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지혜와 명상
파드마 카포 강설
(박성준 번역)
첫째 일반적 기초수행
네 가지 명상
기초수행은 네 가지 명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과 덧없음과 죽음, 카르마의 법칙, 윤회의 비참함
이다.
1.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은 대개 [1]귀한 인간 몸 받음 의
의미, [2]그 가치의 명상, [3]그 희유(希有)다.
(1) 귀한 인간 몸 받음이란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발견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
저 그것이 참으로 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어 다시 있기 힘
든 횡재를 한 줄 알고 유익하게 써야겠다 결심할 것이다.
귀한 인간 몸받는 일은 이 금덩이와 같다.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은데 무슨 귀한 인간 타령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사실상 그렇
지 않다. 열 여덟 가지 점에서 귀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
된다. 이제 소개할 열 여덟가지 훌륭한 특성이 곧 귀한 인간의
조건이다. 티벳에서는 귀한 인간을 "자유롭게 다르마를 수행하
는 사람"이라 부른다.
# 여덟 가지 자유로움 #
(a) 지옥에 나지 않음 : 지옥 세계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이
끊일 새 없다. 다르마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한다.
사지(四肢)를 거센 불꽃 위에 올려 놓은 자가 한 순간인들 명상
을 할 수 있겠는가?
살생, 극심한 분노 따위가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다.
(b) 굶주린 귀신, 즉 아귀로 태어나지 않음 : 아귀 세계의 생
명들에게는 채워질 줄 모르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다르마를 수행할 넉넉한 마음이 도무지 없다. 보통 사람들은 하
루만 굶어도 아무 일도 잡히지 않는 법이다. 아귀들의 비참함은
그런 경험으로는 상상이 안될 정도다.
분노와 탐욕(貪慾)이 굶주린 귀신세계에 태어나는 원인이다.
(c) 짐승의 몸 받지 않음 : 이 짐승 세계의 고통은 우리가 직
접 볼 수 있다. 무지하고 지극히 어리석은 까닭에 짐승들은 다
르마에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예컨대 온 세상의 모든 종
교적 스승들이 모여서 쉬임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준 다 할지라
도, 한 마리의 개는 그것을 경청하는 대신 먹이를 기대하며 꼬
리를 살랑살랑 흔들 것이다.
그릇된 성생활(性生活)과 다른 사람을 짐승취급 하는 일,
다르마 배우기를 혐오함 등에 의해서 짐승 몸을 받게 된다.
(d) 하늘 나라에 태어나지 않음 : 욕망없는 하늘 나라(色界),
욕망과 형체없는 하늘 나라(無色界)의 신들은 매우 오랜 생활동
안 삼매(三昧)의 축복을 즐긴다. 그리고 욕망이 있는 하늘 나라
(欲界)의 신들은 감각적인 즐거움 속에 파묻혀 한 삶을 지낸다.
복은 많지만 참된 다르마를 수행할 동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하
늘 나라에서 태어 난다. 그 세계의 삶은 남의 돈을 많이 빌려서
살 때에 얻는 즐거움과 같다.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어려움이
고개를 치켜든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동기는 없으되, 늘 착한
일을 하거나 하늘 나라에 태어나겠다는 강한 염원을 가지고 사
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보답이다.
(e) 다르마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그러한 곳에 나지 않음 : 다
르마의 견지에서 본다면, 일하고 먹고 자고 잠시 즐거울 요량으
로 또 다시 일어나 일해야 하는 인간의 삶이란 짐승의 삶과 별
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f) 그릇된 소견(所見)에 빠지지 않음 : 사람이 아무리 다르
마가 풍성하고 훌륭한 스승들의 많은 곳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만일 그 자신이 삿된 견해에 집착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좋
은 다르마는 결국 개 발에 편자다. 그릇된 소견은 참으로 위험
하다. 지난 세상에 뿌리고 가꿔놓은 선(善)의 싹을 파괴하여 깨
달음으로 가는 탄탄한 길을 봉쇄하기 때문이다.
(g) 그릇된 수행에 몰두하지 않음 : 모든 에너지를 그릇된 수
행에 쏟아 넣는 사람들이 있다.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몸과 마
음을 학대하며, 다르마의 봉리마라(Angulimala)이야기가 대표적
이다. 앙굴리마라의 스승은 그를 가르칠 때,'천 명의 사람을 죽
여서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꿰어 목에 걸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앙굴리마라가 자기 스승의 말을 곧이
듣고 실천하여 이제 마지막 한 명의 희생자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도 붓다를 만나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크
게 뉘우치고 힘껏 노력한 결과 마침내 앙굴리마라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h) 백치로 태어나지 않음 : 학습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이 가
르침을 받아 한 줌의 지혜라도 얻기는 매우 어렵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거듭 명상해 보라. 그렇게 하면 죽음이
닥쳐 왔을 때 자신이 삶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옳지 못한 행위들
이 세 가지 천한 세계 (지옥, 굶주린 귀신, 짐승의 세계)에 몸
받을 요인이 되는지 어떤지를 알 수가 있다. 되풀이 해서 명상
을 해 나가는 동안,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심은 점점 사라질 것
이다. 모든 사람들은 "여덟 가지 자유로움"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엄연히 살아 있으면 그릇된 소견없고,백
치가 아닌 한, 옳고 그름을 가려 바른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지난 세상에 선한 씨를 뿌린 결과로 부여받
은 이 삶의 귀한 싹을 기꺼워 해야 한다. 행여 잃어버리지나 않
을까 조심하면서 소중히 가꿔야 한다. 지옥같은 감옥을 탈출한
죄수는 자유를 회복한 기쁨을 무한히 느낄 것이다. 동시에 그
는 다시 체포될까봐 몹시 두려워 한다. 자신을 내내 괴롭히던
벼룩을 가까스로 잡아낸 눈먼 사람은 어물거리다가 바보처럼
그것을 다시 놓칠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 생에 인간몸 받은
이도 이 귀한 선물을 한 순간에 쓸모없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음을 굳세게 먹어 높디높은 명상을 실천하려
는 큰 동기가 세워진다.
# 열가지 축복 #
가) 개별적인 복 다섯 가지
a. 사람으로 태어남.
b. 다르마의 중심지에 태어남.
다르마의 중심지는 다르마가 융성한 곳이다.
c. 결함 없는 몸을 소유함.
건강하고 오관(五管)이 온전한 몸이 결함없는 몸이다.
d. 부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쫓아 다섯 가지 극악한 죄를
짓지 아니함.
다섯 가지 극악한 죄란, 어버이를 시해함, 아라한을 죽임, 붓
다의 몸에 피를 냄, 교단(敎團)의 화합을 깨뜨림 등이다.
e. 붓다의 말씀과(經)과 큰 스승들의 해설(論)과 계율(戒)을
신봉하여 실천하고자 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붓다와 다르마를 선뜻 믿으려고 하지 않는
다. 사실상 믿음은 먼 과거부터 조금씩 쌓아온 종교적인 카르마
를 바탕으로 할 때 쉽게 생겨나는 법이다.
나) 복된 환경의 다섯 가지
f. 붓다가 계시는 세상에 태어남.
우선은 하고 많은 세상 가운데 붓다가 계시는 세상에 태어나
기 어렵고, 설사 그곳에 태어나더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신봉하
여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g. 붓다가 다르마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 태어남.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에 출현하신 붓다가 가르침을 펴지않고
곧바고 완전한 니르바나에 드시는 일도 있다.
h. 붓다의 가르침이 아직 세상에 전해지고 있을때 태어남.
이 또한 얻기 힘든 특별한 복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아직 심오한 다르마를 전하는 스승들이 살아 계시는 곳 이다.
i. 붓다의 가르침 곧,다르마가 행해지고 있는 세상에 태어남.
주위에 다르마를 실천하는 이웃들이 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
적(鼓舞的)이다.
j. 생활수단이 넉넉한 곳에 태어남.
다르마의 수행에만 전심 전력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부함이
필요하다. 성취자 루이빠(Siddha Luipa)는 생선 찌꺼기로, 밀라
레빠(Milarepa)는 풀죽을 쑤어 연명하며 수행했다. 넉넉한 환경
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감각적 기쁨만을 추구하며 그들처럼
수행하지 못하는가?
이 열 여덟 가지 자유를 죄다 갖추기는 아주 힘들다.
"귀한 인간 몸"을 자신이 부여 받았다는 사실에 가치를 두는 일
은, 앞에서 이야기한 사나이가 금덩어리라는 확신을 갖는 것과
다름없다. 놋쇠나 구리도 누런 빛을 내긴 하지만, 금은 스스로
흉내 낼 수 없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고상한 세계와 천한 세계의 중간 지역에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 어림에서 바르게 행동할 기회를 놓친다
면, 끝내는 이 "귀한 인간의 몸"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점을 굳
게 새겨 다르마의 실천에 몰두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2) 귀한 인간 몸의 가치에 대한 명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다면, 거의 모든 세
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고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붓다의 바른 깨달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앞서
열거한 열 여덟 가지 조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 가
저절로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귀한 인간 몸"의 진
정한 가치는 당사자가 그걸 올바르게 사용할 때에만 발휘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귀한 몸으로써 세상을 다 정복한다 하
더라도 "완전한 자유"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윤회의 소용돌이에 영문도 모른 채 휩싸여
도느라고 고개 한번 떳떳이 쳐들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르다. 저마다 결단하여 조잡한 카르마(業)을 떨쳐 버리고, 깨달
음에 대한 열망과 큰 자비심을 발휘하면 각자 노력한 만큼의 자
유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 생(生)에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
는 일도 가능하다. 이 몸이 다르마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귀한
인간의 몸"이란 사실을 한시바삐 알아차려야한다.
3) 귀한 인간 몸 받기의 희유(希有)함에 대한 명상
이책을 읽고 잘 기억하는 일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 읽고
간직한 바를 일상(日商)의 마음 씀씀이에 적용하고 명상으로 실
천하는 일이 긴요하다. 적어도 매일 세 차례씩 반복해서 행하노
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모양이 크게 바뀐다. 여느 사
람이 돈 벌이가 수월한 일에 힘을 쏟고 싶어 하듯이, 다르마의
벗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수행에 던져 넣고 싶어한다.
이 명상이 적절히 행해지지 않으면 작은 결실도 기대할 수 없
다. 급기야는 '애당초 쓸데 없는 짓을 시작한 게 아닐까?'하는
의심만 잔뜩 싸안고 주저앉기 십상이다.
'이번 생에서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 해봐야겠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계산이다. 또다시 "귀
한 인간의 몸" 받을 기회가 올 확률이 극히 작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희망을 경계하기 위하
여 다음의 명상이 제시된다.
이 명상은 아래의 순서에 따라 행해진다.
. 귀한 인간 몸 받을 확률이 적음
. 눈 먼 거북이의 비유
.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원인행위
a. 귀한 인간 몸 받을 확률이 적음
하늘 나라 신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지옥 중생들의
수는 굶주린 귀신(아귀)의 수보다 많고, 곤충, 짐승들의 숫자는
인간의 수를 능가한다. 인간 세계에서도 열 여덟가지 조건을 두
루 갖춘 이는 드물다. 무슨 이유로 귀한 삶을 사는 이들은 많지
않고, 비천한 세계만 자꾸 비대해 지는가? 바르지 못한 행위들
만 셀 수 없을 정도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바르게 행동하기 위
해서는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데, 그것이
시냇물을 언덕배기로 치흐르게 하는 일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보리행경(Bodhicaryavatara)에서 산티데바 보살은 노래했다.
이 귀한 삶 얻기 어렵거늘
가까스로 도(道)의 몸 되어서도
부질없이 세월만 소비하네
불현듯 저 검은 숲 속으로 끌려가면
언제나 다시 사람 속을 거닐꼬.
사정없이 몸과 마음 후리쳐 몰면
윤회의 저 강 건널 수 있네
이 배(온전한 몸) 다시 얻기 어려워라
오, 어리석은 이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닌 것을.
또 밀라레빠가 사냥꾼에게 충고했다.
일찍이 말하지 않던가
귀한 인간 몸받기 어렵다고
그대 삶이 아직껏 그러할진데
이 말들은 진실을 잃었느니라.
비록 겉 모양은 같지 않아도 사냥꾼과 그가 사냥하는 짐승은
동일한 미로(迷路)에서 헤매고 있는 셈이다. 바르지 못한 행위
는 희귀한 까닭에 열 여덟 가지 복된 조건을 부여받은 이가 매
우 드물다. 여기에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훌
륭한 비유가 있다.
a. 눈 먼 거북이의 비유
앞에 소개한 산티테바보살의 시(詩)는 단순한 우화가 아닌 진
지한 명상거리로 받아들여 져야 할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깊이를 잴 수 없는 큰 바다 밑에 백 년마다 한 번씩 물 밖으
로 고개를 내미는 눈 먼 거북이가 살고 있었다. 고개를 내밀고
잠깐 동안 떠있다가, 금새 바다 밑의 안식처로 되내려가곤 하였
다. 마침 눈 먼 거북이가 물 표면에 떠오를 그 무렵, 금빛나는
멍에 하나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쉬지 않고 흘러서 그 바
다까지 떠 내려왔다. 공교롭게도 때 맞추어 물 위로 떠오르던
거북이의 고개가 금빛나는 멍에의 한 가운데를 정확히 뚫었다.
이 비유에서 거북이는 윤회에 허덕이는 어느 생명을 상징한
다. 큰 바다의 표면은 복된 세계이다. 그 거북이는 어리석음에
가리워 지혜의 눈을 잃어 버려서,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구
별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 처럼 눈이 멀어 있다. 인간이 진지
하게 다르마를 실천하고자 할 때, 심지어는 경전을 읽거나 진언
을 외고자 할 때조차 늘 그 자신의 육체와 언어와 생각이 스스
로를 방해하듯이 거북이 또한, 자기 자신의 딱딱한 등껍질에 둘
러 싸여 있다. 또 거북이가 살고 있는 깊은 바다 속은 우리가
사는 낮고 열등한 세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 넓은 바다 속
에 살면서 백 년마다 한 번씩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거북이
가, 어쩌다가 파도에 밀려 떠 내려온 금빛나는 멍에에 목을 걸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적다. 마찬가지로 짧은 인간의 목숨을
받고 태어나 다르마를 실천할 의지를 갖는다는 사실도 매우 드
물고 귀한 일이다. 한량없는 세월 중에 붓다가 계시는 시간은
아주 짧다. 혹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더라도 다르마의 수
레바퀴를 굴리시는 일이 드물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있는 다
르마의 전통(불교의 스승들)을 만날 수 있는 밝은 경전이 있지
만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귀한 인간 몸 받기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 숙고함으
로써 열 여덟가지 복된 조건의 귀중함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c.귀한 인간 몸 받기의 원인행위
밀을 수확하고자 하는 농부는 우선 씨를 뿌린다. 같은 이치
로,귀한 인간 몸 받기를 원하면 특정한 씨앗 - 도덕적이고 깨끗
한 행위를 습관화하는 것 - 을 뿌려야 한다. 수 많은 도덕적 행
위 가운데서 특히 열 가지 그릇된 행위를 버리는 것을 귀한 인
간의 씨앗으로 여긴다. 그 열 가지란 몸으로 짓는 세 가지(살
생, 도둑질, 바르지 못한 성행위) 입으로 짓는 네 가지(거짓말,
중상 모략하는 말, 욕지거리, 경솔한 말) 마음으로 짓는 세 가
지(탐욕, 해코지 하려는 생각,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밀라레빠는 말한다.
깨끗하고 바른 삶 사는 이가
만나보기 힘드니
귀한 인간 몸받아 나는 이
참으로 드무네
세상의 인구가 점점 늘어가고 있기 때문에 다시금 인간 모습
으로 태어날 기회가 훨씬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귀한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는냐 하는 데에
있다. 기본적으로 열 가지 바르지 못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음은
물론 베푸는 일(보시), 참는 일, 여덟 가지 세속의 관심사에 초
연함 등이 장차 귀한 인간의 몸 받을 원인을 이룬다. 항상 반복
해야 할 것은, 나의 속에 온전한 인간 몸 받을 원인이 형성되고
있는 가 하는 자문(自問)이다. 상점에는 팔 물건들이 잔뜩 진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상품을 사고자 한다면 제일
먼저 자신의 돈 지갑을 검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
도덕성(Sila:戒)은 모든 성취, 특히 삼매(samatha:三昧)와 선
정(dnyana:禪定)의 기본 조건이다. 다르마의 맛을 처음 본 때부
터 붓다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도덕성(戒), 사마디(定), 지혜
(般若)의 세 가지 공부를 균형있게 실천해야 한다. 이 세가지
공부의 관계를 상징하여 다르마의 수레바퀴에 비유하였다.
도덕성(戒律)은 바퀴의 중심 부분을 나타낸다. 다르마의 모든
성취가 이 도덕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올바르게
가도록 통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마디(定)는 테두리의 쇠
에 비유하였고, 또 수레바퀴의 여덟개 살은 어리석음을 양단(兩
斷)하는 지혜(智慧)의 칼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수레 바퀴의 양
면에 마주 앉아 위 쪽을 쳐다보고 있는 두 마리의 사슴은 지혜
와 방편(方便,upaya)을 상징한다.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지혜/방편, 이 두 가지가 필수 요건임을 알아야 한다.
2. 덧 없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
이 명상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죽
음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생을 초월한 동반자-다르마이다.
1) 피할 수 없는 죽음
삼계를 윤회하는 한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하늘 꼭대기에
올라간다 할 지라도, 바다 속에 들어가거나 산을 쪼개고 그 가
운데 몸을 숨긴다 할지라도 죽음은 반드시 그를 찾아내다."
육신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는다. 큰 지혜로 깨달음을 열어
막강한 신통력을 갖추었던 인도의 대학자, 나가르쥬나(Nagarju
na)나 위대한 성취자 마하리쉬(Mahasiddhas)와 같은 이들도 몸
을 떠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도 열반을 맞
이하여, 현상계가 덧없다는 이치를 스스로 뭇생명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요컨대 죽음이 손을 뻗치면, 이 세상의 모든 기술과 박학다식
이 한결같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르마임을 자각할 일이다.
구루 파담빠,상가이(Phadampa,Sangay)는 말한다.
"틴그리(Tingri)의 민족들이여! 태어나는 그 순간 이미 그대들
은 죽음의 손아귀에 잡혀있다. 서둘러라! 허비할 겨를이 없다."
도살장에 끌려온 왕이나 다를 바 없다. 에스커레이트의 발판
같은 1분 1분이 우리를 죽음의 층으로 밀어 올린다. 시커먼 카
르마의 입 앞에서 마치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두려움에
전율한다.
밀라레빠는 말한다.
"해질 무렵 서산 골짜기 그림자가 덮쳐 오듯, 덧없음은 도처에
깔린다. 필사적으로 도망하여도, 어둠은 끝내 그대를 찾아내어
덧없음의 덮개를 씌우리라. 이제 어디로 숨을꼬?"
