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職業)은 일상생활(日常生活)의 보장(保障)이라 군지군(君之君)과 신지신(臣之臣)이 모두 국가(國家)에 대(對)한 직업적(職業的) 지위(地位)이며 사농공상(士農工商)도 다 직업적(職業的) 부문(部門)인 것은 다 인식(認識)하는 바이다.
봉군사신(奉君使臣)과 애친자자(愛親慈子)와 사부대부(事夫待婦)가 다 인간의 신분(身分)에 불과(不過)한 것이요 정신적 원리는 지령무편(至靈無偏)하여 상하계급(上下階級)과 귀천(貴賤)이 없는 것이다. 이 직업적 신분에서 개성지존(個性至尊)의 원리(原理)를 망각(忘却)하고 관존민비(官尊民卑)와 남귀여천(男貴女賤)의 계급을 설정(設定)하여 공리(公理)에 반역(反逆)된다는 것이 곧 인권유린이다. [1]
인권보호(人權保護)와 자유평등(自由平等)의 절규내용(絶叫內容)이 변국적 대원인(大原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상공농사(商工農士)로 뒤집어 놓아 오늘날 상공의 발달(發達)이 고도(高度)한 나라가 제일등국(第一等國)이며 제왕(帝王)의 전통적 제도(制度)를 환정(換定)하여 원대당요(願戴唐堯)의 공(功)을 찬(讚)하여 기초동량(基礎棟樑)의 종(終)을 정(定)하신 것은 요순(堯舜)은 천하(天下)에 관(官)함을 천업시(賤業視)한 것이다.
복록(福祿)은 직업(職業)[2]으로부터 오는 고(故)로 성지직(聖之職) 성지업(聖之業)이라 하여 복록사상(福祿思想)을 환기(喚起)하시니 이것이 곧 경제사상(經濟思想)의 대혁명을 시사(示唆)하심이며 김형렬(金亨烈)의 노자(奴子: 머슴)에게 항상(恒常) 경어(敬語)로 대(對)하심에 형렬씨(亨烈氏)가 미안(未安)하여 그리 말것을 청(請)하니 답왈(答曰) 너의 노자(奴子)요 나의 노자(奴子)가 아니니라 하시고 반상(班常)의 분(分)을 경계(警戒)하시고 당신께서 몸소 실천하심이라.[3] 대성사(大聖師)님의 일어일동(一語一動)이 세계진화(世界進化) 노선(路線)에 준칙(準則)이 되는 것이 요연(暸然) 무위(無違)한 것이다.
[1] 무신년(戊申年) 하루는 박공우(朴公又)를 데리고 태인(泰仁) 돌창이 주막(酒幕)에 들리사 경어(敬語)로써 술을 불러 잡수시고 공우(公又)에게 술을 불러 먹으라 하시거늘 공우(公又)는 습관(習慣)대로 낮은 말로 술을 불러 먹었더니 일러 가라사대 이때는 해원시대(解寃時代)라 상(常)놈의 운수(運數)니 반상(班常)의 구별(區別)과 직업(職業)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아니하여야 속(速)히 좋은 세상(世上)이 되리니 이 뒤로는 그런 언습(言習)을 버리라 하시니라 – 대순전경(大巡典經) 3장 106절
[2] 남송성사(南松聖師)는 18세 되던 갑진(甲辰 1904)년 봄에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여 예로부터 성현군자와 영웅호걸이 거개가 빈한(貧寒)한 가정의 환경에서 분수를 지키고 직분을 편안히(守分安職) 하는 실제 행적이 있은 뒤에, 바라는 바의 목적에 도달한 것으로 보아 우리네가 자질(資質)과 역량(力量)도 모자라면서 공연한 헛된 생각으로 허송세월(虛送歲月)만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만 7대조 휴옹공(休翁公)이 남원(南原) 교룡산(蛟龍山) 밑에서 살다가 보성(寶城) 오봉산(五峰山) 밑 작천(鵲川)으로 자손세거지(子孫世居地)를 옮긴 후 ‘세업충효(世業忠孝) 여력문장(餘力文章)’의 선세유훈(先世遺訓)을 이어 나의 자손은 ‘근수세업(謹守世業) 불타가성(不墮家聲)하라’며 남긴 가훈(家訓)을 의지하여 언행(言行)을 조심하며 선령(先靈)에 득죄(得罪)하지 않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남송성사(南松聖師)는 부모에게 적극적으로 간청하여 오랫동안 쌓인 빚으로 생활해 나오던 치산권(治産權) 전임(專任)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내어 19세가 되던 을사(乙巳 1905)년에 이르러 파산(罷産)과 청산(淸算)을 뜻대로 마치고난 뒤, 직접 노동복으로 바꿔 입고 노동(勞動)의 신성함을 배우는 첫 단계의 순서라 할 것으로, 몹시 더운 날씨에 보리타작과 달밤에 논에서 김매기 그리고 새벽이슬에 풀베기 작업등으로 3년간을 계속 끊임없이 실행하여 마을사람들의 경탄(驚歎)가운데, 22세이던 무신(戊申 1908)년에는 생활이 아주 풍성하고 넉넉할 정도를 부럽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 새 가정을 재건하게 되었다. -남송선생실기(南松先生實記) 2∼4쪽, 삼덕교사(三德敎史) 4∼6쪽,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상권[上卷] 371∼372쪽
[3] 계묘년(癸卯年) 천사(天師) 비록 미천(微賤)한 사람을 대(對)할지라도 반드시 존경(尊敬)하시더니 김형렬(金亨烈)의 종 지남식(池南植)에게도 매양 존경(尊敬)하시거늘 김형렬(金亨烈)이 여쭈어 가로대 이 사람은 나의 종이오니 존경(尊敬)치 마소서 천사(天師) 가라사대 이 사람이 그대의 종이니 내게는 아무 관계(關係)도 없나니라 하시며 또 일러 가라사대 이 마을에서는 어려서부터 숙습(熟習)이 되어 창졸간(倉猝間)에 말을 고치기 어려울지나 다른 곳에 가면 어떤 사람을 대(對)하던지 다 존경(尊敬)하라 이 뒤로는 적서(嫡庶)의 명분과 반상(班常)의 구별(區別)이 없느니라 - 대순전경(大巡典經) 3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