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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들머리 4 시작
공룡능선에서 설악을 품다 / 9월
설악산 ^^ 강원 속초, 양양, 인제, 고성
설악동소공원 - 비선대 – 금강굴 – 금강문 – 마등령 - 나한봉 - 1,275봉 - 신선대 – 희운각 - 무너미고개 – 천당폭포 – 양폭대 피소 - 천불동계곡 – 귀면암 - 설악동
칠흑 같은 밤에 내딛는 발자국은 조심스럽다. 곤히 잠든 설악을 깨우는 행위는 송구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비선대를 등지고 금강굴 방향으로 암벽을 오른다. 새벽의 향기는 언제나 풋풋하다. 붉은 피부의 금강송에서 묻어나는 향기는 더 그렇다. 크게 한 번 내뱉고 다시 들여 마시면 새벽은 그윽하다.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능선에 오르는데 하얀 운해가 천불동계곡을 뒤덮는다. 이제 산행의 시작일 뿐인데 숨이 거칠어지고 땀이 흥건하다. 벌써 체력을 걱정할 지점은 아니건만 공룡능선을 타야한다는 중압감 때문이리라.
설악공룡은 일단 산행을 시작하면 천불동으로 빠지던, 오세암으로 갈라지던 종주하지 않고는 달리 탈출로가 마땅찮은 코스다. 그래서 많은 산악인들이 대청은 쉽게 오르면서도 공룡능선을 종주하는데 주저하는 이유다. 엄두가 나지 않는 고행의 길이라고 말한다.
한참동안 화강암 너덜지대를 지난다. 키 작은 편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산해당화라 부르는 연분홍 인가목이 길섶에서 반긴다. 금강문을 지나면서 배낭을 풀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봐도 설악은 늠름한 산이요, 내려다 봐도 굵은 산줄기다.
마등령삼거리쯤 왔을 때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른 아침 백담사를 출발해 오세암을 거친 산객들이 군데군데 둘러앉아 행동식을 나눠먹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눈인사를 나눈다.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산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까지 잘 왔으니 날머리까지 안전산행을 하자는 서로의 교감이리라.
나한봉쯤 왔다. 설악의 공룡은 이제 고생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공룡의 꼬리를 밟고 있을 뿐이다. 하늘로 치솟은 봉우리가 도열하고 그 아래로 산안개가 잠잠히 흐른다.
설악산은 속리산, 월악산, 월출산, 북한산 등과 함께 대표적인 암산(巖山)인데 화강암의 피부를 지녀 때깔마저 좋다. 특히나 공룡능선이 그렇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백두대간의 등뼈지점인데 현란한 봉우리로 시선을 한군데 고정시킬 수 없을 지경이다.
구릉지를 깊게 타다 다시 올라서서 대청봉을 바라본다. 용아장성을 휘감던 구름이 범봉 아래로 흐르고 1,275봉에서 신선대로 운해가 일렁인다. 1,275봉에 이르러서는 내설악 외설악 할 것 없이 기기묘묘한 골산의 자태가 공룡의 몸통이고 공룡의 등뼈다.
신선대에서 뒤를 돌아보면 범봉과 용아장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바꾸고 있다. 1,275봉에 시선을 두면 나한봉이 구름에 가려지고, 다시 신선봉이 나타나고, 또 한눈을 팔면 1,275봉은 구름 속에 가려지면서 한 폭의 수묵담채를 그려내고 있었다. 황홀하다.
설악의 공룡능선은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산이다. 몇 번을 벼르다 공룡능선을 타고도 설악의 비경에 감흥하지 못했다는 사람을 많이 본다. 그만큼 설악은 날씨의 변화가 심해 산악사고도 빈번히 일어난다. 산을 오를 때는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요동을 치며 구름을 부르고 비가 쏟아지는 악천후를 만난다. 먹구름이 몰려와 허겁지겁 하산을 서두르는 바람에 엉금엉금 기어 내려왔다고 털어놓는 곳이 설악공룡이다. 요술도 이런 요술이 있을까 싶다. 이런 날은 설악의 비경이고 뭐고 무사히 하산하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그저 집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완벽한 장비를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변화무쌍한 날씨도 감안해야하는 산이 설악산이다. 그래서 설악공룡은 선택받은 자만이 설악의 비경을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룡능선을 오르지 않고는 더 이상 설악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던가. 그만큼 공룡능선의 선경을 함축한 말일 것이다. 화창하게 맑은 오늘이 그날인가 싶다.
1,275봉의 봉우리는 어깨와 목만 내놓고 산안개가 출렁인다. 그러다가는 다시 봉우리 하나가 파묻히고 암벽을 타고 흐르던 안개가 서로 만나 군무를 펼친다. 여섯 개 암봉에서 안개가 모두 걷히는 데는 족히 십 여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천불동계곡을 막 들어서는데 여기저기서 다람쥐가 뛰어 다닌다. 굴참나무를 타고 오르다 박달나무로 건너뛴다. 다시 쪼르르 내려와서는 너럭바위에 앉아 앞발을 치켜 올린다. 다시 주변을 돌던 놈은 사람의 꽁무니를 졸졸 따른다. 앞을 가로 지르다가는 돌아서고 또 막아서기를 반복한다. 어느 산객이 땅콩을 손바닥에 놓고 자세를 한껏 낮춰 앉는다. 때를 기다렸던 다람쥐가 냉큼 받아먹고 쏜살같이 수풀로 사라진다. 때마침 대청봉에서 설악산 현장 점검을 마치고 내려오던 국립공원 직원이 한 마디 한다.
"다람쥐 먹이주지 마세요. 결코 야생동물을 사랑하는 게 아니거든요."
"왜요, 요즘 먹이도 많지 않을텐데 ...“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잘한 일 아니냐는 반문이다.
"야생성이 없어지고 생태계가 교란이 되지요."
산객은 땅콩봉지를 둘둘 말아 배낭에 찔러 넣는다.
천불동계곡을 지나는데 양폭에서부터 따라 나서던 밀잠자리 떼가 돌아설 줄을 모르고 배웅을 한다. 잠자리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른다는 것은 저녁 해가 그리 길지 않다는 신호다. 비선대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때까치 한 마리 날갯짓하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설악소공원의 분홍색 지붕이 보인다. 그제서야 종아리와 발목이 아파온다.
