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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역사적 경험 |
유대-기독교와 그리스-로마 고대로부터 계몽주의에 이르는 서양의 지적, 문화적 전통들 |
자율적 개인주의, 비신비화, 세속화, 자연주의적 환원주의, 과학적 경험주의, 역사적 비평주의의 출현 |
급진적인 자율적 개인주의,자기중심적 쾌락주의,자연주의적 환원주의의 보호아래 사회 과정의 급속한 타락 |
현대성의 억압으로부 터의 자유, 역사적 인식, 상호세대간 전통, 부모 양육, 사회 유지와 계속성의 수단에 대한 갈망 |
기독교 신학 전통 |
처음 기독교 천년기의 정통적 합의를 이룬 7대 세계교회 공의회를지지하는 교부,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 신학들=고전적 기독교 |
경건주의, 종교적 개인주의, 자유주의, 종교경험의 신학들, 과학적 종교학, 사회 복음, 신정통주의, 근본주의, 현대 세계교회주의 운동, 실존주의, 그리고 과정신학=현대화되고, 재해석되고, 비신화화되고, 심리적으로 이해되는 고전적 기독교 상징들. |
현대에 의해 받아지기를 계속적으로 갈망함; 급격히 타락하는 단계에 있는 현대성의 가정들에 대한 지조없는 순응= 타락한 고전적 기독교 언어 그러나 타락을 인식하지 못함. |
현대 말기 단계의 퇴락안에 잠겨져 왔으나, 이제 고전적 기독교의 힘과 아름다움을 재인식하고, 고대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인도하에 현대성의 업적들을 현대성을 초월하는 지성과 기풍안에 하나로 엮으려고 시도하는, 현대후기 정통주의의 가능성. |
위의 도표에서 보여주듯 오든은 현대를 뛰어넘는 현대후기의 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에게 있어 현대성이란 극복해야할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현대이전의 지혜에 대한 경멸, 절대화된 도덕 상대주의, 청소년의 돌봄의 거절, 자율적 개인주의의 이념화, 환원주의적 자연주의에 대한 맹목적 복종, 진리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 과학적 경험주의의 절대성.
2. 오든의 현대후기 정통주의(Post-modern Orthodox)
오든은 정통주의를 현대이전과 현대이후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둘다 같은 성서본문 안에서 교육을 받고, 같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것이지만, 현대이전의 정통주의가 현대성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후기 정통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현대후기 정통주의는 현대이전 정통주의가 회피했거나 역사적 사건에 의해 결코 만날 기회가 없었던 현대 사회학, 물리학, 정신의학, 그리고 현대역사에 의해 크게 영향받았다. 현대성과 그 다양한 비평주의 형태들(마르크스주의자, 니체주의자, 그리고 주로 프로이드주의자)에 깊은 몰입을 했었고, 그것에 희망을 걸고, 철저히 그것에 의해 지시를 받았지만, 결국에는 환멸을 느껴 그것으로부터 돌아섰고, 현대성보다 더 지혜롭고, 실제적이고, 풍부하고, 창조적인 고전적 기독교로 돌아간 것이 현대후기 정통주의이다.
이런 입장에서 오든은 신정통주의, 근본주의 모두 다 적절한 신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신정통주의의 주요한 옹호자들은 자신들을 근본적으로 니케아 회의 이전 전통의 보호자로서보다는 개혁주의자의 변화-대행자로써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있는 차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 모두를--에밀 브룬너로부터 앤더스 니그렌까지, 프리드리히 고가르텐부터 루돌프 불트만에 이르는--전통을 지탱하거나, 가꾸거나, 방어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전통을 바꾸려는 프로그램의 신학자로써 간주하였다. 더욱이, 신정통주의는 대체로 예배의식, 성례전, 목회적 돌봄, 목회의 구체적인 과제, 영적 형성, 교회의 성결, 즉 우리가 지금 깊게 몰두하고 있는 모든 이슈들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면, 불트만은 최근의 어떤 신학자보다 더 기독교의 메시지를 "현대인의 마음에 받아들여 질 수 있는" 범주에 적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신화화하기를 희망하면서, 기독교 언어를 현대 범주 특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로 순응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비판한다. 케리그마는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실존적인 결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으로, 불트만에게 있어서 케리그마는 정보를 주는 내용, 즉 역사적 예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 범주를 현대성의 실존적 질문들과 문화적 가정에 연결시키고 적응하게 하려고 많은 시도를 한 틸리히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오든이 볼 때, 틸리히의 그리스도는 육체없는 그리스도(Logos Asarkos), 즉 비역사적인 개념이다. 아무리 그의 작업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신약성서의 증언이나, 초대 교부들의 핵심사상인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학에서는 빠져버리는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예수가 우리 인간 소외의 깊이(고독, 유혹, 유한성, 죽음에 대한 불안 등)에 진실로 참여했다는 그의 주장이 옳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5:19) 즉 여기에서 인간의 상황에 참여하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신약교회의 명백한 증거들을 피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신학을 심리화된 예수로 대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정통주의의 모든 중요한 대표자들은 현대이후 정통주의를 위한 적절한 모델을 제공하는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도 결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오든은 역사적으로 근본주의의 개념을 밝힌다. 1895년 "나이아가라 성서 회의"의 다섯 가지 "근본요소들"은 기독교 사상의 핵으로써 교리들의 뚜렷한 선택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무오한 성서의 절대적 영감설, 동정녀 탄생, 속죄의 대속 이론, 예수의 육체적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개의 관심사만 제시하는 그들에게 오든은 질문을 던진다: 신의 섭리, 은혜를 통한 믿음에 의한 칭의,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 같은 것들보다 왜 더 "근본적"인가? 무엇이 선택하는데 있어서 순서를 정하는 원리인가?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성령은? 성화는? 죄는?
