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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성근 부산 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 범어사역~금강암~북문~동문~대륙봉~만덕고개~성지곡수원지
▲ 본격적 산행이 이루어지는 대성암 입구, 여기서부터 북문까지 약 1.5km를 숨이 차도록 오른다.
갈맷길 7코스는 총구간 22km로, 금정산성 동문을 기준으로 두 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상현에서 북문을 거쳐 동문까지 13km, 동문에서 남문을 거쳐 만덕고개를 넘어 성지곡까지 9.3km 구간이다. 비 내리고 청명한 날, 여름 금정산 능산길을 걸어 보았다. 애초 거리를 떠나 오르고 내려서는 그 품이 만만치 않아 온천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절반만 가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걸어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걸었다.
막상 걷다 보니 엄두가 나지 않던 마음도 지워지고 시나브로 능선을 오르내리며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말이 아닌 평일에 혼자 걸었다는 것이 새로운 맛을 느끼게 했다. 주지하다시피 금정산은 주말이면 도심 부산의 산꾼들로 들끓는다. 길이란 길은 시내 번화가보다 더 붐빈다. 그 혼잡과 부산스러움을 말끔히 지운 평일 갈맷길 7코스는 고적하면서도 한가롭다 못해 막판에는 외로운 길이었다.
들머리를 팔송에서 시작한다. 이 길은 범어사 옛길로서 ‘명상과 함께하는 금정산 갈맷길’을 비롯해 ‘부산 사포지향 갈맷길 2백리’ 세 번째 구간이다. 경동아파트 뒤편 성불사 입구에서 금어동천길로 들어선다. 흰빛 수피의 서어나무들이 계명봉 비탈 가득 들어서 있다. 이 코스에 대한 이야기는 지난해 다룬 적이 있어(2011년 8월호 ‘우중의 금어동천(金魚洞天)은 별천지 같았다’ 참조) 노정만 밝힌다.
길은 범어사 순환도로를 지척에 두고 나란히 범어사로 향한다. 순환도로 가장자리에는 관할 구청이 목재 데크를 깔았다. 열이면 아홉, 한마디씩 한다. 곧 예산낭비라는 지적이다. 어찌보면 지나친 친절일 수도 있고, 도로를 이용해서 범어사로 가는 이들을 위한 배려인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글쎄’라며 못마땅해한다.
아무튼 지장암~금어동천~비석골~범어사 입구로 연결되는데 불과 2km 남짓하다. 허나 둘레길의 지위로서는 전국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없다. 범어사 입구에서 어산교를 건너 절집 옆으로 난 길을 비스듬히 오르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는 휴휴정사 앞이다. 숲의 주인들이 하마 가지를 펼쳐 그늘이 짙다.
바위 틈새 물소리 들으며 마음 비우고 걷는 길 집채만 한 바위들이 “바쁠 것 뭐 있냐”며 말을 걸어 온다. 여유가 따로 없다. 한나절 바위에 드러누워 숲 지붕에 일렁이는 하늘빛을 지겹도록 감상하는 맛도 좋은 곳이다. 한여름 피서지로는 명당이다. 따로 시간을 내어 너럭바위 골라 책 한 권 읽어 볼 일이다. 계곡이라지만 물보다 바위가 많다. 산꼭대기 바위가 굴러 내려와 돌무더기를 이룬 너덜지대다. 이 바위 틈새로 물이 흘러내린다. 이 물을 일러 ‘대성은수(大聖隱水)’라 한다.
바위 틈 사이사이 나무들이 뿌리를 내렸다. 팽나무, 개서어나무, 당단풍, 쇄물푸레, 피나무, 상수리, 음나무, 노각나무가 단풍으로 물들 때는 금강만풍(金剛晩楓)의 현장이다. 시방은 묵언 정진의 아름다움을 설파하고 있다. 가끔씩 오색딱다구리가 목탁을 두드리듯 나무결을 헤집고 있다. 갈맷길 7코스는 비우고 걷는 길이다. 속에 든 것 버리고 갈 때 빛난다. 버릴 것이 무엇이던가. 그 마음 없이 금정산을 오르면 마치 배낭에 큰 돌덩이 하나 든 것처럼 종내 몸과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천천히 걸을 일이다. 바위 틈새에 뿌리내려 마치 바윗덩어리와 하나가 된 듯한 고목들의 자태며 노래가 새삼 존경스러울 뿐이다.
