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가담리 지명(가담 노을 길)
이학주 정리
가담리(佳潭里)
현재 횡성읍에 속해 있는데, 횡성군 청룡면(靑龍面)지역이었다. 전천(前川 , 앞내)가에 큰 늪이 있으므로 개늪[ᄀᆡ납]이라 했다. 이것이; 변하여 개남, 개납, 가담(佳潭)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곽다리, 노장골, 대왕당, 번말, 사시골, 수류암을 병합하여 가담리라 하여 군내면[횡성읍]에 편입하였다.
가담(佳潭)
가담리를 이르는 이칭(異稱)다. 산지가 아니고 평야여서 농지가 많다. 땅이 찰진 땅이어서 장화 없이는 살지 못한다고 했다.
가담노을길
전천교에서 성남교 부엉바위 있는 데까지 이르는 총 길이 3.2km의 걷는 길이다. 제방을 따라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옆에는 앞내와 뒷내가 있고, 섬강이 흐른다. 그리고 가담마을에 논과 밭, 그리고 멀리 산들이 조화를 이룬다. 저녁이면 노을이 아름다워 가담노을길이라 했다. 길 옆에는 꽃길이 조성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길 중간 중간에는 지명과 거리가 쓰여 있다. 섬강에는 갖가지 이름을 가진 바위가 있고 바위마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고, 그곳에 얽힌 추억이 깃들어 있다. 가끔 고기 잡는 사람, 골뱅이[다슬기] 줍는 사람들이 눈에 띤다.
가담보도교
앞내를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시멘트콘크리트다리이다.
가담평(佳潭坪)[ᄀᆡ납ᄯᅳᆯ]
조선지지자료에 가담리에 있다고 하였다. 한글로는 ᄀᆡ납ᄯᅳᆯ이라 했다.
갓모바우[갓바우]
가담1리 마을 앞 내에 있는 바위이다. 모양이 갓모자처럼 생겼다고 한다. 아마도 상투바위의 다른 이름인 것 같다. 상투바위를 자세히 보면 갓 모양으로 볼 수도 있다.
개납
개늪의 이칭으로 마을사람들이 흔히 개납이라 부른다.
개늪
가담1리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옛날 마을에 큰 늪이 있었다.
곽다리1
곽다리에 있는 마을이다.
곽다리2
수류암과 새터 사이에 있던 다리이다. 옛날 노장골에 있던 절의 주지 곽(郭) 씨가 다리를 놓았다.
노장골
가담2리 2반에 속한 마을이다.
농바위
한강대 밑에 있는 네모모양의 바위이다. 바위가 마치 장롱처럼 생겼다. 바위 위쪽이 조금 우뚝 솟아 있다.
대랫말[대아랫말]
가담2리 1반에 속한 마을이다. 수류암 아래쪽에 위치해서 생긴 마을이름이다.
댕댕이
새터에 있는 골짜기이다.
대학나무[은행나무]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은행나무이다. 이 은행나무로 대학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생계유지를 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나무이다. 옛날에는 은행이 비싸서 이 은행나무에 달린 은행을 모아 팔아서 아이들 공부를 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학나무라 부른다. 두 가마정도의 수확을 했다.
돌다리[징검다리]
가담보도교 아래에 있는 앞내를 건너는 돌다리이다. 큼직한 돌을 네모반듯하게 깎아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놓았다.
망탕골
묵계리와 통하는 골짜기이다.
물구미
가담리 한강대와 버덩 사이에 있는 물이 넓고 오목하게 들어간 곳이다. 여기서 ‘구미’는 ‘구멍’의 방언이다. 물구미는 ‘물+구미’로 보아서 ‘물이 고여 있는 구멍’으로 물이 흐르다가 깊게 패여 넓게 마당처럼 형성된 곳을 이르는 말이다.
가담노을길을 걷다가 보면 물구미 이정표가 나온다. 저녁노을이 지면 물구미에 노을이 그대로 그려진다. 하늘을 보지 않고 물구미만 보아도 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미니골프장
출렁다리가 있는 곳 조금 지나 묵계리 산 위에 있던 골프장이다. 그곳 산꼭대기에 이승만 대통령 별장이 있었다.
미루나무 숲
옛날 강 건너 군부대 앞 제방이 있는 곳에 미루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바우자리
마을 앞 논에 큰 바위가 박혀 있었다. 지금은 그 바위가 없다.
버덩
강 건너 군부대 앞 제방둑이 있는 곳이다. 옛날 이곳 앞에 미루나무 숲이 있었다. 그리고 6.25한국전쟁 때는 임시 군사용 비행장이 있었다.
벌말[평촌(坪村)]
마을에 들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벼락 맞은 미루나무
버덩에 있는 나무이다. 꽤 큰 미루나무로 벼락을 맞아서 나무가운데 구멍이 났다. 벼락을 맞으면서 불에 탄 검은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다.
