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소회를 말씀해 주십시요>
‘마르틴 루터’ 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1517년으로부터 꼭 500년이 되는 2017년을 맞이하여 그 수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종교 개혁의 영향이 그 당시는 물론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에 미치도록 경륜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종교개혁 당시 세속화와 교리적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어 배교의 길을 걸으면서도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던 가톨릭, 교황청이 물리적으로 기독교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을 때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으로” 라는 성경적 깨달음과 확신으로 가톨릭으로부터 생명을 걸고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루터가 피운 개혁의 불씨는 흑암에 갇혀있던 당시 기독교계는 물론 온 세상에 선명한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곳곳에 교회가 세워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산의 큰 수고와 고통을 겪은 루터를 비롯한 많은 종교 개혁가들에 대하여도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우상과 흑암에 갇혀있던 이 한반도에까지 복음의 밝은 빛줄기가 비추어 ‘말세지말’의 때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흑암의 권세에서 놓여 광명의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은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던 당시 가톨릭, 교황청의 불의한 횡포와 그릇된 ‘비진리’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맞서서 일구어 내었던 종교 개혁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종교 개혁가들이 물려주신 바른 진리에 입각한 고귀한 신앙 유산을 값없이 물려받아 진리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현 위치와 상태에 대하여 잠잠히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숱한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희생의 값진 대가를 지불하고 일구어 낸 종교 개혁의 수혜를 물려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각자 합당한 처신과 위치에 있는지를 면면히 살펴보는 계기를 삼는다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변화와 우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그러나 매우 절실한 개혁의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여러 가지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한국 기독교계에 대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이 신약 최초의 교회요 기독교의 태동이었다면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배교의 길을 걷던 가톨릭의 왜곡된 종교흐름 속에서 바른 기독교의 정통성을 회복시킨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사건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기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일보다 더 우선시되는 일이 이 시대의 기독교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당시의 종교계에는 루터의 신앙 양심상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 그릇된 일들이(면죄부등) 많았습니다.
믿음의 사람 루터가 보기에 개혁이 절실한 대상들이자 바로 잡아야 할 악습이었지요.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여 재물, 권세, 명예를 탐하고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마저도 왜곡되게 전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 종교 개혁을 할 당시의 가톨릭교의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이 시대의 기독교계에 하나님이 개혁자 루터를 보내신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느라 분주한 이 시대의 기독교계를 어떻게 바라볼지 깊이 생각해볼 때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계는 세상으로부터 전례 없는 비난과 야유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애매히 받는 비난이 없지는 않겠으나 많은 경우 받아 마땅한 비난이 대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의 문란한 생활, 과도한 사례금, 섬기는 자가 아닌 군림하는 목회자, 세상에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자신이 속한 교단, 교회 그리고 사적인 안위를 먼저 챙기는 이들이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비정상의 정상화’ 가 되어있는 일들이 작금의 기독교계 안에는 너무 흔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나라인 기독교계에서는 개혁의 요인들이며 청산 되어져야 할 악습들입니다. 이런 악습들을 그대로 두고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만 분주하다면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오히려 욕되게 하고 역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루터가 이 시대의 기독교계에 있다면 분명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할 것입니다.
“지나간 종교 개혁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고 절실한 일은 너무 흔해서 더 이상 감출수도 없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는 교단, 교회, 사역자들의 세속되고 부패한 부분들을 하나님의 나라요 거룩한 교회인 기독교계에서 말끔히 도려내어 제거하는 개혁이 더욱 시급한 일이라고....”
<교회 개혁의 핵심은>
기독교(교회)에 있어 개혁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모인 어떤 조직체나 구성원들이 모이는 구심점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그 자체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 몸을 이룬 각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완벽해야 하겠지만 몸의 각 지체를 이루는 각 사람들이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개혁이라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물론 몸의 지체를 이루는 각 사람에게 개혁의 필요성과 강한 의지가 일어나는 동기마저도 각 지체들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끊임없이 재촉하십니다. 때로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처럼 품게 하셔서 교회로 하여금 더욱 교회되게 하며 성도를 더욱 성도되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빌 2:13~15”
그러므로 성령이 운행하시는 교회요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는 반드시 더 나은 방향으로의 개혁을 하게 되어 있으며 그 개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뜻하신데로 완성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흔히들 사도들이 세운 초대 교회를 교회의 원형으로 알고 있지만 초대교회는 이 시대의 교회들보다 개혁되어져야 할 부분들이 더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시대의 종교적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문제될게 아닌 것마저도 심각한 문제꺼리가 되어 있었지요.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하는가. 안식일과 절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많은 부분들로 인하여 마찰이 있었고 이런 점을 해결하려고 사도들이 별도로 총회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히브리서 9:10절에는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의 신비를 어느 한 시대. 한 교단. 한 사람이 다 알 수도 없고 또 완전한 개혁을 단번에 이룰 수도 없기에 각 시대, 상황마다 개혁해야 할 부분들이 항상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음성을 통해 적절한때에 개혁하여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를 입겠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들은 무르익은 개혁의 때에도 개혁하지 못하여 기독교계에 거치는 걸림돌 역할을 하는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특히 성직자로서) 돈, 명예 등 삶에 있어서 주변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모본이 되지 못하여 비난을 받는다면 그런 이들은 이미 개혁의 대상입니다. 기독교의 개혁은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그 시기가 무르익은 때에 이루어지지만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개혁의 주인이십니다.