북문으로 오르는 길 마지막 절집 금강암이 너덜 건너에 있다. 현판과 주련이 죄다 한글이다. 누구나 쉽게 그 글을 받아들인다. 깨우침이 번지는 찰나인데 그 순간을 많은 사찰이 놓치고 있다. 물론 한문으로 걸어둔 주련이 폼이야 날 법도 하겠지만 사실 단박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본듯 아니 본듯 스쳐 지날 뿐이라는 점에서는 한글 주련은 반갑고도 고마운 배려다. 금강암은 대자비전 현판도 그냥 한글로 했다. 이 금강암의 현판 등은 전 범어사주지 정여 스님이 글을 쓰고 조각을 했다고 한다. 자혜당 뒷마당에서 계명봉을 건너다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가을이면 계명추월을 한눈에 보는 곳이다.
북문으로 오르는 비탈이 제법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한다. 소진하지 못하고 체내에 쌓였던 지방덩어리가 타는 과정이다. 이마에 땀방울이 돋았지만 북문에 이르자 바람이 걷어간다. 북문은 범어사에서 1.6㎞ 지점,고당봉(801.5m)에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오르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해 있다. 금정산성의 4개 문 중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어서 화엄벌이라고도 한다.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은 총길이 17.3㎞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4개의 문과 4개의 망루가 있다. 전란 때마다 주민들이 피신했다고 해 ‘피란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다고 짐작하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부가 쑥대밭이 된 후 1703년 인근 범어사·국청사·해월사의 승려와 부민을 동원해 다시 쌓아올렸다. 부역에 시달린 승려들이 어찌나 고달팠는지 미루어 짐작케 하는 비석이, 비석골 조엄(趙)의 영세불망비(巡相國趙公 革祛寺幣永世不忘碑·순상국조공혁거사폐영세불망비)인데 따지고 보면 그이가 바로 승려의 부역을 없앤 전설의 낭백 스님이다.
▲ 1 범어사 옛길에 있는 비석골, 다섯 개의 비들은 모두 범어사와 각별한 인연을 가진 사람들로 특히 조엄의 사연이 눈길을 끈다. 2 해발 약 400m 지점의 너덜지대.
그러니까 조엄이 낭백(浪佰) 또는 만행(萬行) 수좌로 불렸던 낙안선사(樂安禪師)의 현신이라는 것이다. 선사는 갖은 선행과 보시로 삶을 일관했다. 입적을 앞두고 그가 머물던 방 앞에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이 문을 닫는 사람(開門者是閉門人·개문자시폐문인)’이라는 유필을 남겼는데, 훗날 조엄이 그 문을 열고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아래 만연했던 폐해(갖가지 부역과 공산품 제조납품의 고역 등)를 척결했다는 전설 같은 그 인연을 말함이다.
전국 최초의 민속주 산성막걸리 원효봉을 넘어서면서부터 본격적 능선길이 이어진다. 의상봉~제4망루~부채바위~제3망루~동문으로 이어지는 이 길에서 부산의 도심을 한눈에 읽는다. 실로 장쾌한 조망이다. 흔히 금정산을 1천 마리의 거북과 1만 마리의 자라가 있는 형상을 지녔다 하여 천구만별(千龜萬鼈)이라 부르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통해 형성된 기기묘묘한 암장들이 전국 어느 명산에 견주어도 당당하다.
특히 북문에서 남쪽 3km 동문에서 1km 거리에 있는 부채바위와 나비바위에 연해 있는 3망루에서 입지는 탁월하다. ‘궁벽한 자리에 집짓는 지혜’에 감탄하면서 4망루 쪽 경관에 압도당해 절로 탄성이 인다. 부산에 살면서 금정산의 매력을 새삼 깨치는 장소다. 나아가 산 아래 조물거리는 인간세상의 조잡스러움이 참 부질없는 악다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금정산은 가끔 이 도시민들이 거친 세상 사느라 저도 모르게 들앉은 욕심덩어리 산 아래 던져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심성의 순화소다.
넓게 볼 일이다. 착하고 정의롭게 살 일이다. 그러다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오를 일이다. 금정산에 고마움을 느끼며 마음 추스리며 걷다 보니 동문이다. 3망루 지나 동문까지는 숲에 가려 능선 조망은 없다. 소나무들이 검푸르게 우거져 있고 성벽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그렇게 드문드문 산성이 이어지면서 동문 앞 대륙봉이 우뚝 다가선다.
▲ 1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이다. 이 중 북문은 가장 거칠고 투박하게 축조되었다. 2 3망루 일대. 천구만별의 금정산록은 풍화작용을 통해 형성된 기묘한 암장들이 금정의 수호신처럼 당당하다.
