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는 맛 있었다.(단편 소설)
최 광
신 경호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 때문에 잠이 깼다. 설깬 잠을 이기려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헛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가는데, 아내의 추궁이 뒷덜미를 잡았다.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회사를 그만 두다니........”
경호는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회사라는 말에 어제의 필름이 재빠르게 감기더니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신 경호는 정오가 되기 전에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눈이 부신 쨍한 햇빛이 부채 살처럼 퍼지더니 수 백 개의 바늘로 날아와서 머리에 콕콕 박혔다. 기웃 등, 어질어질했다. 신 경호는 아무 생각 없는 진공상태로 가방을 챙겨든 오른팔이 늘어지도록 인도를 걷고 있었다. 늘어진 어깻죽지는 다시는 날지 못할 새처럼 깃털이 푸석하게 빠져서 앙상하게 매달린 채 덜렁거렸다.
초겨울의 짧은 해와 썰렁한 바람이 가금씩 볼을 쓸고 지나갔다. 어느덧 해는 긴 바지랑대처럼 기울어져서 건물에 가리거나 어쩌다 잠깐씩 건물 틈새로 낡은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처럼 뿌옇게 비췄다. 얼마를 걸었던지 휑뎅그렁한 공터 앞에 마주섰다. 시내버스 한 대가 옆구리를 열어놓고 달리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처럼 부릉거리고 있었다. 시내버스 종점임이 금방 느껴졌다. 움푹움푹 깨져나간 포장도로에는 방석만큼 군데군데 기름띠가 번져있었다.
점심도 먹지도 않고 얼마를 걸었던지 발가락이 서로 끈끈하게 달라붙고 구두코에 먼지가 뽀얗게 분칠을 하고 있었다. 뱃가죽도 등짝에 달라붙어서 무거운 하중에 눌린 파이프처럼 등이 오그라들었다. 허기가 지고 맥이 쏙 빠졌다. 시내버스가 매연을 뿜고 있는 꽁무니 쪽에 허름한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신 경호는 분식집 구석에 앉아서 라면과 소주를 주문했다. 라면이 오기 전에 물 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서 들이켰다. 짜르르한 촉감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신 경호는 과장 실에 끌려가서 호된 추궁을 당했다.
“야 이 새끼야, 우리 회사 복무지침 제 일 조가 뭐야?”
과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목울대 옆으로 툭 불거진 핏대가 금방이라도 툭 터져서 분수처럼 치솟을 것 같았다. 신 경호는 머리가 하얗게 텅 비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질려있는데, 갑자기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과장이 신 경호를 향해 집어던진 사기로 된 필기구 통 이 정면으로 날아와서 반사적인 동작으로 피했는데, 그게 벽에 가서 박치기를 하고 박살이 나고 말았다. 과장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의자를 거세게 뒤로 밀치고 책상을 돌아 나오면서 신 경호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내질렀다. 신 경호는 알싸한 통증을 감내하기도 전에 과장은 겨드랑이에 찼던 권총을 뽑아 관자놀이에 들이박았다. 서늘한 쇠붙이의 촉감이 짜릿하게 전신에 퍼져 나갔다. 과장은 너, 이 새끼 말 안 할 거야라고 소리치며 몸이 휘청거리도록 총구로 관자놀이를 쑤셨다. 신 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훈련병처럼 부동자세를 취하고 소리쳤다.
“네, 업무의 기밀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그래, 알기는 아는 구나.”
과장은 분이 약간 풀렸는지 들이대고 있던 권총을 저고리 안쪽에 쑤셔 넣고 단추를 잠근 다음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불렀다. 그래도 험악한 꼴을 부하 직원에게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 이 새끼 달고 남산으로 갈 테니까, 그 새끼도 달고 오라고 해.”
신 경호는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는 과장 뒤를 허둥허둥 따라갔다.
남산 지하실은 써늘했다. 수없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이 여기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시 뒤에 건장한 체격의 유 선배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신 경호는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애원조롤 말했다.
“선배님,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술 췌서 한 헛소리였다 구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순간, 모두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유 선배는 표정이 어둡게 굳어지더니 어금니를 잔뜩 물어서 뺨에 빗살무늬 근육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신 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눈물 뒤에 숨겨진 뒤엉킨 감정이 들끓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각자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의 상처와 희생으로 모든 게 끝났으면 하는 바램뿐 이었다. 아직은 진상규명할 때가 아니라는 걸 유 선배가 느꼈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과장은 비켜서서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 선배와의 인연은 향리의 고등학교 태권도부에서 운동을 함께 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신 경호는 취미 삼아였는지 막연한 남자의 호기 때문이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운동을 하면서 유 선배와 친해져서 형, 동생으로 어울렸다. 그런데, 어느 날 유 선배는 복싱을 하겠다며 태권도 부를 떠났다. 순천에서 복싱사범이 와서 시범이 있었는데 유연한 몸놀림과 남성적인 저돌성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유 선배는 복싱을 시작해서 채 일 년도 되지 않아서 전국체전 고등부 미들급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였다.
