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표 실학파이자 역사가로 손꼽히는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이다.
그는 당시 광주에 정착해 수많은 사상적 학문과 저서를 남겼다. 광주(廣州)를 실학의 본고장으로 이끌었다.
안정복의 집안인 광주 안씨의 시조는 고려 때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안방걸(安邦傑)이다.
그가 정착한 광주는 태조 왕건에게 받은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논밭)이다.
안정복이 주로 살았던 경기도 광주는 지금의 행정구역과 달리 서울 강남 강동 하남시, 남양주시 등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다.
조선 후기에 광주부는 실학의 종장(宗匠)인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영향을 받은 순암 안정복과 다산 정약용(丁若鏞)등
재야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근기실학이 형성된 지역이기도 했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서 은거하던 안극과 안정복은 10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 안서우가 사망하자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경안면 덕곡리(현 중대동 일명 텃골)로 돌아왔다. 이때가 1736년, 안정복의 나이 25세였다.
광주 덕곡리에 돌아온 안정복은 ‘순암(順庵)’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순암이라고 불리는 집은 규모가 8칸이 되는 ‘엄(菴)’자형의 가옥이었다.
그는 조상 선영이 있는 덕곡리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 불리는 청사를 지어 학문 생활과 함께 제자들을
공부시키는 강학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이택재는 안정복이 지은 서재 건물로, 학문 연마 및 제자들의 강학이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과거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한 것이다.
안정복의 학문활동이 큰 전기를 맞게 된 계기는 성호(星湖) 이익(李瀷)과의 만남이었다.
안정복은 35세라는 늦은 나이(1746년)에 경기도 안산면 성촌리에서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학인(學人)들을 모아놓고
활발한 강론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된다. 그해 10월 직접 방문하여 면론(面論)을 청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익과의 만남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이익의 문인들과 학문적 토론을 진지하게 하였다.
윤동규(尹東奎)·이병휴(李秉休)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權哲身)·이기양(李基讓)·이가환(李家煥)·황덕일(黃德壹)·
황덕길(黃德吉)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이때부터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스승 이익과의 학문 교류는 이익이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안정복의 대표 저술인<동사강목(東史綱目)>은 6년간 스승인 성호와의 편지 문답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어린 시절이 아닌 30대 중반에 어느 정도 학문과 사상 체계를 이룬 뒤였기 때문에 이익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자기 색깔이 뚜렷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은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안정복은 조선후기 실학의 호수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이익의 제자로서 그 영향을 받아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호는 순암(順庵),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원래 그의 가계는 광주 안씨 중에서도 문장이 뛰어나고 벼슬이 높아 손꼽히는 명문가로 일컬어져 왔다.
안정복이 살았던 시대는 노론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면서 남인이었던 그의 집안은 점차 가세(家勢)가 기울었다.
조부가 울산부사로 재직 중 노론의 배척을 받아 파직을 당한 후 부친은 일평생 처사로 일관했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에 조부의 비운을 목격한 후 38세 때까지 과거는 물론 일체의 출사도 하지 않았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茂朱)에 은거하던 안정복 집안은 1735년 조부 사망 후 고향인 경기도 광주 덕곡리로 돌아왔다.
안정복이 광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인생과 학문에 큰 전환점이었다.
서울 가까이에서 새로운 학문과 서적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가까운 안산 첨성촌에 실학의 대종(大宗)인 성호 이익(1681~1763)이 살고 있었던 까닭으로
그의 제자가 되어 성호 실학의 중요한 계승자가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정복은 어릴 적부터 성리학의 경사(經史), 시문, 예학 이외에 음양, 천문, 복서(卜筮), 병서, 패관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였다.
‘책이 생긴 이래 문헌상 고증할 만한 것들은 보지 않는 것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해박하였다.
그의 저작 중 경사(經史)의 부연적인 측면을 위해 지은 ‘잡동산이(雜同散異)’는 오늘날의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행정에 임해 취해야 할 목민관의 자세를 서술한 ‘임관정요’는 후학인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의 저술에 영향을 줬다.
젊은 시절 실학자로서 안정복의 자질이 엿보이는 저술이 바로 <하학지남(下學指南)>이다.
