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밭 / 김순향 3
1. 남도 여행길에서 만난 목화밭이다. 하얀 솜꽃을 피운 목화나무가 주렁주렁 다래를 달고 있다. 얼마만인가! 낯익은 그 모습에 아득한 세월 저쪽의 풍경이 선연하게 다가온다.
2. 목화를 보면 먼저 형근 오빠가 떠오른다. 열세 해를 천심으로 우리 집 일을 돌봐줬던 그는 고아였다. 아내가 있었지만, 그녀는 지적 장애가 있어 남편 수발은커녕 오히려 수발을 받아야 했다. 객지에서 장애인 아내를 데리고 남매를 키우며 많은 고생을 한 탓에 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3. 아버지는 객지에서 떠돌다 돌아온 그에게 거처할 방을 주고 오갈 데 없는 네 식구를 거두었다. 형근 오빠는 조금 모자란 듯해서 놀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맞서지 않았다. 오랜 세월 뭇사람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탓인지 작은 호의에도 흥감해했다. 어머니는 그런 형근 오빠네 가족들을 살뜰히 챙겼다. 그가 어렵고 힘들어하면 먼저 달려갔다. 그의 처가 아이를 낳을 때는 산파가 되어, 정성을 다해 해산구완을 했다. 음식을 넉넉하게 하여 그 집 식구들을 챙겼다.
4. 우리 집은 해마다 목화 농사를 지었다. 집안사람들의 옷이나 이불, 방석을 만들기도 했지만, 사랑채를 찾아 와서 묵고 가는 손님이 많아 여유 이불과 옷이 필요했었다. 어머니는 형근 오빠가 오자 장승백이 밭에다 목화를 따로 더 심었다. 겨우내 벌벌거리며 추위를 타는 그에게 따뜻한 옷과 이불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5. 사월 중순이나 오월쯤에는 목화씨를 파종했다. 싹이 자라면 촘촘히 나온 것은 솎아주고 드문 곳은 모종을 옮겨 심었다. 주로 어머니와 같이 밭일을 했던 그는 자기를 위한 목화 농사인 줄 알기에 정성을 다해 가꾸었다. 놋날 같은 비가 온 날, 비를 피했다가 하자는 어머니 말도 듣지 않았다. 도롱이를 걸치고 혼자서 긴 이랑을 목화 모종으로 채웠다. 팔월이나 구월에는 황색과 분홍색, 흰색의 목화 꽃이 어우러졌다. 그는 꽃을 따려는 나를 말리며 따버리면 금방 시들지만 참으면 솜이 된다는 훈계까지 곁들였다.
6.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면 어머니는 솜을 타러 서너 번 읍내로 갔다. 오빠가 짊어진 바지게에 목화를 얹어서, 버스도 자주 오지 않는 시오리 신작로를 도란거리며 걸어갔다. 서울로 유학 간 아들과는 함께 걸을 기회조차 없던 어머니였기에 동행해 주는 형근 오빠가 얼마나 듬직했을까! 해거름에 씨를 발라낸 솜을 지고 오는 오빠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마도 시린 등을 데워 줄 폭신한 솜이불을 떠올렸을 게다.
7. 목화솜을 잠재운 지 이레쯤 되는 날,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아낙들은 안채로 모여들었다. 먼저 무명베 위에 솜을 듬뿍 놓은 이불 속통을 여러 장 만들었고, 미리 염색해두었던 검은 무명천에다 빨간 깃을 단 솜이불을 만들었다. 오빠는 아이처럼 어머니와 올케들이 바느질하는 대청을 기웃거렸다. 싱글거리며 대청을 한번 들여다보고, 뒤란을 한 바퀴 돌고 와서 또 기웃거렸다. 그런 오빠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남정네가 오는 곳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며 내쫓았다.
8. 이불 바느질이 끝나면 남자들의 솜옷을 만들었고,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옥색 비단 조끼도 만들었다. 어머니는 바느질한 실밥을 떼어내고 꼼꼼하게 부분 부분을 확인한 후 애타게 기다리던 오빠에게 안겼다. 이불과 옷을 받아 든 그의 함박웃음이 어찌 그리도 천진해 보였던지!
9. 그는 점차 지난했던 옛 삶을 잊고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어갔다. 건강도 회복하여 튼실한 장년의 모습을 되찾았다. 몇 해를 열심히 일한 덕에 새경도 올려 받았고 논도 샀다. 친오빠는 한 번씩 다녀가는 손님이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 집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형근 오빠는 부모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10. 그러구러 형근 오빠가 우리 집에 온 지 열세 해가 되었다. 시월 열사흘의 달이 휘영청 밝았다. 아버지는 멀리 대종중 묘사에 가셨고, 올케언니는 부산에 유학중인 조카를 보러 갔다. 집에는 어머니와 나, 어린 질녀 둘 뿐이었다.