-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
방대한 면적을 품고있는 설악산은 설악동의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를 비롯해 점봉산분소, 장수대분소, 오색분소, 백담분소, 대청분소에서등산객들의 산행을 돕고 있다. 설악 공룡능선은 체력과 끈기가 있어야 종주할 수 있는 험한 코스다. 새벽같이 들머리를 잡아 부지런히 걸어도 열 시간은 족히 걸린다. 일단 산행을 시작하면 날머리까지 마땅한 탈출로가 없는 코스가 설악공룡이다. 지형의 특성상 높낮이가 있겠으나 설악산에서 공룡능선만큼 힘든 코스도 드물다하겠다.
마이산에 가면 탑사가 있다 / 10월
마이산 ^^ 전북 진안
합미산성 – 광대봉 – 고금당 – 전망대 – 성황당
봉두봉 – 탑사 - 북부주차장
강정대 정자각을 끼고 가을의 숲으로 들어섰다. 손톱만 한 토종밤이 길섶 여기저기에 툭툭 떨어져 있다. 다람쥐 두 마리가 등산객 주위를 겁주듯 쏘다니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쪼르르 밤나무를 내려와서는 신갈나무를 타고 오르고 다시 너덜바위를 건너뛰며 격한 행동으로 시위를 한다. 자신만의 영역인데 웬 소란이냐는 듯 기분 잡쳤다는 표정이다.
가을 산은 나뭇잎이 물들기 전에 열매를 먼저 내려놓는다. 과실을 먼저 익게 하고 몸치장은 나중에 한다. 이른 봄에 새움이 돋고 줄기를 튼튼히 해야 이파리는 실하게 큰다. 모두 열매를 완성하기 위한 자연의 순서다.
오른쪽의 졸참나무 아래 구절초가 무리지어 피어있고 넓은 구릉지로 갓 피워낸 억새꽃이 가을바람에 일렁인다. 들머리부터 시작되는 마이산은 얼핏 보면 시멘트와 자갈을 배합해서 제멋대로 콘크리트를 부어놓은 인공 산인 것 같지만 사실은 특이한 석질의 연한 수성암 석산이다. 그래서 설악산의 화강암과 다르게 바위의 색감도 거무튀튀하다.
광대봉에 올랐을 뿐인데 이마로부터 흐르기 시작한 땀이 전신을 적시며 몸을 칭칭 감는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는 햇살 넉넉한 언덕으로 단풍이 물들고 있다. 아늑한 억새밭이 펼쳐진다.
억새밭에 드러누웠다. 작은 문을 걸어 잠그듯 억새 줄기를 얼굴 쪽으로 당겼더니 내 집의 대청마루 같다. 배낭을 베개 삼아 억새밭 한가운데 소리 내지 않고 누우면 선선한 건넌방이고 청잣빛 하늘은 추석명절에 새로 벽지를 바른 천장이다. 스르르 눈을 감으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가 서성인다. 잠든 얼굴위로 또 하나의 소리를 내는 그림자가 또 왔다 갔다 한다. 산객이 밟는 갈잎 소리에 몸을 일으키는데 일행은 벌써 저만치 바위산의 허리를 감싸며 멀어지고 있었다.
올라서면 다시 내려서고 또 올라서며 마이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능선과 구릉지가 번갈아 나타나지만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서 좋다. 애써 한눈 팔지 않아도 노랗게 물든 싸리나무가 능선으로 보이고 개옻나무와 붉나무의 잎은 진한 핏빛이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날아와 쑥부쟁이 꽃대를 움켜잡고 앉았다. 날개를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큰 눈을 굴리는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봤다. 지금도 그네를 타는 중이다.
바위의 형태대로 휘어진 계단을 밟고 비룡대 팔각정에 섰다. 시원한 바람이 옷섶을 파고든다. 올라온 길을 돌아보면 진안읍이고 멀리 마령면 들판도 누런빛의 가을 들판이다. 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면 오른쪽으로 마이산 능선이다. 암마이산과 수마이산이 겹쳐서 보이는데 두 귀를 세우고는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듣고 있었다.
광대봉에서 봤던 마이산이 더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귀산과 성수산에 한눈을 팔다가 마이산을 쳐다보는데 금세 마이산이 사라진다. 한 여인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비스듬히 오른쪽 무릎을 왼쪽 무릎에 걸치고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운 아낙의 모습이다. 자연은 이렇듯 가끔은 사람을 혼동시킬 때가 있다.
말의 귀를 빼어 닮아서 마이산이라 부르지만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이다. 산안개가 번지는 봄날에는 쌍돛배가 떠 있는 것 같아 돛대봉이요, 여름에는 숲 속으로 솟아오른 뿔 같아서 용각봉이며 가을에는 마이봉이고 겨울에는 하얀 화선지에 한 획의 먹물을 찍으니 문필봉이다.
마이산 능선은 지금 가을꽃이 한창이다. 구절초에 쑥부쟁이에 산부추에 마타리까지 온 산이 들꽃이다. 가을꽃은 두드러지게 티를 내지 않고 피는 꽃이기에 좋다. 이산 저산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피는 꽃이 가을의 들꽃이다. 봄꽃이 우아하다면 가을꽃은 청초하다.
동백이 그렇고 벚꽃이며 진달래며 개나리가 떠들썩하게 원색의 꽃을 피워 내지만 봄꽃은 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가을꽃은 기다림으로 꽃을 피운다. 봄꽃이 우쭐대고 으스댈 때 묵묵히 새순이 돋고 온갖 비바람에 흔들리며 가을을 기다린다.
억수장마철에도 잠시 비가 멎는 밤이면 하늘의 총총한 별들과 어둑새벽까지 다가올 가을을 이야기한다. 들판과 산야에서 피는 가을꽃은 찬바람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달포를 꽃피운다.
비룡대 기슭을 내려오는데 쑥부쟁이 꽃이 하늘거리고 봉두봉 언저리에 구절초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슬그머니 코를 대고 입술을 내밀었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가을볕에 익어가는 산수유 그늘을 빠져나오면 암마이봉 끝자락에 무수한 돌탑 사이로 아담한 산사가 보인다. 탑사다. 잠깐의 햇살만 들것 같은 암벽의 작은 마당으로 돌탑이 가득하다. 치성의 탑이고 소원의 탑이다. 작은 돌로 쌓아 올린 탑이 100년을 넘기도록 가금씩 불어대는 골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도 불심이었지 싶다.
마이산 암벽을 휘감고 오르는 능소화 넝쿨은 오늘도 어떤 임을 그리며 꽃을 피울 것이다. 섬진강 발원지인 탑사의 용궁 물을 마시고 왼쪽 돌계단을 지나 탑사 대웅전으로 갔다. 엎드려 108배를 올리는 불자들의 모습이 경건하다. 같이 합장을 한다.