<하학지남>에서 안정복은 이기심성 위주의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련된 실천적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박학(博學)을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박학에 근거한 실용, 무실(務實), 실리(實利), 실심(實心) 등의
개념을 강조한 것이다. 안정복은 <하학지남>을 통해 이미 실학자로서의 기초를 확립했던 것이다.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성호 이익의 제자들 즉 성호학파 문인들은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다.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전자를 성호우파, 후자를 성호좌파라 한다.
안정복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대표작은 <동사강목>이다.
평소 자국의 역사가 제대로 서술된 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절치부심하여 마흔여덟 살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후로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조리 조사하여
참고하였다 한다. <동사강목>의 핵심은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것에 있었다.
단군 기자 삼한을 정통의 줄기로 잡고 한족(漢族)이 침입하여 세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정통에서 제외한 것이다.
"내가 여러 역사책을 읽어본 후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폭넓게 다루면서 중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역사 자료를
가져와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 ……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簒逆)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충절을 기리는 것, 옛 기록을 상고하는 것이다……."-<동사강목>서문 중에서-
<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한계점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로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책이라는 평가에는 재론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이 가졌던 민족주의 역사관도
안정복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동사강목>에 서술되어 있는 삼한정통론은 일찍이 스승인 이익이 주창했다.
안정복은 그 계승자로서 이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정한 <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진다고 서술하였다.
이어 단군ㆍ기자ㆍ위만을 합하여 삼조선(三朝鮮)라고 한 <동국통감>의 역사 체계를 비판하고,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므로
삭제한다고 기술하였다. 안정복의 삼한정통론으로 우리 역사는 1천여 년이 끌어올려졌고, 독자적 역사관이 제시된 것이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강감찬과 서희 등 외래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국방 문제나 백성들을 위한 개혁안 등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내부(來附)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였다.
또한 종래 다른 역사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주변국가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즉 말갈, 거란, 여진 등과 일본, 유구 등의 화친(和親)과 침구(侵寇)의 일을 기록하여 후세의 자료가 되게 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서문에서 안정복을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 전문가로 평하였다.
단재 신채호가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때다.
그의 단촐한 괴나리봇짐 속에는 <동사강목> 한 질의 책이 소중하게 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몇 해 전 안정복의 후손에게서 빌린 <동사강목> 원본이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고 애지중지하던 책이다.
그의 역사지리적, 민족적 관점의 역사서술은 근대 계몽기의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에게
학문적, 사상적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현대사학에도 그 기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안정복은 20여년 뒤 목천현감으로 있을 때 다시 이 초고에 손질을 가하여 최종적인 작업을 끝내게 된다.
조선후기 개인에 의해 쓰여진 기념비적인 역사서가 완성된 것이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역사서이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기존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안정복은 서문에서 "대개 사학의 방법은 정통을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아 충절을 칭찬하는 것과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하는 것"이라 하여 기존 역사서의 오류를 지적한 후, 계통(系統)을 바르게 밝히고
사실 고증에 충실한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
계통을 밝힌다는 것은 정통론(正統論)의 문제를 올바로 해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이는 강목체(綱目體)라는 서술방식을 택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주요한 역사적 사실을 간추려 강(綱)을 내세우고, 이것을 일일이 다시 설명하는 목(目)을 붙이는 강목체 역사서술 방식은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식견이 없이는 그 집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그만큼 안정복이 우리 역사를 보는 관점과 논리에 치밀했으며,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역사전문가였음을 보여준다.
<동사강목>은 단군에서 시작하여 기자, 마한, 통일신라, 고려를 정통으로 취급하고 삼국시대를 무통(無統)의 시대로
한국사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처럼 안정복이 정통론에 충실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도 정통이 있음을 강조하여
중국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에 대응하여 우리 역사에도 독자성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깊이 배어 있었다.
또한 사실고증을 철저히 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방향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하려고 한 흔적들이
<동사강목> 곳곳에 나타나 있다. 그가 역사전문가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동사강목>은 17세기 이후 축적된 국사연구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 역사인식과 서술내용 면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저술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역사인식의 측면에서는 앞서 시도된 강목법을 한층 세련되게 하고 정통의 부각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였다. 이와 함께 서술내용 면에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이래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역사지리 연구 및 사실 고증의 성과들을 집대성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역사전문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동사강목>을 비롯한 안정복의 저술들은 18세기를 풍미했던 ‘실학’의 시대사상을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이들 걸작의 저서들은 조선후기의 최고 역사전문가 안정복의 이름을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