지난 세상에 행한 행위의 결과로 이 삶의 인간 수명을 획득했
다. 단 1분이라도 죽음을 늦추는 일은 그의 능력 밖이다. 인간
의 몸은 지붕이 약한 낡은 집과 같다고 밀라레빠는 말했다. 세
월이 흐를 수록 작고 큰 빗물에 점점 상하며, 쉬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에 이곳저곳이 숭숭 뚫리어 어느 틈인가 비가
샌다. 그러나 비록 약한 집일망정, 바른 깨달음의 터전으로 요
긴히 사용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하필이면 그런 식으로 비유하는가 하며 불쾌히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쾌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덧없음에 대한
제한된 설명으로는 다르마의 바른 의미를 드러내기 힘들다. 싯
다(Siddhas)와 탄뜨라의 신(Tantric)들이 뼈로 만든 장신구와
해골 바가지 등과 함께 묘사되는 이유도 죽음의 보편성을 상기
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점이 분명히 인식되면 당장 다르마를 수
행하겠다는 결심이 설 것이다.
2) 죽음은 언제 들이 닥칠 지 모른다.
죽음의 여러가지 성질들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인
식만으로는 다르마 수행에 완전한 동기를 줄 수 없을런지 모른
다. 죽음이 예고없는 방문자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당장이라
도 수행을 시작해야겠다는 내부적 동기를 가질 수 있다.
죽음의 시기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삶의 설계를 세우는
데 차질이 생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명에는 보증
(保證)이 없다. 노인이 젊은 이보다 일찍 죽는다는 법칙에 조차
예외가 허다하다. 재산,권력,지혜,젊음은 죽음 앞에서 한가
지로 무력하다. 병약한 사람도 튼튼한 사람도 죽음의 법정에 서
면 평등하다. 어제까지 정정하던 사람이 오늘은 황천객이 되기
도 한다. "나" 만은 그렇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의 내부에는 늘 살 요인보다 죽을 요인이 훨씬 많다. 423
가지 잠재적인 병이 종이에 묻은 기름때처럼 몸 속에 골고루 퍼
져 있다. 그것들을 몸 밖으로 영원히 추방할 약은 없다. 우연히
한 가지의 병인(病因)을 제거했다 할지라도 새로운 병의 씨가
금새 그 자리를 메운다. 가련한 목숨은 맹수에게 쫓기고, 귀신
에게 홀리며, 사람들사물들에 의해서 마냥 겨누어진다.
몸은 뎃(地), 물(水),불(火),공기(風)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
어져 있다. 네 요소가 고르게 유지될 동안은 건강하겠지만, 만
일 조금이라도 조화가 깨지면 당장에 병(病)의 조짐이 생긴다.
이 네 요소는 대나무통 안에 사는 네 마리의 독사와 같다. 머리
를 가지런히 세워두면 조용히 지내지만, 한 마리라도 고개를 두
드러지게 치켜 들 경우에는 당장에 서로 해치려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가 극성(極盛)해짐으로써
죽는다. 그러므로 몸이 네 가지 요소와 결별할 때까지 항상 이
러한 점에 유의하여 그것들을 조화롭게 다스려야 한다.
대개 육체의 부서지기쉬운 이러한 성질과 시간의 침식 작용이
짧은 삶을 갉아 먹는다. 그러나 늘 우리는 시간이 삶의 매듭을
풀어 젖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어쩌면 슬픈 심정이 되
기도 하겠지만, 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도리어 시간은 삶
의 스승의 되고 조력자 노릇을 한다.
삶은 바람 앞의 기름 등잔불이다. 우리의 생활을 유지시키고
편리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조차 잦은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
는 실정이다. 농약으로 기른 음식물, 자동차 등과 같은 것처럼.
밀라레빠는 말한다.
"그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어우러질 때
죽음이라는 말을 까맣게 잊고 있겠지만
청천(靑千)의 날벼락처럼 죽음은
그대의 뒷통수를 때릴 수도 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 자신
의 목숨을 위하여 걱정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의 위험은 평상
시에도 늘 개개인에게 붙어다닌다. 건강하던 이가 별안간 죽는
것을 목격하면, 이유 모를 강한 불안에 휩싸인다. 자기 자신도
인간인 한, 돌연한 죽음에 얻어맞을 확률이 있다는 본능적 직관
때문이다.
티벳의 한 스승은 말했다.
"새벽을 무사히 맞이할
기약도 없으면서
밤늦도록 무사히 일생(一生)을
설계하는 이여!
사신의 손아귀가
목을 누를 때
비로소 떨며 후회하려는가?"
세속적인 목적에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사는 우리 모두가 귀
담아 들을 교훈이다.
나가르쥬나(Nagarjuna)는 말했다.
"삶은 나약하고 곧잘 뒤집힌다.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물거
품 마냥 불안정하고 들뜬다. 이번 호흡이 끝나면 반드시 다음
호흡이 이어진다고 여기는 사람들, 이 밤을 자고나면 깨어나 새
로운 아침을 맞으리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그들의 태연자약함이
참으로 경탄스럽다."
"머리칼과 옷이 불붙더라도 그 때문에 근심하지 마라. 그 순
간 죽음의 참 모습을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갖는
다면, 그보다 더 귀중한 계기는 없으리라."
티벳의 위대한 스승들은 극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명상을 계속
하곤 했다. 그러한 자세를 본받아 어떤 경우든 - 꿈 속에서 까
지 - 수행이 계속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숙달시켜야 한다.
자, 주저하지 말고 당장 수행을 시작하기로 결단하자.
3) 생을 초월한 동반자 - 다르마
죽음이 덮쳐왔을 때, 이제까지 쌓아온 수행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면 죽음의 체험 자체를 명상의 과정으로 삼으면 된다.
죽음은 병을 얻어서 자연스럽게 겪는 수도 있고, 돌발적인 사
고 등으로 말미암아 급작스레 당하는 경우도 있다. 두 경우의
경험 과정은 같지 않다. 여기서는 병을 얻어 자연스럽게 겪는
죽음을 설명한다.
의사가 치료의 모든 노력을 포기할 때부터 그 "경험"은 비롯
된다. 건강한 사람은 입맛대로 변덕 부리며 음식을 즐기지만,
죽어가는 사람은 물 한 모금도 제대로 삼킬 수가 없다. 너무 민
첩하여 때때로 화(禍)의 뿌리가 되기도 했던 그의 혀와 입술은
이제 한 마디의 말도 구사하기 힘들다. 뻔질나게 걸치고 다니던
고급 의복과 값비싼 패물도 무용지물이다. 따스함과 돋보임이
더 이상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나 돌에 입히
고 씌우는 것처럼, 세상의 어떤 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돕지 못
한다. 머리칼 한 올마저 다 버린 채, 그는 춥고 쓸쓸한 길을 혼
자서 떠나야 한다.
숙달된 다르마 수행 습관이 유일하게 그를 도울 수 있다. 이
제 그 이유를 명확히 인식한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힘껏 다르마
의 수행에 몰두하겠다는 결심이 설 것이다. 죽음이 어느날 갑자
기 창문을 두드리면, 당장 맞이할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기 때문
이다. 수행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일을 치를 때 공포와 슬픔을
이기는 힘도 커지는 법이다. 평소에 실천해온 명상을 조용히 반
복하거나 일생동안 숭배해 온 붓다의 형상을 기억해내어 상기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거나 귀한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하여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후회와 한탄 속에서 매우 산란한 마음으로 죽어
갈, 다르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죽음이 가까이 오면, 양팔과 양다리처럼 의식을 떠 받쳐오던
네 가지 요소들이 힘을 잃는다. 육체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
며 이윽고 육체에서부터 의식이 분리된다. 이 과정은 죽어가는
이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주위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바깥 징표(徵表)이고 둘째
는 죽어가는 자 자신이 느끼는 내부적 경험이다.
몸의 네 가지 요소 가운데 먼저 지대(地大:굳고 단단함을 성
질로 하고 몸전체를 지탱하는 역활을 하는 바탕)의 힘이 시들어
진다.
첫째, 몸의 전반적 통제력이 멎는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여름 한낮에 아스팔트로 부터 발산
되는 뜨거운 기운과 같은 열기(熱氣)를 느낀다.
그 열기로 말미암아 수대(水大:축축함을 성질로 하고, 생명력
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말라 간다.
첫째, 몸이 바짝 마른 나무처럼 되어 간다. 피부는 빛과 색깔
을 잃고, 입안과 눈의 물기가 사라진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엷은 안개가 천지를 뒤덮은 듯한
모습을 본다.
이제는 화대(火大:따뜻함을 성질로 하고 성숙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사그라 든다.
첫째, 몸이 차디차게 변한다. 머리에서부터 심장을 향하여 몸
이 식어가는 사람은 바람직하지 못한 후생(後生)을 얻는다고 여
겨진다. 반면에 심장부터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훌륭한 세상에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는 모습을
본다.
끝으로 풍대(風大:움직임을 성질로 하며 성장의 원천이 되는
바탕)의 힘이 사라진다.
첫째,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그 횟수가 눈에 띠게 즐어든다.고
통스러운 안간힘이 한참 계속되다가, 한 번의 긴 날숨(呼)을 마
지막으로 그의 삶은 막을 내린다.
둘째, 죽어가는 자 자신은 고요하고 어슴프레한 빛을 경험한
다.
중음(中陰)의 상태로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두려움과 환
상이 모두 걷히게 되고, "자아(self)"에 대한 조잡한 인식도 없
다, 생전에 명상의 수행을 숙달한 사람은 이러한 죽음의 과정을
겪는 동안, 조금도 당황함없이 순간순간을 찬찬히 음미하며 조
용히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릴 것이다. 외부적인 삶의 징표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바로 처리해 버리
지는 않는다. 죽는 자의 내부적 경험은 며칠간 더 계속될지 모
르기 때문에, 당장 그의 시체를 묻어버리거나 장례지내 치우면
참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몸의 좌우에 있는 에너지 채널(nadis)을
단단히 죄어 에너지의 순환질서를 통제한다. 그러나 죽음과 함
께 몸의 통제력과 좌우 에너지 채널은 자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달아난다.
이러한 점 외에 따로 징표는 없다. 이제 그는 달이 떠오르기
직전 하늘을 가로질러 퍼지는 희미한 빛과 비슷한 것을 느낄 것
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아 정수리의 차크라
(cakra:정신 물리학적인 중심)에 지니고 있던 정기(精氣:white
cell)가 심장의 차크라로 보내질 때 발생한다. 그가 다음에 보
는 것은 해질 녘, 하늘에 퍼지는 노을과 같이 붉고 아련한 빛이
다. 이것은 어머니로 부터 받아 배꼽 아래의 차크라에 지니고
있던 혈기(血氣:red cell)가 중앙에너지 채널(central radi)를
타고 심장의 차크라로 보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두가지 기(氣)가 심장 차크라에서 만날 때 두 단계의 경험
이 시작된다. 우선 칠흙같은 어둠이 닥쳐오고 그 자신은 의식을
완전히 잃는다. 깊은 무의식의 바다에 잠겨있는 시간이 오래될
수록 그에게는 유리하다. 바로 다음 단계는 수행에 가장 적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모든 형체와 색깔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본다. 그
러나 그 상태가 수냐다(sunyata:空)인 것은 아니다. 이 무렵의
의식은 미묘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상태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
라져가는 현상에 불과할 것이므로 헛되이 소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탄트라의 수행을 깊이 한 사람은 이 미묘한 의식상태를
수냐타의 명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죵까빠(Tsonh Khapa)도
다른 많은 성취자들처럼 이러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했다.
일반적으로 이 단계가 지나면 기(氣)는 흩어져 몸을 떠난다.
혈기는 콧구멍을 통하여, 정기는 요도(尿道)를 통하여 각각 빠
져 나간다. 잠잘 때나 죽을 때 사자와 같은 자세로 누우면 이
두 가지 징표를 볼 수 있다. 붓다가 인간의 몸을 버리실 때, 오
른 편 옆구리를 땅에 닿게 하고 누우신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심장 차크라를 떠난 의식은 곧장 중음신(中陰身,bardo body)
으로 들어간다. 이 중음의 상태는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하여간 그 속에 들어간 존재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과거의 행위로 말미암아 새로운 육신을 부여받게 된다. 윤
회의 싸이클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다르마는 죽음의 경험을 자유를 얻기 위한 좋은 기회로 삼으
라고 권한다. 다르마의 교훈을 실천하면 커다란 이익을 얻기 마
련이다. 이익의 정도는 개인의 수행 능력에 비례한다. 최고도의
수행 능력을 가진 사람은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고, 평
범한 능력의 소유자는 수행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부여받고 재생
하는 이익을 얻기도 한다.
이제까지 얘기한 명상의 힘을 키우려면 아래와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 좋다.
"온 우주의 부처님들께 기원하옵니다.
오직 한 번 뿐인 온전한 이 삶
잠깐만에 부서지면, 다시 얻기 어렵거니
하찮은 일에 한눈 파는 일 없이
다만 이 삶의 진실한 모습
낱낱이 깨달아 마치도록 하소서"
3. 카르마의 법칙
카르마(業)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
첫째,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 평범한 존재의 행위.
여섯 세계(六道)윤회의 원인이 된다.
둘째, 행복을 부른는 카르마; 성자의 행위, 지옥, 굶주린
귀신, 동물의 세계에 결코 태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윤회의 법에
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다.
1)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有漏業)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어떻게 해서 생길까?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과 실랑이를 벌일 때 '나' - '무엇보다도
내가 옳다'던지 하는 식의 - 에 대한 강한 고집이 일어나면, 일
하고 먹고 공부하고 죽고 하는 상대적인 "나"가 마치 절대적인
자체의 성질을 가진 것처럼 독단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밤
길을 걷던 사람이 길 위에 떨어져 있는 새끼줄을 뱀인줄로 잘못
알고 놀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결국 모든 갈등은 덧없고 상
대적일 따름인 "나"에 독립자존(獨立自存)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이 상대적인 "나"가 "나"의
완전한 부정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내가 먹고 일하고 잠자
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
이다. 이 상대적인 "나"와 무지로 인하여 독단한 절대적인 듯이
보이는 "나"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면 수냐타(空)의 대한 체험
은 불가능하다.
모든 번뇌의 뿌리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그 어리석음("나"에
대한 착각)에 의하여 증오, 집착, 그 외의 모든 갈등이 생겨난
다. 그리고 그 번뇌가 남을 해롭게 하려는 욕망을 일으킨다. 그
러한 욕망이 일어나면, 곧 정신적인 타르마(意業)가 발동한다.
정신적인 카르마는 의식의 흐름에 어떤 인상을 남기게 되고 적
합한 경우를 만나면 구체적인 행위로 표출된다. 정신적인 카르
마는 몸이나 발의 카르마(身業. 語業)보다 작용 속도가 훨씬 빠
르다. 단 일분 동안에도 많은 종류의 정신적인 행위가 행해질
수 있다. 남을 해롭게 하려는 욕망도 이와같이 몸과 말의 행위
를 통해 구체화 될 정도로 깊어지면, 의식의 흐름에 새겨지는
인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밤이 가고 새벽이 와도 상처 받은 의식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
다. 무수한 종류의 선하고 악한 카르마가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
되어 있다.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물론 이미 결실을
거두었거나 바른 수행을 통해 카르마의 상흔을 제거한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2)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無漏業)
다음의 예(例)는 행복을 부르는 카르마의 생성 과정이다. 어
떤 사람이 한 마리의 새를 죽이려는 광경을 보게 될 때, 측은한
느낌이 우러난다. 그 순간 '저 가련한 목숨을 구해야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때 행복을 부르는 정신적인 카르마가 움직
인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흐름에 바람직한 인상을 새긴다. 그
리고 그 의식이 몸이나 말의 행위로 구체화 될 경우, 새는 목숨
을 건지고 그의 자비로운 카르마는 넓고 깊어진다. 그것이 바로
자신과 남의 행복인 것이다.
카르마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개인적인 카르마로써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되고 그 결
과도 그 자신이 겪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적인 카르마(共業)로
비슷한 환경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공동으로 심어지
고, 그 결실도 다같이 거두는 것을 말한다. 바로 숙명적으로 묶
이어 함께 울고 웃는 공동운명체를 구성하는 요인이다.
붓다가 세상에 계실 때, 한 무리의 덕 높은 비구니들이 음식
시중드는 여인네 한 사람을 데리고 암자에 모여 살았다. 어느날
암자의 오두막 전체에 불이 붙었다. 비구니들은 이 뜻밖의 재난
을 피하고자 저마다 신통력을 써서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러
나 카르마의 위력은 비구니들의 신통력보다 더 강력하여, 비구
니들을 모조리 불더미 속으로 끌어 당겼다. 그때 그 가운데에서
가장 덕 높은 비구니는 자신들이 지난 세상에 저질렀던 한가지
일을 기억해내었다. 자신들이 지난 세상에서 어린아이였을 때
벽지불이 사는 오두막을 불 질러 그를 타죽게 한 일이 있었다.
한사코 그러기를 반대한 사람은 지금 음식 시중을 드는 여인네
혼자 뿐이었다. 결국 비구니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바람직하지
못한 카르마를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청산한 것이다. 다만, 음
식 시중 드는 여인네는 하수구를 통해 달아나 혼자 목숨을 구했
다. 더불어 문제되는 것은 행위의 동기와 성취에 따라서 결과가
복잡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행위의 동기와 성취가 명백히 올바르다면 그 결과 역시 바람
직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그 결과는 바람직 하지 않을 것이 틀림
없다. 그러나 행위의 동기와 성취가 단순하지 않고 다분히 복합
적이라면 그 결과 또한 뒤섞여 나타난다. 예컨데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이나 음식물을 베풀면서 속으로는 깔보는 마음을 품
었다고 하자. 보시한 덕분에 장차 재물은 얻겠지만, 상속받을
재산에 법률적인 문제가 생기는 따위의 어려움을 아울러 만나기
십상이다.
다음과 같은 카르마는 보답의 무게가 특별하다.
a. 부모님, 스승, 보디삿트바(보살), 병자나 곤경에 처한 사
람에게 행한 행위의 보답은 보통보다 정도가 크다.
b. 존경심을 갖고 행한 카르마의 보답이 무겁다.
c. 강한 증오나 탐욕은 카르마의 영향력을 진폭시킨다.
d. 행위할 때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 보답이 영향을 받는다.
카르마는 세 가지 독(三毒: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일
어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재물에 집착하여 남의 것을 훔쳤다면
그것은 탐욕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화를
참지 못하고 살생을 했다면, 그것은 성냄의 번뇌로 말미암은 행
위다. 그때 그는 죽이는 편이 이롭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이는 동시에 어리석음의 번뇌로 말미암은 셈이다. 어리석음 중
에서도 가장 큰 어리석음은 "나"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그것은 실제로 모든 번뇌의 뿌리이다.
다시 카르마는 다음의 둘로 구분한다.
a. 뭇생명을 여섯 세계 가운데 한 곳으로 "집어 던지는" 카르
마.
a. 같은 세계에서 뭇생명의 생긴 모습과 생활환경을 "차별지
는" 카르마.
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어울린다.
