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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영적 물구나무서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등장 이후 전 세계 교구나 수도회마다 변화와 쇄신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도 로마 본부로부터 꾸준히 행동지침이 내려오는데,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변화, 쇄신, 회개, 원천으로의 복귀, 다시 시작하기 등등입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변화된다는 것, 쇄신된다는 것 참으로 어렵습니다.
백번 다짐하고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며 노력해도 늘 제자리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방한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때의 그 감격적인 순간, 우리 가톨릭교회의 쇄신, 그로 인한 급격한 교세의 성장은 식은 죽 먹기 같았습니다.
성직자, 수도자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회개와 새 생활을 통해 예비신자들이 밀물처럼 교회로 몰려올 것으로 다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잘 바뀌지 않는 이유, 회개와 쇄신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변화는 가만히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뼈를 깎는 노력 없이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죽기 살기로 덤벼들지 않으면 쇄신은 요원합니다.
특히 변화되지 못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제대로 비워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제대로 물구나무서기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한번 해보십시오.
땅이 하늘로 바뀝니다.
그리고 하늘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정말 중요한 것, 대단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다 지나가는 것, 하찮은 것이었다는 깨달음,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소소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이
제대로 된 영혼의 물구나무서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영적 물구나무서기를 통해 우리 호주머니에 잔뜩 들어있는 잡다한 것들을 비워내야겠습니다.
진작 떨쳐버렸어야 했던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나쁜 생각,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비워낸 그 자리엔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워야겠습니다.
좋은 생각들, 순수한 마음, 정직함, 나눔, 자선, 비움, 선의, 신중, 절제, 격려, 호의, 성실, 우정, 지혜...
돈보스코 성인이 창안해낸 사랑의 교육학인 예방 교육이 동일한 노선을 취합니다.
예방 교육이란 한 마디로 순수하고 여린 청소년들의 마음 안에 나쁜 것들이 들어오기 전에 좋은 것으로 미리 가득 채워버리는 교육 방식입니다.
나쁜 것들이 아예 발걸음조차 못하도록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의 마음 안에 미리 가득 채워버려야 할 좋은 것들이란 마찬가지입니다.
기쁨, 환대, 감사, 축복, 아름다운 추억, 행복했던 운동장, 아버지 같은 선생님, 친절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신앙을 우리 청소년들 내면에 가득 채워줘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건강하려면 숨을 잘 쉬어야>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어제까지 들은 창세기 1장은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사람도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 명령대로 생겨난 것이 생명입니다.
하느님 명령(命令)대로 생겨났다고 해서 한자로 생명(生命)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명령에 순명하면 살고 불순명하면 죽습니다.
오늘 들은 창세기 2장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를 하시는데
사람만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손수 흙을 빚어 만드십니다.
그리고 특별하게도 당신의 숨을 사람의 코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러니 말씀 한 마디로 우리를 창조하시는 초월적인 하느님보다
우리 인간을 사랑으로 만드시는 다정다감하고 내재적인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숨을 우리가 들이킬 때 우리는 살게 되는데
하느님의 숨이 우리 목을 들락날락한다 해서 우리말로 목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숨을 쉬어야만 살고 숨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살고자 한다면 숨을 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숨을 쉬면서 매연을 들이키면 죽습니다.
반대로 좋은 공기를 들이키면 암 환자도 낫습니다.
공기(空氣)에는 기(氣)가 있는데
매연과 같은 나쁜 공기는 살기(殺氣)이고
숲속의 좋은 공기는 생기(生氣)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숲속의 좋은 공기가 생기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정도이지
우리의 목숨, 그것도 영혼과 육신 모두의 목숨을 살리는 정도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을 숨 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창세기가 바로 성령을 숨 쉬어야 함을 얘기하고,
요한복음도 우리가 성령의 숨을 쉬어야 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주시고 파견하시면서 숨을 불어넣어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성령을 받아라.”
아오스딩 성인은 기도에 대한 정의를 두 가지로 내리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제일 많이 알고 있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이면서 성령을 호흡하는 거라는 얘긴데,
하느님과의 대화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바꿔 말하면 말씀이신 성자를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라면
성령을 호흡하는 것은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지요.
기도란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성령을 모시는 거라는 얘깁니다.
그렇습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주실 때 아담이 숨을 쉬고,
부활의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주실 때 제자들이 숨 쉬었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오늘 성령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실 때 그 숨, 성령을 들이키는 숨을 쉬도록 합시다.