유 선배가 복싱으로 전향해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유 선배가 먼저 학교를 졸업하면서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갔다는 소문만 나돌았다.
유 제두는 쌀 한 말 값 이천팔백 원을 들고 홀로 상경했다. 그는 향리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영등포에 내려서 체육관부터 기웃거렸다. 무조건 관장을 만나겠다고 죽치고 기다렸다. 서너 시간을 꼬박 기다리면서 트레이닝에 열중하는 선수들을 부러운 눈으로 유심이 살폈다. 나도 저들처럼 할 수 있을까 우려가 생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자신감도 있었다.
한참 뒤에 관장이 나타났다. 그는 유 제두의 이력을 살피고 몸매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운동을 허락했다. 하지만 당장 먹고 자는 게 문제였다. 체면을 차릴 것도 없이 바싹 달라붙었다. 허드레 일이나 체육관 청소를 하는 것으로 체육관 구석에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런 선수들이 득실거렸다. 가진 것 없이 오직 주먹 하나로 세계 제패하겠다는 꿈을 가진 청소년들 말이다.
잠자리는 해결했지만 먹는 게 문제였다. 운동을 하려면 잘 먹어야 하지만 당장 끼니를 때우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하나 둘 동료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길이 트였다. 짐꾼 노릇도 하고, 구두닦이 하는 선배에게 빌붙어서 부지런히 구두를 날라 오고 닦는 대로 배달했다. 틈이 날 적에는 상가에서 나오는 빈 박스를 수집해서 고물상에 넘겼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먼저 청소를 하고 줄넘기를 비롯한 체력훈련과 틈틈이 기본기를 닦았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신출내기라서 선배들이 하는 폼을 따라 눈치껏 샌드백을 두들겼다.
신 경호는 오늘 따라 일찍 퇴근해서 텔레비전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아직 오픈 게임이 진행 중이지만 벌써부터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후쿠오카 체육관의 열광적인 관중 소음이 그를 더욱 긴장시켰다.
유 선배는 미들급 동양 챔피언 방어전 신기록을 세워나갔다. 고향의 선배가 언젠가 큰 제목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런 기회가 오고 보니 가슴이 떨리기만 했다. 71년, 그 해는 신 경호가 중앙정보부에 합격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다. 우연히 다방에서 유 선배의 동양 타이틀 매치를 지켜보게 되었다. 시골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러나 링에서의 유 선배는 더 이상 시골뜨기가 아니었다. 날렵한 푸트워크와 적절한 펀치 구사는 금방 상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잽이나 스트레이트, 훅과 어퍼컷을 자유자재로 휘둘러서 챔피언을 무너트렸다. 미들급 동양 챔피언 방어전은 승승장구였고, 동양에서는 더 이상 상대가 없었다. 상대가 없어서 한 번 도전에 실패한 선수가 다시 도전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동양 챔피언 방어전을 K O 퍼레이드로 장식하면서 유 선배의 이력은 쌓여갔고, 드디어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섰다. 그 때,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언은 미국의 오스카 알바라도였다. 오스카는 원투 스트레이트를 주 무기로 하는 정통파 복서였다. 얼마 전에 챔피언 오스카 알바라도와 일본의 도전자 와지마 고이찌의 타이틀 매치가 도쿄 고라꾸엔 체육관에서 벌어졌다. 그 시합으로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일본은 패전의 실의를 딛고 경제부흥을 일으켜서 달러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거액의 개런티를 주고 챔피언을 일본으로 불러들여서 타이틀 매치를 성사시켰던 것이다. 교전 당사국 선수를 자기들 홈으로 불러드려서 타이틀 매치를 벌인다는 것은 매력적인 사건이었다. 패전으로 상한 자존심을 복싱으로 되갚아줄 거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도전자 와지마 고이찌를 흙속에서 얻은 진주로 여겼다. 24세까지 트럭을 운전하다 복싱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한 기린아였다. 오스카와 와지마의 대결은 국내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둘의 대결에서 승자에게 유 선배가 도전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례적인 생중계까지 이뤄졌다. 그만큼 유 선배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있었다.
오스카와 와지마의 한 판 승부는 예측 불허였다. 정통파 복서와 변칙 스타일과의 대결이기도 하면서 미, 일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해서 관심을 배가시켰다.