은수사 마당에 있는 600년 묵은 감나무를 끼고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사이로 난 언덕을 따라 연인의 길로 간다. 마이산관광단지 마당에는 대봉감이 가득하다. 가을이 수북이 쌓인다.
-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
웅장한 마이산을 보고나면 가슴까지 시원하다. 작은 절집인데 크게 느껴지는 것은 탑사만이 지니는 매력이다. 가을에는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손을 흔들고 상사화도 볼 수 있다. 온갖 가을꽃이 무리지어 피는 마이산 능선이다.
청풍호의 새바위를 아시나요 / 9월
가은산 ^^ 충북 제천
옥순대교휴게소 – 새바위갈림길 – 새바위 –벼락맞은바위 – 둥지봉 – 가은산 – 곰바위 – 물개바위 – 상천휴게소
옥순대교 주차장에서 전망대 계단을 오른다. 강 건너를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옥순봉과 구담봉이 솟아있고 오른쪽으로는 옥순대교가 남한강 복판을 가로지른다. 제비봉과 정회나루를 오가는 유람선도 옥순대교를 만나 한가롭게 물살을 가른다.
한가위 마지막 연휴에 맛보는 번개산행이다. 야트막한 언덕의 새바위 삼거리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탈진 산등성이를 돌아서는데 가은산은 벌써부터 암벽을 타고 오르라고 밧줄을 걸어놓고 있었다.
남한강 줄기를 내려다보는데 기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작은 산봉우리에 날아갈 듯 앉아있다. 가은산 새바위다. 새의 형태를 온전히 갖췄기에 사람들은 의심 없이 새바위로 부른다.
남한강에서 미역을 감은 물새 한 마리가 가슴에 뭍은 물기를 털어내는 한가한 모습이다. 얼른 물새 한 마리 잡으려고 소나무 언덕을 내려뛰는데 흥분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런데 다 내려와서 보니 새는 날아가고 물개 두 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미 새가 갓 태어난 새끼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있으니 참으로 정겨운 형상의 바위다. 다시 새바위를 보던 언덕으로 갔다. 물새가족이 옥순봉을 향해 호수를 굽어보는 모습이 압권이다.
가은산과 옥순봉을 끼고 있는 남한강은 충주다목적댐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보통의 강이었다. 홍수가 나면 넓은 강이 철철 넘치지만 가뭄이 심하면 물속의 바위와 자갈까지 드러나는 강이었다. 충주다목적댐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매일같이 수석애호가들이 강바닥을 뒤지던 최고의 탐석지였다. 골석은 물론 무늬석에 물형석, 형상석, 색채석 그리고 산수경석의 유명한 수석산지였다. 특히 남한강 일대의 새까만 오석(烏石)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너도 나도 배낭을 메고 남한강으로 몰려들었다. 수석수집이 취미라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교양쯤은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지금도 남한강을 끼고 있는 충청북도 엄정면의 목계라는 동네는 마을 전체가 수석가게의 집성촌이다.
가은산 새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다. 남한강이 수몰되기 이전인 아득한 옛날에 이 강을 지키던 새바위는 어슬어슬한 밤이 되면 어디론가 날아가서는 동틀 무렵이 돼서야 가은산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도 이를 목격한 사람이 없어 의문만 증폭될 뿐이었다. 첫 번째의 전설은 새바위가 청풍호에 있는 옥순이라는 후처를 만나고 아침이 돼서야 가은산으로 온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가은산의 새바위가 밤새도록 청풍호에서 물놀이를 했을 뿐이라는 설이 전해져온다. 가은산 옆에 옥순봉이 있다.
새바위를 내려오는 암릉도 거칠기로 따지면 최상급이다. 벼락바위와 마당바위를 오르는 암벽 구간은 그 흔한 밧줄도 성한 게 없어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어깨에 멘 배낭이 점점 무거워 지는데 발은 바들바들 떨리고 어깨는 더 처진다. 오금이 저려온다. 둥지봉까지 오는데 속옷이 비에 젖은 듯 흥건하다.
'바우라'는 친구가 있다. 물론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이다. 이름을 아무렇게나 지어 불러야만 오래 산다는 가당찮은 속설이 존재하던 시대가 있었다. 유아의 사망률이 높았다. 똥간이, 개똥이, 바우 등등로 대충 부르다가 서너 살이 되면 죽을 팔자는 아닌가 보다 하면서 그제서야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한새이, 무새이, 진새이 라는 이름이 진짜 이름인 줄 알았다. 한성, 무성, 진성을 부르기 쉬운 대로 적당히 부르지만 다 알아듣고 대답을 하더라.
가은산 새바위를 이곳 상촌마을 사람들은 '새바우'라고 편할 대로 부른다. 강릉에는 선자령 굽이길과 대관령 옛길 그리고 바다 호숫길을 아우르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열일곱 개 구간의 23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인데 아예 '바우길'로 이름을 지어 친근감을 더했다.
"바우야, 잘 지내냐?“
지금도 친구는 어릴 적에 부르던 질박한 이름인 '바우'를 더 좋아한다.
가은산은 내리막 하산 길도 즐비한 기암의 연속으로 풍광이 흡족하다. 왼쪽으로는 청풍호수가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금수산 정상이 뒤따른다. 전망대에 서면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하늘거리고 용담도 꽃을 피운다. 잘 생긴 소나무들은 저마다 숫자가 새겨진 목걸이를 하나씩 목에 걸고 있으니 가은산의 재산목록인 셈이다.
새바위가 있는 가은산은 충청북도 제천시와 단양군의 경계에 있는 땅이다. 그런데 이 남한강을 두고 지역주민들이 부르는 지명은 제각각이다. 상류에 있는 단양사람들은 단양호라고 부르고 제천사람들은 청풍호라고 부르는데 충주사람들은 충주호라고 우긴다. 그런데 호수를 담고 있는 면적으로 따진다면 호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땅이 제천 땅이다. 조선시대에 역사지리를 저술한 이중환의 택리지를 펴 봐도 예로부터 청풍명월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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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옥순봉과 구담봉 사이를 순회하는 코스에 이 새바위를 연계한 관광자원개발을 생각해 본다. 벼락맞은바위 근처에 작은 나루터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남한강을 유람하는 관광객들이 나루터에서 내려 30분 거리의 새바위를 보고는 다시 옥순봉과 구담봉을 관광하고 도담삼봉까지 물살을 가르는 것이다. 관광산업이란 동기유발이 중요하다.