11. 어머니는 형근 오빠와 함께 며칠 전부터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단무지를 담은 독과 김장독을 뒤란 땅 속에 꽁꽁 묻어 갈무리했다. 한밤중까지 말린 나물을 봉지봉지 묶어두고 잠자리에 드셨다. 일을 거들던 오빠도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비어 있는 사랑채로 나갔다.
12. 설핏 잠이 들었을 때 세차게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질녀의 말에 맨발로 뛰어갔다. 그 참을성 많던 분이 온 방을 헤매며 고통스러워했다. 어린 질녀들과 중학생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거리고 있을 때 대소가 사람들이 달려왔다. 육십여 년 전, 병원은 시오리 밖에 있었고, 우리 마을엔 전화가 없어서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당숙이 손수레를 가져오도록 여기저기 기별하고 있을 때 득달같이 달려온 형근 오빠가 어머니를 들쳐 업었다. 이웃집에 살아도 오빠의 눈과 귀는 우리 집을 향해 열려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나와 집안사람도 함께 걸었다.
13. 기별을 받은 친척이 소달구지를 끌고 와서야 어머니를 받아 눕혔다. 어머니를 내려놓은 후 형근 오빠가 손등으로 훔치는 땀은 땀이 아니라 진액이었다. 사람이 다급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더니 그가 그랬다. 지금도 육덕 좋은 내 어머니를 업고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릴 엄두를 냈는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으리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14. 의사는 장이 꼬였다고 했다.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해 전 복막염 수술을 했던 어머니는 수술의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나는 눈물로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보를 받고 천리 길을 달려오신 아버지를 보고서야 어머니는 수술을 허락했지만, 이미 기력이 다 소진되어 수술할 수 없었다.
15. 아버지는 잿불처럼 사위어가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오랜 경험으로 아내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감지한 것이었다. 큰 그늘을 드리웠던 둥구나무 한그루가 허망하게 사그라지고 있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애통했다. 집으로 오신 지 삼십여 분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16. 갑작스런 어머니와의 사별로 마음 추스리지 못하는 날, 나는 산소로 향했다. 그날은 쑥국 새가 유난히도 청승을 떨며 울었다. 자드락길을 오르는 내내 무섬증이 들었다. 인적 없는 산허리에 올라서서 어머니 무덤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아직 떼가 자리 잡지 못해 황토색인 봉분을 뺀 나머지 공간에, 온통 하얀 꽃들이 피어 있지 않은가! 거리가 멀어 무슨 꽃인지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괴기스러웠다.
17. 산소에 다다르니 밑동이 잘린 목화 포기들이 무덤가에 원을 그리며 누워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망석 앞에는 형근 오빠가 우두커니 앉아있었고, 미처 널지 못한 목화 포기가 바지게에 얹혀 있었다. 가지마다 달려있는 다래들과 흐드러지게 핀 목화를 보자 목이 메었다. 그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장례식과 집안 일로 미처 거두지 못해 목화가 많이 피었다고 했다.
“저녁때는 여기 오지 마라, 짐승이라도 나타나면 우짤래! 인자 잊어야지.”
타이르는 형근 오빠의 목소리도 촉촉이 젖어있었다.
18. 어머니는 알뜰한 수확을 위해 해마다 목화 포기를 베서 양지바른 무덤 가장자리나 잔디밭에 널어두게 했다. 조롱조롱 달린 못다 핀 다래들은 생명이 끝났음에도 햇볕 바라기를 하여 탐스런 목화를 피워주었다. 항상 아흔다랭이와 장승배기 밭의 언저리에 널었었는데, 굳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을 올라 산소까지 온 오빠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19. 그는 꽃을 좋아하던 어머니를 위해 산소 둘레에 꽃나무를 심었다. 처서 즈음 벌초를 했어도 가을 초입에 풀이 무성해져 그냥 둘 수 없다며 일 년에 두 번을 했다. 훗날 그는 살림이 편해져 남의 일을 하지 않았지만, 생을 다할 때까지 내 부모님 묘소를 가꾸었다. 어떤 자식이 그만큼 할 수 있을까! 우리 집 살림이 줄어들자, 셈이 빠른 이들은 일찍이 떠나 안면을 바꾸기도 했는데 그는 끝까지 부모님 곁을 지켰다.
20. 가슴 깊숙이 부모님과 형근 오빠를 품고 사는 내게, 목화밭은 현재와 과거를 아우르는 매개이다. 그곳에는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목화밭을 매던 어머니와 형근 오빠, 그리고 내가 있다. 부모님도 그도 굴곡진 삶이었지만, 서로의 울타리가 되었기에 몰아치는 비바람을 잘 견뎌냈으리라. 오랜만에 보는 하얀 목화송이들이 더없이 살갑다. 부모님과 형근 오빠가 몹시 그리워질 때면, 또 목화밭을 찾아 나서리라.
첫댓글 새벽에 보니 한 편이 올라와 있어 저도 한 번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