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雲門寺)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대한불교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 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跡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나라에서 법을 전수하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 835호) ㆍ미륵전ㆍ작압전(鵲鴨殿)ㆍ금당ㆍ강당ㆍ관음전ㆍ명부전ㆍ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 193호)ㆍ동호(보물 제 208호)ㆍ원응국사비(보물 제 316호)ㆍ석조여래좌상(보물 제 317호)ㆍ사천왕석주(보물 제 318호)ㆍ3층석탑(보물 제 678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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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범종루( 사실상 입구이다 )
현판에는 "호거산 운문사" 좌우 기둥에는 "운문사 승가대학"과 "대한불교조계종 보현율원" 이 보인다.
편액 필체와 기둥 필체가 달라보이니 동시대 글씨는 아닌 듯 하다.
승가대학에 관해서는 밑에 원장님 설명 올릴 때 올리겠습니다.
운문사 경내에서 바라 본 범종루
운문사 탑비...중간이 원응국사비다
운문사 원응국사비
다음 내용은 운문사 경내 안내문이다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 보물 제 316호
고려 중기의 승려인 원응국사 학일(圓應國師碑 學一)의 운문사 중창과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이다. 고려 인종 22년(1144년) 학일 왕사가 93세로 입적하자 인종은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라는 시호를 내려 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 비는 높이 2.3m 폭 0.9m 로 비석머리와 받침돌은 없어졌고 현재는 3편으로 절단되어 있는 비편을 연결하여 하나의 비신으로 구성하였다. 해서체로 쓰여진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작성자는 윤언이며 글씨는 고려중기의 명필, 탄연스님이 썼다.
정면 어간( 법당의 중심축이 되는 부분, 주불을 봉안한 법당의 가장 가운데 부분을 일컫는다. 또한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직선공간을 모두 어간이라고 한다)에 꽃살문(문짝 윗부분)을 새겨 부처님께 시들지 않는 법의 꽃 공양을 올리고 있슴을 상징하고 있다.
내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 내용이 궁금하여 문화재청에 것을 가져다 올립니다
문화재청 설명
운문사에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인종 22년(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비받침, 비몸, 머릿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짐작된다.
운문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 180호)
운문사 처진소나무는 주변의 인공적인 압력 없이도 늘어져서 넓게 자라는 나무로 유명핟. 수령 500년에 이르는 이 소나무는 어느 선사가 이 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무가지를 꽃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 막걸리 12말을 희석하여 영양제로 부어준다. 높이는 6m이고, 둘레 3.5m이다
보물 제 316호인 원응국사비와 함께 운문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3기의 비석이 모여있는 곳이다.
처진소나무의 4 모퉁이 중에 만세루쪽에 이런 거북 모양의 바위가 조합되어 있다.
거북 모양 바위군
처진소나무를 지나면 바로 만세루를 만난다.
운문사 만세루
운문사 대웅보전(新)
중앙석가모니불과 미륵불과 연등불을 좌우에 을 모시고 사이에 문수 보현 양가에 관음 대세지를 모셨다(시간적 삼세불)
시간적 삼세불로 봤을 때 그러한데, 석가모니불(현재), 연등불은 제화갈라라고도 함(과거), 미륵불(미래)
공간적 삼세불로 보면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로 볼 수 있으나 운문사 대웅보전은 시간적 삼세불이다
수미단 좌우에 윤장대가 있다.
윤장대( 눈멀고 귀먹은 사람들조차도 윤장대를 돌림으로써 경을 읽는 것과 똑 같은 공덕을 쌓게 하려는 배려)
윤장대 좌측 벽화에는 혜능방아가 보이네요? 내친 김에 '벽화와탱화' 게시판에 혜능방아를 싣겠습니다.
설산동자(대웅전 서편 벽화)
이 벽화를 놓치지 않고 설명하시는 능산 원장님
설산동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설산에서 수행하던 시절 이야기이다.
설산동자는 오로지 해탈의 도를 구하기 위해 가족도 부귀영화도 버리고 설산에서 고행을 하고 있었다. 이 때 한 나찰이 다가와서 한 게송의 절반만을 들려주었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니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이 게송을 들은 설산동자는 마음이 기쁘과 환희로와 그 뒷 게송이 너무나 궁금하였다. 뒤 게송만 들으면 완전히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리라 생각하고는 나찰에게 나머지 게송을 들려달라고 조른다.
