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양문학의 뿌리를 찾아서
1. 어부사시사
향토사연구가 정영래
어부사시사의 발상.
어부사시사는 농암 이현보(1467-1555)가 조선 명종때 “어부가”라는 이름으로 5수의 연시조를 지었다.
어부가는 작자가 실지 어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중국 시풍에 의존한 흔적과
노래 말이 한시이기 때문에 서민들이 부르기에 약간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여 고산이 실지 경험한
어부의 애환을 “어부사시사” 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창작하여 춘,하,추,동 사계를 각10편으로 하여
시대적 정서와 지역적 여건들을 일기 쓰듯이 우리노래 말로 만들었다. 따라서 명확하게 따지고 보면
어부가의 후속편이기도 하다.
고산이 이현보의 어부가에서 시상 을 빌어 왔다고 하나, 후렴만 떼고 나면 완전한 3장 6구의 시조
형식을 지니면서, 전혀 새로운 자기의 언어로써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고산의 고유
시조라고 평가하고 있다.
고산은 도연명의 신선세계와 굴원의 불굴의 충성에 바탕을 두고 어부사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창작을
하였다고 보고 있다.
어부사시사를 창작할 때 고산은 어부들의 노 젓는 고달픔을 노래로 달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고산은 어부사시사에서 ‘맑은 못과 넓은 호수에서 쪽배를 띄우고 마음껏 노닐 때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소리 내면서 서로 노 젓게 한다면 또 한 가지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산은 어부사시사에서 노를 저을 때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부르면서 흥을 돋울 수 있도록 한편의
가사에 여음과 후렴을 두 번씩 넣었다. “배 떠라, 배 떠라” 어음이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는
후렴으로 여러 사람이 합창하도록 되어있다.
이와 비슷한 창가가 강강술래다.
어부사시사의 형식은 단시조(평시조)의 전형적인 3장 6구체다.
초장 3-4-3(4)-4, 중장 3-4-3(4)-4, 종장 3-5-4-3 형식에 거의 일치하며 후렴이 두 번(편)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어부사시사는 고산이 보길도에서 직접 낚시를 하면서 그때그때 보고 체험하면서 느낀 감정을 시조의
형식으로 담아 놓았다.
화자는 어부사시사를 정리하고 마지막 글에 ‘세연정 낙기란가 선상에서 시아조(示兒曺) 즉 아이들에게
보이노라’하고 있다. 고산은 여기서 아이들을 강조한다.
고산이 강조한 아이들이란?
한문을 배우지 못한 즉 우리말 수준의 어부들을 말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보인다는 말은 아이들 수준에 맞게 누구나 쉽게 부르도록 만들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한시를 접하면서 그 뜻을 풀이하고 해석 하는 데는 한글자의 뜻이 너무 많다.
보통 한 글자에 2개에서 많으면 7개 이상의 뜻이 있어 어느 뜻을 대입하여야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근접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한다.
그러나 어부사시사는 그러한 시조가 아니다.
“시아조” 즉 배움이 적은 어부들이 주체이며 조(曺)로 학문께나 하는 사람들과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구차하게 해석이나 풀이가 필요 없는 노래 가사로 만들어 쉽게 따라 부르면서 의미만 세기면
되도록 하였다.
의미를 세기기 위해서는 정확한 풀이가 선행 되어야 한다.
어부사시사 40수 중 어부생활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것이 30수이다. 나머지는
보길도의 자연을 읊은 시조가 4수, 충절과 연군의 시가 4수, 화자 자신을 비유한 시조가 2수이다.
이중 지금까지 어부사시사를 풀어 해석하는 학자들 간에 한 번도 거론되지 못하였던 부분을 찾아
새롭게 해석하였다.
춘사7장 : 산행을 한 날이다. 낚시를 접어두고 홀로 등산을 하였다.
芳방草초를 바라 보며 蘭난芷지도 뜨더보쟈
배셰여라 배셰여라
一일葉엽 扁편舟주에 시른 거시 므스것고
갈 제는 내뿐이오 올 제는 달이로다
춘사 8장 : ‘낙홍’은 떨어진 동백꽃을 표현한 것이다.
개울물에 떠내려 오는 동백 꽃잎을 보면서 잠시 한가한 시간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다.
醉취하야 누얻다가 여흘 아래 내리려다
배매여라 배매여라
落락紅홍이 흘러오니 桃도源원 이 갓갑도다
人인世세紅홍塵딘 이 언메나 가렷나니
춘사9장 : 밤낚시는 밤 장어낚시이다.
장어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밤에 낚아야 한다. 달이 있어도 물지 않는다.
따라서 달이 지기만을 기다린다. 이것은 장어낚시다.
낙시줄 거더노코 篷봉窓창 이 달을 보쟈
닫 디여라 닫 디여라
하마 밤들거냐 子規규 소리 맑게 난다
나믄 興흥 이 無무窮궁 하니 갈 길흘 니젓딷다
춘사10장 : 새벽 낚시를 출발하는 장면이다.
문학 전문 학자들의 해석에는 밤늦게 귀가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새벽낚시를 나서는 장면이다.
來日일이 또 업스랴 봄밤이 몃덛새리
배 부쳐라 배 부쳐라
낫대로 막대삼고 柴싀扉비를 차지보쟈
漁어父부 生생涯애는 이렁구리 디낼로다
하사5장 : 중장에 ‘리예 다 다닫거든 어인쟁도허물마라’의 ‘리’는 ‘리’의 오각이다.
자리는 낚시터를 지칭하는 것으로 ‘자리 잘못 잡으면 그날 낚시 망친다’라는 말이 있다.
보길도에는 그 시절 다리는 없었다. 해옹은 낚시터에서의 자리다툼을 허물 말라고 하면서 노옹을
빙자하여 자리를 양보 할 수 없는가 하고 어부들에게 의견을 타진하는 것이다.
萬만柳류綠록陰음 어릔 고대 一일便편苔磯긔奇긔特특하다
이어라 이어라
다리예 다 다거든 漁어人인爭쟁渡도 허믈마라
至
鶴학髮발老로翁옹 만나거든 雷뢰澤讓양居거效효側측하쟈
萬柳綠陰 - 버드나무 우거진 숲
一便苔磯 - 바위에 붙어있는 이끼
리예 - 리의 오각이다
漁人爭渡 - 고기가 잘 무는 곳의 자리다툼 (어부들의 다툼)
鶴髮老翁 - 학같이 흰머리의 노인
雷澤讓居 - 순임금이 미천할 때 뢰택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뢰택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하였다 함
效側 - 본받야 한다./ 본받자
하사8장 : 초장, “몰래 우희 그믈 널고 둠 미틔 누어 쉬쟈” 모래위에 그물 널고 둠배늘밑에 누어 쉬자.