<성경의 절대성과 종교개혁의 상관관계>
예수께서 마태복음 5:1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일점 일획’ 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하셨으니 바른 성경 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절대성에 관하여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관이 기존 기독교, 혹은 세상의 흐름과 충돌이 빚어질 때 그 기준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민주 국가에서는 어떤 사안의 옳고 그름이나 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다수결, 혹은 지금까지의 전통을 기준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개혁의 동기는 루터가 그러했듯이 ‘오직 성경’이 중심이자 그 동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역자들 가운데서 간혹 꿈이나 환상, 예언, 개인적인 깨달음을 근거하여 개혁, 혹은 어떤 주장이나 일을 추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런 이들은 교회개혁, 혹은 사역에 있어서 바른 결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시대적 흐름이 이러니 우린들 어쩌겠나” 하며 지금껏 지켜오던 어떤 가치관을 버리거나 또 받아들이는 것 역시 신앙인으로서 바른 결정이 아닙니다. 각 교단, 총회, 노회, 교회에서 결정하는 사안들이 다수결에 떠밀림이나 시대적인 흐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오직 성경”의 밝은 조명과 말씀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그 동기와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 위기의 원인과 그 해결책은>
한국 기독교계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은 이 시대 기독교계 전반적인 흐름이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있는 것이라 봅니다. 안으로는 교단 및 교회 운영과 사역자들의 자질에 실망한 기존 신자들의 대량 이탈과 밖으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을 들음으로 복음 전파의 어려움을 겪는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계가 이처럼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는 주된 이유는 이 시대 기독교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있어서 교회 운영 및 사역자들이 지나치게 세속화, 타락되어 있다는 점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히 드러난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땅에 버려져 발에 밟히듯이 세속화된 기독교계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하여 감화력을 끼치지 못하기에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발길을 막는 걸림돌 역할을 함은 물론 깨어있는 기존 신자들마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기독교 교단의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기 위하여 돈뭉치가 오고가고 대기업 회장을 무색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사례금을 받는 목회자들이 기독교계의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과 깨어있는 신자들의 심경은 혼란스러워 질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낮아지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도리가 바로 기독교이며 이런 도리를 올바른 자세로 전하는 것이 성직자들의 당연한 사명일진데 이 시대 기독교계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역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입으로 전하는 말과 행위가 전혀 일치되지 않는 엇박자를 내고 있고 각 교단 및 교회, 사역자들이 교회 세습이나, 과도한 사례금, 자리에 연연하는 등 한 시대의 보편적인 정의와 가치기준 및 형평성에도 미달되어 세상과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판단과 비난을 받으면서 마찰을 빚는 일은 이 시대 기독교계에서 아주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거룩한 길을 걷다가 세상과 마찰을 빚는 진리의 거룩한 투쟁이라면 비난이나 그보다 더한 핍박도 당연히 감수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세속적이며 개인적인 이권과 관계된 문제로 뜻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나 하나님이 세우신 올바른 사역자들 가운데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발람처럼 사적인 탐심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끼쳐질 피해는 아랑곳없는 거짓 선지자, 이단자들 사이에서나 있음직한 일이지만 이 시대의 기독교계 안에는 이런 일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강조하는 이들이 더 타락하여 돈 문제와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혐오시하는 도박에 중독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비난을 받을 세속적인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에 열광하며 온전히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어떤 것들에 유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계 산하 모든 교회들과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을 마음의 문 밖이 아닌 중심에 모셔 들이므로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혀야 합니다.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길만이 다시금 이시대의 기독교계가 세속적인 굴레를 벗어 버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날로 썩고 어두워져가는 세상을 살리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 wcc와의 신앙과 직제일치에 대하여>
로마서 1:24~28이하에 보면 동성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은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 자체가 동성애에 한번 빠진 사람은 영영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성애에 관해서 만큼은 약간의 여지를 남기신 뜻한 완화된 표현을 하시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명명백백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물론 한국교회 산하의 어떤 교회들, 특히 wcc(세계교회협의회) 에 가입된 교회들은 ‘휴머니즘’ 실현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권리를 제공하며 이에 따라서 동성애자들도 성소수자로서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이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동성애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신 성경 말씀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동성애자들을 성소수자로 일컬으며 그들은 태생적으로 생긴 성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니 그들을 비정상으로 보지 말자는 주장을 폅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성애자들은 태생적으로 성정체성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욕심에 이끌리는 자들이라고 로마서 1:26~27절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타락된 인간에겐 금지된 어떤 영역을 침범하려는 죄성이 누구든지 있지만 동시에 이를 억제 하려는 양심의 견제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있는 이들은 비록 불완전 하지만 절대 넘지 말아야 할 금지된 선(천륜을 거스르는 영역)은 침범하지 않도록 통제하므로 자신을 극도의 타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들이나 또 살인자 등 극악한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오직 죄성의 유혹에만 충실하여 자신을 완전히 방치한 결과 정상적인 사람들에겐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동성애 같은 추잡한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을 포용한답시고 균형을 잃은 인간의 자비를 내세워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성애자들이 전도와 긍휼의 대상일수는 있어도 결코 포용의 대상일수는 없습니다. 