그 나찰은 말한다. "내가 그걸 들려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소?" 하니 골똘히 생각한 설산동자는 줄 것이 없으므로 '나의 몸뚱아리를 주겠다'고 답한다.
그 말을 들은 나찰은
"참으로 어리석은 그대여, 그 나머지 게송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그러자 설산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옹기그릇을 깨고 금그릇을 얻는다면 기끼이 옹기그릇을 깨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무상한 이 몸을 버리고 금강신(金剛身)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으니 나의 몸을 받고 어서 나머지 게송을 들려주오"
나찰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나머지 게송을 읊었다.
" 생멸멸이(生滅滅已)이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이 게송을 마친 나찰은 설산동자의 몸을 바로 요구하였다.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는 설산동자는 아니기에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나 이 환희심 나는 게송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니 길바닥, 바위,돌 , 나무 등에 이 게송을 수없이 적어놓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나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것이 우주 만물의 법칙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생하고 멸하는 것마처 이미 멸해버리면
적멸위락(寂滅爲樂) 고요하고 진정한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다.
그리고근 높은 절벽위로 올라가서 지체없이 나찰에게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 나찰은 설산동자의 몸이 땅에 닿기 전에 재석천의 모습으로 변하여 동자를 가뿐이 받아서 땅위에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제석천을 비롯하여 모든 천상의 사람들은 설산동자 발 아래에 엎드려 찬미하였다. 그 나찰은 제석천이 동자를 시험하기 위해 변장을 했던 것이다.
선혜동자( 운문사 벽화의 제목은 買花供佛 이다 )
능산 원장님은 이 벽화도 중요한 벽화이기 때문에 어김없이 설명을 해 주신다.
아득히 먼먼 옛날이다. 과거 연등부처님 시절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선혜동자는 그 이유를 묻는다. 사람들은 오늘이 연등부처님이 오시는 날이라고 말한다. 선혜동자도 부처님께 공양할 꽃을 구하지만 아무데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한 꽃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 역시 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꽃집 여주인 옆에 보시 연꽃 7송이가 놓여져 있다.
이를 본 선혜동자는 "이 연꽃을 내게 파시오"라고 말한다.
그러자 꽃집 아가씨는 "이 꽃은 제가 부처님에게 공양할 꽃이기에 팔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다.
선혜동자는 "원하는 것 무엇이든 들어줄테니 제발 그 꽃만은 나에게 팔라"고 하자
꽃집 아가씨는 " 잘 생긴 동자께서 나와 결혼을 해 주면 이 꽃을 주겠소."라고 말한다.
선혜동자는 " 그렇다면 현생에는 수행하고 있는 난 결혼을 할 수가 없고 다음 생에는 당신과 결혼을 하겠소."라고 대답을 한다.
이리하여 둘이 함께 부처님 전에 나아가 청연화 7송이를 부처님께 바친다.
그러자 다른 꽃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 꽃 7송이는 공중으로 떠 오른다.
그리고는 부처님이 또 길을 가는데 진흙길을 만나게 되었다. 이를 본 선혜동자는 부처님의 발이 진흙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땅에 쫘악 깐다. 그리고도 모자라 웃옷을 벗어 조금이라도 부처님 발에 진흙이 묻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를 본 연등부처님이 선혜동자에게 말씀하신디ㅏ
"선혜야, 참으로 대단하구나. 넌 오늘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신다.
이 선혜동자가 훗 날 위의 설산동자로 태어나게 되고 또 공덕을 쌓고 쌓고 쌓아서 훗 날 코타마싯타르타로 태어나게 되고 꽃집 아가씨(구리천녀)는 야소다라가 되어 부부가 되는 것이다.
신중탱 ( 중앙 예적금강 아래는 동진보살 )
아래의 벽화는 참으로 특히한 벽화여서 원장님의 도움을 얻고자 올립니다
아마도 4성제를 벽화로 풀이한 것 같은데, 도무지 해결할 능력이 없아오니 원장님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 고성제 生老病死
2.집성제 幻身夢宅
3. 멸성제 常樂我淨
4. 도성제 八正道
이렇게 고집멸도의 4성제 벽화가 표충사 대웅보전 뒷쪽 내벽화로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원장님에게 마이크를 돌리겠습니다
수미단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고 집 의 벽화가, 우측에는 멸 도의 벽화가 있습니다.
운문사 대웅보전에서의 능산 원장님 설명
교구본사에 대한 설명
조계종에서는 우리나라 전역을 구역별로 총 26개 구역으로 나누어서 교구본사를 지정하고 있다.