이러한 주장은 19세기의 역사주의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객관적인 역사적 증거에 기초한 신앙을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본다. 19세기에는 역사적 기원과 증거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표현했던 역사 의식(헤겔, 다윈, 맑스, 니체, 스펜서 등등)의 강력한 출현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근본주의는 어쩌다가 이러한 현대의 역사적 의식에 의해 쓸려 갔고, 부지중에 그것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주의가 부활의 사실 보다 부활의 교리적 의미에 훨씬 덜 흥미를 가진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적 의미나 고백적 중요성을 동정녀 탄생의 사실만큼 그렇게 강력하게 방어하지 못했다. 이것은 신앙은 사실적인 역사적 증거에 근거한다는 역사주의의 본질적인 신조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피상적으로 근본주의가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보다 큰 각도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놀랄 정도로 너무 현대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그리고 근본주의가 분위기와 어떤 정신에서 그들중 어떤 것이 정통주의를 닮았다기 보다는 놀랍게도 모두가 서로 더 닮았다는 느낌이 있다고 오든은 말한다. 그들 모두는 현대성에 서로 다르게 응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후기의 사람들--많은 어려운 길을 통과하면서 현대성이라는 것은 기독교가 온전히 의지할 수 없고 단지 흘러가는 인간의식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운 사람들--보다 현대성의 정신 안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3. 현대 비평주의에 대한 비판
예수의 역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성서 역사적 비평주의는 19, 20세기의 자연적 환원주의의 가치를 신약성서 본문에 부과하는 매우 편견된 설명이라고 오든은 주장한다. 이런 연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희망, 열망, 신화, 계급의 관심, 그리고 사회적 영향으로 환원시켰으며, 그리하여 예수는 정치적, 사회적 또는 심리학적 주창자로 꾸며지고 다시 만들어졌으며, 그의 말은 무리하게 해석되고, 그리하여 해석자의 현재 견해와 일치하는 것으로 재구성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역사적 비평주의를 비판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사실 궁극적으로 변증적인 이유에서 기독교 계시와 인간 이성의 연속성을 강조하려고 했지만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다. 그러한 계시의 내용은 예를 들어 이성에 의존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지만, 그러한 방식은 일차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부차적이고 확인차원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성이 계시보다 더욱 근본적이라는 입장을 용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든은 예수가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라는 神人 兩性의 결합이라는 전제가 성경주석가들에 의해서 하나의 진지한 가설로 받아들여 질 때야 비로소 예수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오든이 볼 때, 현대이전의 정통주의는 진지하게, 교리적으로, 그리고 경건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였으나, 예수에 대한 전통의 전달과정을 조사하는데 필요한 어떤 역사-비평적 자료와 방법들을 결핍했다. 그러나 또 한편, 현대 성서비평주의는 예수전을, 강력하지만 종종 환원적인 자연주의적 철학적 가정들과 경향을 가지고, 역사적으로 연구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후기 정통주의는 '고전적, 합의적, 교회일치적 지혜'를 바탕으로 예수전을 접근하고자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비평주의의 광범위한 실패를 인식하면서, 생존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고, 선교할 수 있는 기독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고전적인 주석을 다시 세우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후기 정통주의가 "후기" (post) 인 것은 그것이 현대성의 실패와 붕괴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며, 그것이 "정통주의"인 것은 고전적 에큐메니칼 기독교로부터의 엄격한 지도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후기 정통주의는 의도적으로 후기비판적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역사 비평주의, 양식사 비평주의, 편집사 비평주의, 그리고 자료사 비평주의에 대해 신중하고 한정되고 조심스런 사용으로 정경에 접근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든은 성서 역사 비평주의가 본문들을 더욱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쉽고, 도덕적으로 확고하도록 만들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그 결과는 매우 빈약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본문이 더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졌는가? 이에 대해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오히려 역사 비평주의는 중립성을 주장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본문에 반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목적은 현대의 지성인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신성한 본문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만들었을 뿐이다. 한스 큉도 비평주의는 우습게도 "성서보다 더 성서적이고, 신약성서보다 더 신약성서적이고, 복음보다 더 복음적이려고 했으며, 바울보다도 더 바울적이 되려고" 시도했다고 서술했다.
