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 의신조사는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인도)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흰 나귀 한 마리에 불경을 싣고 신라로 돌아왔다. 의신조사는 귀경길에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고 있었는데, 나귀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범상치 않은 생각이 들은 스님은 주변을 살펴보고 수려한 산세가 가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 여겨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절 이름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고 한다.
일주문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시대적용 기타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속리산사실기비
이 비석은 속리산의 내역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7년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써서 법주사 입구에 세운것이다. 내용은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임금이 이곳에 행차한 사실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제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10층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4년에 옥천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법주사 벽암대사비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마애여래의상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가 새롭게 고쳐 지었으며 그 뒤로 진표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은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倚像)이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 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로서 이러한 예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이 유일한 작품인데 그 양식상의 특징과 연관지어 미륵불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높이는 5m로서 머리에 불룩한 나발이 있고 목에 삼도가 표현되었다.
상호는 치켜 올라간 눈 꼬리, 정면을 향한 도식적 귀, 작은 입과 더불어 군살이 보이는 턱의 모습으로 인해 정교함이 부족하다. 두 손은 가슴까지 들어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였다. 다리는 연화대좌 위에 걸쳤는데 한껏 벌리고 않은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로부터 어깨·팔·무릎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면적이고 거칠게 조각하였다.
이렇듯 현실성이 부족한 조각이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추상적 아름다움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여래의상 왼쪽 아래에 2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다.
그 하나는 짐을 싣고 있는 말[馬]과 그 말을 끌고 있는 사람이 음각되어 있다. 이는 창건주 의신 조사가 인도에서 경전을 싣고 돌아와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를 도설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牛]의 모습이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한 소가 진표 율사에게 무릎 꿇고 경의를 표했다는 설화를 나타낸 것이다.
마애여래의상을 비롯해서 이 두 가지 설화를 담고 있는 암각화는 예술적으로는 우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절의 구심점인 미륵불과 창건의 설화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마애여래의상 북쪽 벼랑에는 또 다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대좌에 앉아 있는 의상(倚像)의 모습이다.
왼손에는 지장 보살이 지니는 특유의 여의주가 새겨져 있어 지장 보살로 추정한다. 상호의 표현과 옷자락의 모양 등으로 미루어 마애여래의상과 동시대인 고려 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장 보살은 지옥세계의 구세주이지만 미륵신앙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석가불과 미륵불의 중계자이기도 하다.
즉 석가불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시대(無佛時代)를 주재하면서 미륵불에게 석가불의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암각의 지장 보살은 바로 마애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며 수행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표 율사의 수행과정에서 보면 이 마애미륵불과 지장 보살과의 관계는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진표 율사는 혹독한 수행을 통해 지장 보살에게서 인가를 받고 법을 전해 받지만, 스님은 궁극의 뜻이 미륵에 있어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진표 율사의 경우 신앙의 중심은 지장이 아니라 미륵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수행담이 암각화로 표현되면서 미륵불은 정면에 크게 새기고, 지장보살은 구석에 작게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해본다.)
당간지주와 철당간
당간이란 달리 찰 또는 찰주라고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걸었다고 한다. 한편 당간이란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는 솟대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 목종7년에 조성된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약 16m에 이르렀다고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3년 국가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바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당시에는 22m높이로 복원되었고, 1972년에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연지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련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천왕문과 사천왕상
금강문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불법의 세계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사찰의 금강문은 앞면 3칸 정도의 규모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법주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는데, 동쪽 세계를 관장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인간 감정의 기쁨의 세계를 총괄한다. 서쪽 세계를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서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남쪽 세계를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끝으로 북쪽 세계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이처럼 인간사를 관장하고 있는 사천왕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시기에 판단하여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왕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최대의 공경을 올리곤 한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금강역사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금강문 안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 2위와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을 함께 봉안하였다.)
