이나 넘은 기간 동안 광대한 대륙인 인도를 보고는 한 시도 쉴 수가 없어 자신의 남은 세월 모두를 자식과 함께 보냈다. 그는 그러한 열정에서 선교의 시대를 열은 영웅으로 역사에 남아져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학생 중심으로 된 해외 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번져나 1886년에 드와이드 무디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 누군가가 희생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전도의 문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전도의 문은 1874년까지는 북미에 국한되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미국 외로 번져나야 하였던 것이 스위스에 공식적으로 선교사가 첫 번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좀 더 넓은 지역으로 전도의 반경이 뻗어나게 된 것이 1890년대이다. 재림교단이 외국 선교에 대한 최초의 서적으로는 1886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외국 선교의 역사적 개요란 책이 출판되었다. 따라서 이 해는 드와이드 무디가 학생 외국 선교 운동이 탄생이 되었던 해이다. 따라서 해외선교운동은 재림교회가 주도하였던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된다. 재림교회는 해외 선교의 중요성을 이처럼 책을 통하여 알리면서 이를 실시하기 위한 점검을 하여 가며, 그 중요성에 대한 취지를 계속 정기 간행물인 홈 미셔너리란 잡지에 실렸다.
이렇게 선교의 중요성을 감안하면서 이행하여 나가던 일들이 선교사 양성과 성경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최초로 선교사 양성학교를 설립한 이는 존 하비 켈로그였다. 1889년에 새니터리엄 의료선교사 양성학교였던 것이 1895년에는 아메리칸 메티칼 미서녀리 칼리지가 설립이 되었다. 아본데일 기독교 사역자 학교가 생겨나고, 서더랜드와 퍼시 메이건이 선교사 양성학교를, 그 외에 다른 이름들로 몇 가지의 선교사 양성학교와 의료선교사 양성대학들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북아메리카의 신자 증가에 기여하였던 것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났다.
이제는 우리는 몇 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잠간 살펴보자.
1. 러시아 - 북미 밖을 번져난 지역에서의 선교는 거의가 다 문서 전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1882년 게하르트 퍼크라는 분이 크림 반도의 출신의 이웃으로부터 1879년에 미국에서 가지고 온 위험한 문서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퍼크는 그에게 앤드류스가 쓴 셋째 천사의 기별을 빌려 보았고, 그 후에 더 많은 정보를 보내달라고 미국으로 서한을 보냈으나, 그는 안식일 준수를 망설였다. 그는 영국 및 해외 성서공회의 회원이 되면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서적을 판매하였다. 자신은 서적 판매를 하면서도 여러 번 위험을 감수하였으나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고,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진리대로 살아야 함에 대한 확신을 지니면서 재림교회 서적도 함께 취급하였다.
퍼크가 이처럼 재림기별을 남부 러시아에서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독일계 러시아인 사우스 다고타에서 재림기별을 받아들인 자로서는 80세가 넘는 언어장애자이며 돈 한 푼 없는 이로, 그는 자신의 장화를 팔아 여비의 일부를 마련하여 러시아로 귀국하여 전도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당시에 종교 서적에 대한 책을 파는 일은 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자신이 시력이 나쁜 체하면서 마을 시장에 들려 사람들에게 글을 읽어 달라고 하면서 책을 보는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게 하였다. 그가 하는 일을 지역 사제가 알고, 당국에 알려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사제에게 돌려 던져 노인의 신변을 보호하였으나 그는 후에 체포되어 일년 간의 징역을 살았다.
위에서 언급한 사람이 최초의 러시아에서 선교의 장을 연 자들이나 러시아에서 재림의 기별을 전파하는 데에 큰 공헌을 남긴 일로서는 콘라디가 있다. 콘라디는 1886년에 목사가 된 분으로 유럽으로 갔다가 퍼크로부터 러시아를 방문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목사의 신분을 지닌 자는 입국이 허용되지 않아 콘라디는 헤랄드 출판협회의 인쇄업자의 신분으로 입국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목사로 재림교회의 기별을 증거하였다. 그는 퍼크와 함께 50여명의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을 발견하였으며, 침례교와 루터교회에도 전도하였으나 저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하였다. 두 분은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는 것도 알면서도 교회를 조직하고, 침례를 베푸는 일들을 하여나갈 때에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붕 위에서 진기한 광경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당국에서 그가 하는 일들이 일련의 질서를 헤치는 일로 기소하여 감금시켰으나, 미국 대사관의 협조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후에 콘라디는 독일에 정착하여 35년간 복음 사역에 종사하였다. 러시아에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경위로는 그 후에 많은 재림신자들이 본국인 러시아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 중에 일부는 전도하다가 시베리아로 추방된 이들도 있었다.
