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빠! 예수님은 누구야?
본문 : 요 1장 1 ~ 5절
어느 날 제가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다섯살 된 우리 아들 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하나님은 영이시지~?”
“와! 우리 진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았지?
대단한데! 최고예요!”라고 하면서 진이를 추켜세웠습니다.
진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누나들과 놀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또 언젠가는 우리 진이가 엄마에게 그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엄마! 하나님은 어디에 계셔?”
“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셔!”
“우리 배속이 좁은데 하나님이 어떻게 계셔?”라고 반문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엄마는 진이가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주 좁은 우리 안에도 계실 수 있으셔!”라고
얘기해 주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엄마! 하나님은 남자고 예수님은 여자지이~응?” 라고
질문하기도 한답니다.
진이의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비록 어린 나이일지라도 진리를 알고자하는 목마름이 사람들에게는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4,5학년이 될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예수님의 남편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예수님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서로가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아야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깊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을 더 잘,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은 맹신이 되고 광신이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온갖 이단들이 나오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나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에비온파나 영지주의의 모태가 된
케린투스의 가르침입니니다.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거나 신성을 부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서 떠나도록 미혹했습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완전한 사람이심을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가르치고,
그래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1장 1 ~5절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일은 또 어떤 일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태초에’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는 두 본문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말씀과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이 말들이 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원문의 의미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등장하는 ‘태초’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뻬레쉬트’로 이 의미는
“시간과 공간, 온 우주가 지음을 받은 시점”을 나타냅니다.
시간의 시작, 우주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 1장 1절에 등장하는 ‘태초’는 헬라어로 ‘엔 아르케’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시간과 우주라는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시점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으로 존재하신 예수님은 창조사건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요,
곧 하나님이시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에비온파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부어주신 선지자도 아니고,
케린투스의 주장처럼 예수님은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는데,
세례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을 때에 신적인 그리스도가 임했다가 십자가 고난을 당하기 전날
신적인 그리스도가 떠남으로 죽음을 당한 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냄으로서
요한은 모든 이단적인 가르침에 철퇴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이단들의 공통된 특징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이루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자로 보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구원사역에 실패한 선지자 정도로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고, 아니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가르침은 다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가운데 바로서서 어떠한 이단적인 가르침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음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창조사건 전부터 계셨던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본문 2~3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사건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그 안에 거할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들을 지으셨습니다.
또 말씀이신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난 이후에 카오스 즉 땅이 혼돈하고
무질서 상태가운데 있던 우주에 코스모스, 즉 질서와 조화를 가져왔습니다.
말씀이 선포되자 혼돈상태인 우주가 질서와 조화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혼돈상태에 있던 우주만물에 질서와 조화를 가져왔던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창조하시고 혼돈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 가운데도
질서와 조화를 가져오실 수 있는 분입니다.
무절제하고 무질서하며 무엇을 해야 될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될지도 모르는
온통 혼돈상태에 있는 우리 내면세계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우리는 절제력 있고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가야할 인생의 방향을 향해 바르게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119편 10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이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만드는 등이요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는 단순히 육체적인 생명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거나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영적인 생명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원한 생명이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사탄의 지배아래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이신 예수님은
참 빛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어두움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빛이요 소망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두움을 불사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두움의 갑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미국 시카고 방송국의 연출가로,
또 인기 가수로 절정을 누렸던 죠지 베브리 쉐아(G.B. Shea)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출세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그의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면서도 마음이 허무하고,
출세를 하면서도 늘 마음속의 불안이 떠나지 않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어렸을 때 믿던 예수님에 관한 추억과 향수가
진하게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뇌리 속에 “나는 어쩌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지도 몰라”라는 고민을 하게 되고,
교회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경험한 이후에 그의 전 삶을
예수님께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이후에 방송국에서 전속 계약을 하자는 제의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받았던 출연료보다 몇 배를 더 준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때에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전화를 너무 늦게 걸으셨습니다.
앞으로 나의 목소리와 재능과 모든 것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나의 주인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 질 것입니다”
죠지 베브리 쉐아는 나중에 자기를 위해 늘 기도하는 어머니의 친구 밀러 여사가 지은
성시를 가지고 우리가 잘 아는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작곡을 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두움의 갑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참된 쉼과
얽매이기 쉬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6절로 8절에 등장하는 요한처럼,
지금도 어두움가운데서 고통 받고 무질서와 혼돈가운데 방황하는 이웃들에게
이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가 됩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풍성한 예화와 함께 잘짜여진 말씀에 은혜받고 나갑니다.
졸필에 은혜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