금동미륵대불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33m의 엄청난 높이로 주변 산세까지 압도하고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재료상 콘크리트-청동-금동불 순으로 변화했다. 콘크리트가 청동불로 바뀌는데는 안정상의 이유, 청동이 금동불로 바뀌는데는 외관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다. 전자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 콘크리트 철근이 부식됐을 가능성이 우려됐고, 후자는 청동인 까닭에 용접선이 그대는 드러나는 등 외관상 보기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더라도 법주사 미륵대불이 황금색의 띄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는 단순히 '보기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라는 교리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이중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접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이마가 넓고 평평하며 바르다' 정도의 뜻이다.
또 32길상에는 첩여우왕(睫如牛王), 목감청색(目紺靑色), 유사십치(有四齒), 치백여군도화(齒白如軍圖花) 등의 내용이 있다. 풀이하면 '속눈썹이 소의 그것과 같이 길다', '눈는 검푸른 색이다', '마흔 개의 이가 있다', '이가 군도화처럼 희다' 등의 뜻이 된다.
이밖에 설연박(舌軟薄·혀가 부드럽고 얇다), 협여사자(頰如獅子·볼이 사자와 같다), 양견원만(兩肩圓滿·두 어깨가 둥글고 원만하다), 수수과슬(垂手過膝·손을 늘이면 무릎을 지난다), 음장은밀(陰藏隱密·음경이 음밀하게 숨어 있다), 비퇴장(脾腿長·넓적다리가 가지런하고 길다) 등의 표현이 있다.
몸이 황금색을 발하는 것은 '부체유연세활 자마금색'(膚體柔軟細滑 紫磨金色)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다. 해석하면 '피부가 부드러우며 곱고 매끄러운데 자마금빛이다'라는 뜻이 된다. 자마금은 자주빛이 나는 황금으로, 품질이 가장 좋은 황금을 일컫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이 금동옷을 입게 된 데는 이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여느 불상도 마찬가지지만 법주사 미륵대불의 피부는 곱고 매끄럽다.
80종호(種好)는 32길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언급된 항목이 80개에 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잘 생긴 귀를 '부처님 귀 같다'라고 표현한다. 이에 대한 표현이 80종호에 존재한다. 42번째 표현에는 부처님 귀의 모습으로 '귀가 두텁고 길으며 귓불이 늘어졌다'라고 표현했다. 나아가 43번째 표현에서는 '두 귀 모양이 가지런하다'라고 적었다.
80종호에는 '몸매가 바르고, 곧아서 굽지 아니해야 하고'(17번), '몸과 팔다리가 견고하여 비뚤어지지 않은 것이라야 한다'(18번)는 표현도 보인다. 또 '얼굴이 둥글고 넓고 깨끗한 것이 보름달 같아야 하고'(57번), '얼굴빛은 화평하여 웃음을 띄운 것이라야 한다'(58번) 라고 적었다.
철확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쇠솥은 높이 120㎝, 지름 270㎝, 두께 10㎝의 거대한 규모로서 철확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강원 옆 공양간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0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람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와 함께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물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상전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쉽게도 우리가 답사를 갔을때 팔상전은 공사중이었다. 그래서 못봤다...해서 온전한 사진은 불교신문에서 가져왔다.
쌍사자석등
국보 제5호. 높이 330cm. 이 석등은 일반형 석등의 간석(竿石) 부분을 8각기둥 대신 쌍사자로 변화를 준 이형석등이며, 쌍사자석등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지면에 놓인 넓은 8각 지대석의 옆면에는 상하에 테를 두르고 우주를 새겼으며,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과 간석을 대신한 쌍사자와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하대석 역시 8각이며 옆면에는 단판의 내림연꽃이 8개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사자 2마리가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을 떠 받치고 있는데 머리와 갈기와 다리 근육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상대석에도 단판의 올림연꽃이 상하로 조각되었으며 연판 안에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얹힌 8각의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장방형 화창(火窓)이 있고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8각의 개석(蓋石)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추녀 끝에 약간의 반전이 있고 내림연꽃이 조각된 정상부에는 보주(寶珠)만 남아 있다. 8각을 기본으로 하면서 간석에 변화를 준 이 석등은 구성이 간결하고 전체 비례가 적당하여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걸작으로 꼽히며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에피소드~ 위 사진에서 보면 왼쪽에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가 암사자, 오른쪽에 있는 사자자 숫사자라고 한다. 암사자는 힘이 들어서 입을 벌리고 있고 숫사자는 기운이 세서 오른쪽 받침석이 약간 더 올라가 있다.