첫째, 집어던지는 카르마와 차별지우는 카르마가 둘다 행복을
초래하는 종류일 때, 그 결실은 바람직한 세계에의 탄생과 훌륭한
생활환경이다. 특히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요한 조건은 생명을 해
치지 않고 계율(戒律)을 준수하는 것이다. 도둑질, 살생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즐겨 남에게 베풀기까지 한다면, 그의 삶은 온갖
훌륭함으로 장식된다. 남을 업수이 여기지 않고 겸손과 예의를 갖
추면 다음 세상에 권력과 자유로 보답받는다. 거기에다가 건강한
신체는 "참음"의 결실이다.
둘째, 집어던지는 카르마와 차별지우는 카르마가 번뇌를 초래하
는 종류일 때, 그 결실은 고통스런 세계에 태어나, 날 때부터 죽
을 때까지 숱한 고초를 두루 겪는다.
세째, 집어던지는 카르마는 번뇌를 초래하는 종류이고, 차별지
우는 카르마는 행복을 초래하는 종류일 때에는 그가 비록 나쁜 세
계에 태어날지라도 꽤 괜찮은 생활환경을 만난다. 가령, 애완용
개로 태어났다면 일단 그는 나쁜 세계에 던져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예쁘게 생긴 덕분에 좋은 주인을 만나 잘 먹
고 귀염받는 처지가 될 경우, 그는 제대로 결실을 본 셈이다.
넷째, 반면에 사람 몸을 받기는 했으나 내내 궁핍과 고통을 못
벗어나는 경우는, 행복을 부르는 집어던지는 카르마와 괴로움을
초래하는 차별지우는 카르마가 함께 어우러진 결과이다.
카르마의 또 다른 특성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일부러 짓지 않은 몸과 말의 행위.
b. 그저 마음으로만 지은 행위.
c. 마음으로 짓고 행동에 옮긴 것.
d. 결실이 현재의 생(生)에 맺히는 강력한 카르마.
e. 다음 생에 보답받는 카르마.
f. 다음 다음 생, 혹은 그 다음 생에 보답 받는 카르마.
g. 카르마 법칙의 필연성: 행위의 결과는 어김없이 닥친다.
h. 작은 행위로 큰 보답을 받을 수 있다.
한 젊은 여인이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붓다
는 사람들에게, 그 여인이 이 행위의 결과로 아무 때 아무 곳에서
벽지불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여인의 남편은 그
러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정도의 작은 행위로 그토록 큰 보
답을 받는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까닭이다.붓다께서 미소지으
며 설명했다.
"한 알의 씨앗이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되듯이,카르마의 보답
역시 헤아릴 수 없다."
i. 뿌린 카르마의 씨앗이 없으면 거둘 열매도 없다.
앞에서 얘기에서 덕 높은 비구니들의 음식 시중들던 여인네처럼.
j. 카르마의 씨앗은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
죽는 듯이 잠자고 있다가도, 적합한 때를 만나면 언제고 싹을
틔운다. 다르마의 수행에 의해서 카르마의 잠재력을 완전히 제거
할 경우를 제외하고.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붓다는 당신의 무한한 자비심으로써
뭇생명의 고통스런 카르마를 제거해 주실 수는 없을까? 실제로
뭇생명들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의 인상을 저장해 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잠재의식이며, 인과응보의 카르마 법칙은 바로
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 자비심에 찬 붓다의 가르침은
결국 인간 자신이 자신의 카르마를 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뿐,
성과가 있고 없고는 단연히 개개인의 자외적인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환자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갖고 최선의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훌륭한 의원(醫阮)의 임무는 끝난다. 처방대로 치료를 받고 안받
고는 환자의 마음이다. 만일 붓다의 자비심 만으로도 뭇 생명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있다면, 윤회는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종식
되었을 것이다. 붓다의 사랑은 넓고 가이 없다. 태양이 온 세상을
두루 비추듯이, 붓다의 사랑은 뭇생명의 마음자리를 평등하게 밝
힌다. 그러나 뚜껑 덮인 단지 안에서 어떻게 햇빛을 쬘 수 있겠는
가?
카르마의 인상이 뚜렷할 경우와, 붓다에 대한 믿음과 다르마의
깊은 수행으로 말미암은 큰 덕성(德性)과 결부되어 있지 않을 경
우에는 과보를 면하기가 어렵다. 설사 결부되어 있다고 해도 쉽사
리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비교적 인상이 약
한 카르마는 붓다에 대한 믿음과 다르마의 수행력 등에 의하여 상
당한 영향을 받는다. 가령 인간의 수명은 지난 세상의 카르마에
의해 결정되지만, 이 생에서의 악행때문에 급작스런 죽음을 당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붓다의 자비심이 힘을 발휘한다.
붓다를 신앙하고 다르마를 깊이 수행하여 급살(急殺)의 원인을 미
리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명은 기름 등잔불과 같다. 기름이 고갈 되던지, 거센
바람이라도 몰아치면 꺼져 버리지 마련이다. 붓다는 결국 바람막
이 역활을 하실 따름이다.
이처럼 카르마는 위험한 존재다. 카르마를 유발하는 번뇌의 뿌
리를 뽑아 버리려면 명상을 해야 한다. 번뇌의 본성을 잘 이해하
기 위해서는 일차적인 의식(the primary consciousness)과 특히
이차적인 의식(the secondary consciousness)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이차적인 의식은 51가지의 정신적 요인(caitta)으로
나뉘는데, 아상가(Asanga, 無着)의 아비달마집론(Abhidharma-samu
ccaya)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바르게 공부하면 모든 행위가
각각 선한지 악한지, 무슨 정신적 요인에 바탕을 두는지를 잘 이
해할 수 있다. 무릇 카르마는 매우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중
요한 것은 다르마의 여러가지 측면을 두루 아는 일이다. 뭇생명들
의 다양한 생활상태와 경험이 단순히 한 가지 카르마의 결과만은
아님을 이해하는 일이다. 카르마의 법칙과 그 결실은, 콩심은 데
콩 나는 식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고, 매우 복잡하게 뒤엉켜있
다.
현상(現象)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감각기관을 통한 직접지각(直
接知覺 : 現量), 수냐타를 탐구할 때 사용하는 논리적인 분석과
추리(推理,比量), 붓다의 지혜(智慧)를 신뢰하여 그 말씀을 받아
들임 등의 세 가지가 있는데 카르마는 세번째 방법에 의해서 이해
한다. 공작새의 깃털처럼 현란한 현상 세계의 모든 원인은 오직
붓다만이 추적할 수 있는 것이다.
4. 윤회의 비참함
1)여섯 세계
뭇 생명이 다시 태어날 세계는 카르마에 의해서 결정된다. 괴
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뭇생명을 세 가지 악한 세계(지옥,굶
주린 귀신 세계, 동물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반면, 행복을 부
르는 카르마는 세 가지 복된 세계(인간 세계, 아수라의 세계,
하늘 세계)로 인도한다.
세 가지 악한 세계 가운데 동물의 세계는 매우 명백하다. 동
물들은 인간과 밀접한 카르마적 관계를 갖고 있는 까닭이다. 그
러나 지옥과 굶주린 귀신의 세계는 직접 지각이 불가능하다. 직
접적인 지각(知覺)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 세계를 부정할 충분
한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지각 능력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실제로 갖가지 카르마에 의하여 우리
의 정신은 어마어마한 제한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붓다의 지혜
가 큰 바다라면, 우리의 지혜는 고작 풀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사물에 색깔이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배냇봉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여섯 세계의 특
성을 하나하나 살펴서 카르마외 그 결과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
시키도록 하자.
* 지옥(地獄)
빙한(氷寒)지옥과 화염(火炎)지옥이 있다. 도둑질하고, 다르
마를 비방하며, 다른 사람들을 추위에 떨게한 죄과로 빙한지옥
에 떨어진다. 많은 원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이나 남의 삶을 파
괴한 죄과는 화염지옥에 걸맞다.
사람이 임종(臨終)할 때, 자신의 카르마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지옥에 태어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
다. 가령 어떤 사람은 굉장히 추위를 느끼면서 따뜻함을 구걸할
것이다. 바로 이 따뜻함에 대한 갈망이 그를 화염지옥으로 안내
한다. 독사의 맹독이 차차 온 몸에 펴져서 생명을 앗아 가듯이.
일찍이 뿌려 놓은 카르마의 씨앗이 무르익어 죽을 무렵에 완전
히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잘 깨우치면, 지옥세계
의 존재를 믿기가 수월하다.
화염지옥은 화산에 비유될 수 있다. 그의 의식은 용암(熔岩),
곧 녹은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불 속에 던져진 조개탄처
럼 불꽃과 하나가 된다.
마찬가지로 빙한지옥의 좋은 예를 제공하는 것은 극(極)지역
이다. 얼음덩이를 몸삼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지옥은 악한 카르마와 악한 카르마를 해결할 장소와
고통을 받을 자, 이 세 가지 요건이 결합하여 창조된 세계이다.
보리행경에서 산티데바(Santideva)보살은 묻는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마루를 누가 만들었는고?
타오르는 자신의 몸을 뒹굴며 울부짖는
저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붓다께서 말씀하셨네.
이 모두 악한 마음의 열매라고."
비록 지옥이 마음의 영상(映像)이고 실재하는 세계는 아니지
만, 그 고통은 인간 세계처럼 리얼(real)하다. 곧 꿈 속처럼 환
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지옥의 일생은 몹시 길며, 카르마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다.
지극히 무거운 카르마 탓에 지옥 세계가 부서질 때까지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지옥에서 일생을 마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 우주에는 수없는 세계가 있지만, 아직 악한 카르
마가 덜 소멸된 생명들이 다시 태어날 곳은 역시 지옥보다 그리
낫지 않은 세계이다. 형기(刑期)를 다 마치지 못한 죄수가 남은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다른 형무소로 옮겨가는 경우처럼.
지옥에 대한 명상을 두 가지 방법으로 행할 수 있다. 첫째,
어느 특정한 지옥을 택하여 그곳의 고통과 그 곳에 떨어지는 원
인을 명상하고, 그 원인이 현재 자신 가운데서 자라고 있지 않
는지를 검사해 보는 일이다. 둘째는 자신의 덧없는 삶과 죽음,
그리고 지옥에 태어나는 모습 등에 대한 명상이다.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자신을 지옥 사람으로 가정할 수 없거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지옥에 떨어질 원인을 만들지 않았다고
여겨지면, 자신이 지난 세상에 지은 카르마 때문에 지옥에 태어
날 수도 있다고 상정(想定)해야 한다. 또한, 죽음은 필경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과 살아있음은 "아직 죽지 않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라 변화한다.
이것은 명백한 자연의 이법(理法)으로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
다. 마음의 작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대
부분 이를 믿으려 들지 않는 이유는 죽음에 의하여 그의 생(生)
이 바뀔 때, 하나의 원인이 지난 세상의 카르마 등에 영향을 받
아 복합적인 형태의 결과로 나타나는 까닭이다. 또 그는 이미
과거 생(生)의 기억을 잊어 버리게 되는 까닭이다.
사람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
를 저지르는 것도 지난 세상에 그러한 행위에 익숙해진 습관을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세상에 익힌
행복을 주는 카르마 역시 훌륭한 필적처럼 남아서 그를 수행의
길로 이끌어 준다. 세심히 살핀다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살펴
지난 세상의 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직 "윤회의 법칙"
을 믿을 때 여섯 세계에 대한 명상이 가능하다. 스스로가 현상
세계의 법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르마를 실천하지 않는다
면, 설명을 아무리 전개해 봐야 결과는 언제나 미흡할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나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라. 마치 금을 감정하듯이,
무게를 달아보고 잘게 부수어 녹여 본 다음 그것의 가치를 확신
하라. 단지 나를 신뢰한다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옳지 않다."
* 굶주린 귀신의 세계(餓鬼界)
정신적인 성취가 없는 사람은 이 세계를 볼 수 없다.
탐욕과 재산에 대한 욕심이 이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탐욕과 재
산에 대한 욕심이 이 세계에 태어나는 주된 원인이다. 지난 세
상에 어떤 것을 지나치게 욕심낸 댓가로 그들은 항상 그것은 굶
주린다. 산같은 음식물과 바다만큼의 물이 눈 앞에 있어도 그는
그것들을 볼 수조차 없다. 수천년 동안 그런 처지로 지내기 마
련이다. 야윌대로 야윈 몸체, 툭 튀어나온 배, 그리고 쇠약한
건강이 그들의 특징이다. 여름철의 서늘한 달빛과 겨울철의 따
뜻한 햇볕도 그들에게는 타는 듯한 고통을 준다. 여는 사람들의
경우, 사흘만 굶어도 몸이 극도로 약해지며 게다가 더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목숨마저 위태로워 진다. 그러나 굶주린 귀신에게
는 고통을 그치게 할 죽음의 혜택도 없다. 카르마가 다할 때까
지 그런 삶은 끝없이 이어진다.
굶주린 귀신들의 삶은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이와는 약간 다
른 고통을 받는 귀신들도 있다. 가령 음식이나 물을 볼 수 있는
귀신이 있다. 우연히 음식물을 발견하고 급히 달려들라치면 당
장 방해물이 나타나 그를 좌절시킨다. 또 그가 물을 보고 마시
려 하면 물은 금새 피고름이나 독수(毒水)로 변하여 구역질을
자아낸다. 굶주린 귀신 가운데에는 인간에게 이익을 주는 무리
도 있고 해를 끼치는 무리도 있다. 어떤 귀신들은, 비교적 작지
만 즐거움과 소유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욕
심 때문에 항상 아무것도 갖지 않은 체 한다. 그런 귀신들은 언
제나 남을 해롭히려는 생각들로 꽉 차있다. 굴러가는 눈덩이처
럼 부푼 악한 카르마는 마침내 그를 더 열악(劣惡)한 세계로 내
던질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영원히 굶주린 귀신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언제나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단지 지
난 세상에 저지른 자신들의 악행 때문에 귀신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과 행위가 그 세계에 태어날 조건에 합당하면, 어
느 누구를 막론하고 장차 귀신의 몸을 받기 마련이다. 카르마와
그 과보의 법칙은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 동물의 세계
동물들의 괴로움은 쉽게 이해된다. 동물들은 힘없고 약하며
작은 과오로도 손쉽게 목숨을 잃는다. 게다가 인간은 커다란 고
통을 덧붙여 준다. 사정없이 때리고 잡아 먹기를 예사로 한다.
동물들은 모든 추위와 더위, 그리고 배고픔을 몸 하나로 견뎌야
한다. 이와같은 동물들의 괴로움은 거의 어리석음, 곧 지혜의
결핍에서 온다. 바람직 하지 못한 행위의 습관 때문에 한번 이
세계에 태어나면, 다시 인간의 몸 받기가 매우 어렵다. 동물들
의 삶에는 살아가기에 필요한 물자(物資)와 자유가 거의 결여되
어 있다.
바람직하지 않은 성행위(性行爲)가 동물 세계에 태어나는 주
된 원인이다.
첫째, 대상 : 부모나 스승, 혹은 남의 배우자와 관계함은 삿
되다.
둘째, 시간 : 그믐날,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날, 또 여인네가
생리 중이거나 임신 중이거나 젖먹이를 기르고 있을 때, 이와
같은 경우에 성행위를 함은 그릇되다.
셋째, 장소 : 절.성지(聖地), 성직자가 거처하는 곳에서는
성행위를 피한다.
네째, 방법 : 변태적인 성행위는 금지된다.
" ** 같은 놈"이라는 식으로 동물을 빗대어 남에게 욕설을 퍼
붓거나, 다르마의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도 동물 세계로 내던져
지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그같은 일을 한
기억이 있는 사람은 참된 마음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깨끗이 해
야 한다.
"세 가지 악한 세계의 고통을 면하고자
붓다와 법과 스승들께 나아갑니다.
원컨대,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선을 성취할 때까지 이 마음
한결같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 인간 세계
인간에겐 크게 생.노.병.사 등 네 줄기의 괴로움이 있다.
a. 태어남
태아(胎兒)는 어머님의 자궁 안에서부터 심한 고통을 받는다.
주머니같이 생긴 애기집이 늘 단단히 죄고 있는 데에다, 어머니
가 움직이거나 먹고 마시며 추위와 더위를 느낄 때마다 아기는
절벽에서 뚝 떨어지는듯한 충격을 받는다. 이윽고 열 달이 차면
공기의 카르마(air of Karma)가 아기의 몸을 자궁 밖으로 밀어
내는데, 이때 아기는 거대한 두 개의 산 사이에 꽉 끼이는 것
같은 압박감을 경험한다. 비록 어머니가 조심스런 순길로 아기
를 안아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주지만, 차라리 그것은 모래종이
에 몸을 비벼대는 기분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큰 소리로 울어
젖히는 이유는 세상과의 첫 접촉이 그토록 고통스럽기 때문이
다. 어린이의 무지(無知)하고 어리석은 특성 -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한 특성은 어느 정도 남는다. - 은 바로 그가 자궁에서 보
낸 열 달의 영향이다.
b. 늙음
어느 누구도 늙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먹어 갈수
록 몸과 마음의 기능이 쇠약해져 가기 마련이다. 젊은 날에는
칼끝처럼 예리하던 지력(智力)도 녹이 슬거나 아예 무뎌지고 만
다. 공원 주변을 할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노인들에게도 한 때의
젊은 시절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사뭇 모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결과적으로 자신이 늙었음을 자각하게
되면 그 번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기력하고 병약한 세월에
치여서 오직 죽는 날만 순꼽아 기다리는 노인들도 허다하다. 다
르마의 수행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도 늙음처럼 맞부딪치는 장
애는 없다.
c. 죽음
내일 신변에 무슨 사고가 생길지, 세상이 어떻게 될런지는 아
무도 모른다. 더구나 죽음이 언제 자신을 택할지 알 도리가 없
다. 언제 어떻게 죽게 되리라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결국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그의 삶을 둘러 싸고 있는 가족,
친구 및 친척들과 영원한 이별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목숨처럼 사랑하던 사람과도 그때에는 결별해야
한다. 지옥의 울부짖음을 듣고서도, 그것이 직접 자신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의 외마
디 절규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d. 아수라(Asuras)의 세계
시기, 질투가 많으면 이 세계에 태어난다. 아수라들은 욕망의
하늘나라 신들과 앙숙이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는 전쟁이 그칠
날 없다. 승패가 뻔한 싸움일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e. 하늘 나라
일생 동안 열가지 악행을 짓지 않으면 하늘 나라의 신(神)으
로 태어날 수 있다. 수명은 엄청나게 길고 즐거움이 끝도 없지
만, 지나치게 안락(安樂)한 환경에 탐닉하느라 대부분의 신들은
다르마에 대한 생각을 않고 지낸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수
명이 너무 짧다고 여긴다. 마침내 복된 카르마가 고갈되며, 죽
음을 맞이하기 칠일(하늘 세계의 시간으로) 전에 하늘 신은 자
신의 죽음과 자신이 재생할 곳을 본다. 번민 때문에 마지막 칠
일은 그가 살아온 모든 세월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훌륭
하던 몸은 빛을 잃고 불결해지며 악취까지 풍긴다. 그의 몸을
장식한 하늘 꽃도 시들어 가고 앉은 자리도 불편하기만 하다.