그것도 아주 깊은 숨을 쉬도록 합시다.
가쁜 숨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쉬고,
씩씩대는 숨은 성난 사람이나 쉬며,
헐떡이는 숨은 힘이 부치는 사람이나 쉬는 것이지요.
좋은 공기는 깊이 그리고 오래 들이켜야 하고,
나쁜 공기는 얕게 들이켰다 빨리 완전히 내뱉어야 하듯
오늘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성령을 들이키는 들숨은 깊이 쉬고
날숨은 악령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도록 빨리 그리고 완전히 내쉬도록 합시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친구를 따라 점집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워낙 집안에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서 답답한 마음이 있었던데
바로 그 순간 친구가 용하다는 무당이 있으니 한 번 만나 보기만 하라고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래서 친구를 따라 무당을 만났는데, 집 안에 안 좋은 일들을 척척 맞추고 그 모든 일들이 조상님 묏자리가 좋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묏자리를 옮기고 굿을 해야 더 이상 안 좋은 일들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었는데도 인간적인 어려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지요.
묏자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조선시대의 임금님들의 권세는 어떠했습니까?
혹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취한다고 가장 나쁜 묏자리를 썼을까요?
아닙니다.
임금의 권위를 가지고 풍수지리를 잘 아는 지관들을 불러서 이 땅에서 가장 좋은 땅을 골라서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오래오래 잘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조선시대 임금의 평균 수명은 34세였습니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평균이 40세인 것을 볼 때, 더 짧은 수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좋은 묏자리를 썼지만, 이씨조선도 결국은 망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 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지금 현재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시련 없이 행복하냐고 물어보십시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들 역시 남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불행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것들의 만족이 아닌, 주님 안에서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마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주님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즉 마음을 더럽게 만드는 나쁜 생각들을 멀리하라고 하시지요.
나쁘고 악한 생각들을 통해서 사람을 죄로 더럽히며, 결국 행복의 길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과거보다도 더 많은 유혹들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그 모든 유혹을 과감하게 벗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간절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을 모실 거룩한 성전인 내 마음을 얼마나 깨끗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더럽히는 유혹들에 계속해서 패배하는 오늘이 아닌, 그 유혹들에 승리할 수 있는 기쁜 오늘을 만드십시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우리가 모르고 먹는 선악과>
미국의 소설가 드라이저의 작품 <아메리카의 비극>은 욕심만 쫓아 사는 인생의 말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라이드 그리피스란 청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엔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약방의 사환으로 취직하였다가 조금 커서는 캔사스 시에서 가장 큰 호텔의 종업원이 됩니다.
호텔 보이로 있는 동안 주급 이외에도 손님들이 던져주는 팁의 수입이 제법 많았으므로
그 수입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 사용을 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여자들과 어울려 남의 차를 훔쳐 타고는 야외로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린아이를 치는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될까봐 그 길로 도망쳐 공장을 경영하는 숙부의 집으로 찾아가 공장 직공으로 숨어서 일하게 됩니다.
공장 주인의 조카라는 체면을 지키며 숙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며 의복도 단정하게 입으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값싼 월급쟁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중 숙부의 집과 가까이 지내는 상류계급의 한 처녀를 사귀게 되었고 그 처녀와 결혼이 될 듯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한 공장 여직공을 애인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돈과 명예와 부귀에 욕심이 생긴 클라이드는 부잣집을 처가로 삼기 위하여 임신한 여직공을 연못에 밀어 넣어 죽게 하고는 부잣집 딸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발각과 동시에 사형대인 전기의자였습니다.
돈은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사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문제는 돈 안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산 복어를 먹을 때 꼭 제거해야만 하는 부위가 있습니다.