봉친바위[봉친암(奉親岩), 수류암]
옛날 횡성읍 가담리 수류암에는 밀양 박 씨 문중의 박수형이라는 선비기 살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에는 뜻이 없어 평생을 진사로 보냈으나 당대의 문장가, 풍류시인으로 옛 선비의 도를 다한 사람이었다. 그는 효성 또한 극진하여 부모님을 잘 모셨으므로 그의 효성은 지역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부모님께 생선을 대접해 드리기 위해 수류암 앞에 있는 바위에 올라 자주 낚시질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제 아무리 좋은 미끼와 기술을 발휘해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지만 그가 이 바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면 낚시를 던지기 바쁘게 잉어와 쏘가리 등이 물려 나왔다고 한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는 그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하여 그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여 부모님을 받들어 고기를 잡는 바위라는 뜻에서 ‘봉친(奉親)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부엉바위
부엉바위는 묵계리 쪽으로 내려가면서 산에 붙어 있는 바위이다. 묵계리 쪽으로 군도를 따라 가다보면 있는데, 지금은 도로를 넓히면서 옛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바위가 산 절벽에 붙어 있었다. 그 바위에서 부엉이가 새끼를 쳐서 불러진 이름이다. 묵계리까지 가지는 않고 좌측에 있다.
비행장
버덩 제방 안쪽으로 6.25한국전쟁 때 군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임시비행장이 있었다. 경비행기 활주로였다. 제방을 주~욱 내려오면서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개간되어서 모두 농지로 변했다. 지금은 흔적이 전혀 없고 모두 논으로 변했다.
빨래바위
농바위 밑 강 가운데 큰 너럭바위이다. 아주 널찍하고 평평하다. 옛날에 이 동네 사람들이 그 돌 위에서 빨래를 했다. 여러 사람이 가서 빨래를 하면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장면은 아주 장관이었다.
이 빨래바위는 아이들이 노는 장소이기도 했다. 강을 헤엄쳐 건너 참외밭에서 서리를 해서 빨래바위 위에서 모여 참외를 먹으면서 밤새 놀기도 했다.
사시동(四時洞)[사싯골]
가담2리 2반 마을의 자연마을이름이다.
상투바위
빨래바위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가서 건너편 반곡리 쪽에 보이는 바위이다. 바위의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다. 빨래바위 뒤쪽에 해당한다. 가담리 하천에서는 가장 높은 바위이다. 홍수가 나서 큰물이 흘러가도 상투바위만 물에 잠기지 않고 바위 꼭대기 상투만큼은 남는다.
삼거리
가담2리 4반 마을이다. 갈풍리, 묵계리, 가담리의 세 마을로 갈라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새말
가담2리 1반에 속한 마을이다. 마을이 나중에 새로 생겼다.
새말동산
새말 옆에 있는 동산이라 해서 새말동산이라 부른다. 동산 위에는 묘지가 있다. 마을회관 뒤에 우뚝 솟아 있다.
새터
가담2리 3반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마을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한다.
새터고개
가담1리에서 2리 새터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새터에서 개늪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서낭당
가담리에서 매년 1월 15일 정월대보름에 마을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금줄도 치고 가가호호 잘 되라고 소지를 올리면서 축원을 했다. 날이 가물어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서낭당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서낭댕이
옛날 서낭당이 있었다. 가담2리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섬강(蟾江)
섬강은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횡성에서 원주 쪽으로 해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횡성읍의 뒤쪽으로 흐르는 강은 뒷내라 부른다. 치악산에서 발원해서 횡성읍 앞으로 흐르는 강은 앞내[전천]이다. 두 강이 합하여 섬강이 된다.
또 가담에서는 섬강이 예전에 큰 개울 작은 개울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산 있는 곳으로 흐르는 개울이 작은 개울이었고, 한강대 쪽으로 흐르는 개울이 큰 개울이었다. 그리고 작은 개울 쪽에는 사금(砂金)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호미로 모래를 퍼서 그릇에 담아 흘러내리면서 금을 캤다. 그렇다고 경제성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홍수가 나면 아이들이 헤엄쳐서 강을 건너는 내기를 했다. 물살이 세서 한참을 떠내려가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그쪽에 참외밭이 있어서 서리를 했다. 참외를 따서 짊어지고는 한참을 위로 올라가서 또 헤엄을 쳐서 돌아왔다. 물살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가로질러 수영을 하다보면 한참 떠내려가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였다. 건너다가 큰 바위 있는 곳에서는 조심해서 건너야 했는데, 잘못하면 물에 빠져 죽는다. 물이 회도리[돌기]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밑으로 기어 나와야 했다. 어른들도 많이 해 봤는지 그렇게 얘기를 했다.