친구들마저 그를 외면한다. 대부분의 하늘 신들은 죽은 뒤에 보
다 못한 세계로 떨어진다. 행복을 초래하는 카르마가 거의 다
소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늘 세계에 태어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2) 세 가지 괴로움(三苦)
* 감각적인 괴로움
사람이면 으례 겪는 괴로움이다.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이 괴로움을 알 수있다. 세속적인 뭇생명이
감수해야 하는 정신적, 혹은 육체적인 고뇌, 고통, 갈등이다.
* 변화의 괴로움
다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의 의미에
무지한 데에서 변화의 괴로움이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괴로움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가령 그늘에 쉬고 있다가 몸
이 으스스 추워 온다고 느낀 사람은 곧 햇빛이 쬐는 따뜻한 장
소로 옮겨갈 것이다. 그러나 한참 지나면 태양빛도 너무 따갑
다. 그래서 이제는 도리어 서늘한 그늘로 다시 들어 선다. 이처
럼 자주 바뀌는, 규정할 수 없는 만족의 기준이 "변화의 괴로
움"을 드러낸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압제자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국민이
있다면 처음 해방을 맞았을 때 그들은 무조건 기뻐하였다. 그러
나 그 기쁨도 잠시, 얼마 못가서 이번에는 자국(自國)내에서 내
부적인 압박 요인이 우후죽순처럼 치솟는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애쓴 끝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성취의 댓가는 행복만이 아니다. 그 지위에 따르는
책임을 짊어지고, 뒤쫓아오는 경쟁자들에 맞서느라고 그에게는
문제와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행복은 새로 얻어
진 이질(異質)의 상황이 아니라, 전에 겪던 상황의 형식적 변형
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껍데기만 갈아씌운 그 괴로움덩이에 가치를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운다.
그런데 그것이 왜 행복처럼 느껴질까? 앞서 얘기한 "감각적인
괴로움"보다 이해하거나 경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참된 행
복은 한번 성취되면, 갈수록 시들해져서 마침내 괴로움으로 변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점점 행복감이 견실해져야 마땅하다.
결국 다르마의 눈(法眼)을 통하여 볼라치면 그런 건 행복이 아
니라 괴로움의 이명(異名)일 따름이다. 진정한 행복의 씨앗은
언제나 다르마의 수행에 있다.
* 삶 자체가 괴로움
윤회하는 삶 바로 그 자체가 괴로움이다. 삶 자체는, 앞의 두
가지 괴로움의 근거가 되며, 번뇌를 초래하는 행위를 만드는 도
구 노릇을 한다. 다음 생(生)은 그 행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다. 손등이 벗겨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은 첫번째의 "감각적 괴
로움"이다. 누구나 그 고통을 안다. 둘째의 "변화의 괴로움"은
다르마에 대한 식견이 깊은 사람이 이해한다. 그러나 "삶 자체
가 괴로움"이라는 이치는 오직 성자(聖者)만이 전체적으로 알
수 있다. 손바닥 안에 머리카락 한 올을 넣고 비벼보라. 쉽게
감촉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삶 자체가 괴로
움"임을 눈속에 들어간 머리카락처럼 아프게 느낀다.
"감각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모든 생명의 바램이
다. 욕망과 형체 없는 하늘 세계(無色界)의 신들은 "변화의 괴
로움인 삶 자체"로 부터 자유롭기를 갈구한다.
윤회하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이 세 가지 괴로움이 불가피하
다. 첫째, 생존(生存)이 항상하다는 믿음. 둘째, 생존이 행복이
라는 견해. 세째, 사실상 더러움의 덩어리인 몸과, 마음의 네
가지 요소(감각작용, 표상, 의지작용,식별작용)가 깨끗한 것이
라는 신념. 네째, 모든 현상생명에 독특한 본질이 있다는 독
단(獨斷).
이와 같은 신념들이 그릇된 견해임을 인식하여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데 실패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괴로움을 피할 길은 없다.
다르마 수행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의 명상(meditation)이 소
개된다. 통찰(contemplation, 觀)과 집중(concentration)이다.
통찰을 실천하면 현상의 덧없음· 카르마와 결과의 법칙·절제·
온전한 몸 받음·만물의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생기(生起)·
자비심·보리심(Bodhicitta)·수냐타(Sunyata, 空)의 의미 등에
관한 직관이 생긴다. 집중을 실천하면 마음을 순수한 하나의 점
(點)으로 모을 수가 있다. 통찰을 끝낼 무렵에는 언제나 그 직
관된 바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통찰을 제쳐두고 집중
만 해서는 명상의 성과가 없다. 다르마를 수행할 때, 무엇보다
도 먼저 배운 것을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받아 들일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하고, 그릇된 견해를 부수는 방법을 바로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수행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있고, 부적당한 시간
이 있다. 또 다양한 방법을 동시에 써서 수행할 수 없으므로 자
신에게 가장 적합한 한 가지를 택하여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그 방법으로써 수행에 몰두해 본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 잠
시동안 통찰을 실천하면 침체한 기분을 돌이키고 집중을 위한
더 강한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다. 나무꾼이 거목(巨木)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우선 도끼날을 예리하게 갈아서(통찰), 정
확한 지점을 힘껏 내리찍어야(집중)하는 법이다. 더욱이 미혹
(迷惑)의 뿌리는 너무 깊어서 당장 뽑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쉬지않고 파들어가는 인내가 필요하다.
괴로움을 끝내고 싶으면 새로운 카르마를 만들지 말아야 한
다. 한시바삐 올바른 방법을 찾아내어 익히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불교의 수행에는 지혜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계시
(啓示)되는 법은 없다. 오직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아
서 - 지혜롭게 만드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뭇생명은 자신의
스승인 동시에 적(敵)이라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 카르마를 소멸시키는 두 단계의 방법
첫째, 과거에 지은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 가운데에서 결
실할 만한 힘이 있는 것을 정화(淨化)한다.
둘째, 그와 같은 카르마를 새로이 짓지 않는다.
이책 후반부의 "특별한 기초수행"은 위의 두 가지를 성취할
목적으로 실천된다.
"붓다께 귀의하옵니다. 윤회의 삶은 즐거운 놀이터가 아니고,
쇠 담장으로 둘러싸인 감옥임을 깨달아 완전한 자유의 깃발을
거머쥐게 하소서. 성스러운 집에 들어서는 그날까지 성문(聲聞)·
연각(緣覺)·보살(菩薩)의 수행을 한시도 멈추지 않겠나이다.
# 특별한 기초수행
다르마의 수행은 그 시작부터 정신을 계발해 가는 점차적인
과정이다. 하나의 수행이 충분히 성취되면 다음 단계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이런 단계들을 차례차례 거친 후에라야
최후의 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요즈음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탄뜨라(밀교 : 身密)수행에 많
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탄뜨라의 수행에 성공적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탄뜨라의 길로 이끌어 줄 부수적인
과정의 성취가 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흔히있다.
탄뜨라의 수행에 앞서 먼저 성취해야 할 세 가지 요건은 아집
(我執)의 완전한 포기,깨달음에 대한 갈망(보리심,Bodhicitta),
수나탸(Sunyata, 空)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탄뜨라를 수행하
려는 사람은 현교(顯敎, Paramitayana)를 추종하는 사람들보다
이 세가지 요건을 더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탄뜨라의
수행은 깨달음을 성취하는 단도직입적인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
이다.
다르마에 정통한 스승들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가지고 그들로
부터 적절한 지도를 받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건
이다. 그저 성자들의 상(像)이나 모셔놓고 탄뜨라에 관한 책을
뒤적이며 머리를 굴리는 따위는 결코 탄뜨라의 수행이 아니다.
그러한 정도는 다르마 수행의 동기가 빈약한 사람들도 흔히 행
한다.
특별한 기초수행의 방법과 지침은 탄뜨라의 수행 종류만큼이
나 많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패턴(pattern)을 제시한
다. 그리고 아무튼 그것들을 제대로 성취하려면 가능한 한, 바
르고 세부적인 기술을 가르쳐 줄 정신적인 스승을 만나 보는 게
좋다.
1. 의지할 대상 정하기
다르마의 수행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채비는 의지할 대상
(歸依處)을 정하는 일이다. 마음을 그 대상에 의지시키는 편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유익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음식은 깨
끗한 그릇에 담아야지 만일 불결한 그릇에 담았다가는 썩어 버
리기 십상인 법이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수행
하려면 마땅히 붓다들 가운데 한 분의 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야 한다.
여기에서 세 가지 측면을 거론한다.
1) 대 상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딱
뜨린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우리가 윤회의 고통과 카르마의 속박 혹은 정신적인 고뇌 등으
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의지할 대상을 갈구하는 것도 그 비슷
한 이유에서이다. 딱 잘라 말해서 괴로움에 처한 뭇생명들이 바
르고 확실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대상은, 지혜와 덕을 두루 갖
추신 붓다 뿐이다.
붓다는 티벳어로 쌍-게(San-rgyas)이다. 쌍(Sans)은 두 가지
장애의 잠(the sleep of the two obstruction) - 불안정한 감정
과 뒤바뀐 견해 - 에서 깨어난 분이란 뜻이며, 게(rgyas)는 세
가지 덕성 - 자비, 지혜, 힘 - 을 완전히 갖추신 분이란 뜻이
다.
붓다의 자비는 모든 생명에게 평등하며, 붓다의 지혜는 제한
(制限)이 없고 모든 지(知)를 다 갈무리 한다. 그리고 뭇생명을
구제하시는 붓다의 힘은 완전히 성숙해 있다. 수행자가 강한 인
내심으로써 번뇌를 소멸시키고 덕성을 쌓아감에 따라 붓다의 이
러한 속성이 그에게도 점차 갖춰진다. 마치 일상생활에서도 작
은 노력들을 보태고 보태면 자신이 바라던 지위가 성취되듯이.
붓다의 입장에서는 이미 뭇생명의 의지처가 되어줄 모든 수단
이 갖추어져 있다. 무릇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은 먼
저 자신이 그 일에 관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
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을 도와 주려는 사람은 길 안내를 맡은
장님이나 다를 바없다.
누구든 붓다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생명은
하나같이 붓다의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의 성품(佛
性, Buddhahood)을 쌍게 끼릭(Sans rgyas Kyi Rigs)이라고 하는
데, 'Rig'는 바로 종자(種子)를 의미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이
종자를 바로 붓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치 자신 안에 하나의
붓다가 내재(內在)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철광석(鐵鑛
石)이 곧 철(鐵)은 아닌 까닭이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여러 과
정을 겪은 후에 비로소 철광석은 철이라 불릴 수 있다. 생명마
다 갖추고 있는 붓다의 종자는 지금 미혹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
다. 여러 단계의 "미혹의 베일(veil)을 걷어내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그 종자가 완전한 붓다의 성품을 드러내게 된다.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당장 모든 미혹을 극복할 수는 없다. 계
속적이고 끈기있는 노력이 미혹을 완전히 제거하는 유일한 길이
다. 뭇생명들이 번뇌로 말미암아 지금은 비록 붓다와 다른 괴이
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철저하게 다르마를 깨치는 그 순간부터
각기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다. 곧 우주의 모든 붓다
들과 똑 같게 된다. 여러 갈래에서 뻗어나온 빛이 돋보기의 촛
점을 통과하여 한 지점으로 보이듯이.
한 분의 붓다에게 의지하여 명상을 수행함은 모든 붓다를 예
배, 공양함과 다르지 않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붓다들의 성품
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의지할 대상을 정하고 난 뒤에는 그 붓다의 청정한 세계(淨
土)를 자신 앞의 공중에 뚜렷이 떠올린다. 중앙에는 가장 진귀
한 보배들로 장식된 "깨달음을 성취하는 나무"를 세운다. 나무
꼭대기에는 황금의 왕좌(王座)가 얹힌 큰 연꽃대가 있다. 모든
붓다의 근본 몸인 바이로차나 붓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그 왕좌
에 앉아 계시고 수 많은 제자들이 주위를 에워싼다. 그 앞에 또
하나의 황금 왕좌에는 차크라삼바라(Cakra-samvara)가 놓이고
둘레에 명상하는 성자들이 있다. 바이로차나 붓다의 오른쪽에는
석가모니 붓다를 중심으로 한 많은 붓다들이 정좌하시고, 왼편
에는 관세음보살을 위시한 많은 보디삿트바와 아라한 및 벽지불
(Pratryeka-buddhas)들이 자리한다. 바이로차나 붓다의 뒷편에
위치한 왕좌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수많은 경전들에 둘러싸
인 "반야경(Prajna paramita)"을 모신다. 정면에는 다르마의 수
호신들이 시립해 있다.
위에 소개된 방법이 너무 복잡하다고 여겨지면 자신이 정한
대상 한 분만을 떠올려도 좋다. 전체를 떠올리거나 한 분을 떠
올려도 좋다. 전체를 떠올리거나 한 분을 떠올리는 효능은 동일
하다.
2) 이 유
a.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에서 만일 윤회의 비참함을 깨닫
지 못한다면, 의지할 대상을 정하려는 의지도 소망도 일어날 까
닭이 없다.
b. 그 목적을 성취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붓다
라는 믿음.
3) 방 법
자신이 정한 대상에 의지하는 올바른 방법은 그 분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분에 대해 가장 진지한 믿음을
갖는 일이다. 그러한 마음자세 없이는 수많은 탑돌이를 하고 경
전을 줄줄 왼다 해도 도움이 안 된다.
2. 보리심 일으키기
어떤 동기에서건 의지할 대상을 정한 사람은 저마다 윤회의
고통과 윤회의 근거가 되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갈망
을 가진다. 보리심(Bodhicitta)은 이러한 갈망을 모든 생명들에
게로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윤회의 생
명 모두를 연민하여, 그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져내고 모두가
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려는 마음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그
럴 능력이 없지만, 장차 붓다의 깨달음을 얻으면 자신이 완전히
자유로워짐과 더불어 모든 생명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보리심
은 곧 모든 생명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려
는 바램이다. 보리심의 사인(sign)은 모든 생명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자기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변함없는 각오다. 붓다의 전
생(前生)이야기에 수많은 실례가 담겨져 있다.
가끔씩 충동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이와 비슷한 감정들은 보리
심이 아니다. 그런 정도의 동기를 갖고는 보살의 수행을 감당하
지 못한다. 참된 보리심은 서서히 익는 법이다. 오랜 단련을 거
친 다음에 비로소 현재의 마음이 참된 보리심으로 바뀐다. 사흘
굶은 이가 밥 생각하듯이 보리심이 굳고 한결같은 사람을 보살
이라 부른다. 보살의 덕(德)은 마치 허공처럼 제한(制限)이 없
다. 그런 까닭에 보살의 사소한 덕행조차도 일반적인 커다란 선
행(善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즉 어떤 행위의
동기가 자신, 혹은 어느 특정한 무리를 위한 게 아니고 뭇생명
모두를 목적으로 할 때, 그 행위의 결실 역시 제한이 없다. 반
면에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보통의 행위는 그 행위
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끼친 이익만큼의 결실을 맺게 된다. 이와
같이 보리심의 공덕은 측량할 수 없다.
모든 생명들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은 붓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하며, 모든 수준 높은 수행의 뿌리이
다. 가령 백만년 동안 수냐타를 공부한 성문(聖聞, Sravaka)의
성과가 보리심을 지닌 보살이 단 일분간 명상한 성과에 미치지
못한다.
모든 생명들을 구제함을 스스로의 사명으로 여기고 어떤 어려
움도 겪어내겠다는 각오를 굳건히 하면, 마음은 더없이 고요해
진다. 자비와 사랑의 성스러운 물이 마음의 모든 굴곡을 덮고
잔잔하게 고이는 까닭이다. 스스로의 이해 관계에 따라 좋아하
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 등으로
차별하는 것은 굴곡있는 마음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정은 끊임없는 명상을 통하여 계발되고 유지되어야 한
다. 일상생활에는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는 세속적 요인들이 너
무나 많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순식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빌딩을 짓는 것과 흡사하다. 우선 땅을 편편하게 다듬어야
하고, 여러가지 건축자재를 확보한 다음 비로소 공사(工事)를
설계대로 진행하게 된다.
보리심 일으키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전
통적 방법이 히말라야로부터 두 줄기 큰 강이 뻗어 나오듯이,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비롯되어 전해진 하나의 줄기는 마이트레
야(Maitreya)가 아상가(Asanga)에게 가르치고, 또 많은 스승들
에게 전하다가 아티샤(Atisa)가 이어받은 전통이다. 다른 하나
의 전통은 만주스리(Manjusri)가 나가르쥬나((Nagarjun) 에게
전하여 산티데바(Santideva)를 거쳐 역시 아티샤(Atisa)에 이
어졌다. 두 방법의 효과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들을 병행
하여 수행하게 되면 성과는 더욱 커진다. 그래서 두 전통을 결
합한 방법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곧 이제 소개할 열 한 단계의
명상이다.
3. 열 한 단계의 명상
열 한 단계는 보리심을 향해 가는 열차의 역(驛)들이다. 모름
지기 여행하려는 사람이 역의 이름만 아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간 목적지와 최후 목적지에 대한 이해와 여행 수단의
특성 등까지도 정확히 파악해야 훌륭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1)마음의 평정
무엇보다도 먼저 '나'라는 것의 정체와 현재의 마음 상태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존재
의의와 마음가짐이 어떻게 이해되고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라는 것의 정체
우리의 행위 모두는 몸과 마음의 결합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
위들을 주관하는 '나'라는 것을 몸의 어느 구석 - 심지어는 개
개의 원자(Atom)속에서도 - 에서도 끄집어 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찰나적(刹那的) 의식" 과 "다음의 찰나적 의식"
자체에는 '나'가 당당하게 머물 여지가 없다. 눈에 뚜렷이 보이
고 질감(質感)이 있는 이 육체를 '나'라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
인 생각이지만, 그런 맹목적인 생각은 결국 죽음과 함께 '나'가
단절된다는 오해를 부른다. 두번째로 저지르기 쉬운 오해는 몸
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정신'이야말로 '나'라는 생각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매우 그럴 듯한 주장들이다. 그러나 세심하게 관
찰하고 분석해 보면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님을 알기는 어렵지 않
다. 세번째의 그릇된 견해는 몸과 마음 어느 것에서도 '나'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나'라는 것은 아예 없다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셋 중에서도 가장 큰 오해이다. 왜냐하면 이러
한 부정(否定)은 때대로 수냐타(Sunyata)를 허무(虛無, nihil)
로 이해하고 집착하는 오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말하면 "본질적인 나" 따위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규
정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평소에 생활하고,
명상하고, 그릇된 생각에도 곧잘 몰두하는 "상대적인 나"가 덧
없는 모습 그대로 실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 세 가지가 "나"
에 관계되는 대표적 오해이다. 이 밖에도 수 많은 그릇된 견해
들이 있기 때문에, 수냐타의 바른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위험한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한다. 책만 읽고 있어서는 한 발자욱도
진전이 없다. '나'의 바른 존재방식을 직관(直觀)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나'의 상대적 존재 모습을 직관하려면 올바르게 사고
하는 방법부터 잘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러는 중에 '나'의 실
제 모습은 저절로 차츰 명백해진다. 탱화를 처음 배울 때, 어느
곳에 무슨 색을 칠해야 하는지를 알기는 쉽다. 하지만 물감을
사용하는 방법은 잘 알 수가 없다. 직접 칠하려 들면, 평소 생
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스승을 모시고
익숙해질 때까지 그 기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선수행(嬋修行)의 경우도 한 가지다. '상대적인 나'는 미묘(微
竗)하게 존재한다. 조금만 관찰해도 금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선(線)이 굵고 뚜렷한 것은 아니다.