복어가 아주 맛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부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 또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조리 먹으려다가는 클라이드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조금 떼어 남겨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늦게 오는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 생명까지도 하느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몫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히 도둑이라 불려도 마땅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말라 3,8)
하느님은 분명 십일조와 예물이 당신의 소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것까지 먹었다가는 하느님의 소유를 약탈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것이 당신 것임을 잊지 않도록 나무 한 그루만 당신 것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아담에 에덴동산을 일구는 데 도움을 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것 하나만 상징적으로 당신의 것으로 기억하며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현재의 가톨릭 신앙에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와도 같은 하느님께 해당된 것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약탈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쩌면 복에 배에 있는 독까지 함께 먹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모르게 돈에 중독되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주시지만 상징적으로나마 모든 것이 당신 소유임을 고백하는 방법을
그 중 십분의 일을 봉헌하는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시간도 마찬가지고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면 우리 생명까지 당장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진정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것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길을 수도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속마음을 보라>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나라의 중책을 맡기 위해서 청문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국무총리 후보자의 청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동산 투기, 병역 기피, 논문 표절, 황제 특강에 이어 특혜 채용, 언론 통제까지 의혹에 의혹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뿌리는 마음 안에 품은 욕망입니다.
감추어진 것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과 하늘을 숨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악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1사무 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아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당신의 영, 얼을 불어넣어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안에 담겨져 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좋은 것을 잘 담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죄의 원인과 책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의 말씀은 음식에 관한 구약시대 규정들을 모두 폐지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구약시대의 사고방식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즉 부정한 음식이란 없다고 선언하시고,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것의 원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음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물질 자체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좋은 것입니다(창세 1,31).
그러나 사람들이 악한 용도로 사용한다면 악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의 원인'은 죄를 짓는 사람 안에 있다는 가르침이고,
일차적인 '죄의 책임'도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남 탓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첫 번째 죄이기도 하고,
뭔가를 먹어서 지은 죄 가운데 대표적인 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해서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죄의 원인과 책임은 누구에게(무엇에게) 있는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선악과가 원래 악한 열매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나무를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인가?
또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인가?
만일에 하느님께서 그런 나무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또는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일이 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하느님께서 왜 인간들이 먹으면 안 되는 나무 열매를 만들어 놓으셨는지,
또 인간들이 따 먹을 것을 아셨으면서도 왜 금지 명령을 내리셨는지,
또 죄를 짓는 것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가 왜 나중에 벌을 내리셨는지...
많은 부분들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만일에 선악과가 죄의 원인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런 나무를 만들지 않으셨거나, 아니면 나중에라도 그 나무를 없애셨을 것입니다.
또는 그런 나무를 만드신 당신 자신의 책임이라고 선언하셨거나,
아니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하셨거나...
그렇게 하셨을 텐데, 그렇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서 가장 먼저 뱀(사탄)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도 된다고)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것은 '죄를 짓게 만든 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것은 아담과 하와 자신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죄는 그들 자신들의 죄이고, 책임도 그들에게 있습니다.
(열매에서 죄가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안에서 죄가 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아담에게 왜 열매를 따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담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죄의 일차 책임은 당신에게 있고, 그 다음에는 당신께서 주신 여자에게 있습니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상투적인 변명입니다.
카인의 살인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죄의 원인은 무엇이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제사가 원인인가?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안 받으신 일이 원인인가?
그러면 그 살인죄의 책임은 하느님에게 있는가?
아니면 아벨에게 책임이 있는가?
카인의 살인죄의 원인은 처음부터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제사를 제대로 바치지 않게 만든 그의 마음속의 어떤 것,
그리고 제사를 바친 뒤에 하느님과 아벨에게 느낀 시기, 질투, 분노 등.
카인은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고 대답합니다(창세 4,9).
아담은 죄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변명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아예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자기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아담보다 더욱 악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다음에 아담처럼 변명할 때도 많고, 카인처럼 아예 모든 것을 잡아뗄 때도 많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덮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제 탓입니다." 라고 진실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
그런데 진짜로 외적인 환경과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도움도 주지 않고 박해만 해서 극한의 상황에 놓인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죄를 짓는 경우.
그런 경우에도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 안에서 죄가 나온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개인만의 죄인가, 모두의 죄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사회와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먼저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환경과 여건 탓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변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행복을 찾아가는 순수와 긍정의 눈길>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행복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행복에의 길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기르는 데 있지 않을까.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걸작 조각품을 남긴 미켈란젤로는
십자가상에서 처형되신 예수님의 시신을 품에 안고 있는 성모님을 표현한 피에타상을 조각하기 전에 석재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보았다.
또 눈이 멀어버린 헬렌 애덤스 켈러(Helen Adams Keller)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절절히 고백하였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우리 곁에, 삶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꾸민 것이 아니며, 거짓으로 있는 것처럼 드러내거나 인위적인 장식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있음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성 프란치스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찬미)을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에서 보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좋은 것으로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코앞에 있는 행복에의 길 곧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
우리는 흔히 행복하지 못할 때 밖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한다.