(2) 성서가 더 접근하기 쉽게 만들어 졌는가? 역사 비평주의는 성서본문을 일반적으로 문화에 더욱 접근할 수 있도록 의도하면서, 오히려 "과학기술주의의 방법만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러한 질문만을 오직 합법적이라고 간주하는 과학기술주의의 형태에 먹이"로 전락했다고 오든은 주장한다. 인간의 질문에 철저히 열려있기를 의도하면서, 비평주의의 "객관적 중립성"은 "성서가 답하고자 시도하는 바로 그 질문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 소위 "객관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서있게 된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윙크도 말하고 있다.
(3) 비평적인 방법은 도덕적 결정을 이끌어냈는가 또는 억제했는가? 철저한 도덕적 결정을 의도하면서, 비평주의는 문제 있는 결정을 한다고 또한 주장한다. 실존적인 결정을 한다는 이름으로, 비평주의는 오히려 결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칼 만하임은 "결정을 못하는 사람은 제기할 문제도 없으며, 또한 그에게 한 문제를 설정해 주고 그 문제의 답을 위해 역사를 탐구하도록 할 수 있는 임시적인 가설을 만들 수조차 없다"라고 파악했다.
신적 계시에 대해 논리적으로 접근할 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교리, 즉 그리스도는 신이며 인간이라는 가르침이 늘 공격을 받아왔다. 실제로 이 교리는 비논리적이라는 세속 철학자들의 비판을 늘 받아왔고, 계몽주의 시대에는 더욱 심해졌는데, 스피노자를 따라 전통적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이자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네모를 동그라미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교리가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신적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타락한 인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고 맥그레스는 주장한다. 이 점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칼빈 같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늘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한데, 바로 역사 비평주의의 한계가 여기에 있음을 오든 역시 분명히 하고 있다.
4. 역사적 방법의 한계
예수는 "과학적"이라고 추정되는 방법에 의해 역사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는데, 현대성서 비판주의에서 사용되는 역사적 방법은 "현대 의식"에 수락될 수 있는 자료에 따라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을 탐구하고자 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성을 파악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때 만일 부활이 증명이 될 수 없으므로 역사 안의 한 사건이 될 수 없다고 미리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 증거를 듣기 전에 이미 예수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성서-역사적 비평주의의 과정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계시에 대한 주장을 없앨 것을 요구했고, 그리고는 모든 증언들에 대해 신적 노출은 불가능하다는 선험적인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역사적 탐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올 수 있다는 전제를 배제한다면, 어떠한 미사여구를 사용하든 우리는 편견에 치우친 탐구를 조직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 될 것이다. 윌리암 제임스는 이러한 절차상의 문제를 잘 진술했다: "어떤 종류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나를 막고자 하는 사고의 규칙은, 만일 그러한 종류의 진리가 실로 존재한다면, 참으로 비합리적인 규칙이 될 것이다"
성육신은 처음부터 그것을 듣는 자에게 공격(마16:23; 18:7; 눅17:1; 갈5:11)이었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공격적이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과연 성서가 말하는 구원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던져지는 것이 현실이다. 현대인은 고전적 기독교 언어가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으며, 죄, 성육신, 속죄, 희생, 부활 또는 구원에 대해 듣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우리는 들어왔다. 그러나 현대 이전의 시기에 이해되어 왔던 것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현대 의식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젊은이들이 성적인 자제나 정절을 지킬 수 없다는, 마치 인간은 이제 그것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깎아 내리는 견해와 비교할 수 있다.