“수영을 하다가 회도리치는 데에 빠지면 헤엄쳐서 나오려고 하지 말고 물밑으로 들어가서 기어서 한참을 간 다음에 물 위로 올라와라. 그러면 살 수 있다.”
물리 회도리치는 데에 빠져서 나오려다 보면 계속 회도리에 말려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 힘이 빠져서 결국 물에 빠져 죽게 된다. 그때는 숨을 참고 물밑으로 들어가서 기어서 회도리를 벗어나야 했다.
이 섬강에는 물고기가 아주 많았다. 특히 모래무지가 무척 많았다. 모래 위로 맨발로 걸어가다가 보면 발바닥에 고기가 밟혔다. 그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 피라미 수놈을 부러지라 하는데 산란 할 때에는 아주 낮은 물에 몰려 있다. 그러면 빨리 그쪽으로 달려가면 놀라서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물 밖으로 뛰어 나왔다. 그러면 그냥 손으로 주워 담았다.
피라미 낚시도 잘 되었다. 대낚시를 들고 앞에 체를 차고 피라미를 낚으면서 강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보통 한 사발 정도 잡았다. 파리 모양으로 된 파리낚시를 주로 썼다. 그렇게 잡으면 가져와서 가족들과 지져먹었다. 그렇게 고기가 많았다. 지금은 잘 하지도 않지만 예전처럼 고기가 많지도 않은 것 같다.
다슬기도 상당히 많아서 가서 잠깐만 주우면 끓여 먹을 수 있었다.
섬강에서는 천렵도 많이 했다. 친구들과 같이 많이 했는데, 강에 가서 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여 먹었다. 어죽을 끓여 먹으면서 술도 한 잔씩 하였다.
여름에 보리타작을 할 때는 태질을 많이 하였는데, 보리까끄라기가 몸에 붙어서 많이 따가웠다. 그래서 타작이 끝나면 너도나도 강에 가서 목욕을 했다. 그리고 집에 오면 하지가 지나 감자를 캘 때니까 감자범벅을 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이라 모기가 많아 쑥을 베어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았다.
속섬
옛날 섬강이 큰 개울 작은 개울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섬이 있었다. 이 섬이 두 강의 가운데에 있다고 해서 속섬이라 불렀다. 섬에는 자갈하고 모래가 있었다. 동산 쪽은 작은 개울 한강대 쪽은 큰 개울이었다. 홍수가 나면 물이 넘쳐서 강이 하나로 됐다가 평소에는 두 개의 강으로 되었다. 속섬이 없어진 것은 제방을 만들 때 골재채취를 하면서이다.
수류암(水流岩, 水踰岩)[봉친바위(奉親岩)]
수류암에는 4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째, 가담2리 1,2반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마을회관을 수류암마을회관이라 했다.
둘째, 마을 앞 섬강에 바위가 많은데, 물이 많을 때는 그 바위를 넘어 물이 흐른다. 가담마을 앞 강 가운데에 있는 큰 너럭바위이다. 효자가 이 바위에서 낚시를 해서 고기를 잡아 어버이를 봉양했다고 해서 봉친바위 또는 봉친암(奉親岩)이라고도 한다.
셋째, 옛날 가담리는 마을 가운데로 강이 흘러갔다. 그때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을 할 때는 대청마루에서 낚시를 했다. 이처럼 가담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상당히 낭만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 땅을 파면 강모래가 나온다.
넷째, 횡성군의 지명유래에서는 마을이름이며 바위이름이라 했다. 수류암 마을 앞 내에 있는 바위로, 여러 사람이 앉을 만하고, 그 앞에 흰 바위가 여기 저기 놓이고 그 사이 사이로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류암보(水流岩洑)
조선지지자료에 병오년(丙午年)에 건축했다고 한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건설했던 보(洑)이다.
숲거리
숲이 우거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숲이 없다.
웃담
개늪의 위에 있는 마을이다.
웃버덩
삼거리에 있는 들로 수류암 위쪽에 해당한다.
응달말
가담2리 2반의 자연마을이름이다. 응달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
현재 강변장이라는 모텔이 있는 뒤쪽에 교회가 있는 자리였다. 별장은 하얀집이었다. 모양은 가담리 회관처럼 사각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왔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곳 뒤에는 숲이 있었고, 앞에는 섬강이 있고, 가까운 곳에 군부대가 있었다.
전천(前川)[앞내]
횡성읍 앞으로 흐르는 강이라 하여 앞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바꾸어서 전천(前川)이라 한다. 치악산 원주 학곡리 쪽에서 하궁리를 지나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다.
중통말
가담2리 2반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마을중앙에 있다고 한다.
