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의정 심지원 沈之源에 대하여. * 본문 출처는 민족문화대백과(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 ♣표 해설은 ; 이재익 -생년 : 1593(선조 26)~1662(현종3) 1) 조선 후기 문신. 본관 청송, 호는 만사晩沙. 1620년 광해군 12년에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 그의 족조族祖인 종도가 대북파인 이이첨의 심복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왔으나, 대북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 앞을 내다 본 것으로 보인다. 2) 1623년의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에 등용된 뒤에 청요직을 두로 거치고, 1630년 (인조 8)함경도 안찰어사로 파견되어 호인 胡人(오랑케)에게 매마매인 賣馬賣人 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방어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 청렴 강직한 성품이 엿보인다. 3) 함경도에서 돌아 온 뒤에도 응교 집의 교리 부수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 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됐다. ♣ 충과 효를 겸전한 인물 4)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 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 이조참의가 됐다. 그 뒤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요직을 두루 거쳤고, 효종 초에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헌 병조 이조 참판 , 1652년 (효종3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 청요직은 주로 언론활동, 그의 전문성은 언론이다. 5) 특히 거의 아들 익현이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결혼하여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 아들이 효종의 부마가 돼 왕과 사돈이 됐다. 신임을 얻은 것. 6) 이듬해 1653년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씨 급함을 때때로 경계하였으며, ♣ 언행 신중, 국왕에게도 할 말은 하고 견제 할 줄 아는 성격. 7) 11월에는 정조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 외교활동에 공로 8)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으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 관직의 최고 영예. 9)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 院相으로서 국정으로 맡고 총호사 總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 영의정에서 좌의정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비상시국에 가장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10)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 조경을 적극 신구 伸救하기도 하였다. ♣ 예송논쟁 그의 당파는 서인, 효종의 상에 모후가 상복입는 기간에 대한 남서간의 논쟁, 효종이 장남이 아니었던 관계로 일어난 상복착용기간에 대한 예송논쟁의 한가운데 심지원이 있었다.
서인과 남인 사이 2차례 예송논쟁이 있었다 (1) 첫째 기해복제문제 己亥服制問題 현종 즉위 후 효종이 죽자, 효종의 모후母后 자의대비(조대비 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기년설 朞年說(1년복상), 남인은 3년설(대통이었으므로 종통으로, 2년설)이 대립.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 禮學論議가 당론으로 전환, 일파만파가 됐다. 결과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2) 2차 예송논쟁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 仁宣王后의 상喪에 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1년), 서인은 대공설 大功說(9개월) 주장. 결과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 남인이 정권을 잡았고, 서인정권이 몰락하였다. 이 때, 남인은 서인인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청남 淸南, 탁남 濁南이라는 분파도 생겨났다.
11)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하였다든가, ♣ 반대당파 남인 조경을 구해주기도 했는데, 김홍욱 까지는 능력에 한계가 있었을 것. 12) 강화설진에 반대하였다든가, ♣ 강화도 군사 진지화에 반대 한 것. 병자호란을 겪었는데도~, 청에 자주 간 것을 보면 외교력으로 안보 문제를 해결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13) 혹은 양역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 양역이란 남자들에게 부과하는 年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데, 양반에게 까지 부과하는 군포 조세개혁안이 대두했는데, 양반신분 옹호적 입장이라. 개혁적인 인물은 아닌듯. 14) 저서로는 만사고 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 松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 글씨는 명필이고, 산소는 경기도에 있는데, 경상도 영천 송곡서원에서 제향, 제사를 받든다. * 송곡서원은 충남 서산군 인지면 애정리에도 있고, 경북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에도 있다. 영천의 송곡에는 처음 유방선을 모시다가 곽순, 이보흠, 이현보, 심지원, 윤봉오를 추가 배향해 왔다. 대원군 철폐 후 다시 지어진 후로는 1965년부터 유방선, 이보흠만 배향한다. (그 지방 유림들의 결정) |
첫댓글 고맙 습니다 대단 하십니다 ~ 짝짝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