이쯤에서 금성동마을로 내려가 산성막걸리 한잔 하기를 권한다. 금성동은 금정산성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는데 공해마을·산성마을·죽전(竹田)마을·중리(中里)마을 4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지난해부터 산성막걸리 축제가 오월에 열리고 있다. 산성막걸리는 금정산성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산성을 만들던 석축자들의 새참술이 금정산성 막걸리의 시작이었다.
산성막걸리가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것은 오래전부터이긴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 군수사령관으로 복무할 당시 금정산성 막걸리를 즐겼다. 당시 밀주로 만들어지던 금정산성 막걸리는 박정희 준장이 대통령이 된 이후 1979년 대통령령으로 전국 최초의 민속주가 되었다. 달착지근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산성막걸리는 허리띠를 풀고 마실 요량이라면 동문에서 하산할 각오로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만 축이는 데서 만족해야 한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실제 갈맷길 7코스는 한 번에 완주하기가 만만찮은 코스다. 지형 특성상 오르고 내리는 능금마루가 대부분인 데다 쉬엄쉬엄 걷자면 두 번에 나누어 걷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제대로 본다.
금정산 동문은 산성고개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다. 동문은 북문 다음으로 거칠고 투박하다고 한다. 수축은 오한원 동래부사가 동래부민을 동원해 1807년(순조 7) 가을 한 달 만에 완성한 성이다. 이후 일제가 금정산성을 파괴한 이후 1972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었는데, 성곽의 경우 그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가 지난해 6월, 동문에서 남문을 연결하는 산성고개길 성곽잇기 사업 완공으로 끊어진 성곽은 연결되었다.
1958년 금정구 장전동에서 북구 화명동을 잇는 2차선 도로가 개설되면서 끊어진 지 53년 만이었다. 따라서 이제 언덕을 내려오지 않고 곧장 남문이나 대륙봉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초장부터 가파르다. 데크계단이 설치되었지만 정상부 가까이까지 오르다 보니 숨이 턱에 차고 이내 땀이 솟아난다. 다리쉼 하느라 뒤돌아보니 금정의 주능이 뒤따라온다. 문득 부산이 개항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륙봉으로 향하는 길에서 동래. 사직동 터와 맞은편 장산 자락과 황령산이 첩첩 다가선다.
대륙봉(520m) 정상부는 평평한 반석이다. 대륙봉이란 이름은 1970년 대 초 대륙산악회가 암벽타기 연습을 하던 대륙바위 위에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좋다. 서쪽 낙동강을 등진 파리봉으로부터 시작해 상계봉, 암봉, 망미봉으로 이어진 축이 반갑다. 그 반가움은 시야에서 하늘 찌를 듯 우후죽순 고공행진을 하는 고층아파트며 사람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부산의 산 어디를 가더라도 온전하게 산이 산답게 서 있는 곳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파리봉은 불교의 칠보(七寶) 중 하나인 수정(水晶)을 뜻한다.
범어사역~금강암~북문~동문~대륙봉~만덕고개~성지곡수원지
▲ 1 성지곡유원지로 인도하는 삼나무숲길. 2 7코스의 종점이자 새로운 시작점인 성지곡수원지, 여름 긴긴 해를 실감한다.
제2망루를 이정표 삼아 성벽 능선길을 가다 보면 무위암 갈림길이 있다. 남문 갈림길에 제법 세월을 살아왔음직한 감나무 한 그루, 이끼 낀 수피로 정정하다. 누군가 허기를 달래느라 먹고 난 뒤 뱉어낸 씨앗 하나 용케도 뿌리내려 오가는 길손을 마중하고 배웅한다.
2망루로 오르는 길은 허리춤까지 오는 성곽이다. 허물어진 것인지 원래 그 높이인지 세월이 흘러 그 마저 자연스럽다. 주변 숲은 사방오리나무가 우점한다. 2망루는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실제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단촐한 망루에서 망을 보던 군졸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웠을까.
능선 옆으로 국토행진길이 나 있다. 남문마을 갈림길까지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내려선다. 휴정암 갈림길까지 10분 남짓, 참나무류와 소나무가 뒤섞인 숲은 점차 소나무 군락으로 바뀐다. 곰솔이 우점하는 가운데 적송이 드문드문 서 있다. 오후 3시의 햇살이 솔숲 사이로 박힌다. 진행 방향에서 좌측 산 아래는 금강공원이 있고,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주말은 몹시 번잡한 곳이지만, 평일은 참으로 호젓하다.