몰래 우희 그믈 널고 둠 미틔 누어 쉬쟈
배 매여라 배 매여라
모괴를 믭다 하랴 蒼창蠅승과 엇더하니
다만 한 근심은 桑상大대夫부 드르려다
둠은 두엄의 준말이다.
하사9장 : 태풍이 휩쓸고 간 안타까운 풍경을 시조에 담았다. 종장에 “어엳브다” 가엽다, 짠 하다의
표현이다.
밤 사이 風풍浪낭을 미리 어이 짐쟉하리
닫디여라 닫디여라
野야渡도橫횡舟쥬 뉘라셔 닐럿는고
澗간邊변幽유草초도 眞진實실로 어엳브다
野渡橫舟 - 나루터에 배가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것. 야도횡주 - 野渡無人舟自橫
澗邊幽草 - 물가에 자라난 풀. 간변유초 -獨潾幽澗邊生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 하면서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어엿비여겨” 라고 하였다.
추사4장 : ‘그러기 떳는 박긔 못보던 뫼 뵈는고야’에서 못 보던 뫼는 ‘한라산’이다.
청명한 날이면 완도에서 가끔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보통 때 보이지 않던 섬들이
멀리 드러나 보일 때가 바로 이날이다.
그러기 떳는 박긔 못 보던 뫼 뵈이고야
이어라 이어라
낙시질도 하려니와 取취한 거시 이 興흥이라
夕셕陽양이 바애니 千천山산이 金금繡슈 -로다
추사6장 : ‘녑바람 고이 부니 다론 돋긔 도라와다’의 다론 돋긔는 달아놓은 돛 개고, 또는 달아
놓았던 돛을 내리고 돌아왔다는 표현이다.
녑바람이 고이 부니 다론 돋긔 도라와다
돋 디여라 돋 디여라
瞑명色은 나아오대 淸쳥興흥은 머러 읻다
紅홍樹슈 淸쳥江강이 슬믜디도 아니한다
녑람 - 늦바람 (북서풍-늦 하누) 고이 - 조금많이
돋긔 -돛을 걷고 / 돛을 내리고 瞑 色 - 어두은빛/저녁노울
紅樹 淸江 -붉게 물든 단풍과 맑은 강
슬믜디 - 싫지도 밉지도/싫증나지도
녑바람 - 옆에서부는 바람, 보길도에서 옆바람이라면 서풍(늦바람)이다
다론 돋긔 - 그대로풀이하면 “달아놓은 돛 접고(내리고/개고)”
동사4장 보길도의 풍광을 극찬한 시조이다.
간밤의 눈갠 後후에 景경物물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는 萬만頃경琉유璃리 뒤희는 千천疊텹玉옥山산
仙션界계ㄴ가 佛불界계ㄴ가 人인間간이 아니로다
동사5장 : ‘그믈 낙시 니저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에서 암시하는 단어가 있다 이는 “그믈 낚시 니저
두고 파도가 뱃전을 두드린다.” 이다. 파도를 의식적으로 빼고 글을 만들었다.
그믈 낙시 니저 두고 젼을 두드린다
이어라 이어라
압개 건너고쟈 멷 번이나 혜여본고
無무端단 된바람이 행혀 아니 부러올까
어부사시사를 풀었던 학자들은 화자가 “흥에 겨워 뱃전을 두드린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돌풍을 만나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돛을 내리고 급하게 포구로 들어오는 과정을 표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흥에 겨워 뱃전을 두드릴 수 있었겠는가?
화자는 시조의 형식을 맞추고자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파도를 빼고 시조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바다의
정서를 모르는 사람들은 주어가 빠져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점은 낚시를 하여본 사람
이라면 앞뒤 문장의 배열로 보아 파도가 빠져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동사 8장 고산의 외로움, 스스로를 돌아봄.
믉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싁싁한고
배 매여라 배 매여라
머흔 구룸 恨한티 마라 世셰上샹을 가리온다
波파浪랑聲셩을 厭염티 마라 塵딘暄훤을 막는또다
동사 10장 한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이와 져므러간다 宴연息식이 맏당토다
배 븟텨라 배 븟텨라
가는 눈 쁘린 길 블근 곳 흣터딘 대 흥치며 거러가셔
雪셜月월이 西셔峰봉의 넘도록 松숑窓창을 비겨 잇쟈
화자의 저물어가는 인생, 그리고 어부사시사의 마지막은 겨울 달 서산에 지도록 창가
소나무를 벗 삼는다.
마지막으로 어부사시사는 어촌의 현실이 그대로 녹아 있는 체험 현실 문학임을 이해 해 주기를
바랍니다.
향토사 연구가. 사) 장보고연구회 회장. 저서 : 어부사시사 외 다수
2. 윤선도와 어부사시사
사) 섬문화 연구소장 박상건
고산 “윤선도”와 어부사시사
국문학의 금자탑 어부사시사.
윤선도는 65세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창작하였다. 어부사시사는 어부의 사계절을 40장에 담아
놓았으며 주로 낚시를 주제로 하였다. 40장 속에는 보길도에서의 낚시가 30장, 자신을 풍자한 시조가
2장, 보길도 풍광을 4장에 담았고 임금을 그리는 시조가 4장이다.
화자가 낚시를 시작한 시기는 고산 60세, 보길도에 두 번째 입도하여 5년간 생활하면서 막내아들
미를 잊기 위해 시작한 것이 낚시에 몰입한 동기가 되었다.
낚시를 하면서 보길도의 자연을 정확히 알게 되고 문학으로 남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인조가 승하하고 고산의 제자였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해가 1649년 고산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65세(1651년)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를 발표한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이 복합되어 어부사시사 전체가 어부생활을 흥으로 역어가는 아주 긍정적인
가사로 되어 있다.
보길도에서의 생활은 주로 낚시를 들 수 있으며 어부사시사의 꾸밈으로 보아 고산은 “낚시 광” 이였다.
고산은
사대부(士大夫), 국부(國富)를 거부하다.
어부사시사가 만들어진 보길도에서 윤선도는 스스로 호를 해옹 이라하였다.