제 8교구 - 김천의 직지사
제 9교구 - 대구의 동화사
제 10교구 - 영천의 은해사
제 11교구 - 경주의 불국사
제 12교구 - 합천의 해인사
제 13교구 - 하동의 쌍계사
제 14교구 - 부산의 범어사
제 15교구 - 양산의 통도사
등으로 나누는데, 이 곳 운문사는 제 9교구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 승가대학에 대한 설명
운문사 승가대학은 대표적인 비구니승가대학이다. 인근 청암사의 승가대학도 비구니 대학이다.
우리나라에서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50세 이하여야 한다.
출가 후 6개월 내지 1년간의 행자생활을 하고 난 후 승가대학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즉 행자 생활 후 사미나 사미니계를 받아야 승가대학 입학자격이 주어진다는 말씀이신 듯 하다.
승가대학은 4년제로
1학년은 사미니과
2학년은 사집과
3학년은 사교과
4학년은 대교과 가 각 학견 중심 교육 과정이다.
졸업을 하면 구족계를 받는데 비구는 250 가지의 계율 비구니는 348가지의 비구니계가 있어
비구니가 훨씬 엄격한 계율을 지켜야 함을 알 수 있다.
운문사 승가대학은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출발하여 1973년 승가대학으로 개치되었다.
현재 운문사승가대학 학장은 전 주이이신 명성스님(관응스님의 딸)이시다. 명성스님은 운문사 회주, 전국 비구니회 회장을 역임
다음은 운문사 주지스님인 일진스님의 법문 내용
목요일 법문과 일요일 법문을 섞어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운문사에 오면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 비로전(구 대웅보전)의 비로자나불 등 부처님들도 만날 수 있지만 다음의 3가지도 꼭 보고 갔으면 좋겠다.
그 첫 번째가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이 5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위로 자라는 일반적인 소나무와 달리 옆으로 퍼지면서 자라는 게 특징이다. 이 소나무를 낮시간에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특히나 달이 훤히 비추는 밤에 달빛에 비추인 소나무는 일대 장관을 이루게 된다. 그러면 하늘에서 비추는 달은 일종의 부처님이 되고 고고히 제자리에 서있는 소나무는 스승이 된다.
일진스님이 운문사에 오신지가 어언 42년 째. 소시적에는 위의 분들이 많이 게셔서 잘못을 했을 경우에 꾸중을 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4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느새 위로는 명성스님만 계시는 어른이 되어버려서 일진스님이 어떤 잘못을 해도 나무랄 스님이 안계신다. 하여 스님 스스로 우쭐하는 자만심이 일어나거나, 나무랄 어른이 필요할 때 말없이 서 있는 소나무 앞에 서면 그 소나무가 바로 스승이 되어 꾸짖기도 하고 격려도 하고 하면서 자연과 교감을 이루신다는 말씀이셨다. 특히 운문사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많은데 소나무연구가들에 의하면 운문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소나무들의 수령이 150년 이상이라고 하며 좌측의 소나무와 우측의 소나무들이 각각 본연의 특징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두 번째는 승가대학 안에 있는 은행나무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은행나무 사진을 싣겠습니다
(현재 이 은행나무는 2005년 8월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수령이 4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은행나무는 승가대학 안에 학인스님들이 생활하시는 공간에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데, 그 날 몇몇 거사님들과 함께 운력에 동원되는 바람에 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다시 일진 스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저 은행나무의 장관이 너무나 아름다워 일년에 평상시 출입이 제한되는 이 곳에 일년에 한 번은 일반에게 공개를 한다고 합니다. 공개하는 시기이니 은행잎이 만개되는 시점에 홈페이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봄이면 싹이 나고 여름이면 꽃이 피어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은행잎으로 맘껏 자신을 뽐내다가 겨울이 되면 위의 사진처럼 완전히 앙상한 뼈만 남은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은행나무는 모든 것을 버린 즉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무소유의 자리 원래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네 삶 생로병사도 원래 없는 것, 결국은 돌고 돌아 내 마음의 불성자리는 하나임을 알 수 있는 진리를 반추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엣날에는 이 장소가 소를 키우던 장소인데 지금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이 은행ㅇ나무는 겨울이 되면 제행무상의 진리를 온 몸으로 말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자연을 그냥 있는 개체로 보지 않고 내 몸과 같이 호흡하는 동체로 보시는 스님의 혜안에 감복할 뿐이었습니다.
