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山寺 [2004.03.10.]
1. 금산사는 어디에 있는가? 전북 김제시 母岳山 남쪽 기슭에 있는 大寺刹.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제17교구)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는 김제와 전주의 경계를 형성하는 모악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고찰. 옛부터 여름에는 변산, 가을에는 내장산, 겨울에는 백양산, 봄에는 모악산이라 할만큼 이름높은 곳의 중심사찰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때 창건하여 통일 신라 때의 진표율사에 의해 크게 번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국가의 원찰로 삼았을 뿐 아니라 훗날 자신의 아들에 의해 유배당함으로써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하고 이로 인해 견훤에 대한 많을 일화를 담고 있기도 한다. 지금도 금산사에는 견훤에 대한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데, 가장 먼저 보여지는 것이 견훤성이다. 금산사를 찾아가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돌문을 가장 먼저 지나게 된다. 바로 그 돌문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자신의 복을 빌어주는 사찰로 금산사를 정하고 왕성을 쌓듯이 금산사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데 그때 쌓았던 성의 출입문이다. 비록 작은 부분만 남았지만 성문 옆에 견훤성이라는 알림판이 있어 그 흔적을 느끼게 한다. 그 다음이 다른 곳에서 가장 먼저 지나게 되는 일주문이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금강문이 나오고 보재루의 밑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금산사의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대적광전이 남쪽을 미륵전이 서쪽을 향해 서 있다. 두 건물은 보기에도 대단히 대조적이다. 미륵전은 3층 석탑 형식의 높은 건물인데 반해 대적광전은 단층의 옆으로 긴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두건물의 사이에 방등 계단의 5층 석탑이 위치하고 있어 그나마의 안정감을 지켜주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건물이 바로 미륵전이다. 현재 국보 62호로 지정되어 있는 미륵전은 국내 유일의 3층 목조건물로 이름높다. 안에는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3층이 하나로 뚫려 있어 지붕이 아주 높게 보인다. 2층과 3층에는 빛을 들이는 창문이 달려 있어 내부를 밝게 유지시켜 주도록 배려한 것이 돋보인다. 뿐만아니라 미륵전 안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미륵입상이 모셔져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미륵전 옆으로 있는 대적광전은 1986년에 불이나 이듬해에 다시 지은 건물인데 기존의 대웅전에 약사전과 극락전의 기능을 합해서 만든 종합불전이다. 이외에 금산사에는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방등계단이라는 높은 대가 있다. 양산 통도사에서 볼 수 있는 금강계단과 같은 모습이다. 이곳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수계의식을 수행하는 곳이다. 참고 : 조계종은 현제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이나 한국 불교 26개 종단의 하나이며,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이다.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인 지눌(知訥)의 중천(重闡)을 거쳐, 보우국사(普愚國師) 태고(太古)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공개적으로 이름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창종(創宗)의 정신은 보조국사에 연유하는 선 ․교 일치(禪敎一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排佛政策)의 결과로 명맥만 유지하면서 선 ․교 양종(禪敎兩宗)의 8도도총섭(八道都總攝)제도가 임진왜란 때까지 계승되어오다가, 그 후 한말까지는 남북총섭시대(南北總攝時代)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 양립하였는데, 선종은 조계종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 교종은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이었다. 1911년 일제의 불교 통합정책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고 31본산(本山:本寺)제도가 생기면서 선 ․교 양종의 명칭이 사용되었고, 1913년에는 31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제도가 실시되다가, 1923년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理事)제도가 되었고, 1924년에는 선 ․교 양종을 통합하여 조선불교조계종이 설립되었다. 당시 총본산은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에 있었는데, 산하 31개 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이 승인하였으며, 말사(末寺)인 1,384사의 주지는 도지사의 승인사항이었다. 