그 사라진 번잡은 일대에 난립했던 노점상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얼마전 철거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남문을 넘어와 이곳에서 파전에 도토리묵을 안주로 동동주 한 사발 들이키던 때도 있었다. 불콰하니 달아 오른 얼굴로 내려가던 하산길은 휴정암 쪽으로 하여 천년송 너럭바위로 하여 금강공원 쪽이었던 기억 새삼스럽다. 어쨌든 사거리에서 만덕고개 방면으로 가는 길은 솔숲 샛길이 많아 길을 놓칠 수도 있다.
도적떼가 들끓어 함께 모여 넘던 만덕고개 바위 틈 좁다란 길을 따라 직진하면 깔딱고개 정상부가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밝아진다. 툭 트인 조망점이다. 백양산 자락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과 사직동 일원이 발아래다. 역방향에서 왔다면 꽤 숨이 가쁜 된비알이다. 그래서 ‘마(魔)의 깔딱고개’라고도 하는데, 내려서며 데크 계단을 헤아려 보니 147칸으로 어지간하다. 그나마 사행으로 조성해서 쉬엄쉬엄 오를 수 있다.
비탈을 내려서면 다시 솔숲길이 이어진다. 하도 많은 사람이 다니다 보니 길바닥이 한밤중에도 보일 만큼 훤히 벗겨져 있다. 주 등산로이다 보니 다른 곳에 비해 심하다. 풀씨가 날아와 뿌리내릴 틈이 없다. 이 길을 한 석삼 년 닫아 두면 회복될 수 있을까.
▲ 생태터널로 새롭게 단장한 만덕고개는 과거 떼지어 넘던 사연 많은 고개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부전교회 부활동산을 지나 동래 정공 묘 두 기를 지나면 안부에 이어 만덕고개다. 만덕고개(290m)도 새로 단장했다. 터널화해서 야생동물의 이동을 가능케 하는 생태통로를 만들었다. 쉼터도 만들었다. 그 옆에 만덕고개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만덕고개는 옛날 구포장과 동래장에 장을 보러 가던 사람들이 오르내리던 고개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비현(其比峴)으로 가도록 되어 있는데 지역민들은 만덕령, 만덕고개 등으로 불러 왔다.’
구포 장타령에 보면 ‘고개 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아픈 다리를 하소연했던 고개가 만덕고개다. 도적떼가 들끓어 고개 아래 만덕사 절터에 모여 함께 넘던 고개이기도 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근방 모심기 민요에 등장한다. ‘명태장사는 떼를 지어 만덕고개를 넘어간다’는 구절이 그것인데 이런 사연 많은 고개도 1965년 2월 6일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졌던 부산시장 김현옥씨가 개통한 이후 명암을 달리했다.
이런 저런 만덕고개의 사연을 들추며 다리쉼을 한 다음 쇠미산 숲길로 향한다. 능선길은 고압송전탑이 지난다. 여기서부터 향토순례비까지는 맛있는 길이다. 노폭은 1.5m 정도로 산자락을 따라 사행한다. 참나무와 비목이 많다. 쥐똥나무 군락도 언뜻언뜻 보인다. 햇살은 시나브로 저물녘이다. 금병약수터를 지나자 쇠미산 습지다. 무당개구리와 산개구리들이 인기척에 놀라 습지로 뛰어 든다. 도롱뇽도 많다.
예전에 이맘때 지천에 널린 것이 개구리며 도롱뇽의 알이었건만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의 악화로 그들의 생존은 벼랑 끝에 내몰려 겨우 이런 골짜기 습지에 서식처를 마련했다. 이곳에 터 잡고 사는 산개구리와 도롱뇽 등은 2009년 국립생물자원관에서 기후변화 지표종으로 지정한 종이다.
3분 정도 나아가면 나란히 열 맞추어 선 소나무 숲인 구민의 숲이 있다. 이곳 역시 아침나절과 주말이면 산보 나온 인근 주민과 각지에서 몰려온 인파로 북적인다. 만남의 광장을 내려서면 편백과 삼나무 숲이 나타나면서 성지곡수원지로 임도가 마지막 여정을 인도한다. 겨울이었다면 하마 어둑살이 내려 불편했을 길이었겠지만, 여름 긴긴 해는 종점을 지나고도 건재했다. 새삼 여름 해에 고마움을 느끼며 다음을 기약한다..
출처 : 월간산 201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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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합니다... 음악 대낄이, ㅎ~~~~~~.
....()...
상당히 먼길 입니다.
전문가 아니면 도전에 실패할듯한 장거리 코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