취미생활의 정원 가꾸기에 세연정을 축조하고 문학을 배우고 즐기기 위해 찾아온 후학을 우대하여 시
문학을 일깨워주었다. 반면 화자의 건강관리를 위해 등산 및 낚시에 흠뻑 빠져 있게 된다. “해옹”
이란 호를 사용하였던 것도 보길도의 낚시가 만들어준 명칭이며 어부 윤선도를 대신하는 대명사이다.
윤선도는 조선사대부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보길도를 택하였으며, 사대부의 미련에서 멀어지고자
보길도의 생활을 고집한다.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동사 8에 있다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머흔 구룸 한 치 마라 세상을 가리 운다
파랑성을 염치마라 진훤을 막는 도다
이처럼 스스로의 선택에 홀로 씩씩하며, 먹구름 세상 가리고 파도소리 속세의 시끄러움 막아주어
사대부와 국부를 거부한 윤선도이다.
당시 보길도에는 지금처럼 사람이 많이 거주하지 않고 10여 가구에 불과했다.
화자가 사대부의 위상에 집착 했다면 어찌 10여 호가 살고 있는 보길도를 택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81세 보길도에 제 입도하여 자기가 거처 하던 낙서제가 헐어 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고
무민당 동쪽 냇가에 작은 초가집을 지어 거처를 옮겨 곡수(曲水) 라 명명한다. 그리고 남긴 “기실(記實)”
이라는 시에 “삼간초가에 두 끼 보리밥으로 만족하다”는 글에서 어찌 국부 윤선도의 생활이라 할 수
있겠는가?,
윤선도는 이글을 남기면서 부자 윤선도라는 선입견을 갖지 말라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지 모른다.
제목을 “기실” 이라 하여 사실을 기록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記實(기실-1668년)
黃原浦裡芙蓉洞(황원포리부용동)
황원포 안쪽은부용동인데
矮屋三間盖我頭(왜옥삼간개아두)
오두막집 삼간이 내 머리를 덮고 있네.
麥飯兩時瓊液酒(맥반양시경액주)
보리밥 두 끼니와 옥으로 빚은 듯한 술 있으니.
終身此外更何求(종신차외갱하구)
종신토록 이것 외에 다시 무엇 구하리.
“말은 백년가고 글은 만년 간다.” 는 말이 있다.
화자는 이처럼 간절한 글로서 지금의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시조의 짧은 글에는 작가의 이상과 현장의 배경, 사물의 변화, 그 시대의 역사, 추구하고자 하는 이념
등이 어우러진 수필이다. 시조는 소설 또는 일기가 압축되어 있는 총체적 문학이다, 따라서 어부사시
사는 길게 역어 풀이하면 수필이 될 수 있고 일기가 될 수 있다.
압축을 푸는 데에는 풀이하는 사람이 원작자가 되어 현장의 배경과 사물의 변화, 그 시대의 역사와
작자가 추구하는 이념을 정확히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시조를 풀 수 있다.
어부사시사의 대중을 이루는 시상은 낚시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낚시를 중심으로 한 주위 즉 보길도의 풍광과 낚시에 필요한 도구, 일기의 변화, 배를 부리는 지혜
등의 낚시라는 행위에 수반한 모든 것을 시조에 담으면서 어부들의 일과에 의한 삶을 담아 놓았다.
문장의 달인, 윤선도
윤선도가 사물을 보는 심미안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다, 표현 또한 귀신같다.
태풍에 휩쓸린 잡초를 보면서 “어여쁘다” 라고 표현하는 화자의 눈에 보이는 사물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자연이라는 주위환경을 쓸어안아 태풍의 위력 앞에 헝클어진 배와 만신창이 되어있는 잡초에 절망과
애절함을 느낀다.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이며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원칙을 강조 한다. 망가진 잡초를 보면서 “여여쁘다”
즉 “애처롭다” 완도말로 “짠하다” 의 표현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화자는 자연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데는 천제적인 소질과 표현의 귀제이다.
仙션界계 ㄴ가 佛불界계ㄴ가 人인間간이 아니로다
신선세계와 부처님 세계를 인간세상과 결부시켜 표현하는 화자의 글 솜씨는 화자 특유의 연출기법이다.
화자가 사물의 변화나 움직임을 살펴 관찰하는 깊은 안목에는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유배와 은거생활
에서 터득한 자연철학이다.
자연과 생활하면서 “자연이 나의 벗이다” 가 아니라 “내가 자연의 벗이다.” 라는 철학으로 스스로
자연이 되어 거기에서 시상을 발견하고 그 시상이 마음에서 우러나 어부사시사의 전편을 긍정과
흥으로 일관하고 있다.
水슈國국의 히 드니 고기마다 져 읻다
가을바다의 풍요로움을 고기가 살 쪄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萬만頃경澄딩波파의 슬지 容용與여쟈
넓게 펼쳐진 바다 풍경 느슨하게 실컷 즐기며
人인間간을 도랴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
인간사 돌아보니 멀어서 더욱 좋다
가을의 풍요로움과 맑고 넓은 바다를 벗 삼아 쪽배타고 자연을 마음껏 즐기는 화자의 행위 묘사,
인간세계와의 단절이 주는 평온함에 독자들의 심중을 안정감으로 유도한다.
“수국에 가을드니” 의 표현은 “바다에 가을드니” 라고 하여도 되겠지만 “수국”으로 표현 하여 넓은
의미를 강조하고 “고기마다 살쪄있다” 라고 하여 “천고마비”를 바다에 적용한다. 또한 “슬지”를
넣어 평화롭고 느슨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해옹은 많은 부분에서 화자 고유의 표현력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어부(漁父) 윤선도!
고산은 “낚시 광” 이었다, 아니다 어부 윤선도라는 표현이 더 타당 할 것 같다.
생업을 위한 어부인가 아니면 취미생활의 어부인가에 따라 문학에서 어부를 분류하는 방식이 있다.
생업의 어부를 漁夫 로 표기하고, 취미생활의 어부를 漁父 라 표기하는 것이 관례이다.
해옹의 낚시생활은 어부(漁父)로 통용되고 있다.
고산에 관한 일부서적이나 논문에는 가어옹(假漁翁)으로 표기하는 경향도 있다. 이는 가짜로 고기
잡는 늙은이라는 것이다.
고산이 낚시를 하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 어부사시사를 창작 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화자는
분명히 낚시의 전문가이다.