구시월이 절정인 불갑사 상사화 / 9월
불갑산 ^^ 전남 영광
불갑사 - 장군봉 - 구수재 - 연실봉 - 해불암 동백 골 - 불갑사 - 주차장
다섯 시간을 운전한 끝에 불갑사 일주문에 도착한 것이 새벽 5시였다. 진주라 천리 길이라더니 전남 영광까지 400여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하늘에 보름달을 보고 걷는 한가윗날의 달빛산행이다. 보름달도 기울어 별들도 하나 둘 창을 닫는다. 관음봉을 지나 투구봉까지 가는 길섶으로 진분홍 상사화가 붉은 꽃대로 일렁이고 있었다. 장군봉을 오를 무렵이 돼서야 굴참나무 사이로 아침햇살이 바닥까지 번지는데 온산이 붉게 익어 초가을 불갑산이 죄다 붉게 탄다.
서어나무 아래도, 바위 틈새에도 온통 진분홍 상사화가 떼를 지어 피었으니 별안간에 눈이 호강을 한다. 연실봉을 돌아 동백골로 이어지는 실개천에는 연한 홍자색 상사화가 골바람에 출렁이고 불갑사 지붕과 맞닿은 언덕아래 건넛산은 구름도, 상사화도 호수에 풍덩 빠져 빨간 물감을 풀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예닐곱 살 되던 유년 시절의 어느 초봄이던가. 뒤란으로 배꽃이 피기도 전에 언 땅을 헤집고 뭉툭한 새순이 올라왔다. 상사화 싹이었다. 특별히 거름을 주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도 부들처럼 두툼한 잎은 무릎만큼이나 쑥쑥 자란다. 그런데 여름이 되기 무섭게 새순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젓가락 같은 꽃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막대를 두드리며 참깨를 터시던 어머니는 측은꽃이라고 일러준다. 측은꽃, 잎이 있을 때 꽃을 볼 수 없고 꽃이 필 때 잎이 없으니 오죽이나 측은했던가. 그러다 불갑산의 상사화를 처음 본 것이 영광에 사는 공옥진 여사를 알게 되면서였다. 방송사 편성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그와 난 배우와 연출자로 만났다.
무대의 조명이 천천히 밝음으로 바뀐다. 꽹가리 소리에 맞춰 장고와 북과 대금과 아쟁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오른쪽에 자리한다. 하얀 한복을 차려입은 공옥진이 등장하며 전통춤사위를 보여준다. 박수가 터진다. 걸쭉한 사설을 풀어놓는 심봉사와 심청의 이별장면에서는 객석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치맛단을 겨드랑이 위로 올리면 금세 난장이가 되고 허리를 바싹 오그려 곱사춤을 춘다.
꽹가리를 치며 무대를 장악하는 공옥진의 살풀이는 가을밤의 큰 울림이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공옥진의 노익장이었다. 관객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낸다. 또 박수가 터진다. 공옥진이 힐끔 악사들을 보더니 겅중겅중 뛰기 시작한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난데없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춤꾼이고 광대의 끼다. 공연이 끝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공옥진 여사가 수석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평소 귀하게 여기던 수석 소장품을 선물로 건넸다. 자그마한 오석에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한 소품이었다. 차에 오르며 수석을 쓰다듬던 공옥진을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준 수석이 바로 지금의 청풍호인 남한강에서 탐석했던 수석이었다.
어느 해 가을이던가, 공옥진 여사와 불갑사를 찾게 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상사화가 피었는데 늦저녁 석양과 어우러져 노을만큼이나 붉게 타는 꽃을 볼 수 있었다. 어릴 적에 보고 두 번째 보는 상사화였다. 공옥진 여사는 마음이 공허할 때마다 불갑사를 방문하는데 일주문을 나설 때는 육신이 홀가분해지더라고 말한다. 그날도 세 사람은 수산스님을 만나 그의 요사채에서 그 유명한 전다(錢茶)차를 마셨다. 동전처럼 동그랗게 눌러진 차를 따뜻한 물에 넣으면 은은한 향이 우러나던 일종의 녹차 맛을 내던 차였던 것 같다.
생전에 공옥진 여사는 상사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말쑥한 꽃대에 새색시가 족두리를 쓴 것 같은 꽃송이가 좋았고, 길게 옆으로 뻗다가 꼬리에서 슬쩍 치켜든 꽃술이 버선의 코끝 같아서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상사화는 기이한 꽃이다. 나리꽃 같지만 마디마다 피는 나리꽃과는 다르게 꽃대의 꼭대기에서 꽃이 피는 게 다르고, 하늘나리꽃 같지만 꽃잎이 더 크고 꽃대도 더 실하며 우아하게 피는 꽃이 상사화다. 꽃이 필 때는 더없이 아름다운 꽃인데 꽃이 질 적에도 뒷모습이 흉하지 않은 꽃이다.
이른 봄, 발등에 툭툭 떨어져 시드는 선암사 동백과는 다르게 상사화는 땅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쭉한 꽃대에서 자글자글 말리며 지는 척 시들어 버린다. 잔치국수에 빨간 실고추 고명을 얻은 모양새다. 백합목 수선화과에 속하는 상사화는 모두 일곱 종이 있는데 불갑산에는 7월 말이 되면 진노랑상사화가 가장 먼저 피고, 8월 초에 상사화, 8월 중순에 붉노랑상사화, 8월 말에 백양꽃, 9월 중순에 석산 등, 다섯 종이 순서대로 피고지면서 온통 상사화 세상을 만든다.
목조삼세불이 모셔진 대웅전을 나오면서 작은 스님을 만났다. 그런데 당시 백양사 방장으로 계시던 수산스님이 얼마 전에 이곳 불갑사에서 입적하셨다는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20여 년 만에 꼭 만나고 싶었던 스님이었다.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천왕문을 나서는데 불갑사의 절집과 경내는 이미 상사화 꽃밭이요, 상춘객으로 가득하다. 군데군데 주차장이 넓은데도 8킬로미터 구간을 지나도록 2차선의 좁은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상사화축제가 글피면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영광 불갑사 상사화는 시월 초까지 불갑산의 능선과 구릉지로 피어내려 불갑사 마당까지 붉게 번진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떠나자. 상사화 꽃이 언제 어디서고 쉽게 보는 꽃이던가. 뜨락 아래 봉선화, 채송화, 과꽃이라던가.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풍경이 한가로운 불갑산의 상사화 꽃길로 가을 마중하는 건 어떨까?
-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
상사화는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진노랑상사화가 있고 8월 초에 피는 상사화, 8월 중순 붉노랑상사화, 8월 말 백양꽃, 9월 중순 석산 등 다섯 종이 순서대로 피고지면서 온통 상사화 세상을 만든다. 어떤 이는 꽃무릇이라고 불러야한다고 말하는데 상사화라는 뉘앙스 때문일지 모르지만 축제의 이름도 ‘불갑산상사화축제’이다.