경기를 시작하자, 예상대로 와지마가 끊임없이 몸통을 흔들면서 파고들었다. 허리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타깃의 초점을 흐리게 하면서 황소처럼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간간히 오스카의 안면과 몸통에 펀치를 적중시켰다. 고라꾸엔 체육관은 함성에 뒤덮여서 중계 멘트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스카도 만만치 않았다. 밀고 들어오는 황소를 투우사처럼 사이드 스텝으로 빠지면서 주 무기인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려서 견제했다. 팽팽하던 경기가 중반전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주도권이 와지마에게 넘어갔다. 와지마의 개구리처럼 생긴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훅이 오스카의 안면에 적중하기 시작했다. 와지마는 오스카의 턱밑까지 다가가서 주저앉았다가 갑자기 튕겨 오르면서 훅을 오스카의 턱에 적중시켰다. 와지마의 비밀병기인 개구리 점프가 먹혀들고 있었다. 그때마다 관중들의 함성이 폭죽처럼 터졌다. 제 2의 진주만 기습을 관중들은 만끽하고 있었다. 와지마는 기세가 높아졌고 오스카는 위축되어 갔다. 전쟁에서 비밀병기는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적군을 궁지에 몰아넣기 마련이다. 64년 도쿄 올림픽 배구에서 일본은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 배구는 높이와 힘에 의존하고 있어서 신체적인 조건이 불리한 동양인은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서구의 장신 선수들이 내리꽂는 타점 높은 오픈 공격을 동양 선수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 배구는 새로운 무기 하나를 개발해 냈다. 중앙 속공이었다. 좌우 오픈 공격만이 공격의 전부로 알던 시절에 새로운 무기는 유효했다. 일본 배구는 연전연승하며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소련 배구를 무너트렸다. 또 하나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다고 일본 열도는 들끓었다.
개구리 점프라는 희한한 전술을 구사하는 와지마에게 현혹된 오스카는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챔피언 벨트를 내주고 말았다. 와지마는 일본의 영웅이 되었다. 트럭 운전수였다는 그의 전직이 더욱 돋보였다.
드디어 유 선배와 와지마의 소개가 끝나고 1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유 선배는 링을 잡고 가볍게 몸을 풀고 링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신 경호는 긴장으로 가슴이 방망이질처서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의 박동소리가 멍멍 하도록 귀에 울렸다.
예상대로 와지마는 요란하게 전후좌우로 몸통을 흔들면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유 선배는 침착하게 사이드 스텝을 밟으면서 날카로운 잽을 던져서 와지마의 돌격을 저지했다.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잽이 적중하면 적극 공세를 펼쳐서 기 싸움에서도 지지 않았다. 유 선배제두의 적극 공세에 당황한 와지마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어느 쪽도 확실하게 우세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유 선배의 기량은 와지마에 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1라운드는 서로의 기량을 엿보는 탐색전이었다. 그러나 와지마의 단순한 훅보다 유 선배의 날카로운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 간간히 몸통을 노리는 훅 등이 훨씬 다양하고 날이 서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 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개전 이래 처음으로 5월 4일 1차 출전을 하게 된다. 전선(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모두 85척 규모였다. 그러나 협선은 승선 인원이 5명 이하의 소형 부속선이고, 포작선은 어선에 지나지 않았음으로 실제 전력은 24척의 전선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취약한 전력과 앞서 경상우수사 원 균의 전문에 왜군 배가 500여척이라는 첩보, 왜군 수군과의 전투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 순신 함대의 초기 행적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5월 4일 새벽 2시경에 출항한 이순신 함대는 종일 항해하여 날이 저물 무렵, 경상우도의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하고 첫날밤을 지냈다. 다음날 새벽에 출항하여 경상우도 수군과 합류하기로 한 당포에 도착했으나 원 균이 오지 않아 그대로 머물렀다. 5월 6일 오전 8시쯤에 원 균의 전선이 도착하면서 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전선 4척과 협선 2척에 나누어 타고 합류했다. 이로써 전체 전력은 전선 28척, 협선 17척으로 늘어났다. 이 날 두 도의 장수들은 작전회의를 거듭하고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했다. 이튼 날인 7일 새벽에 다시 출항하여 왜군 전선이 있다는 천성 가덕도 쪽으로 향하다, 정오경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우척후장의 신기전(神基箭- 신호용 불꽃화살)이 하늘 높이 솟아 왜군 군선이 있다는 첩보를 알려왔다. 이로써 전라좌수영을 떠난 지 4일 만에 임진왜란의 첫 번째 해전이 시작되었다.
탐색전을 끝내고 2라운드에 들어서면서 유 선배와 와지마는 주도권을 틀어쥐려는 적극 공세에 나섰다. 서로의 주 무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와지마보다 유 선배의 다양한 공격전술이 예리하고 파괴력이 있어 보였다. 상대가 약간의 허점을 보이기만 해도 펀치를 날렸다.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와지마도 예상 밖으로 유 선배의 저항과 공세가 거세지자 주춤거리며 클린치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이 순신 함대에 맞선 왜군 함대는 소속을 명확히 알 수 없는 30여척 규모였는데, 당시 거제도의 옥포만 일대에 상륙하여 주변지역을 약탈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옥포만으로 돌입하는 이 순신 함대를 발견하고 급히 배에 올라타 선봉 6척이 먼저 조선 함대와 맞섰다. 조선 수군은 이들을 포위하면서 총통과 화살을 쏘기 시작했고, 이에 왜군 함대에서도 조총을 쏘면서 대항해왔다. 그러나 왜군 수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이 순신 함대의 총통 등 우세한 화기에 격파되었다. 결국 이 순신 함대는 이 해전에서 왜군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이 순신 함대의 총통 등 화기사용, 전선을 이용한 당파(撞破) 전술, 그리고 화공으로 왜군 함대를 분멸시키는 등 다양한 해전 술을 바탕으로 거둔 완승이었다.