광복 후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였으나 1954년부터 1962년까지는 비구(比丘) ․대처(帶妻) 승려 간의 분규가 끊이지 않아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1962년 4월 비구 ․비구니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재발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해방이후 태고종과의 경쟁에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힘으로 태고종을 뒤로 밀치고 최고의 종단으로 성장해온 것이다 현제는 중앙 본 교구와 함께 25교구를 운영중이며 이 금산사는 제 17교구 본산으로 나중에 기술할 수많은 말사를 거느리고 잇는 사찰이다 특이할 것은 모든 교단의 스님이 삭발을 하나 진각종만은 삭발 하지 않는 특이한 종단도 있다. 종헌(宗憲)에 의하면 이 종단의 종지(宗旨)는 석가모니의 ꡐ자각각타 각행원만(自覺覺他覺行圓滿)ꡑ의 근본교리를 받들어 수행 ․실천하여 ꡐ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ꡑ의 법을 전함으로써 중생을 제도(濟度)함에 있다. 종단의 주요기구로는 중앙종정기관(中央宗正機關)인 총무원과 최고의결기관인 중앙종회(中央宗會)가 있고, 별도로 포교원(布敎院) 등이 있으며, 지방에 25교구본사(敎區本寺)가 있으며, 이들은 그 밑에 말사를 거느린다. 25교구본사는 총무원 직할의 서울 조계사를 비롯하여 경기 화성군의 용주사(龍珠寺), 양주군의 봉선사(奉先寺), 강원 양양군의 신흥사(神興寺), 평창군의 월정사(月精寺), 충북 보은군의 법주사(法住寺), 충남 공주군의 마곡사(麻谷寺), 예산군의 수덕사(修德寺), 경북 금릉군의 직지사(直指寺), 대구의 동화사(桐華寺), 영천군의 은해사(銀海寺), 의성군의 고운사(孤雲寺), 경주시의 불국사, 경남 합천군의 해인사(海印寺), 하동군의 쌍계사(雙磎寺), 양산군의 통도사(通度寺), 부산의 범어사(梵魚寺), 전북 김제군의 금산사(金山寺), 고창군의 선운사(禪雲寺), 전남 장성군의 백양사(白羊寺), 구례군의 화엄사(華嚴寺), 송광사(松廣寺), 해남군의 대흥사(大興寺), 제주 제주시의 관음사(觀音寺) 등이다. 종단본부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堅志洞) 45 조계사 경내에 있다. 조계종의 사찰은 전국에 3천여 사찰에 달한다. 이 사찰은 25개 교구로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다. 25교구에는 교구를 관할하는 본사가 있다. 서울 조계사는 총무원장이 직할하는 교구본사이며, 경기도의 용주사 봉선사, 강원도의 신흥사 월정사, 충북의 법주사, 충남의 마곡사 수덕사, 경북의 직지사 은해사 고운사 불국사, 대구의 동화사, 경남의 해인사 쌍계사 통도사, 부산의 범어사, 전북의 금산사 선운사, 전남의 백양사 화엄사 선암사 송광사 대흥사, 제주도의 관음사이다. 조계종에는 총무원장이 관할하는 3개 직영사찰로 조계사 선본사(갓바위) 보문사가 있고, 중앙의 예산을 특별히 분담하는 도선사 봉은사 연주암 내장사 보리암 석굴암 낙산사 봉정암 등 8개 특별분담사찰이 있다. 또한 5대 적멸보궁으로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가 있다. 삼보사찰로 불보종찰 통도사, 법보종찰 해인사, 승보종찰 송광사가 있으며, 오대총림으로는 해인사 해인총림 송광사 조계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수덕사 덕숭총림 백양사 고불총림이 있다 2. 왜 금산사라 이름 지었나? 금산사는 모악산(794M)관광의 중심지이자 모악산 산행의 들머리가 되기도 한다. 엄뫼, 큰뫼로 불려져온 모악산은 정상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과 같아서 모악산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모악산의 줄기는 세 개의 행정구역 (전주시, 김제시, 완주군) 을 나누며 배재, 장군재, 밤티재의 부드러운 능선이 있고, 금산사 방면의 내모악과 동쪽의 구이 방향의 외모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세는 기운찬 호남정맥의 힘을 그대로 이어 우뚝 솟구쳐서 서해에 닿을 것처럼 길게 뻗어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사방백리가 넘는 호남평야를 펼쳐놓았고 북쪽으로 천년고도 전주를 품에 안고 있다. 호남평야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금남정맥, 남쪽에는 호남정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남평야 한가운데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양팔을 벌려 사방 몇백리의 너른 들녘을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다.또 여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구이저수지, 금평저수지, 안덕저수지를 채우고,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흘러들어 호남평야를 넉넉하게 해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모악산의 경관은 아름답기에 흔히 호남사경를 말할 때 금산사를 최우선으로 꼽는다. 그러나 금산사란 이름은 산 이름에서 왔다고 보아야한다 즉 미륵산의 미륵사 선운산의 선운사 내장산의 내장산등 백제 지역엔 산 이름의 사찰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왜 모악산의 모악사가 아니고 금산사 이냐? 그 이유는 이산이 김제지역에서는 무척이나 큰산으로 통한다. 