바다엔 봄이고 성인봉은 겨울인 울릉도 / 3월
성인봉 ^^ 경북 울릉군
도동항 – KBS울릉중계소 – 팔각정전망대 – 성인봉
나리분지
남쪽 바다와 서해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섬이 많은데 동해는 울릉도 178킬로미터 뱃길이 망망대해다. 배를 타고 흑산도나 거문도를 갈 때도 수많은 섬들을 만나고, 네 시간의 백령도 뱃길에서도 섬은 널려있다. 그러나 울릉도는 저동항 포구에 내릴 때까지 전혀 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남해안이나 서해안 보다 파도가 센 편이다. 심한 요동 속에 세 시간의 뱃길이다.
저동항에 내렸다. 바다야채한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25인승 투어버스에 올랐다. 도동항을 거쳐 관음도까지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56,5킬로미터의 해안도로를 달린다. 통구미 몽돌해변에서 거북바위를 만나고 현포항을 지나 송곳봉 아래 성불사 경내로 올라갔다. 마침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송곳봉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퍼지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관음상을 역광으로 에워싸고 번득인다. 부처가 손 씻은 물이라는 용추수 한 모금 마셨다.
심하게 구부러진 고개를 넘어 나리분지에서 삼나물을 안주로 씨껍데기술이라는 향토 술을 마셨다. 먼발치로 삼선암을 보고 발길을 돌린다. 울릉도의 해안도로는 기암절벽 사이로 보이는 동해바다를 껴안고 도는 해풍길이다.
울릉도에는 신호등이 딱 두 군데 있다. 울릉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복잡한 저동항이나 도동항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신호등은 뜻밖에도터널의 양 입구에 있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해안도로는 아홉 개의 터널을 지나게 되는데 남동터널과 남양터널은 모두 일방통행의 구조로 되어있다. 빨간색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게 되면 맞은편에서 차량이 터널에 진입했다는 신호다. 빨강이면 멈추고 파랑일 때는 그대로 터널을 통과한다.
저동항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이다. 방파제 너머 촛대바위는 주황색 조명으로 밤바다가 아름답다. 포구에서는 생선회를 뜨는 손길이 분주하다. 자정이 가까이 돼서야 괭이갈매기가 잠을 청하면 섬마을 사람들마저도 집으로 간다. 뭍에서 온 나그네는 맨 마지막으로 잠을 청한다. 파도소리 마저 잔잔한 밤이다.
사실 울릉도는 역사적으로 울진과 함께 강원도 땅이었다. 포항이 217킬로미터인 반면, 묵호는 161킬로미터, 후포항은 159킬로미터이니 강원도와 한참이나 가까운 섬이다. 1906년까지 강원도 울릉군에 속하던 땅이었던 섬이, 이런 저런 정치적인 사정으로 강원도와 경상남도를 떠돌다 조선시대에 와서 지금의 경상북도 땅으로 굳어졌다.
새벽 5시50분에 일어나 바다가 보이는 후박나무 숲길의 제당으로 갔다. 촛대바위 옆으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봤으면 싶은데 먹구름이 짙게 깔렸다. 뱃머리에 앉아있던 갈매기가 하늘로 솟구쳐 날아가는데 아침식사 시간이라는 연락이 왔다. 후박나무 제당을 돌아 설 때,
느지막이 구름위로 아침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해돋이는 실망이다.
성인봉을 오르는 삼거리 갈림길에 왔을 때는 온 천지가 눈밭이고 겹겹으로 설산이다. 출렁다리에도 눈이 쌓여있고 팔각정 전망대를 오르는 가파른 능선 길도 무릎까지 빠지는 설국이다. 울릉도는 눈이 내렸다 하면 1미터는 보통이고 2미터 이상의 강설량을 보일 때도 있다. 사나흘을 쉬지 않고 퍼붓는 날에는 울릉도는 고요하고 괴괴하다.
무릎을 덮는 눈두덩은 이른 여름이 돼서야 녹는다는 섬이 울릉도다. 며칠 있으면 한식이건만 울릉도는 딴 나라 딴 세상이다. 바다에는 완연한 봄이요, 성인봉 능선은 곤한 겨울잠에 빠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세찬 바람을 동반한 산안개가 몰아친다. 섬에 있는 산의 정상치고는 꽤나 높은 986,7미터다.
하산 길에 가만히 허리를 굽히면 부지깽이나물이 지천으로 깔렸다. 눈 속에서도 새잎을 피워내는 부지깽이나물은 지금이 첫물이다. 쌓였던 눈이 녹는 봄날에 가장 좋은 맛을 낸다. 어제의 점심식탁과 저녁의 한정식에도 거르지 않고 상에 오르던 울릉도의 나물이었다.
어릴 적 울릉도하면 오징어와 호박엿이었다. 바닷가에서 오징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섬에서 웬 호박엿일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금세 의문이 풀린다. 예로부터 울릉도는 더덕이 많이 나는 섬이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더덕을 캐낸 자리에서는 다른 작물은 잘 자라지 않았는데 이 호박만큼은 둥실둥실 익어가더란다. 그래서 더덕심고 호박심고 또 더덕심고 호박심고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울릉도 호박이 지천 이긴 하지만 명성은 예전만 못하다.
최근 울릉도에서는 명이나물과 삼나물 그리고 부지깽이나물이 섬의 특산물로 한자리를 꿰차고 있다. 오징어내장탕도 특급대우를 받는 울릉도의 고급음식이다.
가수 이장희가 LA 한인방송 사장을 그만두고 울릉도에 눌러 앉게 된 것도 바로 부지깽이나물 맛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다시 울릉도를 찾게 되는 날이 오면 사실 여부를 물어볼 작정이다.
울릉도에 가면 나리분지에서 삼나물무침을 맛보라. 쇠고기 씹는 맛에 싸리버섯 요리를 가미한 색다른 미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해가 가슴으로 밀려오는 도동항에서 바다야채한정식을 주문한다. 오징어누른창쌈장에 낙지젓이 나오고 짭짤한 명이나물과 전호나물 그리고 부지깽이나물이 차려진다. 처음에는 비릿하지만 더 씹으면 꼬들꼬들하고, 더 씹어서 삼키면 화한 향이 목젖을 지그시 누를 것이다. 여기는 동해바다 멀리 을릉도다.
- 한걸음 더 들어가는 멘트 -
간밤에 꿈을 잘 꿔야 독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먼 뱃길에 날씨가 거들어 줘야하고 멀쩡하던 날씨가 삽시간에 요동이라도 치면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바위섬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나오는 때가 허다하다. 울릉도 역시 비슷하니 울릉도를 잘 봤다면 그야말로 복 받은 것이다.
