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3>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행복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자비’
비켜갈 수 없는 실패와 고뇌
별다른 느낌이 없다가 어느 날 문득 진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노래가 있다.
내겐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그런 곡이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남성 연기자들이 중창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온 것이다.
왜 그 노래에 감동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배우들이 노래를 잘해서 그랬을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지만, 배우는 노래를 연기한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그 노래 연기가 너무 좋을 때 우리는 감동을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한 배우들의 멋진 연기에 몰입되어
함께 울고 웃는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훌륭한 노래 연기 이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데, 바로 가사였다.
진심이 담긴 배우들의 연기와 노랫말이
공명(共鳴)을 일으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준 것이다.
그날 내가 보았던 무대는
함께(共) 울리는(鳴) 마음의 소리가 어우러진 콘서트였다.
‘가왕’, ‘국민가수’,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 가수 조용필을 수식하는 이름들이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가수,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이다.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기도하는~” 이렇게 노래를 시작하면,
관중석에서는 ‘와!’ 하는 엄청난 함성소리로 화답을 한다.
아직도 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빠부대의 원조,
최초로 1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한 밀리언셀러,
그를 빼놓고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가왕 조용필의 역사는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가 또 어떤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 팬으로서 기대가 된다.
조용필은 자신이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singer song writer)로 유명한 가수다.
하지만 ‘바람의 노래’는 김순곤 작사가의 노랫말에 김정욱 작곡가가 멜로디를 붙여 만든 곡이다.
김순곤은 이 노래 이외에도 수많은 히트곡을 제조한 유명한 작사가다.
그는 조용필의 또 다른 히트곡인 ‘고추잠자리’를 비롯하여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
박강성의 ‘문밖에 있는 그대’ 등 수많은 명곡의 노랫말을 써왔다.
그 가운데 ‘바람의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도록 해주는 노랫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 가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숱한 실패와 고뇌, 좌절의 시간을 떠올린다.
‘맞아. 그때는 정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힘들었어.’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낸 지금의 자신을 다독여준다.
눈물 한 방울 흘리면서. 그런데 가수는 수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우리를 비켜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노래한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을 원한다.
하지만 성공은 실패라는 또 다른 이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수많은 좌절과 고난, 실패를 이겨내고
성공이라는 열매를 맛본 이들이다.
아무런 실패 없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뿐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어댔으며,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과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행복하길 원하지만,
그 역시 숱한 고뇌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실패와 고뇌를 나의 삶 속에서 지워버리고 성공과 행복을 논하지 말자.
중국의 노자(老子)는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하였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장단(長短), 미추(美醜) 등 서로 반대되는 것이
도(道)의 움직임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과 다른 것에 의존하면서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는
연기(緣起)의 공식으로 이러한 이치를 설명한다.
실패가 있으므로 성공이 있고, 고뇌가 있으므로 행복이 있는 것이다.
가수는 지금 그 이치를 깨달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전체 가사를 들어보기로 하자.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
스쳐 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왜 사랑인가?
이 노래는 힘든 시간을 살아온 보통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데 성공한 곡이다.
가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연의 섭리,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바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꽃은 피고 지는지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이별하게 된다.
그렇게 떠난 인연을 그리워하는 사이 또 다른 새로운 인연이 나를 찾아온다.
과연 나를 떠나간 인연들은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일까?
이 노래의 첫 번째 문제의식이다.
‘삶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라는
게송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가수는 자신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 없다고 노래한다.
이를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하면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삶과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자각(自覺)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지의 자각에서 진리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겸손한 태도, 인생과 자연에 대한 진짜 공부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할 것이다.
선불교에서 중시하는 ‘이 뭣고?’, 즉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 역시 진리를 모른다는 자각이 있을 때 나오는 질문이다.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알려고 하는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가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두 번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라는 노랫말 속엔 이러한 인문학의 근본 물음이 담겨있다.
고뇌와 실패가 비켜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수는 사랑에 그 해답이 있음을 깨닫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면서 노래를 마친다.
단순하면서도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이다.
문득 <금강경>에서 수보리(須菩提)가 붓다에게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위없는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낸(發阿多羅三三菩提心) 사람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냐(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가겠다고 발심(發心)을 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붓다는 기쁜 표정으로 제자의 문제의식을 칭찬하면서(善哉善哉)
모든 중생을 건지겠다(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는
보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모든 중생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삶에 대한 문제의식과 해답이 바람의 노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행이 다름 아닌
보시(布施)와 지계(持戒), 인욕(忍辱) 등의 육바라밀이다.
이러한 삶을 살면서 ‘내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보살행을 했다는 ‘상(相)’이 일어날 때마다 ‘공(空)’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이 전해주는 지혜(般若)다.
그렇다면 왜 사랑, 자비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곧 행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데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행복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고 불교에서 진리의 길을 강조하는 것도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는 데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사랑, 자비라는 것이 바람의 노래와 불교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사랑하는 대상이 행복할 때, 나 역시 행복하다.
아들과 딸의 즐거운 모습을 보는 일이 어머니의 가장 큰 행복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랑하면 가난해진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부유하고 행복할 것이다.
춘원 이광수는 육바라밀을 주제로 쓴 ‘애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님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오늘날 보수와 진보 진영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유를 지향하는 보수와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가 의미를 가지려면
‘박애’라는 이념이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자유, 평등, 박애)을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 자비가 결여되면 모두가 공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노래한 바람(wind)의 노래가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다는 바람(hope)이 이루어지길 팬으로서 소망해본다.
2023년 2월 7일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