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황실은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인 김(金)씨이며, 지배층은 대진국(발해)의 후예들이다. 물론 일반 백성들도 대진국(발해)의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여진인은 발해인으로 한 집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대진국(발해)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중상에 의해 세워져 9,000리 강역을 다스린 대제국으로 해동성국으로 불리었다. 최초 국호는 후고구려라 불렀으며, 대조영이 국호를 대진국(大震國)으로 바꿨다. 발해라는 국호는 당나라 측천황제가 대조영을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려 당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부르던 국호이다. 그 이유는 대조영이 발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경계에 있던 가로 100Km X 세로 300Km 되는 큰 내륙호수인 대야택(大野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진국(발해)의 도읍은 동만주 일대가 아니라 대야택 부근 하남성 일대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물론 두 발해공주의 유적이 발견된 동만주도 대진국의 강역에 속했다.
▲ 대진국(발해)은 하남성에 도읍을 두고 동만주까지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대제국이다. © 편집부 | | ‘요양 발해인’이라 하면서 현 요녕성 성도 심양 부근에 있는 요양을 발해의 근거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시의 원래 요양은 요녕성이 아니라 산서성 남부에 있었다.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을 했기 때문이다.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에 속한 7개 군을 설명하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요동군은 고구려의 도읍이 있던 지역이다. (요동군 辽东郡) 秦置。属幽州(유주)。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 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 당시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의 지역이다. 고구려의 핵심은 요동군인 산서성 남부였다. | | 대진국(발해)이 고구려의 영토를 이어받았고, 요나라가 대진국(발해)을 멸망시켜 그 땅을 차지했으며, 그 강역에서 흩어져 살던 대진국의 후예들인 여진족에 신라의 후예인 아골타가 나타나 황제가 되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다시 찾은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신라는 백제 멸망 후 그 땅을 차지했고, 신라의 땅은 고려로 이어져 내려온다. 1107년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여 공험진에 세운 ‘고려의 국경(高麗之境)’ 비는 함경도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 리의 동만주로 방송에서는 소개하고 있으나, 이 비의 위치도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상식적으로 나라의 동쪽 끝에다 국경비를 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고려가 동만주 공험진 부근을 차지하자 금나라 황제가 그 땅을 돌려 달라 하면서 ‘고려는 부모의 나라’ 운운 했다는 것은 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골타가 하남성에 있는 송나라 수도 개봉을 기습 공격해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사로잡은 것을 보더라도 당시 금나라는 송나라와 멀지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금나라와 고려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는 앞으로 면밀히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 윤관장군이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다는 '고려지경' 비 © 편집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