가나다
귀신을 만났던 어느 여름날의 사건
강원 원주시 단구로 406 301동 506호(청솔 3차아파트)
010 2440 8259
지금으로부터 10여년이 훨씬 지난 어느 여름날의 사건인데요, 제가 격
었던 이런 일상의 얘기들도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의 소재가 될까 싶어서 글을 보냅니다.
때는 1906년의 이맘때인 여름밤이었습니다.
제가 택시영업을 할 때 겪었던 일이지요.
저녁을 먹기위해 집으로 왔는데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프로야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지요. (중계아나운서 : 아 – 오늘도 류현진 선수의 돌직구는 여전하네요, 투 스라이크 노볼--- 헛스윙 삼진!! 또 삼진을 뽑아내네요. 류현진 선수 오늘 삼진 6개째)
워낙 야구를 좋아하다보니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시선은 늘 TV쪽에 두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중계아나운서 : 류현진 선수의 돌직구에 선수들 뺏이 도저히 못 따라오네요. 제구도 날카롭고 --- 괴물입니다. 괴물!)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 식사가 끝났는데도 상을 물리지 않은 채 벽에 기대어 프로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류현진 선수 9회 마지막 1이닝만 틀어막으면 완봉승이예요. 대단합니다.)
이때 저는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어이고 내가 이거 깜박 잠이 들었구만--- 벌써 밤 열 시가 넘었네. 그냥 내쳐 잘까? 아니야 새벽 두 시까지는 일을 하고 들어와야지” 하면서 다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몇 개의 콜을 잡고 강변로를 달리는데 어느 여자 승객이 저만치에서 손을 흔듭니다. 차를 세웠지요.
“어서 오십시오. 어디까지 모실까요.”
그런데 이 승객은 처음부터 말수가 적어서인지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지요 ---?”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자 승객은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저 기사님, 지금 이 시간쯤이면 마트가 모두 문을 닫은 시간이겠지요.”
“네 네 그렇지요. 이 시간이면 ---,”
“네 그러면 기사님 만종2리 로 가시다가 24시 편의점에서 잠시 물건을 살테니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아 – 그러문요, 기다리고 말고입죠,”
그렇게 24시 편의점까지 왔습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그 승객은 까만 봉지를 하나 들고 다시 택시에 올랐습니다.
봉지에서 나는 소리로 짐작하건데 소주 아니면 음료수 그리고 사과 같은 과일에 과자부스러기도 들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 고객님 만종 2리 어디쯤이신지--- 대충이라도?”
“기사님, 설명이 쉽지 않으니 그냥 가세요.”
승객은 퉁명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 예 예 알겠습니다.”
만종이라는 동네는 원주 도심과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 도심 변두리에 있는 농촌 마을이었지요.
“자 – 여기부터가 만종2리입니다. 고객님”
“네 여기서는 직진하세요. 그리고 저쪽 산 밑을 돌아서면서 좌회전 하시면 길이 있을 거예요.”
택시 영업을 하면서 이 길은 처음 와보는 생소한 길이었습니다.
“택시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인가요?”
“네 제가 가끔씩 다니는 길인데 억지로 한 대씩은 갈 수 있을 거예요.”
길이 있다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고객께서 가자는데... 그런데 말이 길이지, 아건 뭐 농촌에 경운기가 다니던 길처럼 매우 좁은 길에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아이고 이거 들어갔다가 제대로 나올 수 있을지---”
혼자 구시렁거리며 차를 운전하는데 “어 어 이거 차가 미끄러지네---”
진흙의 좁은 산길에 차는 미끄러지면서 겨우 겨우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보슬비까지 내립니다.
“그럼 고객님, 여기는 민가가 없는 거 같던데요. 어느 댁엘 가시는지요.”
“아 –예 남편을 잠시 만날까 해서요.”
“아 예예.”
그렇게해서 작은 능선을 두 개쯤 넘어섰을 때였습니다.
“저쪽 모퉁이에 세워주세요.”
“네에! 아니 여긴 집도 없는 산속인데 어딜 가시게요?”
정막이 흘렀습니다.
“저 사실은 오늘이 제 남편이 저세상으로 간 날입니다. 불현 듯 보고싶기도 해서---”
“예에, 아니 그렇다고 이 오밤중에 혼자 산엘 오셨다구요.”
“네에 저 여기 왕복요금으로 5만원 드리겠습니다. 한 40분이면 되는데 여기서 기다리시든가, 아니면 대로변에 가셨다가 다시 오셔도 되고요. 그건 기사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러면서 만원 짜리 지폐 다섯 장을 주는 겁니다. 할증시간도 아니기에 만이천원(12,000) 정도 요금이 찍혀 있었으니, 왕복을 해봤자 3만원이면 충분할 텐데 5만원을 주겠다니 씀씀이가 괜찮은 고객이라 싶었습니다.
“차는 저기 한 50여 미터를 더 가면 돌릴 곳이 있어요.”
이때까지는 별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차를 돌려서 막 나오려는 그 때였습니다. 여인이 내린 산 능선쪽으로 전조등을 비췄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분명 제 차에서 내린 분이 저 여자 분이 맞는데 제 눈에 들어오는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곳 만종2리의 농촌 마을은 외진 곳인데다 얼마 전에 산판작업으로 나무를 베어내 그야말로 민둥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사가 심한 가파른 산을 오르는 저 여인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 이거 봐라,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귀신이 아니면 100년 묶은 여우란 말인가?”
나무와 풀포기를 잡고 오르는 여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저 여인, 아니 저 귀신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느냐? 아니면 10여분이면 나갈 수 있는 가로등이 있는 대로변에서 시간이 되면 다시 올까, 이런 저런 고민이 엄습했습니다.
결국 저는 잠시 이곳을 탈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탈출도 쉽지 않았습니다. 산 고랑을 깎아 만든 좁은 외길을 나오는데 “너 지금, 어디 가니?” 하면서 그 여인이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어 어 어거 봐라. 귀신이 날 해코지 하려나보네. 그래 이 귀신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마음과 달리 귀신이 차 앞을 막 막아설 것 같아 미칠 것 같았습니다. 쯔삣쯔삣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숨이 가빠옵니다.
이렇게 자기체면을 걸면서 산길을 빠져 나오는데 10여분이면 충분할 거리가 20리 길만 같았습니다. 마음과 달리 귀신이 차 앞을 막 막아설 것 같아 미칠 것 같았습니다. 쯔삣쯔삣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숨이 가빠옵니다.