특히 WCC (세계 교회 협의회)는 표면상으로는 세계 기독교의 일치 내지는 화합을 표방하고 있지만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처음 개최된 후 지금까지 걸어온 행적을 살펴보면 세계 기독교의 일치 보다는 세계 모든 종교를 통합하려는 것이 WCC 운동의 주된 목적임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일치라는 명제를 걸어놓고 전 세계 모든 종교인들을(우상종교포함) 초청하여 순서에 따라서 각 종교의 종교행위를(무당들의 푸닥거리와 초혼행위도 포함) 하게 하는 등 도저히 교회 연합을 위한 순수한 기독교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활동을 공공연히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WCC 운동을 하는 이들은 가톨릭교와 ‘신앙직제일치’를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가톨릭과 ‘신앙직제 일치’란 가톨릭과 신앙적인 일치를 시켜서 교제하며 다시금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나가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니다. 이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며 배교의 길을 걷던 가톨릭으로부터 생명을 걸고 종교 개혁을 일으켜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시킨 루터의 종교 개혁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잘못된 과거사로 되돌리는 결과는 물론 지금껏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전 세계에 퍼져나간 수많은 하나님의 교회들을 하루아침에 무단가출한 탕자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기독교계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는 가톨릭교도들은 물론 이슬람교도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 신앙적 교제 및 신앙적 일치를 시도하는 대상은 오직 동일한 신앙고백과 같은 신앙 노선을 걷는 이들이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과 성도의 교제 및 신앙적 일치를 도모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며 분명한 신앙 및 노선의 차이가 있음에도 신앙직제 일치를 추진한다면 이는 명백한 배교 행위에 해당될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자세를 가다듬자>
주님의 지상 명령은 세상을 향한 복음 전도에 대한 사명이요 재촉이다. 그런데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가야 할 한국교회가 내부적인 어떤 문제로 인하여 복음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더 나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무엇이 복음에 거침돌이 되는지 자세히 살펴서 드러나는 원인이 있으면 뼈를 깎고 살을 에는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그 원인들을 다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한 생명에게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기독교계 내부의 어떤 문제로 복음이 주춤거리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아직 세상에 속해 있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마저도 다 쓰지 않고 상처받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하였다(고전 9:12 참조). 능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핍박과 죽음까지 불사하며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막아서고 복음이 달려 가야할 길을 더 용이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것이다(골 1:24 참조). 그들의 믿음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들처럼 자신들을 복음의 디딤돌로 바쳐서 복음이 가야할 곳으로 평안히 달려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시각에는 복음의 흐름을 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단지 쓰임 받고 있을 뿐이다. 복음의 흐름은 생명이 흐르는 강이다. 하나님은 친히 마지막 한 생명에게까지 이르도록 생명의 강이 흐르게 하실 것이다. 이 마지막 때가 되도록 복음은 먼 여정을 중간에 막히지 않고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똑바로 흘러왔다. 이처럼 먼 여정을 흘러온 생명의 강인 예수의 복음이 이 시대의 어떤 지각없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뚝 멈추어 지거나 오염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거룩한 생명의 강이 마지막 남은 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순탄하게 흘러가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내놓아야 한다. 복음의 흐름에 쓰임을 받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쓰임받기 위하여 그 흐름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들을 주저하지 말고 다 버려야 할 것이다. 자칫 깨어있지 않으면 사탄에게 속아서 거룩한 복음의 흐름을 방해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기독교계는 거룩한 복음의 흐름에 좋지 않은 쪽으로 쓰임 받고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복음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이 이 시대의 기독교계를 향하여 가지는 불만에는 한국교회의 오랜 관행이나 설령 신앙 양심상 가책이 없는 것까지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마땅히 누려도 될 만한 권리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교회여 어찌하여> 중에서 발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이 시대의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지나치게 세속됨’ 이 그 핵심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어 세상에서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세속화 되고 세상에 얽매인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뿌림으로 구속의 은혜를 입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금 세상에 얽매이고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앞서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에 온전히 사로잡히지 못하고 또 순종치 못함이 핵심이라고 앞서 밝힌바 있습니다.
