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 일본 와세다 대학의 도미끼설에 의하면 "가마주라시대에 합기도가 신라의 삼랑원의광을 그 시조로 하여 막부의 미나모도가(도가)에 전하고 이어서 다께다가(무전가)에 남아 7대를 지나 다께다소오가꾸(무전물각)에 전하고 이어서 다께다가는 그의 고제이다." 그의 저서에서 이와같이 언급하였는데 현재의 일본 합기도 도주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1883-1969)는 다께다의 제자인 우에시바 모리하사의 아들이다.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1883-1969)가 고유 유술의 일파 다이토류(大東流) 柔術을 배워서 창시, 관절을 이용하여 던지는 기술, 누르는 기술(당신기, 관절기)이 특색이 호신술로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다이쇼(大正) 말경(1925년)에 우에시바에 의해서 합기무술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최초의 합기도장이라고 볼 수 있는 황무관(皇武館)이 1930년에 일본 도쿄에서 문을 열었으나 1942년에 비로소 아이키도(合氣道,Aikido/Aikitsu)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이 명칭이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우리말 표기인 합기도로 바뀌게 된것이다.
한국에 합기도라는 명칭의 무술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해방과 함께 귀국한 최용술씨(1904∼1986)에 의해서 이며 최용술씨가 8세(1912년)에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15세(1919년)때 대동류합기유술의 다께다소우가꾸(武田物角)의 문하에 들어간다. 다께다의 문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합기도[당시는 "야와라" 라고도 불리워짐] 수련한 그는 1946년에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최용술씨(당시 42세)가 서복섭씨(현 한국균형학회 회장)를 만나 1951년 2월 12일 서복섭씨의 집 - 당시 대구 시장 북로(현재의 대구 달성 공원 사거리)의 대구 양조장 2층 - 에서 대한합기유권술 수덕관 연 것을 합기도 계에서는 한국 근대 합기도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대동류 합기유술의 대가 다께다 소우가꾸에게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최용술씨는 입문 연도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대동류 합기유술(야와라)이라는 무술을 전수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술에 대한 배경과 철학은 차이가 있으며 또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약 4년(1912∼1916)간의 수련기간이 있는 반면 최용술씨는 약 26년(1919~1945)간의 수련기간으로 볼 때 대동류 합기유술의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의 최초로 합기유권술이라는 무도를 시작했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합기도라는 일본의 무술과 같은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최용술 도주(6단)는 서복섭씨(4단)를 사범으로 김무홍씨(현 신무관 관장), 지한재씨(전 대한 합기도회 총관장), 문종원씨(현 사업 종사) 그 후 입문한 서인혁씨(현 대한기도회 총재)등 20여명의 수련생들과 수련을 시작하였다.
당시 합기도 계의 선배들이 행정 창구의 일원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1963년 9월 최용술 선생을 총재로 사단법인 대한 기도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후 지한재씨는 성무관에서 대한 합기도란 명칭으로 김무홍씨는 신무관에서 한국 합기도로, 그리고 서인혁씨는 대한 국술원이라는 명칭으로 서로가 다투어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그후 대한 합기도 협회가 발족하게되나 이러한 통합도 잠시일뿐 다시 양분되고 지한재씨는 대한기도회로, 김무홍씨는 대한합기도협회로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1985년 전경환씨에 의해 대한합기도협회를 새마을본부로 끌어드려 새마을합기도 중앙연합회라는 것을 발족하여 한국 합기도의 통합을 운운하지만 5공화국의 끝남과 함께 모든 계획은 사라지고, 다시금 오늘날과 같이 여러 분파로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합기도 단체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