(어, 그래 만약 귀신이 차 앞을 가로 막으면 어떻게 대처를 하지---)
혼자 귓속말을 해보지만 별다른 대처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어떻게하고 여차저차해서 드디어 가로등이 켜져있는 대로변까지 나왔습니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보슬비는 여전하고 하얀 안개까지 내리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속옷이 다 젖을 정도로 식은 땀을 흘렸고 지금도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고민이 생기는 겁니다. 그 고민이란 게 다름이 아니라 여기서 내가 도망갈 것이냐, 아니면 귀신을 태우러 다시 산길로 갈 것이냐? 저는 도망가는 비굴한 방법이 아닌 귀신과 부디쳐 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사람이던 귀신이던 왕복 차비까지 선불로 받은 터라 그냥 돌아서 갈 수는 없는 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 안의 에어컨을 세게 틀어 놓고는 우선 옷을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택시영업을 하는 절친의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예 형님, 아직 안 들어가셨어요? 으이구 참 형님도 돈 생각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영문을 알 턱이 없는 후배는 늦은 시간까지 왜 운전을 하느냐면서 몸 조심하라는 안부 성격의 좋은 말만 합니다.
“야, 아우야 나 있잖니 ---”
“예 말씀하세요. 형님!”
전화는 걸어놓고 귀신에 홀렸다는 얘기를 할까, 말까 또 망설여집니다.
전화를 끊었습니다. 귀신 여인을 생각하니 또 무서움이 밀려옵니다. 다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 아우냐? 나 형인데 아무래도 나 귀신에 지금 홀렸는가 싶다. 귀신에 말이다.
이 후배는 먼저 킥킥 거리며 웃습니다.
“킥 킥 아니 형님 지금이 어떤 시댄데 귀신이 있어요. 귀신이 있기를---”
“아냐 나 조금 전에 귀신 태웠다니까.”
“그래요? 그러면 그 귀신 이쪽으로 한번 데리고 와 보세요. 나도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게요.”
어떻게 된 후배가 실실 농담을 하나 싶었습니다.
“나 귀신 태운 거 농담 아니야, 어허 농담이 아니래두---”
“아 그러게 저두 농담 아니예요. 형님!”
그래서 오늘 밤에 있었던 사건(?)을 대충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런데도 이 후배 녀석은 영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습니다.
“야 근데 말이야 그 귀신이 왕복 택시비를 5만원이나 선불을 줬어”
“그래요. 귀신이 5만원을 줘요. 그 귀신이 술 취했나. 3만원도 많은데 5만원을 줘요?”
“그렇다니까.”
“그래요. 그러면 형님 그 돈 5만원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기는 내 주머니에 있지. 빠닥빠닥한 신권으로 만 원짜리 다섯 장이던데.”
“그래요. 그러면 그 돈 지금 꺼내보실 수 있으세요.”
“어, 그래, 여 - 여기, 있구먼, 아까 귀신이 준 돈---”
“형님 그거 진짜 돈이예요?”
“어, 그럼 진짜 돈이지 만 원짜리 세종대왕이 그려진 ---”
이 후배는 대뜸 이러는 겁니다.
“것 봐요. 진짜 돈이지. 아니 귀신이 미쳤다고 진짜 돈을 줘요. 진짜 돈을 주게? 형님 오늘 그 여자 승객은 분명 귀신이 아닌 사람이예요.”
“아냐, 나 정말 받았어 귀신한테 돈 5만원.”
“참, 형님도 아 고등교육까지 받은 형님이 왜 그러세요.”
아니 이 와중에 고등교육하고 귀신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저는 선불을 받았으니 그 산길을 다시 가서 모셔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 참 형님도 귀신이이라면서, 아, 귀신을 왜 태우러 가세요. 가시길, 귀신은요. 제 멋대로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해가 솟을 무렵이 되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아우야 귀신한테 선불을 받았으니, 안 갈수는 없지 않냐?”
“아니 귀신한테 무슨 예의를 찾아요. 형님, 그러지 않아도 요즘, 형님 볼 때마다 얼굴이 수척해 지셨어요. 보약이라도 지어서 드시고 그러세요. 택시영업해서 얼마를 번다고 아등바등이세요. 형님께서 몸이 쇠약해지시니 귀신이 만만히 보는 거예요. 헛것을 보셨네 뭐 ”
“그래도 나 귀신 만나러 갈란다.”
“그러시든가---”
이럭저럭 자정을 넘기는 시각에 다시 산길 외딴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어 여긴가, 더 가야되나 ---”
가로등도 없는 산중에 좌우로는 민둥산이고 보이는 건 음산한 풀섶에 간간이 산짐승(산새) 소리도 들립니다. 또 무서움과 긴장이 몰려옵니다.
귀신이 앞을 막으며
“여기 있는데 어딜 자꾸 가니?”
차를 막아설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밋밋한 능선을 내려서는데 그 요상한 여인인지, 귀신인지 하는 요물이 나타났습니다.
“어 이거 봐라 귀신이 날 기다리고 있네.”
정신을 빠짝 차리기로 했습니다.
“그래 오늘 너 귀신 제대로 임자 만났어”
생각은 그랬으나 정신은 이미 피폐해졌습니다. 차를 세웠습니다. 귀신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인사도 안하고 정면만 바라봤습니다. 드디어 택시 문이 열리고 여인인지, 귀신인지 하는 요물이 차에 오릅니다.
이 여인이 제 옆자리에 탔으면 싶은데 아까처럼 또 뒷자리에 타는 겁니다. 그러니 이 여인, 아니 귀신을 볼 수가 있어야지요. 룸밀러로 보고 싶지만 이 귀신이 “뭘 봐!!” 할 것 같아서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저, 저, 저어”
뭔가 제가 말을 붙이려는데 이 요물은 대꾸를 안 합니다.
“저어, 아까, 아까 타셨던 그 장소로 가면 되나요?”
“네, 그러세요.”
뒷좌석의 요물이 저를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 가슴팍을 핸들 가까이로 최대한 밀착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이 요물, 이 귀신이 심기가 불편해서 제 목을 조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깜깜한 산길을 빠져나오는데 너무도 긴장이 되고 무서웠습니다. 한참을 미끄러져 가로등이 있는 대로변에 나왔습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량들이 있었지만 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운전을 했습니다. 솔직히 룸밀러로 뒷좌석의 여인을 볼 수가 없더군요. 도심 한복판에 왔지만 왠지 이 여인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래, 내릴 때 자세히 좀 보자.”
택시가 멈춰섰습니다.