이런 역사 비평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는 현대성의 입맛에 맞고 그것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로 복음을 재포장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맑스의 언어를 빌려와 계급분석에 대해 논하거나, 과정(철학)의 범주들을 빌려와서 하나님의 원시적인 본성과 그후 뒤따르는 본성의 구분에 대해 말을 하거나, 또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빌려 투사와 승화에 대하여 얘기를 한다. 이렇듯 현대인이 받아 들일만 한 것으로 보려는 것이나 또는 보지 않으려는 것이 현대 "비판적" 성서 연구의 넓게 퍼진 전제가 되었다.
한 번 복음서가 예수의 알 수 없는 삶에 대해 상상되어진 "사건들"에 대해 뒤돌아보며 기억하는 교회의 해석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런 생각을 함으로, 실질적으로 고전적 기독교 가르침의 모든 본래 주제--영원한 로고스(말씀)의 선재하심, 그리스도의 아들되심, 그의 죄없으심, 그리고 속죄의 죽음, 부활과 승천--들을 지적으로 불신하는 모습이 생겨난다. 이런 현대 "그리스도"론적 사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은 주로 실수의 역사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서 생명력의 상실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교회 멤버가 계속적으로 감소하는 자유주의적 개신교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권위에 대한 위기와 사제 소명의 상실을 경험하는 자유주의적 카톨릭에서 또한 나타난다. 이때 두 가설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자신이 현대성에 충분히 순응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또 다른 이들은 현대성이 급속하게 타락하고 있는 때에, 기독교가 너무 값싸게 현대성에 순응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오든의 입장이다.
고대 에큐메니칼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무시되는 곳에서는, 설교가 자명한 이치들이나 도덕주의에 의존하고, 윤리적 생동감은 퇴락되고, 그리고 종교적 기관들은 급속하게 비도덕화되어진다. 그리스도가 잘못 놓여진 곳에서는, 인본주의의 행위는 여전히 있을 수 있고, 의학적 구제 활동이 계속될 수도 있고, 그리고 인간의 유익을 위한 정치적 행동은 작용할 수도 있지만, 아직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그 생명의 영적 도덕적 생동감을 종종 결여한다. 이처럼 현대 교회 생활의 타락은 그 주된 원인이 고전적 그리스도론을 버림에 있다. 따라서 오늘날 역사비평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론은 현대성 붕괴의 한가운데서 다시 시도되어져야 한다고 오든은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5. 복음주의의 핵심적 주장: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많은 학자들이 현대성안에서 성육신, 속죄 그리고 부활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선의의 시도 속에서,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많은 현대인들로부터 인간의 죄와 신의 구원에 대한 딱딱하지만 꼭 필요한 기독교 단어를 벗겨 버렸다고 오든은 비판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논쟁적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닦아 둔 것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신앙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데, 이는 성경과 전통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예배의식적 전통에 의하여 성례전적으로, 카리스마적(은사적) 전통에 의해 영적으로, 경건주의적 전통에 의해 사회 경험의 근거로서, 스콜라적 전통에 의해 교리적 교사로서,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의해 개인들과 사회를 성화하는 힘으로서, 로만 카톨릭 전통에 의해 본성을 완전케하는 은혜로서, 그리고 복음적 전통에 의해 성서의 말씀으로서 경험되어질 수 있다. 모든 이러한 전통들과 그들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들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부활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했다. 그리고 언제나 살아 계신 그리스도만이 이 폭넓은 영역의 중심에 있어 왔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든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광 프리즘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즉 전통의 다양성은 마치 그리스도가 분광 프리즘--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은 진화하는 세상의 변화하는 표면 위에서 굴절된다--인 것처럼 보여지게 할 수 있다. 렌즈는 변화무쌍한 색깔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 한줄기의 빛을 깨뜨려서, 그 빛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던 모든 여러 색깔들을 나타내 보인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렌즈이다. 전통에 대한 연구는 엄청난 분광기(分光器)를 통하여 보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크리스챤의 인식이 매우 다양했던 것처럼, 색깔들은 현저히 다르다. 즉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변함없고 꾸준한 사랑은 여러 가지 색깔의 형태로 변화무쌍하게 현현된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아주 많은 상징 체계들과 세계관을 경험해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새로운 문화적 형성들에 신중하게 접근했을 때마다, 그 중심을 규정하기 위해 고대 에큐메니칼 기독교의 가장 원시적인 시도로 돌아감으로서 결정적으로 지시를 받아 왔다고 오든은 말한다. 여기에서 그것은 보통 정경뿐만이 아니라, 핵심에 접근함으로 영구히 가치 있는 것으로 폭넓게 존경받던 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등과 같은 고대 기독교 교리적 정의들과 상징적 고백들을 또한 의미하기도 한다.