사천왕석등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다. 높이 3.9m에 달하며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대석에 새겨진 사천왕으로 인해 사천왕석등으로 부른다. 조각 기법으로 미루어 쌍사자석등과 같은 8세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팔각형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었다. 지대석은 방형으로 네 개의 돌로 구성했 다. 그 위의 하대석은 2단인데 하단의 각 면마다 안상을 얕게 부조하였다. 상단은 그릇을 엎어놓은 형상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면을 줄이고 8개의 복련을 나타냈다. 중대석 즉 팔각의 간주석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이 늘씬하게 올라갔고 윗부분에만 8개의 앙련을 새겼다. 간주석의 위아래로는 각각 3단, 2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화사석 역시 팔각으로서 각 면에는 화창과 역동적인 사천왕상을 번갈아 두었다. 장방형의 화창 주위에는 쌍사자석등과 같이 구멍이 남아 있다. 경사가 완만한 옥개석은 경사가 끝에 약하게 반전시켰다. 위에 올린 보주는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대웅보전
삼존불
(비로나자불)
(석가불)
(노사나불)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基壇石의) 양식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2층 건물의 구조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좌우로 7칸에 달하는 큰 규모를 감안하면 아주 적절한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마곡사(麻谷寺)의 대웅전과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 전라남도 화엄사(華嚴寺)의 각황전 등과 함께 2층 전각으로서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안에는 닫집 없이 후불탱의 위를 막아 천룡이 불상과 불화를 호위하도록 했다. 170평에 달하는 건물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주존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협시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전체 높이 550㎝이고 허리 둘레 390㎝로서 우리 나라의 소조불상 중에서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즉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이고, 오른쪽의 노사나불은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밖을 향하는 설법인(說法印), 왼쪽의 석가불은 한 손은 위를 향해 펼치고 한 손은 바닥을 향해 있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였다.
전체적으로 경직된 상호에 눈과 코, 입의 선이 작고, 목은 웅크린 듯 짧게 표현하였다. 삼신불 뒤로 삼신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각각 독립된 후불탱으로서 1925년 보응(普應)·문성(文性) 스님 등이 그렸다. 비로자나후불탱은 세로 616㎝, 가로 348㎝의 커다란 종이에 족자로 이루어졌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이 크게 자리 잡고 상단에는 문수·보현보살과 성문중(聲重衆), 하단에는 성중과 동자상을 표현하였다. 좌우의 노사나후불탱과 석가여래후불탱은 규모만 조금 작을 뿐 비로자나후불탱과 흡사하다. 대웅전 오른쪽 벽에는 1897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고, 왼쪽 벽에는 1928년에 조성한 삼장(三藏)탱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명부전
(위사진 왼쪽에서 세번째 책을 머리에 얹으신분이 염라대왕임)
명부전에는 명부세계를 주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분이다. 도리천(쩸利天)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지장 보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절의 중흥조 진표 율사는 몸을 돌보지 않는 치열한 수행을 통해 지장보살에게서 정계(淨戒)를 받았다. 삼국유사에는 ‘지장보살이 석장을 흔들며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스님에게 가사와 발우, 그리고 계본(戒本) 등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마침내 미륵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금산사에 이르러 지장신앙에 입각한 점찰법회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법주사 지장신앙의 전통은 다시 제자 영심에게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지금의 명부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절에는 지장전이라 하여 지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 있었으나, 이후 18세기와 20세기 초의 가람에는 지장전이 사라졌다.