그때 제 좌석 아래로 손 하나가 쓱 다가옵니다. 속으로 “어매야!!” 소리를 지르려다 억지로 참았습니다. 그 손은 기다리느라 수고했다면서 2만원을 팁으로 더 주는 친절함이었습니다. 여자 승객이 차에서 내렸습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물어 봐!”
그러나 생각뿐이었습니다. 왜 하필 비오는 밤에 남편의 묘소를 찾았는지. 왜 하필 내 차량을 타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슥한 밤길을 걷는 여인의 뒷모습이 멀어집니다.
이때다 싶어 운전대를 놓고 그 여인을, 아니 이 요상한 요물의 뒤를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쯤에서 힐끔 뒤돌아서 손짓을 보냅니다. 저를 만만히 본 저 요망한 것이 이젠 저를 희롱까지 합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여인은 오른쪽 골목에도 없었고 왼쪽 골목에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택시 안에 넋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헛것을 봤나, 진짜 사람이란 말인가, 만종의 산비탈을 오르던 모습으로는 영락없는 귀신인데, 귀신이라면 왜 나를 해코지 안하고 보내줬을까?”
차에서 내린 문제의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한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1906년 비 내리던 여름밤에 겪었던 그날에는 차마 그 여인을, 아니 그 귀신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머니를 뒤적여 7만원을 확인 했습니다. 귀신이 준 돈인지, 사람이 준 돈인지 몰라도 돈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주열 동문 한국은행 총재 연임에 대하여
원주문화방송 전 보도부장 한 필 수
( 대성고 14회)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는 2018년 3월 31일였다. 그 첫 임기가 말료되던 작년 이맘때로 기억된다. 재계와 금융계는 물론 정치권의 화두는 차기 한은 총재의 인물론으로 새해 벽두부터 하마평이 무성했다.
그동안 한은에 몸 담았던 걸출한 인사는 물론이고 여권에 줄을 대온 인물들이 거론 되며 차기 한은 총재후보가 너댓 명에
이르렀으나 이주열 동문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35년을 봉직하고 한은의 정문을 나설 때도 집권당은 물론 야당의 입당 제의를 물리치고 모교인 연세대의 강단으로 향했던
사람이 그였고 정부의 요직과 재계의 스카웃 손짓에도 기웃거리지 않았던 이가 이주열 동문이였다.
국정농단으로 인해 조기 대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각 부처에 대한 인적쇄신을 통해 국정운영의 고삐를 다잡기에 나섰다. 임명권자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고심과 고심을 거듭한 끝에
차기 한은 총재로 이주열 동문을 연임시키기로
결정했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2018년 3월 2일의 일이였다.
한은 총재가 첫 임기를 마치고 연임된 사례는 김성환 총재가 1970년부터 1978년까지 연임됐던 일이 있었으니 한국은행
총재의 연임은 44년 만의 일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재직은 그래서 연임이 흔한 일이 아니였던 셈이였다.
정권이 바뀌면 한은 총재의 수장도 새로운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 대세였으니
전임 정부의 인사였던 한은 총재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힌다는 사실에 재계와 금융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예상을 뛰어넘는 문재인 정부의 파격 인사였다.
이는 곧 금융통화정책의 막중한 책무를 맡기는데는 이주열 총재가 적임자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후일담이였다.
이주열 동문은 1977년 한국은행에 입사한 이래 오직 한은에서만 35년을 봉직하고 총재의 막중한 자리까지 합하면 무려 43년을 한은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은의 고위직에 오르면서도 이주열 동문은 정치권 어디에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2014년 3월 19일의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있었다.
TV로 생중계 되는 청문회는 총재후보자로서의 자질도 검증하는 자리인 것은 물론이지만 후보자의 도덕성과 병역, 부동산투기,세금
탈루, 위장전입, 논문표절 등 이른바 5대 비리를 파헤치는 인사청문히 자리가 아니던가?
그날 청문회가 마무리 될 즈음, 어느 야당 국회의원이 던진 한 마디는 아직도 정치권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으니
"이주열 후보자를 아무리 털고 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더라"였다.
그리고 작년 3월에 있었던 청문회 역시 한국은행의 수장으로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런 인물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요, 대성 동문인 것이다.
이주열 동문과 필자는 순수한 대성맨이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까까머리 소년으로 모교인 대성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짝꿍으로 이주열을 만나게 된다.
평원동과 봉산동을 사이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그의 집이여서 틈만 나면 어울리던 고교친구로서의 기억이 아직도 삼삼하다.
모교가 오늘날처럼 명문고교로 우뚝 서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재단과 선생님 그리고 교직원의 60여 년의 노력의 결과라는 것은 자면하겠으나 1967년의 고교입시의 획기적인 정책에 기인한 것이 아니가
싶다. 즉 당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는데 있어 타 학교에 시험을 보겠다는 분위기가 만연했었다. 그런데
당시 모교의 학사운영은 입학시험의 성적을 토대로 상위 성적 7명은 장학생으로,
또 다른 성적의 너덧명은 반장학생으로 선발하는 획기적인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시험제도로 인해 우수한 수재들이 모교로 몰려들었고 이주열 동문도 타 학교로의 진학을 접고 모교를 택한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수업 분위기는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학급당 학생수가 40여 명인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으나 그 시절에는 학급당 학생수가 65명에서 70명에 이르렀으니그야말로 콩나물 교실로서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친구들은 그야말로 열독의 시간을 보냈었고 우수한 인재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분위기였다.
대성인이여!
얼마전 우리 대성동문들은 동문의 힘으로 <대성중고등학교 동문회>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모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건립한 동문의 자산이요, 대성동문들의 쉼터다.
지금의 재학생도 졸업과 동시에 동문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은 물론, 동문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장소로 거듭 날 것이다.
대성동문이시여!
이주열 동문이 한은 총재로 연임되던 날 얼마나 반가웠던가, 그리고 얼마나 자랑스러웠던가!
우리 모두 이주열 총재가 대성출신임에 자긍심을 갖자.
작금의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걱정들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한은 총재의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는 이주열 동문에게
이 나라의 합리적인 통화정책의 헤안을 발휘하길 기원해 주자.
사랑하는 젊은 후배 여러분!
학창시절을 보내고 사회에 진출을 하게 되면 다소간의 낯설음과 두려움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 지역사회에는 각 분야에 걸쳐 선배들이 건재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 감히 조언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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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전직은 못 속여요~~
생생보도 생동감 넘치는 사진들 입니다^^
풍경도 인물도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사진으로 보니까 더 멋있네요~
힘은 들었지만 즐거웠습니다.
팔 다리 다 아파요~~
유격훈련 뒤 비빕밥 괜찮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