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국 시인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정비공장 장미꽃>
----------------------------------------------게시 목록-------------------------------------
절정 / 엄재국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카드 아버지 / 엄재국
꽃밥 / 엄재국
길 / 엄재국
폐차장에서 / 엄재국
백열등 / 엄재국
주검의 증거 / 엄재국
클릭 / 엄재국
옹달샘 / 엄재국
녹, 봄봄 / 엄재국
별꿈 / 엄재국
절정 / 엄재국
담장 위에서 저렇게
자신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는 붉은 장미는
얼마나 몸 밝은지
제 모습에 덧칠 된 빛깔에 취하지 않으려
몸 속에 들이대는 가시는
얼마나 차가운지
가시와 꽃잎이 서로를
절반쯤 죽여주는
죽은 가시와 죽은 빛깔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담장 위를
가시가 달려가고 꽃잎이 달려가고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의
정비공장 담장에 장미가 피어있다
가시로 기둥을 죄고 있다
지난 밤
몇 잔 소주에 눈 풀려진 정비공 하나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점심 먹으러간다
자동차 하체가 내려놓은
정오의 골목을 돌아 밥집에 앉아있다
수저로 입을 죄고 국물로 목을 풀고 있다
냅킨으로 어물쩡 입을 닦고
돌아오는 길 위에 튕겨져 나온 나사 하나
발로 걷어차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느슨하게 조여져있다니.
태양이 풀어놓은 한낮을 점검하고
머리 헝큰 아내의 달이
저녁을 죄고있는 퇴근 무렵
길 건너 불야성의 네온 빛에 서성이는
마음은 더욱 헐겁다
세상을 한 바퀴 다 돌아도
언제나 한발자국 비켜서는 생
조여진 너트가 풀려지듯 정문을 나서다
장미 꽃잎에 코를 박고 향기를 흠흠 거리는 순간
누구인가
몽키도 스패너도 없이
나를 죄었다 풀었다 하는 이
-현대시학 2004년 11월호
카드 아버지 / 엄재국
아버지는 신용카드를 한 번도 쓰시질 않았다
자동차 면허증도 없고 주민증도 없었다
네모난 방, 네모난 이불, 네모난 밥상, 화투장을 만지다
지새운 아버지, 신용 있던 밤은 달도 네모났었지
사각의 병원 사각의 침대에서 각진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
다리 굽은 아버지
관속에 들어가시려 하질 않았다
이젠 들어가셔야지요
내가 억지로 다릴 펴고 관속에 밀어넣은 아버지
사각의 구덩일 파놓고
아버지
카드 한 번 써보시죠. 오냐 그래
온몸으로 긁는 카드
내 몸속에 스윽 밀어넣는 아버지
캄캄하게 감듯 흙 덮이고, 잔고 없....., 거래정......, 마그네틱 선 따라 내리는 아버지
아이고 아이고,
삐... 삐... 삐... ,
어디선가 고장난 카드 단말기 소리
-월간 <현대문학> 2006년 9월호
꽃밥 /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길 / 엄재국
여자들
다리사이에 길이 있다
그들은 그 길 위를 달린다
어머니의 바톤을 이어받아
아내가 달리고 딸이 달리는
그 뒤를
또 한 어머니가 달린다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자신들의 몸을 말아 펼치고 다시 말아 펼치는
그 둥글고 질긴,
나는 그 길을 걸어왔고
오늘 그 길을 걸어간다
한 채의 절간 같은 상여를 앞세우고
나는 으흐 으흐.