거의가 평야지대인 이 모악산을 큰산이라고 불렀는데 큰 산을 한문의로 표기할 때 금산이라고 표기 했다는 설과 이곳에서 옛날에 금이 나와 금광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하여 금산이라는 별칭이 있어 금산사라 이름지었다. 이곳의 유명한 벽골제도 벼고을이란 말을 한자로 적다 보니 벽골이 됐다는 경우와 비슷하다 보면 된다 또한 가야산 해인사. 영축산 통도사 조개산 송광사등 이곳도 모악산 금산사가 됐다 3. 김제시의 역사는 부족국가시대 o 부족국가시대 200년에 벽비이국이었음 삼 한 시 대 o 백제 고이왕 47년에 원마한으로 속함 백 제 시 대 o 백제 온조왕 13년에 마한국을 백제로 병합 o 백제 인덕왕 19년에 벽골군으로 개칭 이 부분은 김제시청의 싸이트에서 발췌했으나 도저히 이해개 가지 않아 다음과 같은 질문을 김제 시청에 하였습니다. o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에 김제군으로 개칭 o 고려 인종 21년에 전주목에서 김제현으로 승격 o 고려 명종 원년에 전주목에서 금구현으로 승격 o 1466년(조선 세조 12년)에 김제현을 김제군으로 개칭 o 1628년(조선 광해군 20년)에 만경현을 김제군으로 병합 o 1759년(조선 영조 35년)에 만경군과 금구군 병합 4. 금산사의 창건 금산사의 모든 사적은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중국문헌인 송고승전 이외《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로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다만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떄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백제법왕원년 (서기 599) *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사찰로 산중암자 규모로 창건됨. 신라 혜공왕 2년 (서기 766) * 진표율사의 중창* 금당을 짓고 미륵 장육상을 봉안함. * 미륵십선계 수계식 및 점찰법회 봉행. * 대중불교 운동 전개 후백제 935년 *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됨 고려 문종33년(1097) * 혜덕왕사 재중창(대사구, 봉천원, 광교원 등 86동 43개 암자 설치). 이 때 금산사의 전성기를 이룸 고려 충숙왕 15년(1328) * 원명 해원의 중창 선조 25년(1592) * 임진왜란 시 처영 뇌묵대사가 일천 승병의 거점지로 활용. 선조 29(1596) * 정유재란시 불탐.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 ․대공전(大恭殿) ․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役事)를 벌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 ․대장전(大藏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 ․금강문(金剛門) ․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高僧)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이외에도 도생승통(道生僧統) ․원명(圓明) ․진묵(震黙) ․소요(逍遙) ․남악(南嶽) 등 대사가 거쳐 갔거나 죽거나 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 ․대적광전(보물 476)이 대적광전은 화재이후 보물에서 제외됨 ․대장전(보물 827)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보제루(普濟樓) 등과, 방등계단(方等戒壇) ․5층석탑(보물 215) ․6각다층석탑(보물 27) ․석련대(石蓮臺:보물 23) ․석종(石鐘:보물 26)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의 석조물이 있다. 인조 13년(1635) * 수문대사에 의하여 대사구 지역 재건. 1725年 * 환성지안에 의하여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여 1,400여명이 금산사에 모임 1863年 ˜ 1907年 * 일제 때 용명선사 가람을 수호하다 광산업자들에 의해 순교 1961년 이후 1961년 송월주 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취임 후 도영, 도법, 평상, 원행 스님 등 도제들과 용봉스님 등 사부대중의 협력을 받아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해탈교, 극락교, 향적당, 적묵당, 보현당, 설법전, 요사채, 나한전, 조사전, 전통찻집, 보제루, 경비실, 목욕소 등을 신축하고 미륵전,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등을 해체 복원하고 방등계단 성역화 불사를 마무리하여 대사구를 완전 복원함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935년 그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감금한 것을 착각한 걸로 여겨진다. 5. 개산자로 여겨진 진표율사와 금산사 진표는 금산사에서 가까운 만경현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숭제법사에게 중이되고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불사의암에서 참회법을 닦아 미륵과 지장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전해 받았다 곧 금산사로 돌아온 진표는 중창불사를 시작했다. 이때의 사정을 鉢淵藪石記에 기록을 보기로 한다 (진표가 교법을 받고 금산사를 중창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대연진에 이르렀을 때 용왕이 나타나 옥가사를 바쳤다. 그는 용왕이 거느린 8만 시위를 받으며 금산사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만에 절이 완성 되었다.) 