3라운드에 들어서면서 양쪽의 대결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와지마는 시종일관 접근 전을 시도하면서 가끔 유 선배의 안면에 훅을 적중시키기는 했지만 유 선배의 반격으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었다. 유 선배는 단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연결 펀치를 퍼부었다.
이날 옥포해전을 마친 이 순신 함대는 거제도 북단에 위치한 영등포로 이동하여 정박했는데, 오후 4시 쯤 “이곳에서 멀지 않는 바다에 왜군 대선 5척이 지나고 있다는 척후장의 급보를 받았다. 이에 이 순신 함대는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웅천 땅 합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두 번째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겁을 먹은 왜군 수군은 배를 버리고 상륙 도주하여, 빈 배를 모두 불태우고 밤중에 건너편 창원 땅 남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이튼 날(5월 8일) 새벽 “진해 땅 고리량에 왜군 함대가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즉시 출항하여 저도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에 이르러 대, 중선 13척의 군선이 포구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순신 함대는 화포 공격을 가하여 13척 모두 분멸했다. 이로써 세 번째 전투인 적진포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을 마친 후 아침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던 중에 선조가 관서지방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4라운드에 접어들면서 유 선배의 자신 있는 공격이 점차 눈에 띠었다. 와지마의 웨이빙과 개구리 점프를 무력화시키면서 자신의 펀치를 적중시켰다. 그저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버팔로의 허점을 노리는 사자처럼 정확한 펀치를 꽂아 넣었다.
1차 출전, 여러 번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 순신 함대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사기를 안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했다. 전쟁에서 자신들의 전술전략이 먹혀든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었다. 세 차례의 해전에서 이 순신 함대는 총통 등 회기와 전선의 우수성이 입증되어 왜군 함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선박 7척 등 모두 44척을 분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5라운드, 중반전에 접어들었다. 유 선배의 잽에 이은 좌우 훅의 명중률이 눈에 띠게 높아졌다. 와지마의 펀치는 둔화되고 있었다. 전의가 꺾이는 듯했고 자신의 한계를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무턱대고 밀고 들어가던 와지마는 라운드 종료 직전에 유 선배의 카운터블로우(counter blow)를 맞고 털썩 주저앉았다. 주심은 황급히 달려가서 노카운트를 선언했지만 관중석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쏟아졌다.
5월 29일, 이 순신은 전라 경상 연합 함대를 결성하여 출항했다. 사천, 당포, 당황포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여기서 이 순신은 해상 유인술 등 다양한 전술을 시험 가동했다. 거북선의 등장도 이 때부터였다. 원래 왜군은 해전개념이 없었다. 수군의 뿌리는 왜구의 해상 노략질이었으므로 치고 빠지기를 기본 전술로 하고, 맞닥뜨리면 배를 상대의 함선에 붙이고 기어올라서 버리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 boarding tactics)을 구사했다. 오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친 무사들은 백병전을 선호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조총보다 먼 사정거리를 가진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총통의 발사로 이를 저지하고 거북선을 왜군 진영에 깊숙이 돌격시켜서 총통을 쏘고 들이받는 다양한 전술을 가동했다. 배의 구조도 판옥선이 한옥처럼 서로 맞물리게 끼워 맞춰 쐐기를 박는 골격으로 크고 튼튼했으며, 배의 밑바닥이 평평한 구조를 가진 평저선(平底船)이었는데, 해안선이 복잡하고 암초가 많으며 얕은 포구에도 진입이 수월하고 회전반경이 작았다. 반면, 왜선은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尖底船) 형태였으나 못질로 만들어서 선체가 약하고 암초에 취약함을 드러냈다. 거북선이 소수이기는 했지만 상대 진영 한 가운데로 쳐들어가서 적진을 혼란에 빠트렸다. 따라서 지휘계통도 무너졌다. 이와 같이 거북선은 왜군의 등선육박전술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의 전력을 극대화시키는 높은 전술적 가치가 있었다.
6라운드에서 와지마의 펀치는 둔화되고 헛스윙을 연발했다. 5라운드의 다운을 만회하고 건재함을 과시하려했으나 오히려 약점만 노출했다. 유 선배는 때때로 거세게 몰아부처서 승기를 잡아나갔다.