어머니는 와불로 누워서
흔들흔들 춤을 춘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승자처럼 덩실덩실
어머니를 땅속에 묻으며
나는 내가 펼치는 길이 궁금하다
딸애가 초경의 혈흔 속에
몇 마리의 잉어를 기르는지
엄숙한 하관식의 구덩이가 무엇을 닮은지
잘못 딛은 발자국 같은
딸애와 구덩이, 그 사이, 그 아득한
길 한 켠에 몇 삽 흙으로 무덤을 만든다
긴 여정의 멍울 같은 길 하나 뭉친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어머니의 두둑을
파헤치며 짓밟으며
폐차장에서 / 엄재국
중고 배터리를 구하러 간 폐차장에서
한 사내가 자동차를 뜯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손으로
쌓여진 길들을 더듬고 있었다
빨간 티코와
검은 벤츠 사이에서
숨 가쁘게 달리다 일순간 멈춰버린
찌그러진 스쿠퍼를 분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구겨진 길은 처음이야”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차 속에서 그는
속도를 부활하는 재생의 길을 분해하며 지껄였다
햇빛이 아직 가 본적 없는 폐차 앞쪽을 비추고
그의 눈빛은 그 길을 더듬고 있었다
“지독한 길이군”
수많은 길과 속도가 타래로 엉켜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멈추어진 심장을 이식하듯
내가 배터리를 갈아 끼우는 동안 그는
큰 나무처럼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트럭 아래서
남아있는 소주를 나발 불며 독을 뿜었다
몇 모금을 더 불더니 그의 지독한 길이
화살처럼 가슴을 찔렀는지
짐승의 발라놓은 살점 같은 부품위로 쓰러졌다
옆에는 수많은 바퀴들이 길을 품고 서 있었고
한 번 접혀진 그는 어깨를 펼 줄 몰랐다
폐차장 귀퉁이에서 그의 속도는 재생될 것인지
시동을 걸다가 돌아본 그의 등뒤에
절단된 햇빛이 널브러지고
입구 쪽에서 견인 되어오고 있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차 하나
그의 몸을 조금씩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폐차장을 나오는 바퀴 위에서 나는
서서히 엑셀레이터에 힘을 주었다
백열등 / 엄재국
불을 켜자 전구가 맞아 죽은 자들의 눈알 같은 시력을
방안에 쏟아 놓는다
저 무기물의 시(視)신경이 천장과 바닥을 기어다닌다
닥치는 대로 들쑤시는 절대의 눈동자를 피해
장롱 옆에 어둠의 칼 한 자루로 숨겨져 있었다
나는 눈을 떴으되 보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길 거부했다
한 천년 묵은 어둠도 일시에 밀려나지만
그토록 완강한 어둠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둠의 숨소리는 눈동자가 희고 거칠었다
아버지가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얘야 불을 끄거라
-저 전구는 지난번 니가 빼버린 내 눈알이란다
-아버지 눈알은 거울에도 안 비춰요
-얘야 그래도 저건 엄연히 내 눈알이란다
-저 발광(發光)하는 신경을 보면 모르겠니? 저건 분명 내 발자국이란다
-그래요 아버지는 죽었고 죽어서도 날 보려 들어요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나는 장롱 곁에 숨어있던 딱딱한 어둠의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래 하나 남은 눈알 마저 파가렴
아버지가 마지막 눈알을 순순히 내놓자
방안을 훑고 있던 빛이 파편처럼 터졌다
어둠이 휘청거리며 방밖으로 넘쳐흘렀다
어둠은 그렇게 엎질러졌다
하늘엔 잘못 떠오른 달하나
구름을 끌어다 안대를 하고 있었다
주검의 증거 / 엄재국
종이 위의 글자는 종이의 흰 뼈다
붉은 핏줄이다
몸 속을 꿈틀대는 정충이다
나를 지탱하는 몸 속의 흰 뼈
그 뼛속의 뼈가 내 생각이듯
어디든 닿아서 기진 하는 마음이듯.
책 속은 들끓는다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쥔,
부릅뜬 눈으로 구호를 외친다
책장을 들치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문자들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검은 종이 위를 달려가는 문장들
나는 본다. 뼈 있는 세상
살아있는 그 뼛속을 읽는다
어두운 사각의 감옥,
오래 닫힌 여인의 문전에서
수태를 꿈꾸는 언어의 눈동자를
세상에 드러낸 한마디 말이 굳어
다시 사람이 되는
언어는 발기한다
글자들은 봉기한다
산 자로부터 죽은 자에게,
죽은 자로부터 산 자에게로 여행하는
정충의 정거장 책을 펼치면
하얀 평면 위에 각혈하듯
벌떡벌떡 일어서는 문장들
클릭 / 엄재국
1.
생각이 몸을 슬며시 빠져 나와
대문 앞까지 굴러온 달을 들추고
그 뒤쪽으로 트여진 샛길을 산책한다
어린 날 흩어진 구슬을 모으듯
꿈처럼 뿌려진 푸른 맥박의 행성들을 점검하고 돌아와
떨어지는 낙엽 위에 가만히 내려 앉는
어느 성좌의 쓸쓸한 평화가 되기도 한다
2.