그 세 번째가 학인스님들의 새벽예불입니다.
운문사의 승가대학에 있는 스님들은 어른 스님들이 아니라 어리고 어린 스님들입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각자의 가정에서 각양의 모습으로 살아오던 분들입니다. 그런 앳띤 스님들이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른 스님들이지만 이 곳에서 단체로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그렇게 유기적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개성이 있지만 이 엄격한 수행처에서는 모두가 하나같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데, 예를 들어서 검은 고무신이면 검은 고무신 흰 고무신이면 흰 고무신을 벗어놓은 모습이 100이면 100이 하나도 흐트르짐도 없이 똑 같은 모습과 방향으로 간지런하게 정리됨을 요구받고 사신다고 합니다.(아래 학인의 하루 사진 참조)
이렇게 간지런한 신발장과 우리집 신발장 비교를 통해서도 내 생활을 반추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 각자의 학인스님들이 하나가 되어 하는 새벽예불은 하나의 장엄한 오케스트라이며 에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운문사에 오셔서 이런 3가지 등을 통해서 시공을 초월하여 원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생로병사의 울타리에 갇혀있는 본인을 되돌아보고는 건강과 행복을 찾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적 제약으로 새벽 예불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지만 돌맹이 하나 나무 한 그루도 예사로 보지 않으신 일진스님의 고우신 모습은 우리의 어머니상이며 살아있는 생불보살님 그 자체였습니다.
운문사 법륜상(명성 스님 때 모심)
법륜상(法輪相)
법륜은 부처님의 묘법이 수레가 굴러가듯 머물지 않고 항상 전하여지느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안치된 윗단은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의 올바른 생활윤리인 八正道를 상징하며 아랫단은 부처님 최초의 설법지인 녹야원에서 오비구에게 법을 설함으로써 비로소 佛 法 僧 삼보가 이루진 것을 상진하는 초전법륜상입니다.
이 땅에 부처님의 진리가 영원히 전하여저서 일체중생의 삶이 안락하고 행복하며 세계는 평화롭고 佛日이 항상 빛나기를 염원하면서 여기 법륜상을 새겨보신다는 설명이 있었다
꽁꽁 언 감로천
운문사 삼층석탑( 보물 제 678호)
쌍탑
운문사 삼층석탑 : 이 탑은 높이 5.4m 인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삼층기단에는 앉아있는 팔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 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지붕들은 각 층급 받침이 5단씩이며,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어 경쾌하고 날씬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이 탑은 하부가 약해 보여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준다.
상륜부에는 노반 박발 위로 향해 새겨진 꽃이 남아있으며 기단 일부는 새로운 돌로 보수하였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데 붙여서 짰고 중석에는 각 면서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 2주씩이 있다.
운문사 대웅보전(구) 비로전....보물 835호
저 위의 대웅보전 즉 현재의 대웅보전을 짓기 전, 운문사 신앙 공간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재청 등록당시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비로전으로 고쳤다가 다시 옛 현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유연성이 아쉬운 대목이다.불교계로 봐서는 조금 서글픈 현실이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며 좌측에는 신중탱화 우측에는 삼장탱화를 봉안하였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와 비로자나불 삼신탱화(탱화는 1755년 제작)
운문사 대웅보전(비로전) 신중탱화( 39위?)
운문사 대웅보전(비로전) 삼장탱화 -천상 지지 지장보살
운문사 악착보살
악착보살
운문사 대웅보전(비로전이 옳다) 안에 천장에 끈 하나로 대롱대롱 매달린 보살이 있다 이름하여 악착보살이다.
그 위에는 반야용선이 그려져 있다. 반야용선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극락정토로 가는 배이다.
표충사의 반야용선을 설명할 때 동편에 배를 탑승하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사람이 무수히 많이 있는 것을 설명한 바 있다. 이 보살도 이처럼 배에 오르지 못한 보살인 모양이다. 설화를 뒤져봤다.
옛날 청정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을 서방정토로 태우고 가는 반야용선이 도착했을 때에 이 배에 타야할 보살이 가족과의 작별인사를 너무 오래 하여 늦게 도착했다. 그 때 반야용선은 이미 터나고 있었고, 다행히도 배에서 밧줄을 하나 전져주었다. 지각한 그 보살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서방극락정토로 갔다고 한다.
서편벽화 관세음보살과 남순동자
관음벽화를 본 김에 관음탱화가 생각나서
표충사의 관음전에서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여러가지를 생각나는 데로 적어보겠습니다.