어부사시사에는 보길도의 자연과 바다의 특수성, 화자의 심중, 사계절기후의 변화, 하루의 일기(기상)
등에서 화자가 어떠한 상황에서 무었을 하면서,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
어부사시사를 연구하시는 학자분들이 낚시의 전문성은 고사하고 수시로 변하는 바다의 자연현상,
보길도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부사시사가 추구하는 본질적 이상을 저버리고
문장의 구성이나 정치적 입지의 표현에만 맞추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순수하게 어부사시사를 이해하려면 낚시를 즐기는 노 어옹 즉 화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각도에서 어부사시사를 풀어야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다.
화자는 이웃의 어부들과 똑 같은 조건에서 배낚시와 그물질까지 하면서 생업의 어부들과 하나도
다름없는 어부생활을 하였다.
어부사시사에 등장하는 여러 정황을 보아 물때를 맞추어 출어하는 장면과 동풍이 불어 서편으로
피신하는 경우, 돌풍이 일어 귀가를 망설이는 장면들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배낚시의 전면을
하나도 꾸밈없이 사실 그대로 시조에 담았다, 바로 이것이 어부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진면목이다.
만약 강호(江湖)의 낚시였다면 이러한 멋진 어부사시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충의(忠義) 윤선도
충의(忠義)
어부사시사 시조를 만들어 가는 사상적 측면을 본다면 “굴원”의 충신과 불굴의 의지, “도연명”의
상상에 농촌풍경 무능도원에서 두 선인들의 사상과 자연 사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인다.
굴원의 충과 불굴의 의지를 화자와 견주었으며, 도연명의 상상에 농촌에서는 보길도 천연의 자연이
잘 녹아 있다.
굴원의 “어부사”와 도연명의 “도화원시”에서 어부사시사 창작의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굴원의 “어부사” 중에서 탁영가를 소개합니다.
굴원의 탁영가
滄浪之水淸兮(창낭지수청혜)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며
滄浪之水濁兮(창낭지수탁혜)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창량의 물이 탁하면 내 발을 씻으면 될 것을
시류에 적당하게 타협하면 될 것을 이것을 못한 굴원은 스스로 멱라수에 돌을 품고 자결한다. 순수한
충정을 고집스럽게 강조 하는 고산은 일생을 유배 또는 자연과의 생활을 연속으로 파란만장한 역경의
계속 된다.
굴원의 타협할 수 없는 충신의 선비정신은 2,200년이 지난 조선조에는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군”
“신”간에 “충” 에 대한 개념을 강조하던 시기다. “효” 보다 “충”을 앞세우는 고산이었다.
화자의 개인적 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평소 제일 좋아했던 학문으로 “소학”을 치고 있다. 소학의
기본 바탕이 충효로 이어져 백성이 바로 서는 학문이라 하면서 자손 또는 가까운 이웃들에게 항시
권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忠이 不忠이 되는 충신으로서의 일면을 보자면, 윤선도 6세에 임진란을 겪으면서 위태로운
나라의 존망을 몸으로 실감하고 자란다. 윤선도가 나이 들어 나라 일에 직접 참여하면서 민족주의적
충심의 발현은 나이 50에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임금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향족을 모집하여 강화도까지 출병하는 의로운 충정이다.
이를 진심으로 받아줄 수 없었던, 조선 조정의 서인들에 의해 결국 유배의 길을 떠나야 하는 조선조
역사상 “충”이 “불충”이 되는 특별한 예이다,
어느 누가 그런 상황에 풍랑을 무릅쓰고 죽음을 각오한 충심을 발휘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역설적으로
고산이 해남에 그대로 있었다면 유배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아닌가?
고산의 충의(忠義) 정신은 어부사시사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인의(仁義)
소학에 기초한 고산의 사람됨을 한편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효종 즉위 3년 예조참의에 특배된 고산은 그해 11월에 원평부원군, 원두표를 외방으로 보내라는 소를
올려 조정에 매우 혼란해진다,
그로 인하여 직을 사임하고 부용동으로 내려와 낚시로 소일하고 있을 때이다.
원두표가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고산은 약제를 조제하여 원두표에게 보내
주었다. 그 약으로 병이 나았다.
원두표는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이 있다. “내 죽더라도 앞으로 고산 가문과는 절대 원수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산은 “공과 사” 사리의 분별이 뚜렷한 선비로서의 “도” 가 정립되어 있는 학자이다.
큰아들 인미에게 보낸 편지에 근검절약과 겸손, 노비관리에서 어진사람으로서의 인자함을 엿볼 수
있으며, 의술과 풍수지리 정원 설계 등 조선조 선비로서 남들이 갖추지 못한 다방면의 덕목을 두루
겸비한 훌륭한 선비 학자이다.
박상건 시인은 완도읍 대구미 출신으로 91년 <문학과 지역>으로 등단했고, 시집 ‘포구의 아침’ 산문집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여행기 ‘대한민국 걷기사전’, ‘바다 섬을 품다’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 여행’ ‘등대이야기’ ‘등대로 가는 길’ 등 다수가 있다.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한국기자협회 자정위원장, 한국언론학회 편집위원장, 국무총리실 전문위원, 국정홍보처 사무관,
농림부 공보자문관을 거쳐 현재 (사)섬문화연구소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해양수산부 자문위원, 한국잡지학회 회장,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이다.
책 보낼 주소: 04168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68 아크로타워 707호 박상건 섬문화연구소장
3.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그는 누구인가?
광양여자고등학교장 윤영훈
고산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자.
1587년(선조20)에 태어나서 1671(현종12)까지 5대 임금을 거치며 85세까지 장수하였던 선비학자 이다.
1587년 한성부 연화방(종로구 연지동) 윤유심 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8살에 작은 아버지 윤유기의
양자로들어가 종가의 대종을 이은다, 1592년 고산 6살 때 임진란이 일어나고 2차 정유재란이 마무리
되기까지 7년의 혼란기에도 고산은 꾸준하게 산사에 머무르면서 독학으로 심신의 수양과 학업에만 열중한다.
조선조 학자들은 당대에 유명한 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업 하였다. 그러나 고산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터득한 사람이다.
고산은 어려서부터 조선조 정치에 관하여 많은 부정적 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고산이 세 살
때 기축옥사라는 조선조 최악의 옥사사건을 겪으면서 고모할머니 아들 이발이 처형을 당하고, 80세
고모할머니와 다섯 살 손자까지 온 가족이 참살 당했다는 것을 듣고 자란 고산은 백성들의 삶과 나라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26살에 진사시에 급제한다. 이 때 부터는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여야 할 나이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한 고산은 과거시험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조정의 실세들과 맞서게 된다.