이 순신 연합 함대의 1,2차 출전으로 왜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군수품 보급로의 근거지인 부산포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초조해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순신 함대를 격파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 때까지 지상전에서 연전연승하며 승리에 도취한 왜군은 대수롭지 않게 달려들었다. 조선 수군의 존재조차 무시하고 수륙병진(水陸竝進)으로 한양성과 평양성에 군수품을 보내려던 왜군은 작전에 크나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지상전에 참가하던 수군장 와카자키 야스하루, 구키 요시다카, 가토 요시아키에게 토요토미의 긴급 지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이 순신 함대와 정면 대결을 노리며 부산포에서 출전준비에 들어갔다.
앞서 5라운드에 다운을 당하는 등 허점을 보인 와지마는 유 선배의 집요한 공격을 견뎌낼 수 없었다. 7라운드에 들어서자 유 선배의 펀치에 더욱 체중이 실리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끝장을 내려는 기세였다. 이에 비해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관념으로 밀고 들어오는 와지마의 턱에 유 선배의 라이트 훅 카운터 불로우가 터졌다. 이 한 방으로 와지마는 썩은 삭정이처럼 무너져가는 판에 레프트 훅이 완전히 노출된 와지마의 턱에 작열했다.
주심의 부축을 받다시피 하며 겨우 일어선 와지마를 유 선배가 가만둘 리 없었다. 와지마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시 일어선 와지마의 턱이 휙휙 돌아가도록 유 선배의 펀치가 날아들었다. 유 선배가 태권도를 배울 때 다리를 넓게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굽힌 상태의 주춤서기 자세로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와지마의 세 번째 다운이었다. 와지마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들것에 실려 나갔다.
한산도 해전에서 함대와 군사를 거의 잃은 와카자키 야스하루는 가까스로 무인도에 표착하여 해초를 뜯어먹으며 연명하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 그래서 와카자키 가문의 사찰인 인화원(仁和苑)에서는 해마다 이날을 기리기 위해 그의 14대 후손들이 모여서 해초만 먹는 날이 있다고 한다. 와지마 고이찌도 응급차에 실려가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았을 테니까, 이 날의 패배로 그의 후손들이 모여 응급실에서 링거만 맞고 하루를 보내야 날이 올지도 모른다. 두 명의 와지마 후손들이 2배수로 불어나서 10대쯤 지난다면 500명이 넘을 테고, 며느리 사위까지 합치면 1000명이 훌쩍 넘어가는데, 이 인원을 응급실에 다 수용하고 링거를 놓을 병원이 없을 것이므로, 와지마의 기념 사찰을 짓고 요사채도 엄청 크게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로써 유 선배는 꿈에 그리던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그것도 적지에 뛰어들어 통쾌한 K O 승으로 거머쥔 값진 승리였다.
1592년 7월 8일, 이 순신 연합 함대는 견내량(見乃梁)으로 출항했다. 이 때, 부산포에서 먼저 출전준비를 마친 와카자키가 자신만만하게 덤벼들었다.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해협으로 최소 폭이 180m, 얕은 곳의 수심 2.8m, 수로의 길이는 약 4킬로미터인 곳이다. 이 순신은 이곳에서 큰 판옥선으로 전투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와카자키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로 했다. 먼저 선봉 5~6척을 견내량에 보내 싸우다가 패하는 척하고 도주하면서 추격하는 왜군 함대를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이 때, 섬 그늘에 숨어있던 이 순신 함대의 주력이 나타나서 일시에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여 왜군 함대를 포위하고 모든 전선에서 총통으로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이 순신의 함정에 말려든 것을 깨달은 와키자카는 도망칠 궁리를 했으나 이미 사방이 막혀서 퇴로가 없었다. 이 순신은 이때의 상황을 “장수들과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며 철환과 화살을 발사하기를 풍뢰와 같이하여 적선을 불사르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일시에 다 해버렸다.”고 술회했다.
유 제두의 1차 방어전은 시즈오까에서 벌어졌다. 도전자 미사꼬 마사히로는 빠른 몸놀림으로 아웃복싱을 하는 선수였다. 와지마가 삭정이처럼 넘어가는 걸 본 미사꼬는 꽁무니를 빼고 견제 잽만 날리면서 도망치기에 바빴다. 와카자키에 이어 부산포를 떠나 견내량으로 뒤따라오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순신과의 접전을 피하고 안골포의 좁은 포구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이 순신은 새로운 방책을 내놓았다. 좁은 포구의 불리한 여건에 맞게 전선을 교대로 투입해서 총통 공격을 퍼부었다. 토요토미의 직속 수군 명장이라고 자부하던 구키와 가토의 함대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풍비박산하고 말았다. 이 전투 뒤에 토요토미는 이 순신과 해전 금지령을 내렸다.