태양의 언덕에서 가상의 기억이나 희망을 경험했다
물과 불이 잘 섞여 흐르는 강가에서 사람들이
세모난 네모 모양을 한 꿈을 공기 받고 있었다
강을 건너 세상 쪽으로 넘겨진
이름지을 수 없는 꿈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몸이 강물로 되어있는 사람은 강 위에 목을 내놓고
자신의 몸통을 생각의 보를 넘겨
어디론가 끝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일생을 가상의 현실 속에서 살다 죽은 자에 의하면
이곳엔 모든 존재와 부재가 완벽한 자유 속에 있으며
현실의 세상은
가상의 세계 속에 잠시 클릭 된 입자로 된 화면이라 했다
3.
그의 뇌와 나의 뇌를 바꾼다
꿈이 증발 된 머리통을 열어보는 수술은 간단했다
몇 개의 감각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드러난 뇌를 푸른 달빛에 헹구는 일과
시각과 청각을 각각의 생각 속에 주사하고
서로에게 부족한 감각들은 몇 개의 성능 좋은 칩 위에 떨구어진
한 방울 가상의 눈물로 대신했다
바꾸어진 뇌로 우리는 부활했다
그의 생각으로 내 팔이 움직이고 다리가 움직이고
내 심장의 뜀박질로 그는 생각했다
나의 이상과 꿈이, 사랑이, 고통이, 청춘이, 죽음이
온전한 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생각과 눈물, 절망과 공포로
조금씩 섞여진 어두운 희망의 호기심으로
우리는 새로 태어났고, 영원히 사라졌다
세상을 이름짓던 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옹달샘 / 엄재국
경북 문경시 산길 깊은 내화리
사과를 주렁주렁 매단 사과나무 한 그루가 명찰을 달고 있는데요
"지나다 목마르면
하나 따 드세요"
까치밥에 사람 밥 얹어 매달아 놓은 주먹만한 물통들
목젖 가득 찰랑대는 물소리
녹, 봄봄 / 엄재국
.
서너 살 계집애가 맨땅에
사타구니 사이로 녹물을 찔끔 흘리는 봄
허공이 녹슬면 꽃이 피는가
홍매화 가득한 뒤뜰 그쪽 허공이 녹슬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고
한 사람의 생애를 갈무리하는 무덤이
너무 얕아 슬펐던 그 슬픔도 녹슬었다.
일순간 무너지는 건물처럼 봄은 온다
무너지는 것들,
삭아가는 것들의 힘이 폭발하며 오는 봄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잎 몇 장 달아 폐허를 확인하는 고목
파편처럼 튀어오른 희미한 낮달의 미소
죽은 나무가 거느리는 풍경을 새기며
봄은 지금 진공상태를 건너고 있다
지구의 중력이 미치지 않는 저쪽,
허물어진 건물의 철근같은 잎 없는 나무들
드러난 허공의 늑골들
그 늑골에 꽃잎이 묻어 허공은 한 번 더 녹슬고
부서진 봄 몇 조각 거두는 영산홍
저 노회한 꽃잎은 땅 위에서 얼굴이 붉다
봄을 부식시키는 빛깔이 지천으로 번지는 봄
오줌 누는 계집애의 보이지 않는 경련처럼
녹슨 꽃잎을 밀어내고 바르르 전율하는 봄.
-시집:정비공장 장미꽃:(애지)중에서-
별꿈 / 엄재국
별이 빛나는 밤엔
입을 크게 벌리고 자자
밤새
수많은 별 중
그중 작은 별들이
몇알 입 속에 들어오면
뱃속엔 환한
별들의 잔치
별들의 꿈을 꾼다
별이 빛나는 밤엔
입을 한껏 벌리고 자자
첫댓글 좋은글 마니마니 써세요 언제나 봉사활동도 마니하시는걸로알고있습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해요 감사합니다복마니마니받으세요
언제나 생명력있는 글은 쉬원함을 주었습니다. 정말 속이 쉬원함을 주는 생동력있는 글을 쓰셨군요 무궁한 발전을 빌어 드리며...
잘 감상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