결과는 유배이다. 이 때 시작된 유배는 평생을 산수와 접하여 살아가는 외로운 삶이 되었다.
유배생활에서 버릇이 되어버린 자연과의 생활은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을 찾게 되면서 바다와 심산의
생활이 계속된다. 바다와 심산이 바탕이 된 고산의 문학은 강호가도인(江湖歌道人) 으로서의 조선
시조문학의 큰 별이 되었다.
고산의 문학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유배와 강호의 생활을 간추려 정리 해 보았다.
고산 윤선도가 살아온 길.
유년기
고산의 유년기는 임진전쟁 기간이었다.
1587년 6월 22일 한양, 연화방(현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 어머니 손홍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어려서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특출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다. 6세, 학업에 입문하여 총명함을 인정받으면서 남들에 뒤지지 않으려고 언어와 행동을
가려하는 어른스러움을 보인다.
그해(1592) 4월에 임진전쟁이 발발한다. 국토가 초토화 되고 선조임금이 의주로 몽진하였다가
다음해 4월 임금이 다시 서울로 환도하면서 가족이 모두 서울에 모인다.
8세(1594) 관찰사 윤유기(종가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친부모의 슬하를 떠나 있으면서
가족의 그리움을 털어버리려고 더욱 학업에만 열중 한다,
학문을 많이 하고 출세한 사람들은 어려서 특별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고산은
특이하게도 특별한 스승이 없이 산사에서 임진전쟁 7년간을 혼자서 공부하였다.
산사에서 공부할 때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7년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산사에서는
승전을 축하하는 수륙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시끄럽고 혼란한 법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 시간에도 고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독방에 홀로 앉아 열심히 학업에만 열중하였다. 법회에
참가했던 모든 이들이 고산의 학업모습을 보고 칭찬이 자자했다 한다.
13세(1599) 아버지 윤유기가 안변(강원도 지금은 북한 땅) 도호부로 취임하게 되어 아버지를 따라
안변을 가게 된다.
임단도중(臨湍道中)
모색천림수(募色千林樹) 저녁노을 나무숲에 드리우고
추광일장풍(秋光一嶂楓) 가을빛 온산을 단풍으로 물 드린다.
강연황원미(江煙潢遠抹) 강가에 안개가 멀리 자욱하고
석우하몽몽(夕雨下濛濛) 저녁에는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도다.
14세 아버지가 안변도호부에 취임할 때 동행하게 되어 처음으로 지은 시 이다.
고산은 14세부터 시작(詩作)을 좋아하여 보고 느낀 것은 모두 시로 남기고 있다.
청년기
17세에 결혼하여 20세에 승보시에 장원하고 처음으로 소학을 접하면서 평생의 필독서로 삼는다.
고산은 25세 해남에 처음 내려온다.
남귀기행(南歸記行) 이라는 장문의 일기이다, 11일간의 남행 일기는 당시의 지역별 시대상과 풍습을
알 수 있는 7언고시 122구나 되는 장문이다.
정철의 관동별곡과 맥을 같이 하는 작품이다.
장년기 유배의 시작
첫 번째 유배
(1616. 12. 23-경원 1618 겨울-기장이배 1623. 4 - 해배 7년 4개월)
진사 윤선도 “삼가 아룁니다!”
고산 나이 30세에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집권당의 실세였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당시 예조판서 이이첨이 과거시험을 부정으로 치르고 있다는 폭탄선언이었다.
이 탄핵 상소는 1616년(광해8년) 12월 21일 접수되어 섣달그믐 대목을 전, 후하여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조정의 관료들은 대부분이 이이첨의 전횡에 의해 버슬 길에 올라 조정에서 버슬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광해임금이 고산의 손을 들어주면 자신들의 입지가 난처해지고 조정에서
물러나야할 위기감에 대북파 인들이 하나같이 고산을 비난하고 나서게 된다.
그러나 재야의 선비들과 변방의 벼슬아치들은 고산의 상소에 크게 감명 받는다. 그리고 고산을
풀어주라는 상소를 올리나 상소가 받아드려 지지 않는다.
당시 재야의 선비들은 조정에 출사하기위해 십 수 년을 학업에 열중하여 겨우 벼슬을 얻은
관리들이다. 이들은 조정으로의 진출이 일생일대의 희망이다, 그러나 능력의 고하를 막론하고
이이첨의 무리가 아니면 과거시험의 합격은 물론 조정으로의 진출이 거의 가망이 없던 때이다.
이것을 보아온 고산이 죽기를 각오한 상소가 이이첨 탄핵이다.
사건의 발단은 선조 임금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축옥사(1589년선조22-정여립 모반사건) 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축옥사는 고산이 유년기에 기축옥사에 관한 이야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으면서 학문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 학문에 의한 정치를 갈망하면서 자란다.
기축옥사.
1589년 선조 22년 정여립이 전주에서 모반을 주도하고 있다는 탄원이 올라가면서 서인들이 주도하여
동인세력의 씨를 말린 사건이다,
정여립은 호남에서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사람이다. 그때 호남에는 변방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누려 왜구들이 자주 침범하였다.
정여립는 전주지역에서 스스로 의병을 모아 왜구를 섬멸한다.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서인들이 보았을 때 왜구를 섬멸할 정도의 군사력이라면 조정에 위해가 될 수 있다고 모략한다.
정여립을 제거하기위해 모반을 주도한다는 탄원을 하여 정여립을 제거하면서 동인들도 한꺼번에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 과정에 호남의 선비들 1천여 명이 죽임을 당하는 조선조 최대의 살 상극이 벌어진다. 그 때
희생당한 호남의 선비가 무려 1천여 명 그 대표 인물로 정개청, 이발, 백유양, 최영경등을 들 수 있다.
1천여 명의 처형은 조선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중종 14년 기묘사화, 명종원년 을사사화, 이 사화에서도
300백 명이 넘는 처형은 없었다. 그러나 기축옥사 정여립 사건은 1천여 명의 유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의 3년 전 사건으로 역사학자들은 기축옥사가 임진왜란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민심은 천심이다”
이발, 정개청, 백유랑, 최영경은 억울하게 죽은 사림의 대표 인물이다. 그들은 동인도 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축옥사에 동인과 함께 죽었고, 그의 제자들 중 훗날 남인에 속하는 자가 많아 남인이 되고 만다.
이발은 고산의 고모할머니 아들이다. 이발의 가족이 몰살당하면서 노모 또한 죽인을 당한다. 이발의
노모는 80세였다. 손자가 5살이다. 모두 죽인다. 고산 가에서는 원한의 사건으로 남게 된다.