통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깨달음을 얻는 데에 외
부적 상황이 크게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분석을 시도
함에 있어서는 그릇된 '나'에 대한 고집을 명백히 드러내는 특
별한 경우(상황)가 요구된다. 독단(獨斷)된 '나'는 흔히 강한
감정, 가령 격렬한 미움, 고통, 행복감 등이 밑바닥에 잔뜩 도
사리고 있다. 그러한 감정들은 외부적인 자극 없이 자신의 생각
만으로도 별안간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까닭에 어떤 특별한 외
적 상황이 닥칠 때까지 관찰을 미룰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러한
순간을 재빨리 포착하여 그릇된 '나'의 출현을 날카롭게 검증(
檢證)하기를 계속하면 된다. 고통이 경험되는 상태에서 "나는
도저히 못 참겠다"라고 생각하는 그 '나'가 예리하게 파헤쳐 져
야 한다. 그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의 강력한 '나'- 몸과
마음을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듯 싶은 - '제어되지 않는 '나'이
다. 그토록 실감나는 나타남(appreance)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지(無知)의 산물(産物)이며, 병자의 환각(幻覺)과도 같은 '상
대적인 나'의 위조품(僞造品)이다. '나'에 관한 환상적인 개념
은 그같이 특별한 경우에 뚜렷이 인식되지만, 사실상 늘 자신과
함께 있어 왔고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이제껏 우리는 이무
지의 산물을 신임(信任)해 온 셈이다. 환상의 '나'에 애착을 가
지고 숱한 정(情)을 쏟았었다. 더 쉽게 표현하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수억년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기사랑(利己)의 태도이다.
자신과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동포에 대한 집착의 결실이다. 뭇생명들의 정신적 품격(品
格)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고, 그들 각자가 집착하는 바도 큰
바다의 파도처럼 층(層)이 무수(無數)하다. 그러므로 그릇된
'나'와 '나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셀 수 없을
만큼의 번뇌를 초래하는 카르마(行爲)가 생성되는 것이다. 또
자신에게 해로운 듯한 사람들을 원수, 원수의 가족, 그의 친구,
그의 편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적의(敵意)를 품는다. 이 줄기차
게 끓어 오르는 미움의 불길은 대상 -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을
가리지 않는다. 가령, 외출할 참에 비가 퍼붑기 시작하면, 얼굴
을 찌푸리고 발끈 성을 낸다. 몸과 말과 마음의 문을 통하여 번
뇌를 초래하는 행위가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대상을 가리지 않
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와 이(利),해(害)관계가 없는 제 3
의 영역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사랑해 마지 않는 '나'와 전
적으로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까닭에 그들을 길 위에 굴
러다니는 돌 보듯이 무관심하게 대한다. 구태여 나의 편으로 끌
어 들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을 돌보려고도 하지 않는
다.
이러한 마음 태도는 자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나
사회, 국가, 심지어는 미세한 곤충에게서도 발견된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옛적부터 모든 삶과 더불어 왔기 때문이다. 자신 속
에서 이러한 마음 태도에 부합되는 행위가 일어나거든, 그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세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행위를 그만두면 된다. 아무리 해봐도 이러한 마음태
도를 자신의 행위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가 어리
석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단지 관찰이 바르지 못한 탓임을 명
심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이 그릇된 마음 태도를 근거
로 한다. 그런 까닭에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온갖 괴로움에 짓
눌려 왔다. 이후에 자기사랑에 입각한 삶이 그 원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한, 미래에도 상황은 동일할 것이다. 만물을 대하는 이
세가지 자의적(恣意的)인 태도를 바꾸려면, 바른 이성(理性)과
적절한 방법으로 내부적 혁명(internal revolution)을 일으켜야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로 이끄는
이른바 '친(親)한 이'를 정해 놓고 유별나게 집착하는 것일까?
많은 댓가를 치루면서 참으로 어이없다. 그들이 내게 도움을 주
므로 특별히 대해 주려는 것이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매우
그럴 듯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피상적(皮相的)이고 비논리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세상에 바로 그가 자신을 해롭히고
위협하고 자신의 살을 물어뜯었을런지 누가 알겠는가? 바로 그
가 자신을 부들부들 떨게 하고 분노케 했을 수도 있다. 윤회의
싸이클에서 벗어날 때 까지는 장래의 언제 어는 곳에서 그들이
다시 자신의 적이 되어 자신을 해칠런지 모른다. 가령 우정(友
情)이란 것의 덧없음을 이 생(生)에서도 분명히 경험하기는 어
렵지 않다. 작은 의견충돌도 좋은 친구를 시샘하는 적(敵)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가 사
탕 한 줌을 준다고 해서 당장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경
우도 마찬가지로 허망(虛妄)하기만 하다. 개인 사이에서 뿐 아
니라, 국가 간에도 관계가 좋았다가 나빠지는 현상은 허다하다.
마음이 후련할 때는 남이 자신에게 가한 해로운 행위를 되씹는
일은 비생산적이다. 차라리 그 순간, 친구나 가까운 이가 영원
하다는 확신(確信)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굳은 집착을 감소시키
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왜 우리는 자신이 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죽이고, 속이고,
외면하고, 해치지 못하여 안달을 하는가?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을 미워함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상적으로 무감각(無感
覺)하다. 여기에서도 '그들이 나를 괴롭히므로?'라는 이유를 거
부한다. 자신의 모든 괴로움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카르마가 초
래한 것이다. 다만 그 결과가 남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형태
로 맺혔을 따름이다. 현재는 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이 과거
세상의 어느 때는 자신에게 한량없는 친절을 베풀었을 수도 있
다. 우정이 매우 두터워서 "그대야말로 내 행복의 원천"이라 했
을 정도로 윤회의 수레바퀴에 휩쓸려 도는 한, 이와 같은 상호
의존적(相互依存的)상황은 끝나지 않는다. 생(生)에서도 오늘의
적(敵)이 끝까지 적으로 남는다는 법은 없다. 몇일, 몇달, 혹은
몇년 안에, 현재의 적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을런지 알 수 없다. 그러한
변덕의 예(例)는 정치 무대에서 흔히 발견된다. 여러해 동안 자
신에게 친절히 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잔소리, 거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주 유치하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자
신의 중요한 적으로 간주된다. 미움 자체는 포인트(point)가 없
다. 다만 자신의 혐오감을 줄이려고 노력할 일이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커다란 행복을 따라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커다란 고통을 더불어 슬퍼하지 않는가? 왜 자신
과 관계없는 일에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은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 없지만, 먼 과거 세상이나 아니면
장차라도 그들이 자신을 돕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들과 나
누는 단 몇 마디의 말도 장래에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기 마
련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함은 어리석은 일이
다.
이러한 식의 반성을 여러 해 동안 꾸준히 행하다 보면, 극단
적인 견해를 무너뜨리고 마음의 조화와 균형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다. 이와같은 튼튼한 기초없이 급히 얻어진 마음의 평정은
대단히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다. 약(藥)은 급성병 환자의 아픔
을 단 시간에 진정시켜 준다. 그러나 심한 병을 오랫동안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꾸준한 치료가 유일한 구제다.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나쁜 감정들, 의식 없이 고개를 쳐드는 자신
의 나쁜 감정들을 잘 관찰한 다음 세 종류의 생명에 대한 - 자
신이 사랑하는, 자신이 미워하는 - 태도의 메스로 매번 잘라 버
려야 한다.
보리심의 궁전을 짓기 위한 터마련의 방법은 이상과 같다. 그
러나 이 이치를 이해했다고 해서 마음의 평정이 성취되지는 않
는다. 애오라지 규칙적인 명상을 통해서만 마음의 조잡한 분별
과, 집착(執着), 방기(放棄)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동요(動搖)를
잠재울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얻어진 커다란 마음의 평화는 자
기 자신들에게 매우 이롭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자신의 마음의 평화가 아니
다. 수행의 참된 목적은 자신의 마음을 개발하여 모든 생명들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다.
이 첫째 단계는 매우 강한 집중(concentration, 止)을 필요로
한다. 진정한 마음의 변화는 단 시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
나 열 한 단계의 명상 방법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면, 각 단계를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뭇생명들의 끝간 데 없는 행복
그것만을 위해 몸 바치게 하소서
원래 나와 남은 차별 없는 것
자기자신의 기쁨에만 머물지 않사오며
뭇생명들의 터럭같은 고통도 바라지 않습니다."
2) 뭇 생명을 어머니같이
뭇 생명들을 도와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 비록 지금 현재
는 자신과 관계없는 듯 여겨지는 사람들 일지라도, 사실상 그들
과 자신 사이에는 매우 친밀한 끈으로 매듭져 있다. 그래서 그
들 모두를 도울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끈은 서로서로를 어머
니와 자식의 처지로 복잡하게 얽어매고 있다. 현재의 나는 결코
우연히 빚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없는 지난 생(生)의 산물(産
物)이다. 시작없는 옛적부터 네 가지 방법 - 자궁을 빌어서, 알
에서, 습기에서, 그리고 하늘 나라에 탄생할 때 처럼 갑자기 나
타나는 식으로 - 으로 수 많은 생을 되풀이 해왔다. 이 중에서
자궁을 빌거나 알에서 태어날 땐 반드시 어머니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태어난 햇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
므로 자신이 만났던 어머니도 그 수를 모를 정도일 것이다. 곰
곰이 생각해 보라. 세상에 한 번쯤 내 어머니 되지 않았던 생명
이 누구겠는가?
물론 이러한 논리가 설득력 있기는 매우 어렵다. 윤회의 참
모습과 자기 자신이 지난 세상에 수많은 생을 겪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설명만 갖고서 확신을 심어 주기란 애당
초 불가능하다. 바르고 합리적인 명상을 깊이 하면, 확신은 지
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직관(直觀)으로 닥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 까닭에 거의 모든 사
람들은, '삶은 다만 이 목숨 붙어 있을 때까지이며 윤회따위는
절대로 없다' 라는 그릇된 견해를 고집한다. 여기에 대해서 더
확고한 신념을 가지려면 의식의 본성(本性)과 존재방식, 말하자
면 의식(consciousness)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여전히 많은 의혹이 남을 것
이다.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단지, 갖가지 상이(相異)하고 거칠거칠한 생각들에
불과함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아무튼 일단 자신이 과거에
도 무수(無數)한 생을 겪었다는 확신만 서면, 뭇생명을 자기자
신의 어머니로 여기려는 명상은 큰 힘을 얻는다.
이 생에서의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반성이 필요없다. 이와 비슷하게 뭇생명들을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어머니를 대할 수 있다면, 이 단계의 명상은 성취된 것
이다. 자신의 어머니든, 한 마리의 짐승이든 똑 같은 사랑으로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훈련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은 자신이 인간의 아들이지만, 과거 어느 세상에서는 한 마리의
강아지였을런지 모른다. 겉 모습은 달라도 '어머니였고 아들이
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두 관계가 동일 한 것이다. 자신과 뭇생
명 사이의 이러한 맥락(脈絡)을 인정하는 마음 훈련이 곧 모든
생명을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는 수행이다. 이 단계와 마음의 평
정을 구하는 명상 사이에는 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다. 후자
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반면에 이 단계는 뭇생명에 대한 동
족의식(同族意識)과 평등한 감정을 기른다. 갓 떠오르는 태양은
평원(平原)을 두루 비추지만 그다지 만물에 따스함을 주지 않는
다. 태양이 점점 높이 솟아 오를수록 평원의 열기로 더해간다.
이 단계의 명상이 일출(日出)이라면, 다음 단계는 태양이 중천
(中天)에 떠오르면서 점점 강한 열기를 발산하는 모습이다.
3) 그 은혜를 생각함
뭇 생명들을 자신의 어머니같이 여길 뿐 아니라, 그 은혜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아
니 할 때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는 법이다.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는 어머니의 자궁안에서 보호받으며 귀하게 자라
고 있었다. 온전한 기쁨과 부족함 없는 배려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육체적 집이었고, 어머니의
행동의 자유까지 구속했다. 식사를 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어머니의 관심은 오로지 나의 안위(安危)와 건강에서 떠나지 않
았다. 어머니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다. 출생시
(出生時)에는 어머니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해드렸던가? 내가 세
상으로 나오자 어머니는 방금까지의 고통을 금새 잊어 버리고,
마치 귀중한 보배를 얻기나 한듯이 나를 안아들며 기뻐하셨다.
그때 아직 나는 몸을 다스릴 줄 몰랐으므로 연신 젖을 토하거나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래도 어머니는 조금도 귀찮아 하지 않고
자상하게 나를 달래셨다. 사랑이 철철 넘치는 눈길로 나는 내려
다 보며 내 이름을 불러 주신다.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어머니는 무한한 사랑을 쏟으셨다. 어머니의 그같은 사랑이 없
었던들 어떻게 오늘날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자식을 보살피는 것은 모든 어머니들의 의무라고 당연시 할
수도 있다. 거기에다 자식을 양육하는 것은 어머니 자신의 기쁨
도 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의 나를 있도록 해 주신 어머니의
한결같은 행위는 무슨 댓가를 바란다던가 누가 시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진 게 아니다. 분명히 모든 여인은 선택의 자유
가 있고, 어머니는 자식을 낳아 기르기를 선택하신 분이다. 어
머니라도 가끔은 이기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자신
의 이익과 자기 자식의 이익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에 부
딛칠 경우, 서슴없이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희생시키기 마련이
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댓가 없는 사랑과 보살핌이 비단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동물들에게서도 이같은 모습을
예사로 관찰할 수 있다.
아직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둥지에 뜻 밖의 적이 침입하면,
어미새는 목숨을 걸고 아기새를 지킨다. 어머새 자신도 뾰족한
부리 외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기 때문에 잘못하여 목숨을 잃기
도 한다.
과거 세상의 특별한 카르마로 말미암아 자식을 학대하는 어머
니도 지극히 예외적으로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모든 어머니들의
자식을 대하는 태도는 - 그 표현 방법이 어떠하건 - 사랑의 일
종이다. 아무튼 스스로의 마음을 계발하려고 결심한 이상 늘 문
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함이 마땅하다.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아
야 자신의 마음이 남을 이익되게 하려는 쪽으로 바뀌어 간다.
부정적인 태도의 삶은 얻을 것이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 - 비록 그가 나의 부모가 아니고 나의 자식이 아니더
라도 - 에 대한 앙심을 먹는 것은 삿되다. 모든 물리적, 정신적
괴로움은 하나 같이 자신의 카르마가 맺은 열매인 까닭이다. 고
통을 주는 특정한 사람들은 나의 열매를 날라다 주는 도구에 불
과하다. 남들이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은 자신에게 끼치는 해
(害)보다 훨씬 감미롭지 않은가?
윤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생(生)을 겪었다. 삶
의 괴로움을 벗기 위하여 또, 행복을 얻을 목적으로 언제나 '무
수한 남들'에게 의지해 왔다. 혼자만으로는 결코 그 일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힘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는 잠시라는 남들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는, 상호의존적
인 생활을 그만 둘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아주 고상하지도 않고 너무 천하지도 않은 인간 세계
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모든 생명들의 도움 덕분
이다. 과거 세상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온 훌륭한 벗들의 우정과
도움은 자신이 깨달음에로의 여행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이어진
다.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식품, 의류, 돈 등만 하더라도 그것
들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 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부
가 되었다. 물론 필수품, 사치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스스로의 목적 아래에서 그렇게 했겠지만, 그들의 노력 결과가
어쨋든 나를 이롭게 한 건 사실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인간은 편안하고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을 좋아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꺼린다. 직접적이건 간접적
이건 인간은 명예와 칭찬을 바란다. 이렇게 바라마지 않는 편안
함, 기쁨, 칭찬을 가까운 이가 아니라면 누가 자신에게 듬뿍 주
겠는가? 가까운 이와 좋은 친구의 도움 덕분에 윤회속이나마
우리의 삶이 제대로 굴러가는 셈이다. 그보다도 만일 그들이 없
다면, 정신적인 발전이 도무지 불가능하다. 대상삼을 뭇생명들
없이 어떻게 보살의 여섯 가지 실천덕목(六波羅蜜)이 있을 수가
있을까? 붓다가 되려면, 우리가 따라야 할 가르침을 베푸시는
붓다의 자비와 아울러 모든 생명들의 도움도 반드시 필요하다.
보리행경에서 산티데바(Santideva)보살이 이 점을 지적했다.
"자신이 붓다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여 붓다들과
모든 생명들의 덕을 입을진대
붓다께서는 예배와 공양을 드리면서
뭇생명들을 가볍게 여기나니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일인가?"
붓다와 뭇생명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습관화시켜야 한다.
한 가난한 농부에게 어떤 사람은 한 자루의 곡식 씨앗을 주고,
또 한 사람은 밭뙤기를 주었다. 농부는 누구에게 더 고마움을
느낄까? 아마 두 사람을 똑같이 은인으로 여길 것이다. 바로 붓
다는 나에게 다르마의 씨앗을 주셨다. 그리고 모든 생명들은 그
씨앗을 심고 가꾸어야 할 밭이다.
4) 그 은혜에 보답하기
이상에서 자신이 뭇 생명들에게 여러가지로 빚지고 있음을 알
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빨리 갚을 길을 찾아야 한다. 모든
생명들은 하나같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올바른 빚 갚음은 그들의 괴로움을 바로 알고 그
들에게서 괴로움을 제거해 주려는 노력이다. 우리의 다르마 수
행자는 대개 작은 구멍을 통하여 비치는 한 줄기 광선에 불과하
다. 그러나 보살(Boddhisattva)의 수행은 태양 빛의 홍수다. 자
신의 마음을 보살의 커다란 의식으로 바꾸는 노력에 진력(盡力)
해야 한다.
"무한한 자비의 힘 갖게 하소서
어머니가 망나니 아들 사랑하듯
고뇌에 찬 뭇생명들을 어찌할꼬 어찌할꼬
그 생각 끊이지 않게 하소서
내 어머니께서 내게 하셨듯이"
5) 남과 나를 동등히 여김
어머니 같은 뭇생명들의 은혜에 보답할 결의(決意)를 굳힌 후
에는 새로운 마음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과연 그들을 어떻게 도
울까? 그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서도 갖고 있는 것 -괴로움-
을 제거해 주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갈망하면서도 갖지
못한 것 -행복-을 선사해야 한다. 이러한 책임을 짊어질만한 강
한 힘을 찾아야 한다. 하나 하나의 생명을 꼭 그와 같이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야 한다. 나 자신의 괴로움도 지천인
판에 남의 괴로움까지 떠받을 것 까지야?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수행은 이러한 의구심을 깡그리 소
멸시키는데 목적을 둔다.