이처럼 용왕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것도 있지만 용왕을 쫒아내고 절을 세웠다는 전설도 있다 (금산사는 본래 용이 살던 못으로 깊이를 헤아릴수 없었다 신라때 조사가 여러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쫒아내고 그 자리에 대전을 세웠다. 대전 네 귀퉁이에서 간수가 나온다 했다) 이는 위 두 설화가 내포하는 공통점은 통도사나 해인사의 창건 설화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또한 미륵사도 같은 맥락으로 본인의 생각으로는 산중에 절을 지을려니 넓은 평지를 찾아야하고 평지는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이 고이는 곳이 있으니 그런 설화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한 금산사는 설화처럼 며칠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762년부터 시작하여 776년에 끝났다. 진표는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여 주존으로 모셨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 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는 모습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긴 시간동안의 중창 불사는 신라 왕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진표의 출생연대가 좀 부정확 하지만 성덕왕때 태어나고 경덕왕때 활동한 것 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경덕왕때는 불국사 석굴암 뿐만아니라 여러 불사를 일으킨 왕으로 진표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보살계를 받고 7만7천석을 주었으며 계를 받은 왕실의 종친들이 많은 비단과 황금을 시주했으므로 (삼국유사 진표전 참고) 가능한 일이었고 미륵 장륙상을 주존으로 모심으로써 법상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참고 : 신라오교 열반종 보덕화상 (무열왕때) 전주 경복사 계율종 자장율사 (선덕여왕때) 양산 통도사 법성종 원효대사 (문무왕때) 경주 분황사 화엄종 의상대사 (문무왕때) 영주 부석사 법상종 진표율사 (경덕왕때) 김제 금산사 신라 점찰법회의 확립자 참회불교(진표의구도 행적기는 여기서 다 적을 수 없으나 그 전말을 알면 진표가 점찰경과 참회불교에 빠진 이유가 될겄이다.:발표자 주) 집대성자로써 법상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고 율종에 속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에 진표와 점찰경에 대해서는 따로 기술하기로 하고 점찰경과 미륵사상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진표에 끼친영향. 이러한 내용들이 혜덕왕사진은탑 비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등 헤아릴수 없는 이유가 있다 어쨌거나 금산사는 초창기에 법상종에 속하는 사찰임에 분명하나 나중 화엄경의 영향을 받아 사찰의 방향이 틀려진 이유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고려 중기이후 까지 대적광전의 이름이 없으니 아마 훗날의 이야기인성 싶다. 6. 혜덕왕사의 중창 진표이후 고려시대에 금산사는 혜덕왕사를 맞아 대가람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이때가 제일 번창했던 때이기도 하다. 물론 그 전에도 부분적인 수리 보수는 있었겠지만 견훤의 숭봉을 받아 일시 중창 하였으나 뢍실 내분으로 견훤이 유폐당하고 나서 소홀해진 뒤 혜덕왕사(1038-1095)가 해린국사로부터 법상을 배운 뒤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것은 고려 문종 33년 서기 1079년이다 이에 혜덕은 가람을 보수하고 중수하며 거의 지금 남아있는 중요한 석물들은 이때 조성 되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크다. 그러하듯 혜덕은 금산사 뿐만 아니라 주위에 광교원(간경, 법석을 주관하는기관)을 만듬으로 최대의 가람으로 만들었다. 이후 정유재란에 미륵전 대공전 광교원등 모든 사찰이 불타고 산골 암자까지 잿더미가 된 뒤로 선조 34년부터 수문대사등 많은 사람들이(지훈, 덕행,석준, 천장, 응원, 학련, 태원, 운근, 심윤, 경일, 문일, 보환, 인언, 지수, 천주등) 재건에 들어가 35년이란 긴세월이 지난 인조13년 1635년에야 낙성을 보았다 고종때 (1863-1907)용명스님이 미륵전 대장전 대적광전을 차례로 보수 하였고 일제시대에 황성열 스님이 미륵전 대적광전 금강문을 보수하였다. 7. 금산사의 전각과 유물 ◎ 노주 :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 구조물.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ꡐ노반지주(露盤之柱)ꡑ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ꡐ노주ꡑ는 잘못 된 명칭이고, ꡐ광명대(光明臺)ꡑ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3m. 상부에 놓인 보주(寶珠)만 없으면 4각형의 대좌(臺座)처럼 조성되어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물이다. 밑바닥에 하나의 돌로 된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1단의 높은 각형(角形) 굄이 하대석(下臺石)을 받치고 있다. 1매석으로 된 하대는 사방 측면에 두 우주(隅柱)가 있고, 아래위에 가로띠가 양각되었다. 