세속화의 양상은 대부분 개인 ‘이기주의’ 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에서 남보다 내가 더 부각되고 앞서가야 하며 더 많이 가지고 남위에 군림해야 성공한 자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다 보니 말씀을 순종하는 삶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에 급급했던 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계에 나타난 전반적인 양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세속적인 번영신학을 좇음이며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 반대되는 배교의 가르침에 해당합니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 이런 성향으로 움직이다보니 자신이 낮아져 남을 섬기고, 받기 보다는 베풀기를 좋아하며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기독교 최고의 가치이자 계명은 외면하고 오직 개인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다 보니 자신이 소속된 교단, 교회, 자기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렸지만 그 후유증으로 이 세상에 평안히 임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인 기독교계 전체가 세속적인 집단처럼 변질되고 비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십자가 뒤에 숨기고 형제와 이웃을 더 사랑하고 섬기며 소중하게 세워주는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회복한다면 열방과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나라인 기독교계 안으로 물밀 듯 밀려들어올 것을 확신합니다.
첫댓글 9월 1일자 신문에 게재되는데 8월 21일까지 마감하느라 (가능한 시간이 실제적으로 24시간 정도) 시간이 많이 쫓겨서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양해를...^^::
좋은글 좋은 사역 감사합니다 ^^
가을애님 다시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신 은혜는 많으나 불충함이 많아 늘 죄송한맘 그지없습니다
@민들레홀씨 포럼에서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
@가을애 제가 그쪽에 가면 껄꺼러워 하실분들이 계실것 같고 또 요즘 포럼은 이대로가 제일 좋을것 같습니다
전례없이 활성화 되어있는것 같더군요
@민들레홀씨 반길분이 더 많지 않을까요 ㅎ
@가을애 물론 반길분이 많겠지만 불편해하는 한분이 반길분 열분보다 제겐 더 무겁게 느껴 집니다요^^::
좀더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겠습니다요
@민들레홀씨 글은 넘쳐도 신실한 개혁적인 논객은 많지 않지요.
말이 많거나 목소리가 큰것보다 제대로된 글하나가 백개의 글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
@민들레홀씨 부딪힘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ㅎ
@가을애 저의 글도 쓰레기처럼 보이는 궁극의 혜안을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요
물론 많이 부족한점이 많은 글입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다보니 더욱^^:::
@민들레홀씨 그런 시각의 분에게는 포럼에 재활용으로라도 건질글이 하나도 제대로 없을것입니다요 ㅋ
@민들레홀씨 바쁘시겠지만 함께 나눠주시면 풍성한 은혜가 넘칠것입니다 ^^
@가을애 그래도 정들었던 곳이라 자주 곁눈질 하고 있습니다요
제가지금 쓰고있는 책을 탈고할쯤에 문을 두드려 볼까 합니다요
@민들레홀씨 네~~선한일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주님께서 갚아주실것입니다 ^^
@가을애 가을애님이 제 소매를 잡아끄시는 바람에 그만^^::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대담으로 매우 적합한 내용인 듯 합니다.
언제부터 퍼 갈수 있나요? ㅎㅎ
9월 1일짜이긴 합니다만 당장 퍼날라도 됩니다요
그럴만한 내용이 될진 몰라도요
교정을 거치지 않은 원석 그 자체입니다
@민들레홀씨 알겠습니다요. ㅎㅎ
좋은 글 좋은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너무 설치는거 같아 조심스럽고 귀한 분들께는 죄송하기도 합니다
널리 양해를 ...
한‥‥‥10년 ‥만에
어린양 지체님께서 오세끄마요 이ㆍ
운동 많이 허심서 강건하십쇼‥
10년 만이라니요? 가끔 한번씩 눈팅하고 가는디요...
@어린양 온세까페에서 제일 눈밝은 사람이 저뿐인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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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한번 모일까 합니다
귀한 내용이라 생각하여 스크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