2. 태평양 군도 - 태평양 군도의 한 작은 섬인 피트캐언 섬은 한 때는 무인도였던 섬이었으나, 1790년에 바운티 호에서 폭동을 일으킨 폭도 10명이 원주민과 함께 숨어서 살던 곳이다. 이런 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존 테이란 분은 배를 만드는 목수였으나 그곳을 가기 위하여 여섯 번이나 배를 갈아타고 1886년에 피트케언 섬에 도착하였다. 재임스 화잇과 존 러프버로우는 이 섬에 대한 소식을 접하여 섬 주민들이 읽도록 책자를 한 상자를 보내었다. 이 책자로 주민들은 토요일이 안식일임을 알았으나 저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주저하였다. 그러다가 테이가 섬에 도착하여 머무르면서 첫 일요일을 맞던 중에 안식일에 대하여 증거할 때에 믿는 자들과 안 믿는 자들 두 부류가 생겨났다. 테이가 성경 공부를 가르쳐 5주 후에는 섬의 모든 주민이 제칠일안식일 교리를 받아들여 재림교회 본부에 고무적인 선교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1887년 대총회는 2만 달러의 돈을 투자하여 선박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성사가 잘 되지 않아 테이를 그곳에 보내기로 하였으나, 선박 편이 용이하지 않아 시행하지 못하고, 다시 처드니를 피트케언에 파송하였다가 그도 배를 타고 가던 도중, 태평양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선원 모두가 익사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다. 처드니가 재난을 당하자 존 테이가 다시 그곳을 가기 위하여 시도하였으나 잘 시행이 되지 않자, 미국 내 안식일학교 학생들로 선박을 건조할 필요가 생겨나 배를 만들어 선원 3명과 선교사 부부를 태우고 출범하여 1890년에는 피트케언을 중심으로 인근 섬 주민 82명에게 침례를 주고 교회를 세웠다. 몇 주 후에는 인근 타이티와 라로통가, 사모아, 피지와 노포크 섬 지역으로 항해하여 가는 곳마다 서적을 배포하여 주민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2년 후에는 항해를 마치고 샌 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선교 임무를 완수하였다. 존 테이는 선교활동을 한지 5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선장 마치도 뉴질랜드에서 선박을 정비하던 중 사망하였다. 1890년부터 1900년까지 피트케언 호는 이곳 태평양 군도를 여섯 번 항해하면서 교회를 설립하는 개가를 이루었다. 아마도 이곳 태평양 군도에 선교의 붐을 일으켰던 역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이 효시였다.
3. 남아공화국 - 윌리암 헌트는 18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채광하다가 러프보러우를 통하여 안식일 진리를 받아들였다. 수년 후에 남아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광하던 헌트는 두 명의 네델란드인을 만나 그들로부터 성경 공부를 하다가 제칠일인 토요일이 안식일임을 깨달았다. 헌트가 네달란드인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과정으로는 헌트가 토요일 오후 산책을 하다가 두 명 중 한 사람인 드루텐을 만난다. 헌트는 그날 일하는 대신 성경을 읽고 있었다. 헌트는 드루텐과 또 혼자서 안식일을 지키던 피터 베슬즈라는 사람을 미국의 교단본부에 연락을 주선하게 하여 네달란드어를 할 줄 아는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베틀크릭에 요청할 때에 노동자 1년의 임금보다도 더 큰 50 파운드로 선교사 여행경비를 사용토록 하여 1888년 대총회에 그 서한의 내용을 읽게 하여 즉석에서 마음에 감동을 받게 하여 하나님을 찬양케 하였다가 이듬해에 로빈슨이 이끄는 7명으로 구성된 선교단이 케이프 타운으로 떠나게 하였다. 남아공화국에서 두 명의 안식일을 지키던 이들은 40여명에게 전도하여 자신들만의 교회를 운영하다가 조하네즈 베슬즈의 농장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하루 아침에 백만 장자가 된 베슬즈는 조국에 재림교회 개척에 크게 투자하여 출판사와 대학, 요양원, 기타 다른 기관들을 거느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4. 로디지아 - 로디지아는 아프리카 대륙인 짐바브웨로 아프리카 대륙의 선교의 시발점이 된 지역이다. 1894년 대총회는 베슬즈 가족의 촉구를 받아들여 남아공화국으로부터 동쪽에 위치한 마타벨레랜드에 선교 활동 거점을 확보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때에 남아공화국 캐이프 식민지의 수상인 세실 로즈와의 베슬즈가 만남을 가진 후에 그로부터 인근 도시의 12,000 에이커의 땅을 무상으로 하사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후엘에 이 땅을 하사 받는 문제로 인하여 교단 내에서 문제가 발생되었다. 당시 존즈와 기타 종교 자유의 파숫군지의 편집자들이 선교사들이 정부의 특혜를 받는 일을 놓고 종교인의 양심을 팔아 먹는 비겁하고 더러운 일로 간주하여 이런 일은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땅을 받지 않는 일이 옳다고 배척하는 현상에 대하여 엘렌 화잇이 서한을 보내어 반박하고, 대표자들에게 느혜미야서를 읽도록 권유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일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솔루 시에 본부의 선교사업을 위하는 일에 합당하게 사용하도록 종래의 결정을 번복하였다.