1. 관음탱화의 특징
주로 절벽위이거나 주변이 바다임.
동굴이 있기도 한다. 꽃병에는 버들가지가 꽃혀있다.
남순동자는 중생을 대신해서 관세음보살님에게 각종 법문을 청한다.
2. 에수는 태어난 시기를 모르나 부처님은 태어난 시기를 분명히 안다.
불자가 되었음을 자부실을 가지고 살아라.
3. 동지가 지나면 새해라고 볼 수 으니 매 해마다 동지가 오기 전에 그 동안 소원했던 사람이 있으면 화해를 청하라.
그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풀어줄 때는 해원결진언( ' 옴 삼마라 가닥 사바하') 을 하면 된다.
4. 안택기도
새 해가 되면 안택기도를 하면 좋다. 친지나 지인들이 함께 모여 돌아가면서 안태기도를 하면 좋은데,
안택기도는 글자 그대로 집안에 우환을 없애주고 집안은 편안하게 해주는 기도를 말한다.
안택기도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하면 좋다.
1) 천수(다라니는 3회)
2) 천지신주팔양경
3) 과명진언(108회)
4) 불설소재길상다라니(21회 내지 108회)
5) 마지막에 발원문을 하면 좋다(108독송집에 보면 용도에 맞는 각종 발원문 수록)
5. 관세음보살님의 지물
관세음보살의 손끝에는 일륜(해), 도끼, 홍련, 백련, 금강저 등을 들고 있는데, 그 지물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하나
의 도구(방편) 역할을 한다.
그 지물 중에서 금강저에 대해
천상의 도리천 밑에는 아수라들이 살고 있다. 그 아수라들이 도리천에 있는 아름다운 천녀들을 차지하기 위해
도리천으로 처들어오는데 도리천을 지키고 있는 제석천왕은 군사가 없으므로 이 금강저를 들고 흔들면 아수라들이
추풍낙엽이 되어 우수수 떨어진다고 한다. 이렇듯 금강저는 적군을 물리치는 도구, 즉 우리의 번뇌 망상을 물리치는
도구로 보면 된다.
6. 거사와 처사 그리고 보살
거사와 처사
일반적으로 남성불자를 처사라 하는데 이는 거사의 잘못이다.
처사는 두 가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유교권에서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한단계 승격을 시키는데 이를 처사라 했다.
그 두 번째는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지 못한 자가 절에 와서 요사채에서 생활하면서 스님들의 알음알이를 배우곤 하는 자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처사는 재가불자를 말하는 거사(예 인도의 유마거사)가 옳은 표현이다.
인도의 유마거사는 중국의 방거사 등과 더불어 불교의 3대 거사로 불리운다.
그는 머리른 깍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 옛부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선근을 심어 무생인을 얻
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변재는 걸림이 없고, 신통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모든 가리침을 완전히 기억하는 힘에 숙달
되어 있었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자신을 얻어 악마의 재앙을 물리쳤고, 심오한 진리의문에 들어 깨달음의 기슭에
이르렀으며 모든 방편을 통달하고 있었다.
하루는 유마거사가 눈에 보이지 않자 알아보니 유마거사가 몸이 아프다고 한다. 병문안을 보내려고 하니 10대 제자
중 선뜻 가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훌륭한 제자들조차도 '유마거사와의 불법이 높았음을 인정'하는
일화이다
보살의 유래
1) 고려가 망하고 정도전이 유교를 육성하고 불교를 배척하자 대중속에 계시던 스님들이 전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산 속에 먹거리가 없슴을 안 어머니, 할머니들이 먹을 음식을 차려들고 산에 가서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여 먹여 살
리는 스님들에게는 어머니 할머니들이 그야말로 보살일 수 밖에 없어서 보살이라고 했다.
2) 보살의 보리살타의 준말이다. 보리살타는 인도어 보디사트마에서 유래된 것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뜻
따라서 남성 여성 구분하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을 통칭 보살이라 부른다.
운문사 비로전(옛날 대웅보전) 어간문 앞 계단 좌우에 있는 석조사자상
좌 3층 석탑 우 비로전 정면 오백전
운문사 오백전 내 500 나한상
학인의 하루
운문사 주지이신 일진스님을 말씀하신다. 서로 낯선 학인들끼리 태어나고 자란 곳과는 전혀 다른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학인스님들이라고...
