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白石). 그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 全文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향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全文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흰 바람벽이 있어」全文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는데 사실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 그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 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소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소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소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소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 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후인 199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소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우원호(계간 정인 창간호)
첫댓글 <흰 바람 벽이 있어 시의 한 구절인,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시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시 안에 한 구절인, '갈래나무라는 나무'-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시집 안에 있을 겁니다>... 안도현 시인의 글적인 스승이라고 할 수 있고, 최근 김사인 시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 시집도 백석 시인 시의 모티브를 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