각면 중앙에 탱주를 새기고 좌우에 1구씩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상면에는 복련(覆蓮: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으로 1변에 3꽃잎씩, 4모서리의 합각(合角)에 1꽃잎씩, 모두 16꽃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중석(中石)은 일반형 석탑의 4각형 탑신(塔身)과 같은 형태이며, 각 면의 양 우주는 그 윤곽을 2중으로 나타내었다. 상대석도 1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밑면에는 모두 3단의 굄이 있다. 측면의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도 하대와 같은 수효이나, 하대의 넓고 짧은 연판(蓮瓣)의 형태와는 달리 좁고 길쭉한 형태이다. 상대석의 상면에는 일반 석탑형식에서 볼 때 노반석(露盤石)의 위치에 4각형의 높은 받침 1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상륜(相輪) 부분을 받치고 있다. 둥근 상륜은 밑바닥과 정상부분의 보주(寶珠) 사이를 가늘고 긴 간주(竿柱) 형식으로 조성하였으며, 상부와 하부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간주에는 굵은 한가닥의 띠가 돌려졌으며, 보주는 연꽃 봉오리형이다. ◎ 석등 :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 육각 다층 석탑 :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 당간지주 :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 석련대 :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부도전 : 금산사에서 심원암으로 가는 동쪽 길을 300m 쯤 오르면 왼쪽 산 기슭에 부도전이 있다. 이곳이 고려시대의 봉천원으로서 혜덕왕사의 비도 여기에 있다. 나지막한 돌 담 안에 15기의 비와 부도가 'ㅁ'자형으로 늘어서 있는데, 이들 부도는 고려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금산사를 거쳐 간 고승들의 묘탑이다. 정면 중앙 깊숙한 곳이 최근에 건조된 진표율사의 부도를 비롯하여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동편에는 비(碑) 2기와 부도 4기 등 6점의 석조물이 있고, 서편에는 석신(石身)은 유실되고 비대와 가첨석만 남아 있는 비(碑) 1기와 부도 7기 등 8점이 석조물이 있어 총 15점의 석조물이 독특한 양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부도군의 동쪽으로 명문당(明文堂)이라고 한 최근의 부도가 1기 더 있긴 하다 ◎ 방등계단 :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 오층 석탑 :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 혜덕왕사 진응 탑비 : 이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 금산사의 전각 ◎ 금강문 :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을 보게 된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금산사와 같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4년에 새로 지어 안에는 인왕상 2체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모셨다. 본래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다. 현재의 금강문을 지나 바로 오른쪽에 「모악산 금산사」 현판이 걸린 건물이 그것이다. 1994년에 가람을 일신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본래의 금강문 왼쪽 앞에다 새롭게 금강문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 세운 금강문에 자리를 내주고 전각이름마저도 사라졌지만, 1556년(명조 11)에 인언(仁彦) 경휘(敬輝)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의 중수 때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 범종각 : 보제루 올라가 가람 중심의 서편에 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때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범종각이 오른 쪽에 위치하는 이유는 불교의 체용설(體用說)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쪽은 체(體) 왼쪽은 용(用)에 해당하는데, 소리는 곧 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종각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소리는 곧 우리들 일심의 작용이요, 부첨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인 것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 원통전 : 미륵전 옆 보제루 우측으로 원통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는 원융통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전, 대비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8. 금산사가 배출한 고승 ● 진표율사 : 진표율사가 출생한 곳은 완산주 벽골군 두내산현 대정리로서 지금의 김제지역이다. 