미사꼬 마사히로가 아무리 발 빠르게 유 제두의 펀치를 피하려고 해도 안골포의 좁은 포구에 갇힌 가토와 구키의 함대나 마찬가지인 4각의 링에서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가까스로 6라운드까지 끌어가던 미사꼬는 유 제두의 펀치 한 방에 비틀거리다가 태권도의 주춤서기 자세에서 나오는 소나기 펀치를 맞고 나가 떨어졌다. 유 선배의 1차 방어전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 순신 함대의 제 4차 출전으로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장사진(長蛇陣)으로 직접 공략하여 큰 전공을 세운 것과 다름없었다.
유 제두의 일 년 후배인 신 경호는 잠시 태권도부에서 활동한 거 말고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신 경호는 여름방학 때, 진도에 있는 이모네 집을 가기위해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에서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배가 도착하여 출항했으나, 여객선은 맞은편에 빤히 보이는 진도의 벽파진 선착장으로 가지 못하고 목포 쪽으로 떠 밀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갑판에 나와 웅성거렸다. 선장이 아무리 엔진 출력을 높여도 울돌목의 거센 조류에 밀기만 했다. 울돌목이 목청을 돋아 우는 때라고 했다. 하루 몇 차례씩 목 놓아 우는 때가 있는데 그 소리가 이십 리 밖에까지 들린다고 했다. 여객선이 울돌목의 격랑이 몰아치는 때를 만난 것이다.
결국 여객선은 격랑이 가라앉은 다음 한참을 되짚어 올 수밖에 없었다. 신 경호는 얼핏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이 순신과 명랑해전(鳴梁海戰)이었다. 그 뒤로 신 경호는 이 순신의 전기와 소설을 찾자 읽었다. 학교 도서실에서 누렇게 빛이 바랜 난중일기와 징비록도 찾아 읽었다. 신 경호는 그때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무언가 일본을 알고 일본을 극복하는 일에 매진하고 싶었다. 유 선배가 태권도에서 복싱으로 전향하여 전국체전을 제패하는 순간 신 경호의 가슴에도 꿈이 불타올랐다. 마침 진로를 걱정하던 차에 중앙정보부 입사시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신 경호는 그때까지 건성으로 하던 공부가 아니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공부에만 매달렸다. 신 경호는 시험에 합격하고 대망의 정보부 직원이 되었다. 어려운 수습기간을 견뎌내고 정식 직원이 되었을 때, 일본 담당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정보라면 고대에서 현제까지 모두 사들여서 탐독했다.
76년 2월 17일, 도쿄 고라꾸엔 체육관에서 유 선배의 2차 방어전이자 리턴 매치가 와지마를 상대로 벌어졌다. 이는 돈을 앞세운 일본의 옵션 때문이었다.
리턴 매치는 한산대첩에 참가하여 대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아키 등이 칠천량(七川梁)에 모여들어 원 균 함대와 대결하는 형국과 비슷했다.
유 선배는 충분한 훈련으로 오전 계체량을 가볍게 통과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한편 와지마는 독감에 걸렸다고 엄살을 떨며 마스크를 끼고 다녔다. 독감 때문에 연습을 못해서 형편없는 시합이 될 거라고 연막을 피우고 다녔다. 칠천량 해전 초기, 원 균 함대와 정면 대결을 피하다가 상대가 피로해진 틈을 노려 야간기습을 하려는 의도와 비슷했다.
그러나 유 선배가 그런 꼼수에 넘어갈 선수가 아니라고 신 경호는 굳게 믿었다.
정유재란 전에, 고니시 유끼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이 간계(奸計)를 꾸며서 이 순신 파직의 빌미가 됐던 과거를 선뜻 기억하고 신 경호는 불길함을 느꼈다. 선조의 이상한 원 균 두둔과 이순신 불신과 비방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둔함으로, 수군통제사 교체의 패착을 두게 된다. 칠천량 해전 패배의 급보를 받은 조정의 대책회의에서 선조는 자신의 판단착오와 무능을 덮기 위해서 “칠천량 해전은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다”라고 토설했다.
또한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만주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후금(後金, 뒤에 靑나라)은 사신을 보내 “여진과 조선은 형제나라이니 3만 정예군을 파병 하겠다”는 제안을, 오랑캐와 상대하지 않는다는 궤변으로 거절하고 명나라의 구원병만 애걸하였으나, 평양성까지 고니시의 왜군 수중에 들어가고 선조 자신이 월경(越境)을 해야 하는 궁지까지 몰렸을 때야 겨우 구원병이 왔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전투는 즐기지 않고 군량미만 축내고 민폐만 끼치는 상황을 자초하고 말았다. 선조가 청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20여일 만에 한양성이 왜군에게 떨어지는 일도 없었거니와, 청나라와 경쟁관계인 명나라도 일찍 파병하여 서로 전공(戰功)을 다투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의 조선의 군왕이나 사대부들은 국제정세에 어둡고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형세를 바로 보지 못하고 국난을 키웠다. 국난의 고통은 바로 백성들에게 돌아갔으니, 죽고 다치고 끌려간 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국제 노예시장의 노예가격이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왜군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이런 일은 불과 30여년 만에 되풀이 하는데, 망해가는 명나라만 섬기고 청나라를 홀대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마는 것이다.