자신을 예로 삼아 볼 때, 이를테면 아주 작은 고통도 맞이하
기 싫다. 결국 모든 생명들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경험으로 미
루어 보면, 아무리 커다란 만족도 자신의 더 행복하고픈 욕망을
잠재우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덜 채
워진 만족으로 하여 마음이 산란하다. 이렇듯 나도 남도 지극한
기쁨을 못 가지고 산다. 우리가 갖는 세속적인 기쁨은 늘 제한
이 많다. 행복을 초래하는 행위(skillful action)가 온전한 기
쁨을 줄텐데도, 그것들은 독(毒)인 양 피한다. 죽기보다 싫은
고통이 연신 닥친다. 감각적인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 삶 그
자체의 괴로움,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모든 고통들은, 개가 고깃
덩어리를 좇듯이 맹렬하게 추구해 온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u
nskillful deed)의 결과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들의 생각과 감정은 공유(共有)영역이
넓다. 너나 할 것 없이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를 추구했으므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괴롭다. 우리는 모두 같은 틀(mo
ld)안에서 생산된 상(像)이다. 이와같이 모든 생명은 피차 같은
처지인 까닭에 유독 '나'를 별도로 고집함은 사리에 맞지 않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필요한 요건들은 역시 모든 생명들
에게도 필요하다. 남을 대할 때 자기 자신과 다름없이 해야하는
훌륭한 이유가 여기서 생긴다. 만일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제거
해야겠다고 절실히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무감각하
여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려는 생각이 시큰둥한 사람은
보리행경에 나오는 산티데바 보살의 충고를 들어야 한다.
"다리를 칼에 베었을 때, 손이 상처를 어루만지지 않던가? 다
리의 상처라고 손이 내버려 두는 일은 없다. 몸 전체가 괴로
움을 겪는 까닭에, 멀쩡한 손이 다리의 상처로 가는 것은 당
연하다."
이와 같이 남의 괴로움을 쓰다듬어 줄 책임을 느끼는 것은 자
연스럽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것은 곡물을 거둬 들이기 위해서지만,
줄기와 잎도 소중히 여긴다. 줄기와 잎은 부산물(副産物)에 불
과하나 그냥 내버려 두게 되면 수확이 성글기 때문이다. 마찬가
지로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없다고 해서 줄기와 잎에 견줄 수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소홀히
함은 어리석다. 눈으로 당장 확인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의
심이 일어날 소지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열렬히 호응해 마지않
는 노후생활에 대비한 저축은 그 이익이 당장 눈에 보이는가?
노후생활을 위한 저축은 그 이익이 즉시 확인되는 건 아니더라
도,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맺어질 장래의 명확한 때가
상상되기 때문에 쉽게 정당화 되는 것이다. 노후 생활저축은 기
꺼이 시작하면서, 큰 깨달음을 맺을 기약 아래 남을 이롭게 하
기를 망설이는 사람이야말로 근시안(近視眼)이다. 뭇생명들을
향한 이로운 행위도 다음 생에 반드시 열매 -청년이 노인 되는
과정이 수없이 합쳐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를 맺는다.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이 단계의 명상을 되풀이 하면, 나와 남
이 동등하다는 자각(自覺)이 생긴다. 그 밖에도 다른 생명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매우 많다. 이론적으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나 자신과 남이 동등함을
깨닫게 하소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노력함이
뭇생명을 구제하려는 일념인
붓다의 성스러운 행위와
어떻게 다른가 알게 하소서"
6) 이기심의 허물
뭇생명들 모두를 자기자신처럼 아껴야 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
를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자기 사랑의 태도에 집착하는 게
예사다. 가령 개 한마리가 폭우 속에서 비를 흠뻑 맞고 서 있어
도 우리는 별반 걱정하지 않는다. 만일 자기자신이 그같은 처
지에 놓여 있다면, 당황하고 고통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
다. 대개는 스스로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남은 덜 소중히 취급
하는데 익숙해 있다. 어느 때고 그런 느낌이 일어나면 당장 마
음을 바꿔 먹어야 한다. 소홀히 취급당하는 쪽이 상대방이 아니
고 자기자신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렇다고 극단적으
로 자기 소홀의 태도를 택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기 무시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붓다께서는 자기사랑의 태도를, 자기안에 많은 괴로움을 잉태
하고 있는 고질병과 같다고 하셨다. 자기 사랑은 깨달음을 방해
함과 아울러 자신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 항상 자기라는 작은
늪에 빠져 지내기 때문이다. 제일 저열한 지옥에서부터 가장 높
은 보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들이 아직껏 붓다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모든 번뇌의 뿌리인 이 자기 사랑
의 태도를 끝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벌레가 싸
우는 일, 두 나라 사이의 전쟁 등도 분명히 자기 사랑의 태도에
서 비롯된 나쁜 결과다. 그 순간에는 자신을 즐겁게 하겠지만,
자기 사랑은 보살의 수행을 가장 크게 방해한다. 자기 만족을
위하여 탐내고 욕심 부리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회피하고
자 성을 내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괴로움을 초래하는 카르마는
차곡차곡 쌓여간다.
자기 자신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가히 본능적 태도이
다. 이러한 생각을 모두 뒤엎어야 한다.
"자기 사랑이란 위대한 악마(惡魔)를
철저히 굴복시키게 하소서
그것은 심술궂은 괴물입니다
바라지 않는 고통의 원흉입니다
끈끈하게 달라붙는 고질병입니다"
7) 이타심(利他心)의 이익
이러한 태도는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서 계발할 가치가 충분하
다. 우리의 짧은 세속적 행복과 마찬가지로 깨달은 분(覺者)들
의 완전한 자유 역시 뭇생명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노력한 댓
가이다. 이 생에서 온전한 인간 몸을 받는 것은 지난 생에 폭
력, 살생, 해코지를 삼가한 덕택이다. 또 우리의 재산과 풍요한
생활은 과거에 즐겨 남에게 베풀고 인정(人情)을 쏟은 보답이
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다르마의 수레바퀴를 굴리
신 까닭도 모든 생명들을 향한 무한한 자비심에서 였다. 모든
수행의 성취는 결국 남을 이익되게 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수행에 있어서는 첫 단계 건, 중간 단계건, 완성 단계건, 최고
로 중요한 것은 이타심(利他心)이다. 개, 닭, 쥐 같은 동물들
조차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고 먹이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정을
주지만, 쌀쌀맞게 대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자신의 친구나 친
척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이는 세상에서 '고
상한 인품을 소유란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는 쉽다. 다르마에
문외한인 사람도 그렇게는 한다. 다만 혐오감을 풍기는 나쁜 성
품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군인들이 훈련
을 거듭하는 까닭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서 이다. 훈련
안된 군인은 별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르마의 수행자는 불
유쾌한 상황이나 괴팍한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
다. 세상 사람들에게 따돌림 받는 그들이니까 더욱 큰 사랑으로
감싸줘야 한다. 마음껏 베풀어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사
람들은 힘을 쭉 빠지게 만들지만, 그들이야말로 사실상 나의 스
승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보리심이 어느 정도 계발되
었는가를 측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붓다나 큰 스승이 뭇
생명의 모습으로 나투어 나를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다. 매일 방 안에만 들어 앉아서 이타심의 이익에 대한 명상만
행하면 태도에 실제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신 나머지.
불유쾌한 상황에서도 평소대로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다소의
순수한 진보가 이뤄진 셈이다. 한편 그같은 상황에서 평온하게
이타심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훈련에 더욱 분발해야 한
다. 주변에는 나를 단련시켜 줄 많은 남들이 있다. 국가가 자체
의 화력(火力)을 시험해 보고 결함이 발견되면, 더 효과적인 신
무기(新武器)를 개발하는 데 힘 쓴다. 이타심(利他心)이야말로
자기사랑(利己)의 태도를 무찌르는 무기(武器)이다. 외부의 적
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
는 자신의 사나운 적은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숨
쉰다. 깊이 생각하고 진지하게 실천하라. 이러한 교훈은 최악의
시기에 반드시 그대를 도울 것이다.
자기 사랑의 태도는 뿌리가 너무 깊어서 마치 인간 본성의 일
부분인 양 쉽게 뽑히지 않는다. 여러해를 두고 꾸준히 명상을
실천하는 동안 서서히 이타심으로 바뀌어 갈 뿐이다. 자기 자신
의 성역(聖域)을 침범한 적을 내버려 둘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묘하게도 최고로 해로운 침입자에 대해선 관대하다. 도리어 감
싸고 돈다. 이 오래묵은 몸 안에 새 마음을 심자. 그래야 자기
사랑의 태도가 이타심으로 툭 트인다.
8) 남을 나로 바꾸어 생각함
자기 사랑의 허물과 이타심의 이익을 충분히 알았다. 이제는
남을 나로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 태도를 실제로 연습해야 한다.
내가 남으로 변하고 남이 나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태
도를 가장 보편적인 수준 아래 둔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마음
태도에 익숙해지면 남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고
뇌하고 아파하게 된다. 남의 행복을 진정으로 축복하고 더불어
기뻐할 수 있다. 자기 자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모든 어
머니는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괴로워 한다. 자식이 즐거워 하면
어머니 역시 큰 행복을 느낀다. 자기 자신보다 자식을 더 귀중
히 여기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 태도는 자
식인 경우에 한 하지만, 다르마의 수행에서는 모든 생명을 대상
으로 한다.
"심지어 나를 괴롭히는 생명들까지도 자기 자신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 태도를 갖도록 하소서. 모든 생명을 어머니같이
여기는 마음 앞에 한량 없이 복된 삶의 문이 열려 있나이다."
9) 주고 받기
이 명상을 시작할 때에는 자기 사랑의 태도를 가슴 속의 한
개 검은 점이라고 상상한다. 모든 생명들은 여섯 세계(六道)에
나누어 살고 있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허덕이며 지내는 뭇생명
들을 떠올린다. 인간의 모습 -이를테면 동물같은 인간, 굶은 귀
신같은 인간, 아수라 같은 인간등- 으로 떠올려도 좋다. 이때
마음속으로부터 연민의 정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고통으로부터
뭇생명을 구제해 주고 싶은 강한 바램도 일어난다.
콧구멍으로 천천히 숨쉬면서, 뭇생명들의 정신적, 육체적 괴
로움이 검은 빛줄기로 변하여 가슴에 있는 자기 사랑의 검은 점
(点)으로 빨려들어 온다고 상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뭇생명들
이 깨끗함과 밝음을 등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한다. 이들의 모
든 고통을 자기 사랑의 죄과로서 스스로 기꺼이 받아 들인다.
뭇생명들이 행복을 구하고 있지만 늘 불행 속에 있다는 사실
을 인식하여,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마음을 낸다.
자기 자신의 모든 덕과 행복을 초래하는 카르마를 흰 빛줄기
로 상상한다. 숨을 내쉴 때, 그것이 자신의 코를 통해 뻗어나와
뭇생명들을 감싼다. 그 빛이 뭇 생명들의 몸과 마음에 닿으면
행복이 진하게 번진다.
뭇생명들의 고통을 들이쉬고 자신의 행복을 토해내기 전에,
우선은 심상(心象)을 뚜렷이 잡아 필요한 시간 만큼 마음 속에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충분히 익숙해지면 수시로 실행 할 수
있다. 또 모든 생명들을 약하고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받아들
여, 명상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선사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되풀이 하는 동안 마치 탑(塔)위에서 관망하듯,
드넓은 시각으로 뭇생명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
다음에는 물직적인 궁핍에 시달리는 뭇생명들의 괴로움과 물
질적인 안락에의 소망을 생각하자. 그들의 모든 괴로움 역시 자
신이 빨아들이고 자비의 빛을 토하여 그들의 소망을 채워준다.
그들의 어리석음과 괴로움은 다르마에 무지(無知)한 까닭이
다. 그들의 짐을 대신 짊어 지고, 지혜의 빛을 토해내어 그들
모두가 어리석음을 버리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도록
해 준다.
잘 훈련된 '고통을 들이쉬고 행복을 토하는' 이러한 호흡은
일반적인 수식관 (자신의 호흡을 뚜렷이 의식하는 호흡법) 과는
질(質)이 크게 다르다.
실제 행위가 아닌 단순한 상상만으로 실천하는 이와같은 수행
이 실용성(實用性)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은 정신적 에너지를 크게 계발한다. 참된 보리심과
커다란 덕행(德行)을 쌓을 바탕을 기른다. 순수한 동기로 실행
하면 한 생(生)에서 다음 생(生)으로 넘어갈 때 크게 도약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조만간 뭇생명들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행
복을 선사하겠다는 보증(保證)을 주는 행위다. 깨달음을 완성하
기 위하여 반드시 이루어야 할 준비과정이다.
더러움 단지에 무엇을 담으려면 우선 그 속을 깨끗이 씻는다.
마찬가지로 뭇생명들에게 행복을 가득 채워 주려면 먼저 그들의
괴로움을 씻어줘야 한다. 이와같이 뭇생명들의 고통을 꾸준히
받아들이면, 자기 사랑의 검은 점은 차츰 작아져서 마침내 소멸
한다.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점점 엷어져서 결국 공기 중
에 흩어지고 말듯이. 이 단계의 명상이 성숙할 무렵에는 뭇생명
들이 훨씬 행복해졌다는 신념을 갖게 되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
로 집중(concentration)을 유지할 수 있다.
"자기 사랑의 태도는 아무 짝에도 쓸 데 없으며, 붓다의 길은
무엇보다도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음을 아옵니다. 이 순간부터
모든 고통, 어머니 같은 뭇생명들의 부덕한 카르마와 장애(障
碍)는 내가 갖고, 그들에게는 모든 나의 행복과 덕(德)을 선사
하도록 자비로운 스승들이시여 축복하소서"
10) 거룩한 바램
이제 뭇생명들이 우리의 명상에 의하여, 실제로 행복을 얻게
되는지 생각해 보자. 사실상 자신의 명상이 남을 직접 돕지는
못한다. 오히려 명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없이 거룩한 바램
을 갖게 해 준다. 뭇생명들의 고통과 행복에 대한 절실한 관심
이 나의 수행노력을 부추켜, 그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지는 책
임을 스스로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삶 자체가 수많은
남들의 도움에 의존(依存)해 있는 이상, 그들에게 보답하는 일
을 다른 사람에게 미룸은 마땅하지 않다. 고통을 호소하며 나만
을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앞에서는 그저
남을 돕겠다고 외쳤지만, 이제는 "바로 나 자신이"이 그 일을
떠맡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예비 명상(豫備暝想, examination m
editation)이라 불리는 일련의 수행에 의하여 일어나는 마음 태
도이다. 이러한 사고가 깊어지고 철저해 질수록 자신의 숭고한
바램도 더 순수해지고 강렬해 진다.
11) 보리심(Bodhicitta)
이제 자기 자신의 거룩한 바램을 성취할 능력이 스스로에게
있는지를 조사해 보자. 나와 남들을 모든 괴로움에서 건지려는
바램은 강하지만, 오히려 모두가 괴로움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
- 일 자체가 역부족이라는 사실 -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생
사를 초월한 큰 아라한(Arhats)들에게도 모든 생명을 구제할 완
전한 힘은 없다. 뭇생명에 대한 무한한 자비를 가진 큰 보살(菩
薩, Bodlhi sattva)도 붓다의 도움을 빌어야 한다. 모든 능력을
갖추고 무엇이든 스스로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지신 분은 오직
붓다들 뿐이다.
지금의 내 의식은 구름에 가리운 태양이다. 구름이 걷힐수록
햇빛은 점점 밝아져, 마침내 온 산하대지(山河大地)를 찬란하고
밝은 빛으로 뒤덮는다. 마음도 이와같다. 보살의 수행 단계에서
번뇌의 구름이 걷히면 태양같은 지혜가 무한한 힘을 발휘한다.
번뇌의 장애(障碍)가 완전히 제거되고 지혜가 완성될 때, 그는
깨달은 이 곧 붓다다.
붓다의 지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태양 빛처럼 모든 사
물과 다르마를 평등하게 비춘다. 붓다는 태양같은 지혜로 뭇생
명들이 어떻게 완전한 자유를 얻을까를 아신다. 붓다는 지혜와
더불어 위대한 자비심을 지닌다. 그래서 뭇생명들의 완전한 행
복을 위해 쉴새없이 노력하면서도, 게으르거나 싫은 생각이 없
다. 위대한 자비심 때문에 늘 천한 생명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붓다 자신은 괴로움에 물들지 않는다. 요컨대 보살의 무한한 사
랑으로도 도저히 잴 수 없는 위대한 자비심을 가졌기 때문에 붓
다는 하나의 생명도 소홀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온 누리에 가득찬 지혜와 자비심 외에도 붓다는 모든 것을 성
취할 수 있는 힘을 갖추셨다. 붓다의 줄어 들지 않는 지혜, 자
비심, 힘은 항상 뭇생명들에게 열려 있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는 정오의 햇빛도 뒤집어 놓은 단지 속을 비추지 못하듯이,
다르마를 향해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는 붓다의 도움도 쓸
모가 없다.
이만하면 뭇생명들과 자기 자신을 행복으로 이끌고 싶은 숭고
한 바램을 성취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붓다가 되어 붓다의 지혜, 자비심, 힘을 얻는 도리밖에 없다.
뭇생명들을 위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강한 의지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보리심(Bodhicitta)이다.
어쩌다가 한 차례 그런 의지를 일으킨 것은 보리심, 곧 보살의
마음이 아니다. 몇 년이 건 꾸준히 실천해야 그러한 마음의 골
격이 형성된다. 고통받는 이들을 볼때마다 본능적으로 "저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마음이 반사적으로 일어날 정도 되도록. 바
로 그 마음이 순수한 보리심이다. 대승 보살의 첫 마음(初發心)
이다.
이 정도 성취에 만족하고 쉬어서는 안된다. 보리심은 붓다가
되는 그 날까지 결코 방일(放逸)하지 않겠다는 커다란 맹세이기
때문이다. 확고부동한 맹세를 세운 이상, 달성할 때까지 각 단
계의 수행을 철두철미하게 따라야 한다. 산 꼭대기에 황금 송아
지가 있다해도 가져야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아주 불충분하다. 집
을 나서서 산에 올라 둘러메고 내려와야 한다. 모든 생명은 붓
다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모든 다르마의 성품은 비어있다
(제한이 없다). 마음의 성품도 비어있다. 이 제한없는 마음이
바로 깨달음의 자리다. 그러므로 붓다는 초월적 존재이며 나는
결코 그 분과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완전히 모순이다.
철(鐵)은 철광석에서 나오는 법, 지식과 기술이 철광석을 철
로 바꾼다. 마찬가지로 씨앗같은 저마다의 마음도 명상과 실천
을 통하여 붓다의 지혜로 변모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보리심을 계발하고 싶은가? 여기 그 방법이 있다.
"메마른 들판에도 더 없이 귀한
보리심의 싹 움트게 하소서
이미 정갈하게 싹터 있는 보리심
성장 멈추는 일 없게 하소서"
4. 마 음 훈 련
명상하는 시간이 아닌 평소의 생활에서는 명상을 통해 느낀
것을 실제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훈련에 관련하여 많은
사항이 얘기되지만,까담빠, 게쉬, 까와 (Khadampa,Geshe,Kawa)
는 특히 일곱 가지로 구분해서 요약했다.
