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월요일
다니엘 13,1-9.15-17.19-30.33-62 요한 8,1-11
다니엘서가 전하는 수산나의 이야기와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이야기는 많이 닮았습니다.
수산나는 주님을 경외하던 사람으로 억울한 누명을 씁니다. 그러나 그 누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수산나의 결백을 주장할 사람은 본인밖에 없는 반면, 원로 두 명 모두 수산나의 간음을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증언은 두 사람 이상일 때 유효하였습니다.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자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가 잡힌 경우
남녀 모두에게 벌을 내리지만, 오늘 복음은 홀로 잡혀 온 여자의 처벌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여자가 수산나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에 대한 단죄는 없어야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다른 이를 심판하고 단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이들을 벌하시고 책임을 물으시지만 누명을 쓴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가 있더라도 회개하고 참회하는 이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죄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단죄보다 용서를, 심판보다 자비를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만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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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월요일
다니엘 13,1-9.15-17.19-30.33-62 요한 8,1-11
온 백성이 모인 가운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나와 예수님께 판결을 요구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는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아래 있었는데
로마제국은 식민지하에 있는 예속 국가들의 사형권을 박탈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스스로 직접 누군가를 사형에 처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율법대로 돌로 치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반대로 풀어주라고 하면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됩니다.
결국 그 질문은 예수님을 딜레마에 빠뜨리려는 그들의 간교한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시선이 간음한 여인에게 쏠려 있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그 시선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돌이키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형제 자매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일로 인해 책임을 논할 때
자기 자신의 잘못보다는 상대방의 탓을 크게 탓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남을 험담하고 남을 비방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얘기를 하게 되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은 심판관이 되고 상대방은 죄인이 되게 됩니다.
오늘 진정한 심판관이신 예수님은 단죄하기 보다는 용서를 처벌보다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는 예수님의 그러한 권고에 따르는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미덕이 있습니다.
“네 탓이요 네 탓이요 네 큰 탓이로소이다”
누군가를 탓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대구대교구 신장호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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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월요일
다니엘 13,1-9.15-17.19-30.33-62 요한 8,1-11
죄를 대하는 요령
예수님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복음 속에서 점점 주님을 잡으려는 엄청난 음모들이 눈에 가깝게 들어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말씀이나 행동이 있으면
언제든 그분을 고발하여 없앨 궁리를 하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혈안이 됩니다.
그 수단이 하느님이든 무엇이든 이유가 닿기만 하면 예수님을 잡을 심산으로 그들은 수도 없는 그물을 칩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죄인을 앞에 두고 시험을 당하십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그것도 현행범이기에 그녀의 죄는 움직일 수 없게 드러났습니다.
장애를 지닌 사람과 같은 이유를 모르는 죄인의 경우 주님은 ‘네 죄는 용서받았다’와 같은 말로
그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시고 고쳐주셨지만 이 여인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녀는 분명 예수님이 보기에도 죄가 있는 여인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정을 벗기 위해서라도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마땅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를 처벌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예수님껜 시험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각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여인이지만
이 여인에게 이 사람은 어떻게 말하는가에 초점을 모읍니다.
그래서 그 대답이 하느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들은 덤으로 예수님까지 처리할 수 있다는 잔인한 기회를 노립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그동안 사람들이 잘못된 죄에 대한 생각을 잡아오셨지만 지금 이 상황은 진짜 죄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그냥 죽여라고 하면 당신이 지금껏 사람들에게 가르쳐오셨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되고,
단순히 죽이지 말라고 말하면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무시무시한 죄에 빠져드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사건을 단 한마디로 정리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그리고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여인만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인 우리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런 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여인은 분명 죄입니다. 사람들이 물러 갔다고 해서 그녀가 무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남은 여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라고 말입니다.
죄는 있지만 그 죄를 벌한 사람이 있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여인을 둔 채 하나 둘 씩 떠났다고 해서
여인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인은 분명 죄인이지만 자신들의 부족함을 생각해볼 때
그 부족함을 단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여인과 사람들의 본모습을 통해 서로 부족함 때문에
서로를 섣불리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못하게 사람들을 마비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하느님조차 그녀의 잘못된 삶에 책임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도 죄인에게 쉽게 단죄하시거나 벌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 여인은 죄를 지닌 채 살게 되었습니다. 분명 죽을 죄를 지었지만 그녀를 죽음에서 건져 낸 것은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이 누구에게나 있음을 인정해서 나온 기적입니다.
스스로의 죄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죄를 바라보고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기에 그녀는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녀는 그 순간을 절대 잊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죄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죄인조차도 하느님은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시고 억지스러움이 아닌
서로의 부족함 때문에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는 사람을 못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떠날 구실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기적을 통해 발견하고 믿어갑시다.
여인에게 남겨진 죄, 그러나 그것이 없애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의 앞으로의 평생이 이 잘못에 대한 보속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것은 별말씀도 없이 당신 죽음의 위기와 죽은이를 배려하심을
모두 배울 수 있어서 기뻤던 것 같습니다.
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