내가 못사는 것도, 내가 기쁘지 않은 이유도, 내가 못 배운 것도 못난 것도 모두가 다 다른 사람 탓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내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이유는 내 마음이 어두워진 때문이다.
내 눈앞을 가리는 것은 나의 연약함과 결점, 자기 중심적인 마음 때문이다.
체면 때문에 또는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며, 다른 이의 호의를 거부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말씀해주신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들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에서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7,21-22).
이런 악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며(7,23),
하느님께서 주신 깨끗함과 아름다움과 진리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각의 마음자리에 아름다운 낙원을 만드시고
온갖 보기 좋은 꽃들과 과일나무를 자라게 하시고 생명나무를 심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키우지도 못한 채 눈이 멀어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며 행복한 삶, 구원의 길로 나갈 수 있을까?
다음 네 가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첫째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더렵혀진 마음 곧 자신의 약점과 결점, 죄스런 점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러한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더러운 것을 더럽다고 말하는 것,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흐린 시야를 밝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시선을 나의 시선으로 삼아야 한다.
비워진 마음자리에 하느님의 눈길을 모셔야 한다.
셋째로,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사랑을 키워가야 한다.
자기 것만을 챙기고, 자신에게 넋을 빼앗긴 사람은 그 누구도 나 밖의 피조물 그 어느 것에서도 참 아름다움을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내 안에 사랑이 넘칠 때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끝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 있어야 하는 모습을 피조물이나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다면 아름다움은 행복은 사라져버린다.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셨으니, 이미 우리 안에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있다.
우리 모두 내 눈앞을 가리고 흐리게 하는 더러움을 씻어내고
하느님 사랑으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겸손하게 바라보고 더렵혀진 마음을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 사랑을 채우며,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참 아름다움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되도록 하자!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발효(醱酵)인생 - 무념(無念)>
두서없이, 자유롭게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옛 강론 주제, '발효(發效) 인생이냐, 부패(腐敗) 인생이냐' 였습니다.
예전에 이런 내용을 어느 기사에서 읽었을 때 정신 번쩍 나게 하던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발효와 부패, 외관상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잘 살아, 잘 익어 발효 인생일 때는 향기(香氣)이지만, 잘못 살아 썩어 부패 인생일 때는 악취(惡臭)입니다.
미국 뉴튼수도원에 머물 때, 나르다 자매님의 홍어회 무침에 대한 설명이 저에겐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홍어를 고를 때는 잘 냄새를 맡아야 돼요.
썩은 것은 고린내가 나지만 잘 삭힌 것은 톡쏘는 향기가 납니다.
썩은 것을 가지고 삭힌 것으로 말할 때 속아넘어가면 안됩니다."
썩는 냄새, 삭힐 때의 향기가 판이하다는 것입니다.
'냄새'와 '향기'의 차이입니다.
삭히는 것도 일종의 발효입니다.
'마음을 삭힌다'는 마음의 발효 과정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삭히다'라는 말뜻이 얼마나 신비한지요.
정말 영적 삶의 기술을 터득한 이들은 썩게 방치하지 않고 부단히 삭히고 발효시켜 향기로운 인생으로 만듭니다.
어제의 체험도 참 각별했습니다.
옛 동료 교사이자 현직 교장(민경숙 루치아)님의 정년 퇴직을 앞둔 개인전 마지막 날,
수녀원의 양해를 구해 오전 강의가 끝나는 즉시 '갤러리 수'를 찾아 도착하니 오전 11시, 방금 철거가 끝났다 했습니다.
작품이 빠져버린 '텅 빈 공간'이 가벼운 충격이요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요셉수도원으로 50호, '무념(無念)'이라는 작품을 보냈어요.
오늘 낼중 들어갈 거예요.
묵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제가 그린 작품 중 최고라 하고 작품성도 높다고 평가받는 그림입니다.
수도원에 연락해서 받도록 조치해주시면 고맙겠어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니 불편해하지 마세요.
늘 감사하는 루시아 드림."
곧 이어 받은 자매님의 카톡 메시지입니다.
'무념(無念)'이라는 그림 제목처럼 작품이 아닌 철거된 텅 빈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무념을 체험했으니 작품 감상은 제대로 한 셈입니다.