당시 서인을 제외한 모든 선비들은 정철을 두고 “음험한 함정을 파서 공법을 빙자하여 정적을 소탕하고
사적인 원수를 갚는 자” 라고 하고 있으며 호남의 글 깨나 했다는 선비라면 모조리 죽이는 대 살상을
자행하였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를 듣고 자란 고산은 서인들의 횡포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상소를 올리는 사상적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송강(松江) 정철(鄭哲1636-1593)은 조선국문학사에 가사의 대가라면 윤 고산은 시조의 대가로 쌍벽을
이룬 사람이다, 그러나 정치 생활에서는 많은 사람을 죽인 원한과 저주의 대상이다. 윤 고산과는
정치적 이념에서 서로 상반된 사상이다. 그러나 다행히 활동했던 시대가 약간 달라 서로의 충돌은 없었다.
기축옥사의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위가 백성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의 관심거리가 되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모든 선비들의 한결같은 상소가
이어지면서 정개청이 사망한 후 26년 뒤 광해 8년 신원이 복원되어 전남 함평군 엄다면 운암산에 서원을
지어 후학 강론의 장이 만들어 진다.
여기서부터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쟁의 중심에는 자산서원(紫山書院) 이 있게 된다.
광해임금에 의해 새워진 서원이 지어진지 52년 되던 해 1675(효종 8년) 송시열 개열의 송준길이
훼철(철거)을 주장하는 소를 올림에 고산이 적극적으로 반대 한다. 이때가 송시열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이다.
고산은 송시열에 의해 관직이 삭탈되고 삼수 유배가 결정된다, 그 후 숙종이 친히 자산서원(紫山書院)
아라 액호를 내리고 다시 중건된다.
한번 당쟁에 휘말린 자산서원은 250년간 남, 서인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헐리고 새로 지어지고를
무려 7차레 반복하면서 1988년 노태우 정권시절 그 터(함평군 엄다면)에 다시 자리 잡고 신축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공이 되지 못하고 있어 우리나라 당쟁의 표본이 되고 있다.
역사와 문학은 별개로 취급되어 왔다. 정철 가사문학은 계산풍류(溪山風流)의 큰 획을 이르고 있다.
고산은 정적의 피해자로서 평생을 유배 은거하면서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조문학을 완성하였다.
고산의 양부 윤유기는 이이첨과 같은 계열의 대북인 이였다. 그러나 고산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곧은 성품 때문에 북인들의 횡포에 대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북인으로 분류되다가 남인이 되고 말았다.
고산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당파의 분쟁이 조정에 편 가르기를 하고 백성들의 삶에는 오히려
피해를 주고 있다고 판단한 사람이다. 효종이 임금이 되었을 때는 “시무팔조”라는 상소를 하여
붕당을 깰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고산은 당파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고 있다.
고산 30세 벼슬도 없는 진사 입장에서 광해임금에 올린 탄핵상소는 결국 고산이 유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고산의 경원 유배는 변방의 관료들과 사림의 선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그 시대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고산을 지지하는 많은 선비들이 유배형을 철회하라는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해 12월 23일
함경도 경원에 안치된다.
북방으로 압송되는 과정에 함경도 흥원에 이르렀을 때 기생 조생(趙生)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이르되 “제가 벌써부터 영감의 행차가 여기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사례함에 다음의
시를 지어준다.
戱贈路傍人 (희증로방인)
吾事固非詩 (오사고비시) 내 하는 일 본디 제 때가 아니었는데
汝知吾不知 (여지오불지) 그대는 알았지만 나는 몰랐네
讀書不及汝 (독서불급여) 글을 읽었지만 그대만 못하니
可謂天生癡 (가위천생치) 나는 가위 천치라 하겠네.
이 때 고산은 하루아침에 조선의 모든 선비들에 폭발적 인기를 받으며 우상이 되어 있었다.
사림의 선비들과 겨우 출사 하였으나, 이이첨에 의해 조정으로의 진출길이 막혀 변방으로 전전하는
관리들은 이번 고산의 상소가 자기들을 대변한 것이다. 또한 자신들은 보복이 무서워 고발하지 못
하였던, 그 엄청난 사실을 고발 수 있었던 용기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원까지 가는 동안 지나는 곳마다 지역 유림과 선비 그리고 관리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격려 한다.
경원의 유배지에서 부모에 불효하였던 것이 마음이 걸려 부모와 임금을 그리는 많은 시가 창작되었다.
그 중 우리말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견 회 요
내 일 망녕된 줄을 내라 하야 모를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타시로쇠
아매 아므리 닐러도 님이 혜어보쇼서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븟터 아란마는
님군 향(向) 한 뜬도 하늘이 섬기시니
진실(眞實)로 님군을 니즈면 긔 불효(不孝) 인가 녀기롸.
내 망령됨을 내가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임금을 위한 것이며, 아무개가 아무리 일러도 임금님이
헤아려 보소서
부모 그리운 정 처음부터 알았지만 임금님 뜻은 하늘을 섬기는 것,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것이
바로 불효이더라.
忠이 孝보다 앞선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강조 하고 있다.
1617년 1월 9일 (광해 8) 함경도 경원에 안치되었다.
다음해 1618년 겨울 북방 이민족이 자주 침탈하는 지역이고 이민족과 접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하여 조정에서 명령하여 1618년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되어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목 흥원에 당도하여 다시 조생(흥원 기생)을 만난다.
戲贈路傍人(희증로방인)
汝非愛唱少游歌(여비애창소유가)
너희들의 즐거운 노래와 춤이 조금도 즐겁지 아니함은
我豈耽看梨頰媧(아기탐간리협왜)
내가 지금 어찌 기여들의 아름다움을 탐하여 볼 것이냐
只喜身編羅綺裏(지희신편라기리)
다만 아름다운 비단옷을 몸에 두른 것은 예쁘구나
語言敢與世殊科(어언감여세수과)
세상의 법이 그렇다 하나 감히 말하노라
고산은 고성군 기장읍 죽성리에서 여장을 풀고 귀양살이가 계속된다.
1621년 고산 35세 조정에서 납전해배(納錢解配-돈을 받고 사면하는 제도) 가 있다면서 동생이 돈을
준비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는다. 급히 서신을 띄어 “나는 죄인이 아닌데 어찌 돈을 내고 사면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절대 금하도록 하여 동생이 기장까지 찾아와 사정하였으나 고산의
의지를 꺾지 못 하고 돌아갔다.