그의 속성은 정씨(井氏)로 아버지 진내말(眞乃末)과 어머니 길보량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향리에서 대대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으며, 진표율사는 날쌔고 민첩했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개원 년간 서기 713˜742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진표는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두덕에서 쉬었다. 그때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보고 그는 그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꿰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해 물 속에 담가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하던 그가 집으로 갈 때는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 개구리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 진표는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 속에서 30여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던 것을 보았고, 그제서야 그는 지난 해의 그 일이 생각났다. 그는 잊어버리고 1년을 지났는데 입을 꿰매인 개구리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곧 그 개구리를 풀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하여 그는 출가의 뜻을 품게 되고 마침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금산사 숭제법사(崇順濟法師)에게 출가하였고 숭제법사로부터 사미계법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1권,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받았다. 부안 선계산 부사의암(不思儀庵)에서 망신참회(亡身懺悔)로써 지장보살의 계를 받고, 부안 영산사에서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 2권과 8․9 간자를 포함하여 189간자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그는 금산사, 법주사를 중창하였으며 발연사를 개창하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또한 경덕왕에게 보살계를 주고 왕으로부터 조(租) 7만 7천석을 받았으며, 왕후(王后)와 외척들에게도 계품을 주고 그들로부터 명주 500단과 황금 50냥을 받아 여러 사찰에 나누어 주고 불사를 일으켰으며, 명주지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니 이들을 위하여 계법을 베풀고 고성해변에 고기들이 쌓이게 하여 백성들을 구하였다고 전해진다. 진표율사는 말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鉢淵寺)에서 함께 도업을 닦음으로써 효도를 다하였다. 그는 발연사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入寂)했다. 제자들은 그 시체(屍體)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짐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 한다. 이와 같이 진표의 명성은 수행과 교화로 일관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출가 동기부터가 개구리의 고통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되어, 각지를 편력하면서 가는 곳마다 설법과 교화에 힘썼다. 특히 스님의 교화에는 소와 물고기로 상정된 어려운 백성들이 주는 한이었다. 어쩌면 잃어버린 나라 백제에 대한 그리움과 통일신라 사회에서 억눌렸던 백제 유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해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혜덕왕사 :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1038˜1095)은 속성이 이씨(李氏)이며, 1038년(정종 4) 7월 3일 개성의 남쪽 불령리에서 중서령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민(民)이고 자는 범위(範圍), 소현은 법명이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해린(海麟)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소현은 출가 후 해린에게서 『금광명경』과 『유식론」 등을 배우면서 법상종을 익혀나갔다. 12세 때 부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61년(문종 15년) 왕륜사에서 열린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서 대덕(大德)의 칭호를 받았다. 금산사의 역사에 있어서 혜덕왕사가 주지로 있던 기간은 가장 큰 불사가 이루어지던 시간이었다. 스님은 진표율사 이후 기울어가던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였던 것이다. 단순한 건물을 증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창건하였다. 그는 광교원에서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하였다. 1096년(숙종 1) 12월 18일 스님은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니, 세랍 59세, 법랍 48세였다. 