사실 이러한 일이 그때에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후 정세의 불안으로 선교사들이 철수하는 사태가 생겨나고, 기근과 우역이 발생하여 선교본부의 운영이 심각하게 타격을 받는 경지로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는 말라리아의 창궐로 인하여 말라리아의 예방약인 키니네를 복용하지 않아 1894년에 파송된 선교사 7명 중에 4명이 죽었다. 저들은 소위 건강개혁이란 명분하에 해로운 약을 먹지 말라는 화잇 선지의 권고를 잘못 인용하여 아까운 생명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 3인 중에 두 사람은 그대로 죽을 수 없어 키니네를 먹고 살아남아 계속 선교의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시행착오를 범하며,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오늘날 아프리카 선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5. 중앙 아메리카 - 중앙 아메리카는 카리비아 해 근방의 열대지역이다. 1883년에 뉴욕에 거주하는 한 재림교인이 어떤 배의 선장에게 부탁하여 가이아나의 수도 조지타운에 한 묶음의 책자를 보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그 책을 주워 모아 읽으며,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게 권하여 읽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위에 몇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게 되었고, 그 중에 한 여인이 사인즈 오브 타임즈 몇 권을 자신의 여동생에게 보내었다가 몇 해 전에 안식일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한 어떤 여인에게 전달되었다.
또 한 번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림기별을 받은 고테라우 부인이 1885년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온두라스 해안에서 떨어진 베이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그녀는 고향에서 6년간 자신의 믿음을 나누었을 때에, 재림교단에서 프랭크 허친스를 보내어 안식일학교를 갖도록 하여 교회를 개척하게 하고, 후에 선교선을 건조하여 중앙 아메리카 연안 지역에 재림기별을 전하도록 하였다. 또한 로스크럭 부인이 영국에서 재림기별을 받아들이고, 1888년에 자신의 고국인 안티구아로 돌아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얼마 있다가 기별이 담겨진 책자가 쟈마이카로 흘러갔다. 이태리계 제단사가 문서전도인이 되어 1891년에 멕시코에 재림기별이 소개되었다. 그곳에는 스페인어로 된 책자가 없었으나 영문판으로 된 책자를 팔아서 복음의 전파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6. 남미 - 남미는 광활한 지역이다. 남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을 받아 언어가 영어권이 아닌 라틴계의 언어였다. 이러한 곳에 복음을 들고 간 이는 재림교회로 개종한 아르헨티나와 칠레와 브라질 등지로 이민 온 독일이나 프랑스어권의 사람들이었다.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1885년 보도우를 통해 재림기별을 받아들여 칠레로 이민 온 클라우디오와 안토니에타 드 테시그네였다. 이 무렴에 아르헨티나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두 가정이 유럽으로부터 정기간행물을 통해 재림기별을 받았다. 북부 아르헨티나에 살던 이탈리아 출신 페베리니 부부도 프랑스 시조인 레시그네드 땅에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주장을 조소하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가 그후에 이탈리아에 사는 자신의 오빠로부터 재림교회의 잡지를 구하여 보게 된 후에 재림교회의 신자가 되엇다. 남부 아르헨티나에서는 스위스 및 프랑스 침례교인들이 사는 촌에 거주하던 훌리오와 아디 두페르튀스 부부도 자신이 먼저 기별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다가 1889년에 베틀크릭에 있는 선교본부에 연락을 하여 교단 지도자들로부터 남미 선교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1890년대 후반에 헌금을 모아 남미 선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렇게 광대한 남미 지역으로 선교가 뻗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최초의 단계는 1885년 호주에 최초로 안식일학교 선교헌금이 생겨나면서 시작이 되었고, 1889년과 1890년 피트케언의 선교 사업이 이행되기까지는 별반 호응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전세계 재림교회 선교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인하여 남미에서 계속 전파가 되었다. 재림교회 본부가 남미 지역에 선교사를 최초에 공식적으로 보낸 때는 1891년이다. 1890년에는 조지 리펠이란 사람이 켄자즈 출신의 독일 및 러시아계의 농가 네 가족을 이끌고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자신들의 출신 지역에 속한 이들에게 편지하면서 안식일을 알렸다. 교단이 선교사를 파송하였던 때도 저들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 언어를 몰라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을 전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요청을 받아 1894년 대총회는 웨스트팔을 파견하여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의 선교사업을 관장하게 하였다. 웨스트팔은 20년 이상 이들 나라와 칠레에서 선교사업을 이수하였다.
