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살았던 행복
아는 분의 안수집사 임직이 있어 익산에 있는 한 교회를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조금씩 기가 죽기 시작했다. 오래된 건물에서 보여주듯 교인들의 신앙의 깊은 연륜과 함께 임직식을 위해 역할을 분담해서 각자가 주어진 위치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체계적인 모습에서부터 기가 눌렸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여진 모습들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벌어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평일 낮 시간임에도 축하하기 위해 큰 교회 안에 가득 메워진 사람들로 벌어진 입은, 50년도 훨씬 넘은 오래된 교회와 건물에서 풍겨오는 ‘권위주의에 구닥다리(?)’ 일거라는 이미지를 깨는 첨단 시설로 다물 줄 몰랐다.
여기저기 5-6곳에 설치되어 있는 비디오 카메라에 비쳐진 모습들이 프로젝터를 통해 강단 위에 길게 내려진 대형 스크린에 그대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임직식에 비쳐지는 모습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편안한 마음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디 그 뿐이랴? 순서가 진행될 때마다 적절하게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내가 스크린에 자막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찬송을 부를 때는 찬송의 가사가 나타나 고개를 내리거나 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했다.
외국인들을 위한 통역기가 2층 한쪽 책상 위마다 놓여져 있고, 뒤쪽으로 여러 장비들을 준비한 방송실에서는 5-6명의 사람들이 모여 능숙한 솜씨로 장비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직 꿈같은 모습이자 여전히 부러움의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더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날 임직 받은 사람들의 수가 무려 74명이나 되는 것이었다. 장로임직, 집사임직, 권사취임 대상자가 74명이라니…, 전교인을 다 더해도 턱도 없는데다 아직도 개척교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목사의 입장에서 임직자의 수가 74명이라는 말에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교인 수가 저 정도만 되어도…” 이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아니 “몇 명이 되었든 임직식을 할 수 있는 숫자만 되어도…” 라는 부러움 섞인 말도 덩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큰 교회, 신앙의 연륜들, 체계적인 활동, 첨단시설, 많은 임직자, 매 주일마다 10-20여 명씩 등록한다는 통계, 어쨋든 기가 죽는 하루였다.
며칠 후 식당에 갔다가 작은 교회를 부러워한다는 분과 이야기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작은 교회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가장 큰 이유가 워낙 큰 교회에 있다 보니 담임목사님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상담 겸 목사님과 가까이 하고 싶어도 교인들 모두가 다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 자기 차례까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일 년에 한번 목사님 모시고 예배드리기도 어렵다는데….
언젠가 크게 서운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시내에서 우연히 담임목사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너무도 반가워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눴는데 글쎄 목사님이 “그런데 낯은 익는데 어디에서 뵌 분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느 교회 출석하고 계신가요?” 하더라는 것이다.
‘교인’ 이라고 하면 목사님이 당황하실 것 같아 “목사님 교회 가서 자주 은혜도 받고 그럽니다” 했다는데 “워낙 많은 교인이라 기억하지 못해서 그랬겠지…” 하면서도 “목사님이 내 얼굴도 모르는 것을 보면 내가 그만큼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생각도 하지만 “얼굴도 모를 정도라면 나를 위해서 한 번도 기도 안해주셨겠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서운하다” 는 말을 한다.
매주 새신자가 있어서 그런지 다른 교회로 가는 성도들이 있어도 “본래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나가는 사람도 있는 법, 나간만큼 들어오니 괜찮다” 고 할 때면 “한 두 사람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시험들 때도 있다” 고 했다.
그랬다. 기죽을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큰 교회에서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소중함, 한 영혼에 대한 소중함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느끼는 소중함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오늘도 기도해주어야 할 사람이 있고 오늘도 축복해줘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을, 이것이 행복인 것을 나는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