오전 계체량을 통과하고 충분한 휴식을 한 유 선배는 리턴 매치가 벌어지는 링에 올랐다. 그러나 몸 상태가 이상했다. 눈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으며 근육도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이 더부룩하고 매스껍기까지 했다.
계체량을 끝내고 곰탕을 한 그릇 먹었는데 권투위원회 임원 한 사람이 딸기를 한 접시 가져왔다. 맛있게 드세요 라고 이르고 금방 가버렸다. 그때 한국에는 2월에 딸기가 없었다. 귀한 것이라 맛있게 먹었다.
전 국민의 희망이 된 유 선배의 리턴매치 2차 방어전은 의심의여지가 없어 보였다. 지상파 텔레비전이 모두 생중계를 할 만큼 관심이 대단했고, 타이틀을 제패할 때와 마찬가지로 통쾌한 승리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라운드가 시작되면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선배의 경기를 하나도 노치지 않아 보아왔던 신 경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유 선배의 몸놀림을 보고 불길한 낌새가 느껴졌다. 유 선배는 우둔한 몸놀림과 푸트워크도 없이 와지마의 맹공에 휘말리고 있었다.
원 균이 칠천량(七川梁)에서 왜군의 야간 급습을 받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목이 타는 한 라운드 한 라운드를 보내면서 기사회생을 갈망했으나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었다. 와지마의 펀치력이 약하고 결정타를 맞지 않아서 경기는 15라운드까지 밀려갔다. 그러나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유 제두는 다운 당하지 않았지만 링을 등지고 경기를 포기했다. 신 경호는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유 선배의 패배는 갖은 억측을 자아내며 세간에 퍼져나갔다. 유 제두가 오스카, 와지마와의 세계 3강 체제에서 스피드, 테크닉 파워에서 월등하기 때문에 당분간 롱런할 것이다. 라는 스포츠 평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커졌다. 그 중에서, 유 선배의 매니저가 와지마 측의 돈에 매수되어 음식에 약을 탔을 거라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아무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일은 이십대 후반이긴 해도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아무도 경기를 주선하지 않았다. 유 제두는 한국권투위원회 측에 강력히 항의하며 경기 주선을 요구했다. 아직 세계 랭킹에도 들어있었다.
거듭 된 항의에 마지못해 경기를 주선했다. 유 선배가 보유했다가 세계 챔피언 도전으로 자진 반납해서 새로 동양 미들급 챔피언이 된 임 재근과 대결하여 승자에게 세계 챔피언 도전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유 선배는 아픔을 애써 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칠천량 해전 패배의 비보가 도원수 권 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던 이 순신에게 날아들었다. 이 순신은 자신이 혼신을 다해 구축해온 수군이 한꺼번에 궤멸되고만 현실에 뼈를 애는 아픔을 느꼈으나, 언제까지 거기에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도원수 권 율의 허락을 받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송대립 등 군관 9명과 함께 현지로 출발했다. 이 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기 전에 칠천량 해전 주변의 현장 실사와 패잔병, 장 수습, 남은 군선 12척의 사태 파악과 앞으로의 전력 보강 계획과 전술전략 수립에 골몰했다.
유 선배는 임 재근과의 대결에서 보기 좋게 KO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세계 챔피언 도전을 주선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더니 임 재근을 도전자로 내세우고 말았다. 유 제두는 미칠 것만 같았다. 권투위원회를 찾아가서 분탕질을 쳤지만 모두가 슬슬 피하기만 하고 위원장 등 책임 있는 자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절망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디를 둘러봐도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고 수렁에 빠져드는 자신의 비명만 밤낮으로 가득했다. 피울음이 목에서 넘어오고 피 끓는 육체가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혈뇨(血尿)가 나오도록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끝도 없이 거리를 방황해 보았지만 까마득히 가로막힌 장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공원 벤치에서 밤을 밝혀도 새벽에 빛나는 샛별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유 선배는 모든 걸 포기했다. 일 년 이상 방황과 고통은 그를 무너트렸다. 그는 미련이 싸인 링을 떠났다. 혜성처럼 떠올랐던 영광의 순간은 꼬리의 잔영(殘影)조차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해놓고도 무능한 선조는 바다를 포기하고 권 율 휘하에 들어가라는 어이없는 권고를 내리기도 했다. 이순신은 즉각 답신을 보냈다. “아직도 전선이 12척이나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용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 순신은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다. 스스로 차실천행(此實天行)이라고 말했다.