7. 인도 - 인도에서도 문서전도로 인하여 복음이 들어갔다. 윌리엄 랭커와 스트롭이 1893년 마드라스에 도착하여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을 상대로 서적을 판매하였다. 인도에 가는 길에서 이미 이곳 지역에서 재림신도가 있는 것을 알고 저들은 가슴이 매우 벅찼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어떻게 복음이 증거되었는지는 잘 모르나 1894년에 다섯 명의 문서전도인이 인도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 세 명은 호주 출신이었다. 영어로 된 책을 팔다가 타밀어와 기타 지방 방언으로 번역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최초의 공식적인 선교사로는 조지아 버러스와 후에 조지아 버제스로, 그는 1895년 1월에 캘리포니아로부터 최초에 파송된 젊은 성경교사였다. 버러스 양은 여행경비 보조만 받겠다고 하여 파송되었다. 그녀는 뱅골어를 배우면서 부업을 하며 살아갔다. 그후 아프리카 출신인 사람이 그녀를 돕겠다고 하였고, 그녀는 인도에서 40년을 지내며 재림기별을 증거하였다. 1898년에는 1922년에 대총회장을 역임하였던 윌리엄 스파이서 씨가 있으며, 그는 오리엔탈 워치맨이란 잡지를 출판하였다.
8. 극동 - 극동 지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는 곳이다. 아브람 라루란 개성이 뚜렷한 성도 한 분이 홍콩으로 문서전도사업을 시행하였다. 그가 홍콩으로 오게 된 과정은 그가 처음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에서 큰 돈을 벌었었다. 그러던 그가 재림기별을 받아들였던 1880년 쯤에는 재산을 모두 잃고, 양을 치며, 벌목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분이나 그는 믿기로 결심하고, 대총회에 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결심을 표하였으나 나이가 많아 그의 요청이 거절되고, 대신 태평양 군도의 한 섬으로 갈 것을 제안하였다. 라루는 힐즈버그 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1883년에서 1884년까지 호놀루루로 가서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여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개척한 호놀루루 선교는 다른 이에게 넘기고, 그는 1888년에 홍콩으로 건너가 선원들을 상대로 맹렬하게 문서전도 사업을 이행하였다. 그는 무려 14년 동안을 선박을 이용하는 선원들을 상대로 전도하면서 상해, 일본, 보르네오 자바, 실론, 세라왁, 싱카폴, 레바논, 팔레스틴까지 선교여행을 다녀왔다. 배가 가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갔다.
우리는 아브람 라루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다음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아브람 라우의 영향을 받아 재림교회의 신자가 된 분이 바로 힐즈버그 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던 그레인저 교수였다. 그레인저 교수가 자신의 제자인 오고히라와 함께 자원하여 일본으로 선교사로 자원하여 와서 일본 땅에서 순직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교회사의 산 증인인 쿠니야 히데 목사를 배출하게 되었으며, 쿠니야 히데 목사는 한국인인 이응현, 손흥조, 임기반 3인을 만나면서 저들 삼 인을 교인이 되게 하면서 한국 복음 전도에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의 과정에서 복음은 뿌리를 내리면 그것이 번져나 결실을 가져와 민족과 나라들에게 천국 복음이 번져나는 역사를 이룸을 보게 한다. 중국은 1888년에, 일본은 1893년에, 한국은 1904년에 재림교회의 기별이 들어가 오늘날 교회가 되게 하였다. 이 세상에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뿌리를 내린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하여 민감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