그런 학인 스님들의 일과를 그린 그림이 있어 실어보았다.
예불, 간경, 공양, 석차례, 운력, 포행, 도담, 수면이 전부인 학인스님들의 수행생활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운문사 작압전
운문사 작압전(鵲鴨殿)
전면,측면이 한 칸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전각이지만 운문사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는 전각이다. 운문사의 전신은 대작갑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600년에 원광국사가 제 1중창을 한지 303년 뒤 신라 경순왕 4년 서기 930년에 보양국사가 제 2 중창을 하면서 오늘날의 작압전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운문사는 창건당시 작갑사(鵲岬寺)였다. 제 2 중창을 한 보양국사가 서역과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던 중 서해에서 용왕의 청으로 경을 설하여 주고 돌아오려 하는데, 용왕이 작갑사의 옛터를 찾아 절을 지으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할 어진 임금이 나올 것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돌아와서 작갑사의 옛터를 찾는데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서 북쪽 고개에 올라와 보니 멀리 황금탑이 보였다. 그 자리로 내려와서 보니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다시 현 북대암 자리에 올라가서 보니 찬란한 빛을 발하는 황금탑 주위에 까치떼가 땅을 쪼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땅 밑을 파 보니 무수한 벽돌이 나왔기에 그 벽돌로 탑을 쌓아 보니 벽돌이 하나도 남지가 않아 그 자리가 바로 작갑사의 옛터임을 알았다고 한다.
까치떼들의 도움으로 작갑사를 중창하게 된 보양국사는 까치떼를 기념하기 위해 까치작(鵲)자에 오리압(鴨)자를 써서 작압전을 지었고, 사람들은 작압사로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937년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려 이 때부터 운문사이라 불리웠으면 호거산을 운문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압전은 일제 때 지금의 종무소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인 관음전 옆으로 옮겼으며 안에는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가 있다.
운문사 석가여래좌상 ( 보물 제 317호) - 신라말기
운문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317호)
작압전에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 시대 말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연화좌대와 두광 및 신광 등 광배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불상으로 불상높이 673Cm, 대좌높이 41Cm, 광배 높이가 92Cm 에 이른다. 그러나 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 불상은 살상투가 뚜렷하며,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법의가 수직으로 무겁게 내려져 있다.손모양은 항마촉지인으로 다소 어색한 감이 있고 결가부좌한 양발 사이에는 부채꼴의 주름이 잡혀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순썹, 작은 눈, 오뚝한 코, 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통견)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승각기가 보인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운문사 사천왕 석주
운문사 사천왕 석주(보물 제 318호)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것으로 그 에가 드물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탑의 기단부를 장식하기 위해 조각되었던 것이 파편으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석주 네 기가 각각의 높이가 달라서 정확한 추정으로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모두 갑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에 밟고 있다.
사천왕은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하겠노라 서원을 세우고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악을 물리치는 천신으로 동방 지국천왕(비파), 서방의 광목천왕(용과 여의주), 남방의 증장천왕(보검), 북방의 다문천왕(보탑)을 통칭한다.
이들 사천왕상 높이를 보면 제 1돌기둥은 114 Cm, 제 2돌기둥은 118Cm , 제3 돌기둥은 128Cm , 제 4 돌기둥은 122 Cm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 사천왕상이나, 철갑선사탑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들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8세기의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작압전 내 목탁
운문사 관음전
운문사 명부전 (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그리고 양 가에는 시왕을 모셨다.)
끝으로 운문사 서점 벽면에 있는 벽화 몇 점을 싣는다.
벽화에 관한 설명은 본 카페 "벽화와 탱화" 게시판에 차츰 싣겠습니다. 제일 아래에 있는 혜가단비도는 이미 "벽화와 탱화" 에 실려 있는 내용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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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천거사님 덕분에 행복카페가 조화롭고 풍요로워 진것 같습니다 감사 ...고맙... 수고... 108복덩이네요
108문화원 아니면 어떻게 이런 공부를 할수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석천거사님!! 고생이 많습니다.
대단하신 석천거사님과 존경하는 능산거사님 이쁜 간사님들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도반님들이 계시니 어떤 추위도 즐거움만주더군요^^너무 대단하고 사랑합니다^^
석천거사님 수고 많았어요. ()()().
원장님께서 보내주신 쪽지를 읽고 이제사 부랴부랴 수정했습니다
지적해주신 원장님 감사합니다. 이런 수정작업을 거치면서
또 한 번 배우게 되니 이 또한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