출렁다리
출렁다리는 묵계로 건너가는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위치는 반곡리로 가면 옛날 일본식 집 있던 곳 허브집[허브농원]이라 있다. 그쪽으로 가담리에서 강을 건너 다리가 놓여 있었다. 지금 오규환 면장 비 있는 위쪽이다. 이 다리를 처음 놓을 때 오규환 면장이 추진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가 있던 곳 길 옆 산 밑에 오규환 씨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옛날 큰 쇠줄[와야]을 강을 건너 놓고 나무판자를 가로질러 위에 설치하고 건너 다녔다. 네모바위 있는 그곳이었다. 유동이 심해서 노인들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현재 성남교에 그 연혁이 쓰여 있다.
1956.12.20. 1군 사령부에서 출렁다리 가설
1957.9.21. 홍수로 유실
1964.12.20. 횡성군에서 1107야공단 협조로 복구
1965.8.10. 홍수로 유실
1967.12.23. 횡성군에서 1107야공단 협조로 재복구
1972.8.19. 홍수로 유실
1973.5.15. 새마을사업으로 잠수교 가설
1976.8.1. 홍수로 유실
1976.10.17. 수해복구 협동권 새마을사업으로 영구교량가설을 추진 착공
1977.9.20. 교량준공(L=154m, B=5m, 형식 RC스라보)
1997.4.15.~2006.9.1. 재난위험 시설물로 관리(시설노후 및 중과하중 부족)
2004.8.9. 교량 재가설 착수
2006.9.2. 기존 단곡교 철거
2006.11.8. 사업 준공 및 교량 명칭 변경(반곡교 → 성남교)
코끼리산
서쪽 산이라고도 한다. 산의 형상이 마치 코끼리처럼 생겼다.
한강대
가담에서 보면 반곡리 쪽으로 나 있는 바위 부근이다. 바위가 약간 솟아 있다. 그 부근의 물이 깊다. 그리고 물이 흐르다가 잠시 멈춰 있다가 돌아서 다시 흐른다. 정자가 있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바위 아래에 동굴처럼 바위가 파여 있다. 바위 모양이 약간 넓어서 대(臺)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강대는 ‘큰 강이 있는 대’라는 뜻으로 물이 깊게 돌아 흐르는 곳에 있는 널찍한 바위이다. 사람들은 바쁜 틈을 타서 이곳에 모여 옛 시인묵객들처럼 마을을 노래하고 음식과 술을 나누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합수머리[두물머리]
전천(前川, 앞내)과 섬강(蟾江, 뒷내)이 합수하는 지점을 합수머리리라 한다. 장마에 홍수가 질 때 사람들이 물의 흐름을 보고 흉풍(凶豐)을 점쳤다. 앞내가 많으면 풍년이 들고, 뒷내가 많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앞내는 원주의 학곡리 쪽에서 내려오는데 학곡저수지를 개방하여 물을 쓰는데, 농토가 많다. 그래서 앞내가 물 양이 많으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했다.
합수머리 미루나무
앞내와 뒷내가 만나는 지점인 합수머리에 커다란 미루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커다란 나무가 두 강 사이에 있어서 운치가 있다.
횡성면장 오규환 기념비
이승만 대통령 별장 가는 곳 못 미쳐서 길가에 있는 비석이다. 비석에는 “횡성면장오공규환기념비(橫城面長吳公圭煥紀念碑)”라고 썼다. 그리고 뒤에는 다음과 같이 국한문 혼용으로 기록했다.
“跋涉大川를 架橋連陸하여 通學兒童과 里民産業開發上多業惠澤하니 是誰之功가 橫城面長 吳圭煥 氏의 錦密한 活動과 不斷한 勞力으로 本郡守와 千百七工兵團에 謀忠하여 對民支援事業으로 本橋를 架設하여 一般交通上 貢獻이 多大함으로 南村面 個里民이 齊聲頌德하야 本 紀念碑를 建立함 西紀一九六年九六月 日”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산을 넘고 큰 강을 건너는 다리를 연결하여 통학하는 아동과 마을사람들의 산업개발에 많은 혜택을 주었으니, 이 누구의 공인가요. 횡성면장 오규환 씨의 비단처럼 촘촘한 활동과 부단한 노력으로, 본 군수와 1107공병단에서 도와주어[모충: 남을 위하여 꾀를 냄] 대민지원사업으로 이 다리를 가설하여 일반교통 상 공헌이 다대함으로 남촌면 각 마을주민이 다 같이 소리를 내어 덕을 기리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한다.
서기 1969년 6월 일 (필자 졸역)
오규환 씨가 면장을 오랫동안 했는데, 그때 출렁다리를 건설했다. 군수보다 더 말발이 좋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제보자: 박길식(남, 81) 가담리. 2022.6.26.
조사자: 이학주, 김시동.
녹음풀이 및 정리: 이학주(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참고문헌: 조선지지자료, 경인문화사, 2007.
이영식, 횡성의 지명유래, 횡성문화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