1) 마음 훈련을 위한 기초 다지기.
보리심을 계발하려면 무엇보다도 덧없음, 온전한 인간 몸받기
등 이제까지 제시한 명상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2) 실제로 보리심을 일으킴.
두 가지 전형(典型)의 보리심이 있다.
A. 자비심을 근본조건으로 하는 전통적인 타입.
B. 수냐타(Sunyata)의 깨달음을 절대조건으로 하는 타입.
3) 어떠한 상황에서도 순수한 보리심을 실천할 수 있을 것.
병들어 누웠을 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병은 내가 지난 생에
저지른 고통을 초래하는 카르마의 댓가이다. 내가 받는 이 괴로
움이 뭇생명들의 고통을 대신 할 수 있게 하소서.' 풍족하고 건
강할 때도 보리심의 실천을 잊지 않는다.
4) 일생 동안 모든 에너지를 다섯 가지 힘에 집중할 것.
다섯 가지 힘은 아래와 같다.
a. 바람직한 의도를 갖는 힘.
이 순간부터 붓다가 되는 그날까지 보리심 하나에 모든 힘을
기울이기로 작정한다.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사를 보
리심 계발과 결부시킨다.
b. 아는 힘.
몸, 말,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보리심 계발의 수단이
됨을 안다.
c. 깨끗한 행위의 힘.
순수하고 선한 모든 행위는 보리심 계발에 직결(直結)된다.
d. 자기 사랑의 태도를 싫어하고 불안히 여기는 힘.
e. 기도하는 힘.
마음이 보리심의 계발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게 염원한다.
5) 보리심의 계발 정도를 측정함.
명상을 행할 때건 아니건, 보리심을 생각할 때건 아니건, 어
떤 상황에서 건 뭇생명을 향한 한 없는 자비심이 저절로 우러나
는가 살펴서 자기 자신의 보리심 계발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완전한 인욕(忍辱)을 성취한 사람, 혹은 숙련된 마부(馬夫)처럼
자유자재한 본성(本性)으로 우러날 때까지 노력한다.
6) 열 여덟 가지 공약(公約)
a. 마음을 훈련하겠다는 맹세를 어기지않음 : 가령 히나야라
(Hinayana,小乘)를 경멸하는 따위도 보리심 실천의 바탕을 범하
는 행위다.
b. 목적없이 땅을 파거나, 식물을 꺾고 베거나, 뭇생명들의
삶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음 : 늘 뭇생명들의 안위(安危)를
고려해서 행동해야 한다.
c. 보리심의 실천을 이해관계에 치우쳐 행하지 않음 : 인척이
나 친구만을 위하여 보리심을 실천하지 말라. 단 한 생명도 수
행 대상에서 제외하면 안된다.
d. 자신이 보리심을 계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보이려고
애쓰지 아니함. 섣불리 생색을 내며 나서서 공연히 화합을 깨뜨
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e. 누구를 비평하거나 험담하지 않음 : 바로 그가 보살의 나
투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괜히 보살을 욕되게 하여 훌륭한 결
과를 가져올 기회를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f. 남의 허물을 보지 않음 : 혹 보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음 :
자기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이 지혜요, 남의 허물을 지나쳐 버
리는 게 덕(德)이다.
g. 스스로를 살펴 가장 큰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바
로 그것에 우선 관심을 둠.
h. 선한 행위를 할 때 댓가를 바라지 않음 : 깨끗하고 이기심
(利己心)없는 동기로 뭇생명을 도와야 한다.
i. 순수한 보리심의 수행에 '나'라는 집착, 자기 사랑의 태
도, '나'에게 본질이 있다는 생각 등의 독(毒)을 섞어 넣지 않
음 : 훌륭한 음식물을 독물(毒物)로 못쓰게 만들 이유가 없다.
j. 자기를 해롭게 하는 이들에게 앙심을 품지 않음 : 앙갚음
을 하지도 말고 보복을 꾀하지도 않는다.
k. 친절하게 응수해 오지 않고 욕설을 퍼붓더라도 끝까지 참
음.
l. 자기 자신의 번뇌(煩惱)가 하는 대로 너그러이 놓아 두지
않음.
m. 어떠한 경우에도 뼈있는(날카로운)말로써 남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지 않음.
n. 비난을 피할 요량으로 전가하지 않음 : 또 자기 자신의 책
임이나 부담을 남에게 떠맡기지 않는다.
o. 남의 재산이나 공(功)을 가로채거나 자기의 것인 양 사용
하지 않음 :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만 해도 마음 훈련에 혼란이
발생한다.
p. 악귀(惡鬼)를 좇거나 액운(厄運)을 벗어날 목적으로 보리
심을 계발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 : 오직 모든 생명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순수한 동기만 용인(容認)된다.
q. 보리심의 실천에 성취감을 느껴 우월의식(優越意識)에 사
로잡히지 않음.
r.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려
는 생각을 버림 : 마치 부왕(父王)이 죽기를 고대하는 고약한
태자(太子)처럼.
7) 마음 훈련에 관한 도움말.
a. 수많은 세속적 행위에는 제각기 스스로에 걸맞는 요가(Yog
as)가 있다. 어떤 일에 종사하던 매사를 뭇생명들의 이익에 기
여하는 이기심없는 태도로 일관(一貫)하는 것이다. 보리심의 수
행을 통하여 마음이 '나'라는 독단(獨斷)에서 떠나 남들에게로
열려있기 때문에, 식사 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뭇생명들을
이롭게 할 이 몸을 부지하기 위하여 음식을 섭취한다' 불을 끄
고 잠자리에 들 때에는, '이제 악한 세계(지옥, 굶은 귀신, 동
물의 세계)로의 문은 닫혔다' 라고 생각한다. 매일매일의 행위
를 이와같은 태도로 행해야한다.
b. 남들이 나에게 퍼부은 저주를 제거할 목적으로 만트라를
사용하려 들지 말라. 그럴 때는 자신과 남을 바꾸는 보리심을
생각하라. 그래서 도리어 자비심으로 되갚는다.
c. 무슨 일이든 보리심의 동기에서 시작하고, 그 복(福)을 자
신과 모든 생명들의 깨달음을 위해 바침으로써 끝맺는다. 잠에
서 깨어날 때 생각한다. '오늘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뭇생명들
을 위한 것이다' 잠자리에 들 때에도 장사꾼처럼 돈을 세는 게
아니다. 덕행(德行)을 얼마만큼 했는가 셈해 본다. 좋지 못했던
행위를 기억하여, 네 가지 돌이키는 힘을 써서 정화(淨化)해야
한다.
d. 어떠한 생활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생활이 마음 훈련
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병을 앓을 때는 '지금 내가 겪는 이 아
픔이 뭇생명들의 아픔을 대신하는 것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생
각한다. 행복에 취(醉)하여 다르마를 잊기 쉬울 때는 이렇게 유
념해야 한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은 과거에 행한 선(善)
한 카르마의 댓가이다. 장래에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쉬지말고
훌륭한 행위를 쌓아야 한다.'
e. 모든 순수한 맹세, 특히 마음 훈련의 공약(公約)을 굳게
지킨다.
f.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는 네 가지 돌이키는
힘으로써 그 행위를 정화시킨다. 다시는 그러한 행위를 짓지 않
으려고 노력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야기하는 번뇌(煩惱)를 없애는 데에
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번뇌를 똑바로 인식하기 어렵다. 둘째, 뚜렷이 알아차
린다 해도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네 가지 돌이키는 힘을 적용시
키기 어렵다. 세째, 끝없이 이어지는 번뇌를 완전히 끊어 버리
기 힘들다.
g. 다르마 수행에 적합한 조건을 만든다.
첫째, 정신적인 스승을 찾아 모신다. 둘째, 마음을 수행에 적
합한 상태로 계발하고 다듬는다. 세째, 음식물, 옷가지 등 필요
한 물품을 장만한다.
h. 세 가지 물러서지 않는 자세로 명상한다.
첫째, 정신적인 스승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둘째, 마음
훈련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 세째, 청정한 계(戒, Sila)를
잃지 않는다.
i. 몸과 입과 마음으로 행위할 때 도덕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j. 뭇생명들을 편견없이 평등하게 대한다.
k. 산만하게 고개를 쳐드는 모든 생각들을 오직 마음 훈련에
겨눈다.
l. 사랑과 연민을 계발한다. 특히 자기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의 고뇌를 위로하는데 눈 떠라. 자주 접촉하는 사이 일수록 화
내고 신경질낼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m. 생활 조건이 아무리 부적당하더라도 마음 훈련을 당장 시
작하라.
n. 나와 남을 바꾸어 생각하는 보리심을 계발함으로써 다르마
의 수행에 최선을 다하라. 지금 온 힘을 다하면 장래에 반드시
결실이 있다.
o.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르마 수행이야말로 자장가다. 그들은
세속적인 일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다.
버려야 할 여섯 가지 뒤바뀐 행위가 있다.
첫째, 뒤바뀐 참을성. 세속의 일은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해
내면서, 다르마 수행의 어려움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것.
둘째, 뒤바뀐 취향. 세속의 유희와 거래는 즐기면서 다르마
수행은 시큰둥하게 여기는 것.
세째, 뒤바뀐 자비심. 비록 재산은 있지만 윤회에 빠져있는
세속 사람들 대신에, 가난한 수행자를 가련하게 여기는 것.
네째, 뒤바뀐 바램. 다르마에 대한 통찰 대신 세속의 쾌락을
바라는 것.
다섯째, 뒤바뀐 베품. 다르마의 가르침을 베푸는 대신에 돈이
나 윤회에의 유혹거리를 베푸는 것.
여섯째, 자신과 남의 바람직한 행위를 기뻐하기 보단 적(敵)
의 고통과 불행을 즐거워하는 것. 게쉬 포타와(Geshe Potawa)는
남의 부덕(不德)한 행위를 기뻐하는 것이 부덕한 행위 그 자체
보다 나쁘다고 가르쳤다.
p. 다르마 수행을 산(山)같이 안정되게 한다. 조용한 환경에
서만 수행하려 들지 말라. 순조롭지 않은 환경에서의 수행이야
말로 자기 훈련에 크게 효과가 있다.
q. 마음 훈련은 한마음(一心)으로 행해져야 한다. 갈등을 느
끼며 하다 말다 하는 산만한 태도는 좋지 않다.
r. 번뇌를 제거하는데 특별히 마음을 쓴다. 번뇌의 힘은 결코
불가항력(不可抗力)이 아니다. 적절한 지혜가 자리를 차지하면
번뇌는 아무 맥도 못춘다.
s. 남을 도우면서 뻐기지 않는다. 마땅히 자신이 해야할 일로
여길 뿐 아니라 그러한 기회를 준 그들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
t.적개심(嫡慨心)을 완전히 버리고, 면전에서 비난 받더라도
성내지 않는다. 면박을 당하거나 성가신 처지에 놓일 때 능히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u. 훌륭한 평판을 얻을 욕심으로 자랑삼아 다르마를 수행해서
는 안된다.
v. 실제의 체험을 얻을 때까지 자기가 하고 있는 수행을 꾸준
히 한다. 변덕을 부려 성급히 다음 단계로 뛰어들지 말라.
5) 절 (Prostration, 拜)
절(拜)은 자기가 의지하는 분에 대해 행해지거나 구루 요가
(Guru Yoga)의 한 부분으로써 수행된다. 절은 괴로움을 초래하
는 카르마 - 특히 육체적 카르마 - 의 씨앗을 정화하는 가장 훌
륭한 방법의 하나다. 카르마의 장애와 번뇌를 소멸시키며 특히
아만(我漫)을 꺾는 효능을 발휘한다. 티벳어 '착첼(phyal tsh
al)'은 '손을 청하다' 란 뜻인데, 붓다의 수중(手中)에 있는 몸
․말․마음의 덕성(德性)을 자신도 부여받기를 청하는 것이다.
몸의 정해진 부위와 관련된 절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
는 정수리와 이마, 목, 가슴 등 네 부위의 한가운데를 차례차례
닿게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정수리와 목․가슴을
닿게 하는 방법이다. 뒤의 방법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정수리를 닿게 하는 것은 붓다의 몸을 얻으려는 바램을, 목을
닿게 하는 것은 붓다의 말씀을, 가슴을 닿게 하는 것은 붓다의
마음을 얻으려는 바램을 각각 상징한다. 이 세 가지 - 붓다의
몸․말씀․마음 - 를 성취하려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지혜와 방편(方便)을 마스터해야 한다. 몸의 세 부위를 닿게 할
때, 우리의 합장한 손이 바로 이 지혜와 방편을 상징한다. 합장
(合掌)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마하야나(Mahayana,
대승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마주붙인 손바닥 안에 엄지 손가락
을 숨긴다.
단지 무릎이나 이마 그리고 손바닥을 땅에 닿게 하여 절할 수
도 있고, 몸 전체를 완전히 땅에 닿게 하여 완벽한 절을 행할
수도 있다. 공간이 넉넉하다면 언제나 완벽한 절을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아무튼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것이 포인트다. 휴식
은 땅에 엎드려 있는 동안이 아니라, 몸을 일으키고 난 후에 취
한다. 모든 사항이 올바른 절차에 걸맞도록 각별히 신경써야 한
다. 규칙을 잘 알면서도 그것에 따르지 않는 일은 예사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절하는 도중에 게으른 생각을 일으켜 엎드린
채로 쉬는 행위는 불운한 재생(再生)을 초래한다. 몸을 일으킬
때에는 반드시 손바닥으로 땅을 짚어야 한다. 손가락 관절로 떠
받치고 일어나는 것은 절의 대상에 대한 경시(輕視)- 귀찮고 진
지하지 않다는 표시이므로 -를 의미한다. 그 댓가로 그는 장래
에 고창증(鼓脹症)있는 동물로 태어난다. 잘못 행해지는 절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영양가 높은 음식물도 잘못 조리해
먹으면 목숨을 앗아가듯이.
절은 완벽할수록 효과적이다. 쭉 뻗친 몸에 닿는 땅의 원자(a
toms)수에 비례하는 공덕이 절의 결과로 축적되는 까닭이다. 올
바른 의도로 절차에 맞게 행해진 절의 결과는 굉장히 커서, 그
공덕으로 말미암아 장차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만주쓰리 비끄리디따 쑤뜨라(Manjusrivikridita sutra :
文殊師利 神變經)에서 붓다 번뇌있는 절의 허물과 순수한 절의
이익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이와같이 절은 덕(德)을 쌓는 강력
한 수단이다. 만일 절의 수행을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잠재적 효능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는 그 방법이 옳지 않았거나.
자기 자신의 마음밭에 모든 행복을 초래하는 카르마의 생육(生
育)을 방해할 정도로 강한 미혹(迷惑)이 무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경에 붓다는 문수보살에게 말한다. "모든 번뇌 가운데에서 증
오(憎惡)가 가장 파괴적이다. 증오는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행
복을 부르는 행위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절을 하는 동안 트리스칸다 경(Triskandha sutra)을 암송한
다. 35분의 붓다 이름을 부르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키
지 못해왔던 허물을 참회하는 것이다. 한 차례의 암송이 끝날
때마다 약 40여 회의 절을 하게 된다. 세 가지 측면의 절이 동
시에 이루어진다. 몸을 움직이면서 육체의 절을, 경을 암송함으
로써 언어(言語)의 절을, 대상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짐으로
써 정신의 절을 성취하는 셈이다.
처음에는 50회 정도의 절을 시도하다가 100회, 150회 ? 로 차
츰 횟수를 늘여가는 게 현명하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목표를
세웠다가는 마음 먹었던 것과 딴판으로 지쳐버리기 일수다.
6) 금 강 살 타 수행법 (Vajrasattva-Sadhana)
이 사다나(修行法)는 파트마․카포(Padma-karpo)의 저서에 나
오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서는 초보 단계를 가르치고자 하는
까닭에, 그의 방법은 설명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정수리 위에 연꽃 의자를 떠올린다. 의자 위에
금강살타(Vajrasattva)가 앉아계신 빛나는 달모양의 원반(圓槃)
을 얹는다. 금강살타는 붓다의 모습을 하고 자기 자신과 같은
방향을 향하신다. 그는 붓다의 정화력(淨化力)의 표현이다. 붓
다의 청정(淸淨)함을 상징하는 흰 빛이 그의 몸에서 뻗친다. 하
나의 얼굴과 두 개의 팔을 가졌는데, 오른 손에는 위대한 자비
(Upaya)를 나타내는 금강저(金剛杵, vajra)를, 왼손에는 위대한
지혜(prjna)를 뜻하는 방울(鈴)을 쥐고 있다. 지혜와 자비는 새
의 두 날개와 같아서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더불어 갖춰
져야 한다. 그는 또 아름다운 장신구로 온몸을 꾸미고, 은색 천
을 두르고 있다. 항상 젊고 다이나믹한 모습으로 나투는데 무한
한 에너지와 실천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금강좌(金剛坐, Va
jra posture)의 자세로 앉아서 자비로운 눈빛으로 뭇생명들을
내려다 본다.
이상과 같이 떠올린 다음 그 대상에의 믿음과 보리심을 가다
듬고 다음의 여섯 싯귀를 암송한다. 맨 마지막에는 자신의 덕행
을 뭇생명들에게 바치는 것(廻向)으로 맺는다.
# 귀의(歸依)와 보리심 일으키기
깨달음을 성취하는 날까지 붓다와 다르마와 큰 스승들께 돌아
가 의지합니다. 모든 수행에서 얻은 공덕(功德)으로 뭇생명들을
구제하는 붓다 되게 하소서.
# 절(拜)
수십억 세계에 머무시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붓다와 다
르마와 큰 스승들께 수없이 경건하게 절하옵니다. 보살께서 머
무시는 모든 성스러운 자리에 예배하며 그분들께 경건한 믿음을
드립니다.
# 공양(供養)
문수보살과 다른 보살들께서 그랬듯이, 저 역시 모든 붓다와
보살들께 공양 올립니다. 보리심을 계발하기 위하여.
# 참회(懺悔)
시작없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윤회에 빠져서, 그릇되고 괴로움
을 초래하는 행위를 수없이 저지르고 또 남까지도 그렇게 하도
록 했습니다. 어리석고 미혹한 나머지 세속의 쾌락을 좇다가 그
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제 모든 붓다와 보살께 순수한 마음
으로 제가 지은 죄 모두 자백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네
가지 돌이키는 힘으로써 모든 허물을 정화(淨化)시키렵니다. 어
리석고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범한 해로운 실수와 생활에서 바르
게 이해하고 알지 못한 실수 모두를 깨달으신 분 앞에 털어 놓
습니다. 붓다여, 다시는 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지 않겠나이다.
# 더불어 기뻐함
모든 생명들에게 행복을 주는 자비로운 행위에 더불어 기뻐합
니다. 모든 생명들을 평화롭게 하시는 붓다와 보살의 행위에 더
불어 기뻐합니다. 뭇생명들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시려는 붓다와
보살의 바다같은 바램에 더불어 기뻐합니다.
# 다르마의 수레바퀴 굴리시기를 간청함
두 손 모으고 간절히 청하옵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뭇생
명들을 위하여 모든 곳에서 다르마의 등불을 밝히소서.