위의 관점에서 볼 때, 프리즘에 여러 색깔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만일 부분적인 색깔을 빛의 전부인양 말한다면 오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의 기독교에 대한 주요한 기여가 그의 도덕적 가르침이거나 종교적 통찰력이라면(몇몇 자유주의의 형태가 가르치는 것처럼) 또는 사회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공동체의 설립(몇몇 종교 사회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이라면, 우리는 쉽게 기독교와 이슬람과 불교사이의 구조적 평행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중요성은, 만일 그의 도덕적 또는 종교적 가르침이나 조직적 능력, 개념적 이념, 또는 엄격히 말해서, 그 자신의 과거 삶의 차원 위에서 본질적으로 보여진다면 잘못 판단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 공동체를 생동감 있게 하는 중심으로서의 그의 현재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만찬에서 거행되는 것이다: 믿음의 투사로서가 아니라, 믿음을 존재하도록 이끌어낸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카톨릭, 은사주의 교회, 그리고 전통적 개신교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오든은 말한다.
이처럼 변화가 많은 전통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은 예배하는 공동체 한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된 임재이다. 아무리 그 만남이 기독교 이천년동안의 세계관들, 문화들, 많은 언어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상호 인격적 만남이 없이는 기독교 전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1세기에 있어서처럼 지금도 세상의 삶속에서 영구히 함께 하신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신약성서 안에서,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믿음의 공동체의 삶에 임재한다는 것과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없다. 십자가와 부활은 성서 안에서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분리된 사건이라기 보다는 하나이면서 복잡한 사건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활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가 보여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예스'이고, 속죄의 십자가는 부활절 이야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다.
거의 예외없이, 고대 에큐메니칼 합의들은 기독교의 처음 17세기 동안에 굳게 지켜져왔지만 현대에 와서 그것은 사라지고, 쪼개지고, 그리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고대 기독교의 찬송, 성서, 예배 의식은 아름다운 가락으로 계속해서 울려왔지만, 그것들은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에 의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고대 정통주의의 상징들은 현대성 한가운데서도 한때 생생하게 알려지고 축하되던 살아있는 중심에 대한 말없는 증거로서 여전히 서있는 채로 남아있는 것을 오든은 보면서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최근 기독교의 계절이 겨울철이라는 것과 지금은 가장 본질적 요소를 유지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고 호소한다.
나오면서
복음주의는 기독교 복음이 유일하며 다른 어떤 종교나 인생 철학과 혼동되거나 동일시될 수없다는 점을 확고히 한다. 이와 같이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의 유일성에 대한 일관성있는 기독론적 고백체계에 확고하게 기반을 두고 있는--의 독특성을 수호하는 강경한 자세는 많은 이들에게 적대감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특히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피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하며 다같이 삶에 대한 타당성있는 관점을 제공한다고 보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는 부정적으로 비추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슈가 되고있는 종교다원주의는 바울이 처음 유럽에 복음을 전하던 당시의 상황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삶의 현실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대의 신앙의 다양성은 오히려 오늘날 못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궁극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아예 처음부터 다른 신앙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물론 여기서 그들이 다른 신앙들을 비난하기보다는 단지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설득력을 동원해서 예수를 전파하는데 노력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오늘날 실질적으로 중대한 쟁점이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특별히 미국에서와 같이 강력한 권리 지향적 문화의 출현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개인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정책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정치 의제에서는 모든 종교는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관용에 관한 본질상 정치적인 판단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학적인 선언으로 슬그머니 이동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종교외에 다른 종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전적으로 지당하고 용납할 만한 요청에서, 다른 종교들을 모든 같은 것으로 혹은 '궁극적인 신적 실체'에 대한 똑같이 타당한 표현으로, 혹은 공통적인 구원에 이르는 똑같이 타당한 방식으로 취급해야한다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기독교가 종교적 다원성의 한복판에 실존하고 있으며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모든 종교를 동일한 정치적 입장에서 대하려는 문화가 실존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서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에서 조금도 물러서거나 후퇴할 필요는 없다고 오든은 주장하였다.
역사해석이나 교리 해설의 문제들을 보더라도 세계 종교들간에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하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부활하셨음을 명백하게 강조한다. 이것이 어떻게 이슬람이나 불교의 교리와 같을 수 있겠는가?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특수성을 선포한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다원주의화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주장하면서,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범위를 넘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의 자연적 질서나 인간 양심과 문명을 통해서 다양하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지식이 만인 구원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결코 오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신학의 한계를 넘어서서 복음주의의 입장을 학문적으로 제시하는 오든의 주장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것으로 본 글은 마치고, 그의 주장에 대한 평가와 현대신학에의 공헌 및 의의에 대해서는 토론을 통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