안에는 오른손에 석장을 잡고 왼손에 여의주를 든 지장보살과 그 협시로 도명존자·무독귀왕을 봉안하였다. 다시 그 좌우로는 각각 5구씩의 시왕상이 있는데 시왕상마다 모두 동자상을 대동하였다. 또한 각 2구씩의 판관·녹사·인왕상도 배치되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96년에 조성한 지장보살도가 있고, 1992년에 주조한 동종도 있다. 명부전 외벽에는 삼면에 걸쳐 지옥세계의 무서운 장면이 벽화로 그려졌는데, 이를 통해 중생들로 하여금 경계심을 일으켜 생전에 선업을 닦도록 가르침을 준다.
삼성각
삼성각(三聖閣)은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칠성(七星)·독성(獨聖)·산신(山神)을 탱화로 봉안하였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고, 산신은 우리 나라 고유의 재래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독성은 부처님의 16제자 중의 하나였던 나반존자를 가리킨다.
삼성각은 이처럼 불교와 외래신앙이 습합된 결과로서 특히 산신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대개 가람의 외곽에 들어 서 있다. 그러나 법주사의 가람 구조상 산 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던 듯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안에 봉안된 탱화들은 1991년에 조성한 것이다.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한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하였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었다. 왼쪽의 독성탱은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산신탱은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 할아버지와 시자의 모습이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나타냈다.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희견보살상
법주사 희견보살상은 지대석 위에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법주사희견보살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금오태전선사 부도
금오 대선사(金烏大禪師)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은 법주사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나아가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스님이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스님은 1896년 7월 23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동래 정씨로 태어났다.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 그리고 이름이 태전이다.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금오 선사는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았는데 천성이 영민하고 기질이 출중하여 학동 가운데 공부가 늘 앞섰다고 합니다. '금오집(金烏集)'에는 가형(家兄)으로부터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꾸지람과 매를 맞고는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무엇을 하느냐"며 집을 나와 그 길로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1912년 3월 마침내 스님은 15세로 금강산 마하연사에 출가하여 도암 긍현(道庵亘玄)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안변 석왕사 등지에서 불교의 기초교육을 습득하고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하였다. 이해 8월에는 통도사에서 일봉(一峰) 율사를 계사(戒師)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남달리 참선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수 년 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사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충청남도 예산 보덕사의 보월(寶月)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보월 선사는 스님의 그릇됨을 보기 위해 쉽게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금오 스님은, “시방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 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 라는 오도송을 올리자 그제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치루지 못한 채 보월 선사가 1924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보월 선사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에게서 건당식을 받고 전법계까지 수지하였다. 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다.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다. 1935년에는 경상북도 김천 직지사의 조실을 지냈고, 이후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칠불사, 서울 선학원 등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출가자의 모범적 자세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1954년에는 불교정화를 위한 전국비구승대회의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스님은,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이 법주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서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수좌들에게 열정적으로 불도를 가르쳤다.
이듬해 1968년 음력 8월 17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1975년 법주사에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세수 73세, 법랍 57년을 살다간 스님의 생애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납자는 승려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스님의 법을 이은 상좌로는 월산, 범행, 탄성, 혜정, 월주 스님 등 한국불교 현대사의 큰획을 그으신 분들이 많이 있고,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스님이 일군 한국불교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대종사백운탑
범종각
범종각은 팔상전 동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 4물(四物)을 봉안하였다.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오랫만에 답사를 떠나 행복했고, 더구나 법주사를 다년온것이 무척 좋았다. 어제(2012년 8월 29일) 백석도서관에서 부처, 보살, 수호신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왔다. 절에 가면 대체적으로 삼존불 형태의 불상이 있는데 그저 석가모니를 협시하여 왼쪽 오른쪽에 누구 정도가 있다라는 것만 알았지 정확하게 몰랐는데 이번 공부를 통하여 다는 아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고... 삼존불이나 탱화를 볼때면 늘~~ 기억을 되살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