8년간의 유배는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가 물러나고 1623년 해배되어 4월에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왔다.
1628(인조 6) 3월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왕자(봉림, 임평) 사부에 임명되어 5년간을 역임하면서
공조정랑(정 5품) 호조정랑(정 5품)등의 벼슬을 겸임하였다.
1634년에는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어 다음해 그만 두고 해남으로 내려온다.
1636년(인조 14년)은 고산이 해남에 계실 때이다. 5월 차남 의미가 병환으로 죽고, 이어 의미의처
(고산의 며느리)가 같이 자결하여 자식을 합장하는 불행한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어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다음해 1월에 강화로 출병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恨은 두고두고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고산은 평생에 처, 자식, 손자까지 번번이 먼저 보내면서 그 때마다 괴로움을 한 장의 시에 남기고 있다.
둘째 아들 의미는 5년 전 장남 인미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임금이 특별히 주찬을 내린 은덕을
받았으나 병사함에 안타까움이 더 한다.
이러한 가정의 불행을 겪으면서도 병자호란이 일어 임금이 위태롭게 되었다는 사실에 병환의 몸을
이끌고 해남에서 강화까지 사생결단 뱃길을 재촉한다.
충이 불충되어 떠나는 귀양길
두 번째 유배
(1638년 인조16. 3. 15 영덕유배 – 1639. 2 해배 1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 임금이 위태롭다고 판단한다. 해남에서 향족과 가복 3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강화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한양이 점령되었다.
임금이 남쪽으로 몽진 하였다는 소문만 듣고 배 머리를 돌려남으로 내려온다. 남쪽 어딘가에서
임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이다.
전라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의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원통하다 원통해 !
나라 잃은 원통함에 사람이 보기 싫어진다.
사람이 살지 않은 섬으로 들어가자.
고산은 섬이라면 제주가 가장 멀고 사람이 비교적 많이 살지 않으며 조정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주를 결심한다.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컸던지 해남을 거치면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향족만 내려놓고 제주로 항로를 잡았다.
해남 땅 끝을 지날 때만해도 풍랑이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땅 끝을 뒤로 하고 보길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그곳에 내려 잠시 정박하는 일정이었으나 보길도의 풍광을 보고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하고 자연과 함께하는 자기만의 세상을 꿈꾸며 터를 잡는다.
고산이 평소 그리던 지역이 바로 이곳, 고적한 섬에는 천석이 절승하여 귀신이 깎아 세운 듯하고
인간세상의 이목으로는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곳,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연꽃봉우리
마냥 아늑한 계곡을 따라 격자봉 자미봉 둘러 있어 인간사 보기 드문 절경이다,
그래서 그것을 심히 사랑하여 흥을 위탁하고 시름을 잊어 終老(종로)의 계교로 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산의 생각이었을 뿐, 다음해 바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 되고 만다.
삼전도의 굴욕을 치른 조정에서는 국정의 안정을 찾기도 전에 반대파 서인들은 “고산이 병자호란 때
한양 지척까지 왔다가 임금께 문안도 드리지 않았고 피난 도중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숨기고 있다.”는 탄원을 올려, 고산 52세 두 번째 영덕으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이 유배는
그리 길지 않아 다음해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 수정동으로 들어간다.
忠이 不忠이 되어 떠나는 유배에서 당쟁이 얼마나 무서웠나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유배지로 떠나면서 다음의 공사(供辭)를 남긴다.
공사는 지금의 진술서 이다. 이 진술서에는 그 때의 보길도 생활상이 그대로 살아 있다. 1638년 3월
15일 영덕으로 유배된다.
다음해 1639년 2월에 해배되어 돌아온다.
귀양길이 풀려 돌아오는 길에 서자 미(尾)가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퍼하는
시를 남기는데 부모의 절절한 恨이 담겨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한다.
悼 尾 兒(도 미 아)
尾。余之賤男也。生而極穎悟。余所鍾愛。己卯仲春。余自盈德謫所蒙赦而歸。二十日朝。
行到慶州地要江院。聞尾患痘瘡。以是月初一日化去。痛苦摧裂。無以爲懷。馬上屬韻語。以瀉我哀。
막둥이는 내 천첩 소생 사내 녀석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지극히 영특해 내가 사랑을 쏟았다, 기묘년 2월에 나는 영덕의 유배지로부터
사면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20일 아침 경주 땅 요강원에 이르러 막내가 천연두를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이달 초하루에 죽고 말았다, 가슴이 너무도 아파 아무생각도 하지 못하다가 말위에서 나의
슬픔을 쏟아 놓다.
貴賤分則殊。父子情何異 (귀천분칙수。부자정하이)
귀천으로 따지면 다를지라도. 부자의 정이야 어찌 차이가 있으리
途中聞汝死。未哭心先悸。(도중문여사.미곡심선계)
길가다 너의 죽음 소식 들으니. 눈물 보다 마음이 떨리네.
생략
미는 천출의 작은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이라 했다.
고산이 마흔여섯에 얻은 아들이라면 서울에서 호조정랑과 임평대군의 사부를 겸임하고 있을 때 얻은
자식이다. 고산은 부용동에서 이 부인과 살았다. 본가는 본부인이 살림을 맡아 하고 있었으며 부용동에
들어올 때는 작은 부인과 네 살 아들도 같이 들어왔다. 그 아들이 미이다.
고산 46세에 늦둥이로 얻은 아들이다. 외로운 부용동에서 같이 생활했던 정이 오직 했겠는가. 고산이
가까이 두고 직접 어루만지며 키웠던 자식은 오직 미였다. 아들 미도 마치한 가지다. 옛날에 서자는
부모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때이다. 그러나 보길도는 노비 몇 외에 보는 사람이 없어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다. 미와 놀아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 고산 뿐이었다. 고산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이뿐 짓만 골라 한다. 귀여운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억장이 무너진다.
고산은 영덕유배지에서 미가 보고 싶을 때가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영덕으로 데려올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애가 너무 어려 포기하곤 하였다.
울면서 내려오는 남행길에 한 마리의 개를 만난다.
고산은 남행길에 떠돌이 개 한 마리를 만난다.
졸랑졸랑 따라오며 던져주는 밥을 받아먹으며 길동무를 한다.
그런데 어느 땐가 따라 오던 개가 보이지 않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왔다가 쫓지도 않았는데 가버렸다.
인간사 조화란 희극이구나.
얻어도 기쁜 것 잠시 잃어도 슬픈 것 잠시.
사람이 죽고 사는 것 이와 같은 이치이니.