이 또한 강렬한 잊지 못할 체험입니다.
그림을 통해 자매님의 깊고 맑은 심성이 그대로 표현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무념(無念), 무욕(無慾), 무아(無我), 무심(無心), 무상(無常), 모두가 불교의 말마디이지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기를 비운 '텅 빈 충만(充滿)'의 초탈(超脫)의 경지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의 경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에겐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사랑을 배경한 무념, 무욕, 무아, 무심, 무상의 경지입니다.
투명한 '호수 거울' 같아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반영하는 마음입니다.
평생 발효의 여정을, 삭힘의 여정을 살아갈 때 이런 마음입니다.
마음의 신비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아담이 상징하는 바 우리 인간들입니다.
에덴에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과의 나무만 없었더라면, 유혹했던 뱀이 없었더라면 상상할 수도 있지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자유가 있어 인격이요 사람입니다.
자유 없이는 인격도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 주신 위대한 자유의 선물을 제대로 시험할 기회가 없는 참 재미없는 삶일 것입니다.
선악과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얼마나 심오한지요.
우리 마음의 에덴동산에도 유혹하는 뱀이 있고, 또 선악과 나무, 생명 나무가 있습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음식이 아니라 외부의 온갖 비난, 비방이 아니라,
선악과의 나무에서 기인하는, 안의 마음에서 배설되는 악한 것들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아, 바로 우리의 실존적 체험입니다.
바로 갈라디아서(5,19)의 육의 열매와 흡사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부패 인생의 결과 이런 악취나는 것들이 안에서 나와 우리를 더럽힙니다.
아래의 항문에서 배설되는 것은 화장실에서 정화조로 가서 처리되는데
위의 입에서 배설되는 오물 같은 말들은 화장실도 정화조도 없어 나오는 그대로 공해(公害)가 되어 공동체를 오염(汚染), 부패시키니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답은 단 하나 부패 인생을 발효 인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발효되어 순수한 마음일 때 여기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이 사람을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아, 이런 성령의 효소가 마음을 순화시켜 부패 인생을 발효 인생으로 바꿉니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효소의 효능이 어떤지는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모두를 발효시켜 맛있고 향기로운 음식이나 술로 바꾸는 효소입니다.
성령의 효소에 이어 말씀의 효소가 또 제일입니다.
말씀을 통한 믿음의 효소, 사랑의 효소, 희망의 효소가 마음을 순화, 성화하여 사람을 깨끗하게 합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생각, 말, 행동, 즉 성령의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바 예수님이요 십자가와 부활의 나무입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에덴동산 미사 중
생명나무의 열매인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생명나무의 말씀과 성체의 생명의 열매를 맛본 우리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말씀과 성체의 효소를,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食)'으로써
비로소 맛있고 향기로운 발효인생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어, 성공적 발효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요한 17,17 참조)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본성적 욕구’가 있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으로 식욕, 수면욕, 성욕이다.
젖 빠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그 방법을 안다.
자는 법도 배우지 않는다.
욕구가 육신을 돌보고 유지케 한다.
욕구가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혼자 있을 때를 ‘사람’〔人〕이라 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人間)이라고도 하는데,
본성적 욕구는 인간 관계에서 사회적 욕망으로 발전한다.
식욕은 소유욕이, 수면욕은 명예욕이, 성욕은 지배욕이 된다.
욕구에 따라서만 살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니,
‘이성’이라는 것이 작동되어 본성을 제어한다.
그렇게 하여 공동체와 사회 질서의 규범을 마련한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본성이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이성이다.
배가 고프지만 타인도 생각하고, 놀며 자고 싶지만 근면하며, 욕정이 일어나지만 스스로 삼가는 것이 이성의 작용이다.
본디 교육이란 자기 절제 능력, 곧 ‘예의염치’를 가르치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금기의 열매’란,
본성의 자유는 이성의 질서를 넘지 말아야 함을 뜻한다.
유혹자란 악령이다.
욕망을 유인하여 욕구를 관철시키는 현상으로 공동체를 파괴한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새 사람은 세례의 정화로 태어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소유욕, 명예욕, 지배욕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 ‘말씀의 순종’으로 물리치셨다.
본성은 사람에게서 나가는 욕구이고,
이성은 들어오는 성찰의 작용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신앙도 윤리 생활에서는 이성의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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