# 붓다께서 세상에 출현해 오래 계시기를 간청함
두 손 모으로 진심으로 청하옵니다. 완전한 열반(涅槃)에 들
지 마시고, 이 세상이 어둠에 물들지 않도록 부디 오래오래 머
무소서.
이때 금강살타의 가슴 부위에 있는 "빛의 고리" 위에 "훔(HU
M)"이라는 흰 글자가 나타난다. "훔"의 둘레를 시계 방향으로
만트라(呪文, mantra)의 흰 글자가 에워싼다. 만트라의 각 음절
(音節)로 부터 감로수(甘露水)가 샘솟는다. 음절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일으키고, 광채를 내뿜는다. 이쯤에서 다음과 같이 기
원한다.
"성자 금강살타여, 저와 모든 생명들을 그릇된 행위․번뇌에
서 자유롭게 하소서. 일찍이 세웠던 거룩한 맹세를 영원토록 어
기지 않게 하소서"
이 기원이 받아들여지면 금강살타의 가슴 부위에 있는 "훔"이
빛을 낸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기원하는 사람의 해로운 카르마
와 미혹(迷惑)이 깨끗이 씻긴다. 붓다와 큰 스승들이 한결같이
기뻐하신다. 깨달으신 분들의 거룩하신 덕(德)이 빛으로 "훔"속
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금강살타를 지혜와 힘의
결정체라 부른다.
"옴 바즈라사트바 사마야 마누파라야 바즈라사트바 테노파 티
쉬타 드르도 메 브하바 수토 쉬요 메 브하바 수포 쉬요 메 브하
바 아느라크토 메 브하바 사르브하싯디 메 프라야짜 사르바 다
르마 수짜 메 찌탐 쉬리얌쿠루 훔 하 하 하 하 호 바가밤 사르
바 타타가타 바즈라 마메 문짜 바즈리 브하바 마하 사마야 사트
바 아훔 페"
알맞은 목소리와 빠르기로 이 만트라를 외는 동안 금강살타의
몸 전체가 만트라의 각 음절에서 샘솟는 감로수로 충만하다고
떠올린다. 그 감로수가 정수리를 통해 나의 몸 속으로 들어온
다. 그러면 몸과 마음의 모든 부정(不淨)이 더러운 물․전갈․
거미․다른 검은 물질로 변하여 쫓겨 나간다. 몸 밖으로 밀려난
더러운 것들은 이내 땅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대지(大地)는 모
든 더러움과 부패를 받아들여 분해시키기 때문이다.
다시금 기도한다.
"어리석고 망령되어서
스스로의 거룩한 맹세를 어기고 흠냈습니다.
큰 스승, 지켜주시는 분, 돌아가 의지할 분이여!
금강저와 방울을 지니신 가장 존귀한 분,
자비의 화신이신 당신께 온 마음 바치나이다"
그때, 금강살타께서 대답하신다.
"오, 착한 사람이여, 그대 해로운 카르마와 마음의 때, 거
룩한 맹세를 어긴 허물이 이미 깨끗하게 씻겼도다."
이렇게 말하면서 금강살타께서는 나의 안으로 들어와 나의 몸
․말․마음이 덕(德)으로 그득하게 하신다.
# 나의 공덕을 뭇생명들에게로 돌림
"이와같은 덕(德)을 성취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훌륭한 행위
를 쌓아온 것은 뭇생명들을 덮고 있는 괴로움의 장막을 걷어 줄
힘을 얻고자 함입니다. 원컨대 저의 모든 공덕이 모든 생명들의
괴로움 소멸에 쓰이게 하소서. 제 자신만을 위한 인품(人品),
제 자신만을 위한 소유(所有), 제 자신만을 위한 공덕(功德)을
모조리 포기합니다. 흙․물․불․공기가 우주의 한량없는 생명
이라도 고통을 겪는 한 저는 언제까지나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불이 되고, 공기가 되오리이다."
부덕(不德)을 깨끗이 하려면 반드시 계발해야 할 "네 가지 돌
이키는 힘"이 있다.
첫째, 뉘우치는 힘.
어떤 사람이 잘못하여 독약을 마셨을 때, 그는 당장 그렇게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 문제가 생기면 지나간 일을 조목조
목 따져 가면서 후회하고 괴로워 하는 게 예사지만, 그렇게 쓸
데없는 후회를 하는 대신 현재 혹은 지난 생에 행여 고통을 초
래하는 행위를 저지른 일이 없는가를 반성하여 바로 그 원인적
행위를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뉘우쳐야 한다.
둘째,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힘.
한번 해로운 음식물을 먹고 혼줄이 빠진 사람은 다시는 그러
지 않겠다고 결심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뉘우친 사람은 이
생에서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결단코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되풀이 않기로 결단해야 한다. 당장에 그런 엄청난 결단
을 내릴 자신이 없으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결심을 세우고 굳혀
나가야 한다.
세째, 의지(依支하는 힘.
의지할 대상(믿음의 대상)을 가져야 한다. 붓다의 시현(示顯)
이신 금강살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보리심을 계발해야 한다.
땅에 엎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이, 고통을 초래하
는 카르마의 씨앗을 깨끗이 하려면 반드시 세 가지 보배(붓다,
다르마, 스승)에 의지하고 뭇생명을 구제하겠다는 보리심을 일
궈야 한다.
네째, 치료의 힘.
자기안에 저장되있는 고통을 초래하는 카르마를 정화시키는
데에는 금강살타의 만트라(呪文)를 외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 네 가지 돌이키는 힘을 굳게 지니고, 적어도 매일 스물 한
번씩 만트라를 외워야 한다. 십만 번 이상이 될 때까지 하루도
건너 뛰지 말아야 한다. 이 수행에 깊이 들어가면, 자신이 깨끗
해지고 있다는 징표(徵表)가 꿈 속에서 거듭 보인다. 더러운 것
을 토해 내거나, 우유나 응유(凝乳)를 마신다든지, 혹은 목욕을
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자기의 스승이나 세 가지 보배(붓다․
다르마․스승)에 대한 믿음과 집중력 역시 더욱 강해져서, 세속
의 생활 중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만트라를 암송하면 금
강살타와 자신이 일체가 되기 때문에 과거에 저지른 고통을 초
래하는 카르마의 씨앗도 소멸하고 거룩한 맹세를 어긴 허물도
씻을 수 있다.
7) 만 달 라 공양
만달라(Mandala)는 정수(精髓)를 뽑는다는 뜻이다. 매우 단순
한 수행이지만 덕을 쌓는데 효과가 크다. 만달라 공양은 더러움
과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에게 '바치는' 행위이다. 그런 까
닭에 매우 유익하다. 만달라의 바탕(base)은 지름이 약 6 인치
가량 되는 둥근 판(板)이다. 가능하면 은(銀)처럼 귀중한 재료
로 만들지만, 돌이나 나무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재료로
되어 있건, 만달라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붓다의 성품을 상징
하는 황금 판으로 떠올린다. 바치는 물건은 보통 신선한 곡식,
즉 밀․쌀 등이다. 귀중한 돌․목걸이․반지․가락지 등을 공양
하기도 한다.
우선 약간의 쌀이나 밀을 왼손 바닥에 올려 놓고 만달라 판(b
ase)이 가슴 높이 정도 되도록 맞춘다. 오른손으로 쌀알을 집어
판의 중앙에 떨어뜨린다. 만트라를 외고 보리심을 다짐하면서,
오른 쪽 앞 팔을 시계방향으로 세 번, 혹은 그 이상 바탕에 문
질러 쌀알을 쓸어 내린다. 이것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세 가지
독(三毒) 즉, 집착․성냄․어리석음을 제거하는 행위를 뜻한다.
지혜의 신경(nerve)선이 오른팔 앞을 따라 달리기 때문에, 오른
팔 앞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제 쌀알을 다시 판의 한 가운데 떨어뜨리고 이번에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세 번 쓸어 내린다. 붓다의 몸과 말과 마음의 덕
을 자신도 얻고자 바램을 뜻한다.
다음에는 손에 있는 쌀알을 만달라 판의 한가운데 붓는다. 그
리고 새로 한 줌의 쌀을 쥐어 바탕의 가장자리 네 군데에 시계
방향으로 더미를 쌓는다.
한가운데 있는 무더기는 수미산(須彌山, Mount Meru)을 상징
하고, 가장 자리의 네 군데는 사대주(四大州)다. 수미산 옆에
두 더미를 더 쌓는데 그것은 해와 달을 가르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귀함과 아름다움을 바치는 것이
다. 그때 다음의 시를 왼다.
"제 앞에 만달라로 모습을 나투신 붓다들께
꽃․향․향수와 수미산․사대주․해․달을 모두
바칩니다.
이 공덕 모든 생명들에게 베푸소서"
이렇게 공양 드리고 난 후, 만달라를 몸쪽으로 기울도록 살짝
건드린다. 쌀이 자신의 무릎 위로 쏟아짐은 거룩한 분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주 전체를 바치려는 것이 어리석은 발
상인 것 같지만, 찌꺼기없이 모든 것을 바쳐 버리는 마음 태도
를 계발함으로써 장차 커다란 결실을 이루게 한다. 어느 때 한
왕(王)이 붓다와 그 제자들께 공양을 드렸다. 왕의 행동을 지켜
보던 거지 한 사람이 덩달아 기뻐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더불어 기뻐한 거지의 공덕(功德)이 실제로 공양한 왕의 그것보
다 훨씬 크다고. 순수한 마음(찌꺼기 없는 마음)의 공양에 미칠
수 있는 물질적인 공양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만달라 공양을 또한 여섯 가지 완성에 대한 수행을 포함한다.
첫째, 물에 향로를 섞어서 만달라 판을 늘 깨끗이 닦는 수행
은 보시(佈施, 베품)의 완성을 기약한다. 물은 번영과 풍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둘째, 만달라 판을 소중히 하고 깨끗이 유지하는 수행은 지계
(持戒, 계율을 지킴)의 완성을 기약한다. 지계는 모든 수행의
기초다.
세째, 공양을 시작하기 전에 곡식에서 곤충과 벌레를 조심스
레 골라내는 일은 인욕(忍辱, 욕됨을 참음)의 완성을 기약한다.
네재, 즐거운 마음으로 적극 만달라에 공양하는 일은 자비의
완성을 기약한다.
다섯째, 만달라에 공양할 때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은 명상
(嬋)의 완성을 기약한다.
여섯째, 수냐타(sunyata, 空)를 바르게 이해하고 만달라에 공
양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을 기약한다.
만달라 공양에도 네 가지 계위(階位, level)가 있다. 바깥 공
양, 안 공양, 비밀 공양, 절대 공양, 기초수행 단계이므로 여기
에서는 '바깥 공양'에 대해서만 설명했다. 각자 적어도 십만 번
은 거듭 실천해야 한다. 만달라 공양은 초심자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매우 커다란 이익이 있다. 수행을 시작해서 부
터 깨달음을 완성하기 까지의 다르마에 관한 전반적인 의미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
8) 구 루 요 가 (Guru Yoga)
구루 요가의 수행을 위한 길이 다양하다. 많은 탱화에, 구루
공양으로 불리는 명상의 심상(心象, visualization)이 그려져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나무 가운데 있는 연꽃 의자(蓮華台)
위에 구루(Guru, 큰스승)가 자리한다. 구루의 몸에서 뻗치는 광
명(光明)을 통하여 연꽃 왕좌(王座)에 정좌하신 붓다와 보살의
상(像)이 무수히 비친다. 거룩한 모임이 연출되는 "깨달음을 성
취하는 나무" 위의 공중에는 역대의 모든 구루들이 순서대로 줄
지어 앉아 있다." 이와같이 떠올리기는 복잡하기 때문에 초보자
들에게는 매우 어렵다.
구루 요가는 또 특별한 성자 - 예컨대 마이트레야(Meitreya)
붓다 - 에 대해 명상할 때 더불어서 행할 수 있다.
맞은 편 공중에 눈부시게 흰 구름을 떠올린다. 그 위에 연꽃
자리가 있고 황금 왕좌가 놓이며 빛의 고리가 에워싼다. 황금
왕좌에는 마이트레야 붓다가 금새라도 몸을 일으킬 듯한 자세로
앉아 계신다. 그의 몸은 금빛 광채를 낸다. 가슴 어림에서 두
손으로 다르마챠크라 무드라(Dharmacaka mudra : 法輪契印)를
맺고 계신데 양 손에서 각각 한 송이의 연꽃이 솟는다. 왼쪽 꽃
송이는 감로수가 담긴 병을, 오른쪽 꽃송이는 다르마차크라(法
輪, 다르마의 수레바퀴)를 떠받친다. 몸 전체가 장(壯)하고 엄
숙하게 꾸며져 있다. 가슴 중앙에는 작은 빛의 원반(光盤)이
"마이(MAI)라는 황금빛 글자를 담고 있다. "마이" 둘레를 시계
방향으로 구루 만트라(Guru mantra)의 음절들이 에워싼다. 구루
만트라를 짧은 마이트레야 만트라가 둘러싸고, 짧은 마이트레야
만트라를 다시금 긴 마이트레야 만트라가 둘러싸고 있다.
구루 석가모니의 근본 음절은 "뭄(MUM)"이다. 구루를 바즈라
빠니(Vajrapani, 金剛手 : 번개를 관장하는 신), 바즈라드하라
(Vajradhara : 역시 번개를 지배하는 신) 등의 신(神)으로 떠올
릴 때에도 순서는 같다. 상의 겉모양과 근본 음절, 그리고 만트
라가 다를 뿐이다. 잊지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의 겉
모양이 어떠하던 간에 본성(本性)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상
(像)으로 떠오르는 모든 것이 구루의 시현(示顯)인 까닭이다.
그런데 구루를 굳이 본래 모습이 아닌 다른 신들의 형상으로 떠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미혹하여 저마다 괴이한 취향
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루의 본래 모습보다는 특별한 신
의 형상으로 나투신 구루에 대해 더 큰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다. 만일 구루의 본래 형상을 떠올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특별한 모습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살
아있는 구루를 떠올릴 때에는, 이미 돌아가신 구루를 떠올릴 때
와 달리 황금왕좌의 받침대로 연꽃 자리를 쓰는 대신에 두 개의
두터운 방석을 깐다. 살아있는 구루는 반드시 그의 본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에 푸른 글자의 "훔(HUM)"을 표상한다. 그리고 이
"훔"을 에워싸는 만트라도 오직 그 구루의 것 하나 뿐이다.
다음에는 가능한 한 모든 육체적 공양을 드린다. 구성지게 일
곱 가지 공양 시(the verse of Seven Limb Puja)를 외면서 그
의미를 명상한다. 이렇게 한 뒤, 만달라 공양을 일곱 내지 스물
한 번 실천한다. 시간이 넉넉하면 서른 일곱 더미(thirty - sev
en heaps)의 만달라에 일곱번 공양한다. 시간이 모자라면 한 번
은 서른 일곱 더미의 만달라에 공양하고, 나머지는 일곱 더미의
만달라에 공양한다.
깊은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구루 만달라를 암송하면서, 구
루나 신의 가슴에 있는 근본 음절과 만트라의 음절로부터 솟구
치는 빛과 감로수가 자신의 머리위에 쏟아진다고 상상한다. 마
치 눈이 호수 위에 떨어지자마자 물로 녹아 들듯이, 빛과 감로
수 안에 있는 구루 만트라의 작은 빛나는 글자들과 구루, 혹은
신의 조그마한 형상들이 정수리를 통하여 자신의 몸 속으로 녹
아 들어온다. 그것들이 몸 속에 빨려 들면 모든 더러움이 깨끗
해 진다. 깨끗해 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빛과 감로수가 흰색
으로 보이고, 정신적․육체적인 계발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렇
게 보인다. 힘을 얻고자 하면 붉게, 안팍의 장애와 삿된 기운
(邪氣)을 소멸 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푸른색으로 표상된다.
이리하여 자기 자신이 바라는 상태를 완전히 성취했다고 상상해
야 한다.
구루 요가를 실천할 때마다 구루 만트라를 적어도 백 여덟
번, 각 신(神) 만트라를 스물 한 번 암송한다. 구루 만트라를
십만 번 욀 때까지 이 수행을 계속한다.
십만 번의 수행이 완성되는 날, 구루의 몸에서 발산하던 빛이
모두 근원으로 되돌아 간다. 이때 머리 위에 있던 구루의 형상
이 점점 줄어들어서 마침내 나 자신속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떠
올린다. 그 순간 구루의 마음과 나 자신은 하나가 된다. 구루를
다른 신의 형상으로 표상하여 수행할 때도 같은 방법으로 마무
리 하면 된다. 그러나 십만 번의 암송이 끝나는 날이라도 다시
구루 요가를 시작할 작정인 경우에는 위와같이 구루와 신(神)을
빨아 들이지 않는다. 새로 구루 요가의 수행을 되풀이할 때, 그
들의 형상을 다시 떠오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수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구루에 대한 자기 자신의 존경
심과 완전한 믿음이다. 사실상 현재는 구루의 본성과 나의 것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나의 마음을 구루의 본성보다 열등
하게 만드는 장애(障碍)들을 제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이 격
차를 없앨 수 있다. 구루 요가의 목적이 바로 구루의 본성과 나
의 마음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이로써 특별한 기초수행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 맺 음 말 #
다르마를 수행하려면, 우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여러가지 방
법들을 잘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엔 자기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을 선택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실천해야 한다.
붓다께서는 모든 생명들의 바램을 이뤄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
셨다.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기쁨과 완전한 행복을 얻도록
해 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나투셨다. 뭇생명들의 취향과 능력이
제각기 다른 까닭에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도 여러가지 각도와
수준에서 다양하게 베풀어 졌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모두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에는 훌륭함과 악함, 높고 낮음
의 차별이 없다. 한결같이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할 따름이다. 일
부분이건 전체건 좋지 않은 수행이 있다면, 그것은 붓다가 가르
치신 게 아니라고 단언(斷言)한다. 그런 까닭에 다르마를 업신
여김은 붓다를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다르마를 업신여김으로써 생기는 카르마(嶪)-다르마의 씨앗을
없애는 행위라 불린다- 의 나쁜 결과는 간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아라한을 죽이는 것보다 크다고 붓다는 말씀하셨다. 다르
마 수행의 목적은, 고통을 초래하는 카르마를 버리고 행복을 초
래하는 카르마를 쌓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고 자신이
선택한 방법에 따라 진지하게 수행하면 노력한 만큼의 성취가
주어질 것이다. 물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방법들도 존중
해야 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삼매왕경(三昧王經, Sama
dhiraje sutra)에 이러한 사실들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어버이신 뭇생명들에게
당신의 완전한 행복을 주소서
지옥․굶주린 귀신․동물의 세계는
영원히 텅텅 비며
보살들께 올리는 기도 한시바삐 성취되소서"
밀라레빠가 감뽀빠에게 "보게나!" 하고 말하면서 그의 가사를
잡아 당겼다. 그 바람에 감뽀빠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밀라레빠
가 말했다.
"이보다 더 깊은 가르침은 없다.
내가 이렇게 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더냐?
불교의 가장 심원한 가르침은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