이에 알겠노라 죽은 자식 팔년 손님.
가슴에 응어리 풀어버리자.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개 한 마리와 견주어 자기성찰을 하는 고산을 보면서 자식에 대한 정을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온 고산은 막내아들 미에 대한 연민 때문에 보길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해남 수정동에 초가집을 짓고 “금쇄동기” “산중신곡 18 장” 을 지으며 산림에서 생활한다.
고산이 해남에 거주할 때 작품산실은 금쇄동이다. 여기에 수정동과 문소동을 오가며 홀로 산수를
즐기며 떠오르는 감상을 시조에 담는다.
60세에 다시 보길도 부용동으로 돌아와서는 낚시를 즐긴다.
63세 인조가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해남으로 돌아왔는데 그해 5월 8일 인조가 승하하고 봉림대군이
조선조 17대 효종임금으로 등극한다.
그해 9월 고산은 큰아들 인미에게 효종에 직접 전달하도록 봉함한 서찰을 보냈다. 이것이 “기축소” 이다.
조정의 서인들은 신하가 직접 오지 않고 아들을 시켜 상소를 올렸다하여 벌할 것을 청하나 효종은
따르지 않았다.
다음해(고산 64세) 낚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고산은 다시 부용동을 찾는다.
고산이 60세부터 즐기기 시작한 낚시는 이제는 거의 생활화 되어 있다. 어부들이 하는 낚시 그대로
사대부 고산은 어부가 되었다.
65세 어부생활을 바탕으로 일 년의 어부생활을 40수의 단가를 연이어 일기 쓰듯 수록한 어부사시사는
우리 국문학의 금자탑이며 세계 해양문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유배
(1660현종 1. 4. 27-삼수 1665. 4-광양이배(5년) 1667. 7. 21 해배 7년 2월(2년 2월)
74세 늙은 몸 삼수로의 행로
삼수로 출발한다.
고산의 세 번째 유배는 74세이다.
그 시절 74세는 늙어도 폭삭 늙은 왕 늙은이였다, 그리고 평생에 병치레로 몸도 허약한 상태다.
정월 삼수의 유배는 거기서 죽으라는 혹독한 형벌이다. 그러나 고산은 의지 하나만으로 굳굳히 버티며
유배의 길을 재촉한다.
첫 번째 유배 길은 31세었다. 이후 43년이 지난 74세 다시 똑같은 길을 늙은 몸을 지탱하며 떠나는
귀양길 도중에는 많은 회한이 서려 있다.
함흥도 경원에 이르러 예순과 승례 라는 관기를 만난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처음 귀양길에서 만난 조생의 여식들이라며 두 낭자가 나타나 첫 번째 유배 길에 남기고간
戱贈路傍人(희증로방인) 를 보이면서 위로한다.
두 낭자의 이야기는, 자기 모친께서 평생을 두고 영감을 잊지 못 하시다 십여 년 전에 임종하면서
이 글을 소중히 간직하라 하여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한다. 영감이 이곳을 들릴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고산 또한 감개가 무량하다. 젊어서의 귀양길에 남긴 글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다시 보여주면서
그 때의 추억을 들추어 주는 어린 낭자들이 고맙고 대견하여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또 글을 남긴다.
復用前 韻 贈洪獻禮勝二娘 (복용전 운 증홍헌예승이낭)과 육변문.
삼수에서 다시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명령이 떨어진다.
4월에 삼수를 출발하여 광양으로 옮기는데, 함경도 수령들이 노비 40여명과 말 20여필을 제공하고
가마꾼을 각 접경지역에 대기시켜두도록 연통하여 수령들이 고산을 대접하기를 봉명사신 모시듯 하였다.
이는 변방의 벼슬에 있는 관리 일수록 고산이 자신들의 대변자이며 곧은 절개에 동조하는 세력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그 수령들은 이것이 조정에 알려 지면서 처벌의 문제가 논의되어 처음은 속전(벌과금)
으로 처리 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이 일이 거론되면서 그에 관련된 수령들은 모두 파직되었다.
고산은 81세(1667년, 현종 8년) 7월21일 해배되어 해남으로 내려와 1개월간 계시다, 9월에 부용동으로
들어와 생활한다, 다음해(1668년) 부용동에 곡수당을 새로 짓고 생활하면서 해남에 연락하여 수원에
있는 집(효종이 하사한 집)을 해남 녹우당으로 옮겨 짓도록 한다. 지금 해남 녹우당 고산 본가 주택이다.
83세 부용동에 계시면서 한시 동하각을 지었다, 이것이 화자의 마지막 작품이다.
同何閣 (동하각)
我豈能違世(아기능위세) 내 어찌 세상을 거슬렀기에
世方與我違(세방여아위) 세상이 나와 어긋났으리
號非中書位(호비중서위) 높은 자리 들먹이지 말고
居似綠野規(거사록야규) 짓푸른 들녘처럼 살아가리라.
화자의 마지막 성찰이다.
세상을 거슬려 내와 어긋났으니 높은 자리 들먹이지 말고 자연처럼 살아가리.
그처럼 열망하였던 화자의 종노는 85세를 일기로 보길도 부용동, 곡수당에서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인생은 허무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젊음의 기상이 30세에 귀양을 시작으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이라, 봉림, 임평의 사부를 거치면서 벼슬에 꿈을 다져본다.
오십이지천명(五十而地天命)이다, 하늘의 뜻이 고산편이 아니었던가? 충이 불충이 되어 영덕에서의
유배생활, 자식을 둘씩이아 일어야 했던 고산의 생애는,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다. 배우고 들었던 것,
문장으로 남기는 어부사시사를 창작하였으니 후세 국문학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다.
칠십이종심(七十而從心)이라, 하지만 산울타리 얼음골 삼수의 생활은 팔십으로 종심을 미룬다.
마지막 종심은 부용동에서 동하각에 실어 후세에 남긴다.
윤선도의 비문은 미수 허목이 지었다.
1671년 사망한 윤선도는 1680년 손자 윤이후의 요청으로 허목이 윤선도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1818년 4세손 윤덕희가 신도비를 세운다.
해옹(海翁) 윤 참의(尹參議) 비(碑)
비문이 새겨지기까지 윤선도의 호는 해옹이다.
<월간문학> 동시. <창조문학> 시 당선. 전남문학상. 한국바다문학상 수상. 전남시인협회 고문
전남문인협회.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시집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시집 <풀벌레 소리 시냇물 소리>. 현 광양여자고등학교 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