노량에서의 마지막 해전은 하지 않아도 토요토미가 죽음으로써 저절로 물러갈 왜군을 가로막고 스스로 조선의 혼을 불태웠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시작된 정면대결은 왜군 함대를 관음포로 몰아넣고 최후의 일전을 치렀다. 한번 칼을 휘두르니 온 누리가 피로 물들었다.
신 경호는 어느 날 회식자리에서 과장급 요원의 입에서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고조된 취기와 함께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심해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에서 갑자기 화산이 폭발했다. 그 시절 정보부는 안기부로 바뀌어 있었다. 체계나 사람은 별로 바뀐 게 없이 간판만 바꾸어 단 셈이었다. 잊고 있던 유 선배의 영광과 아픔이 동시에 다가왔다.
다음 날 신 경호는 유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포효하던 맹수의 기세는 사라지고 유순한 시골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체육관에서 트레이너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날개 죽지를 다쳐서 뭍에만 걸어 다니는 새나, 날카로운 이빨이 빠진 이름뿐인 맹수처럼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반갑다고 내밀던 그 억센 손아귀는 늘어져서 연체동물처럼 미끈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사처럼 째진 눈자위도 힘을 잃고 신 경호의 정면을 외면했다. 어디 가서 앉읍시다. 라는 신 경호의 제의에 따라 둘이는 체육관 구석의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신 경호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얘기는 한동안 겉돌기만 했다. 트레이너 일은 할 만하냐는 둥, 건성으로 안부를 묻고 대답하는 시무룩한 양상이었다. 신 경호는 말을 할까 말까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형, 리턴매치 하기 전에 계체량 끝내고 호텔에서 먹었던 음식 기억해?”
신 경호는 유 선배를 외면하고 딴전을 피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둘은 한동안 나란히 벽을 바라보면서 서로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유 선배가 먼저 신 경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 경호의 눈길도 그에게 다가갔다. 한 순간 유 선배의 눈 속에 폭풍처럼 먹구름이 지나갔다.
“그 때, 딸기 먹지 않았어?”
신 경호의 두 번째 발언은 연타를 얻어맞은 선수처럼 비틀거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대를 노려보는 자세로 유 선배가 돌아왔다.
“그래, 맞아. 계체량 끝내고 호텔방으로 돌아와서 배달해온 곰탕을 한 그릇 먹었는데, 잠시 후에 딸기가 들어왔어. 특별히 구해온 거라며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는 말도 하고.”
통상 시합을 앞둔 권투선수들은 고기나 야채, 과일을 주로 먹는다. 그것도 챔피언 정도 된 선수들만이 누릴 수 있지만. 몸을 가볍게 하고 근육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근데, 딸기는 왜?”
유 선배는 벌떡 일어나서 신 경호를 바라보고 다그쳤다. 신 경호는 엊그제 회식자리에서 들은 엄청난 시한폭탄을 터트렸다.
정보부 제 1국은 국내 정치공작을 주도했다. 챔피언이 된 영웅 유 선배는 향리 선배의 권유로 동교동에 인사를 갔고, 그 뒤에도 아무 생각 없이 명절 때마다 인사를 다녔다. 그것을 제 1국이 놓칠 리 없었다. 당시 동교동 인사는 가택연금 상태나 다름없었고 명절 때만 문이 열리는 정도였다. 제 1국에는 동교동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리스트가 있었다. 그 정보는 윗선에 보고되었다. 부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뒷짐을 쥐고 서성이면서 생각에 몰두하다가 마음을 굳히고 심복을 불러 들였다.
“이봐, 챔피언이 그런 데(동교동) 드나들면 각하가 정치하기 어렵되 잖아. 리턴 매치 때 조치해 버려.”
부장의 오더는 곧바로 실무 팀으로 내려져서 공작에 들어갔다. 권투위원회에 실무 팀의 공작원이 하나 달라붙었다. 그리고 권투선수들이 과일을 즐겨먹는다는 데 착안하여 딸기에 근육 이완제를 투입했던 것이다.
모든 의문은 일시에 풀렸다. 문제의 딸기를 먹고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뻐근한 몸과 멍멍한 머리가 생생하게 유 제두의 뇌리에 떠올랐다. 유 선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뺨에서 빗살무늬가 실룩거렸다.
유 제두는 다음 날부터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청와대, 치안본부, 검찰청에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때가 아니었다. 정보를 입수한 안기부는 역 공작에 돌입했다. 괜히 후배만 다치게 하고 만 꼴이었다.
여러 개의 대륙판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지각 판이 떨어져서 지층의 한 가운데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 심층에 떨어졌다. 마그마는 더욱 팽창하고 압력이 높아졌다. 마그마는 갈등으로 얇아진 지층을 뚫고 솟구쳤다. 임진왜란 380년 뒤, 유 제두가 은퇴하던 그해 10월 26일 삼각산이 폭발했다. 그 아래 산자락이 피로 물들었다.
끝(2007,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