문하에 도생(導生) 승통 등 1천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숙종이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여 탑비를 세웠다. 탑비는 금산사의 부도전에 있다. ● 도생승통 : 도생승통의 이름은 규(窺)이며, 고려 문종(文宗, 1046˜1083)의 여섯째 아들이다. 같은 시대를 활약했던 대각국도사(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은 바로 스님의 친형이며, 문종의 넷째 왕자(王子)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융성을 거듭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아들이 셋 이상 있는 집에는 한 아들을 출가시킬 정도로 불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의천(義天)이 득도한 것은 문종 19년(1065)이었고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도생(導生)이 득도한 것은 문종 23년(1069)이었다. 아마 어려서 출가했으리라 짐작된다. 문종은 스님의 출가 의사를 확인하고 연덕궁(延德宮)으로 혜덕왕사(慧德王師)를 맞아들여 계를 받고 득도하도록 하였다. 스님은 오랫동안 법주사(法住寺) 주지직을 맡았다. 그러다 숙종 원년(1095) 혜덕왕사가 돌아가시자 금산사의 주지직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스님의 행적이나 만년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스님이 통상 승통(僧統)으로 불리어졌고 금산사를 중창했다고 전해올 따름이다. ● 뇌묵대사 처영 :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은 7년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개국이래 문관(文官)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정은 상대적으로 국방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마침내 일본의 침략에 무방비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수없이 많은 문화유산이 약탈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의식은 곳곳에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출가자인 스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산(西山)대사와 사명(四溟)대사 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조선의 국운을 되돌려 놓은 위대한 분이었다. 일본군이 거침없이 한양까지 밀려오자 선조는 의주로 몸을 피하고, 이때 서산대사는 전국의 승려에게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다. 전라도에서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승병이 집궐하였고 이들은 뇌묵 처영(雷黙處英)의 지휘 아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스님과 권율(權標)장군이 함께 싸운 금산의 배고개전투는 의승군의 대승리였다. 스님은 이후 권율장군과 함께 북진하여 수원 독왕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또한 권율이 행주산성에 주둔하였을 때는 700여 의승병을 이끌고 함께 참여하여 적병 2만 4천 명을 살상하는 최대의 수훈을 세웠다. 스님의 공적을 치하하여 조정에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스님은 이처럼 전란의 와중에서 의연히 일어나 불법의 정도(正道)를 몸소 실천하였지만 아쉽게도 자세한 생몰년이나 행장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어려서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뒤에 서산대사를 찾아가 선지(禪智)를 익혔다는 사실만이 전한다. 한편 1794년(정조 18)에는 국가에서 서산대사, 사명대사 그리고 스님의 진영을 해남 대둔사와 묘향산 수충사에 봉안하여 봄 기울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 원명대사 해원(海圓) :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중창한 분이 원명 해원(圓明海圓, 1262˜1330)이다. 스님은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활동한 유가학승(瑜伽學僧)으로서 묘탑과 비석이 중국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에 전한다. 속성은 조(趙)씨로 완산주 함열군에서 대호군 조혁(趙奕)의 이들로 태어나 12세에 금산사의 석굉(釋肱)법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1294년(충렬왕 20)에 승과고시인 오교대선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후 불주사(佛住寺)의 주지를 맡았다. l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이 스님의 계행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초빙했다. 1311년(충선왕 3) 원나라 무제(武帝)의 원찰로서 숭은복원사가 창건되었다. 원나라 인종은 중국의 여러 고승을 제쳐두고 스님을 초대 주지로 임명하였고, 이후 스님은 원 황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한편 스님의 명성은 되돌아 고려 국내에 자자하게 알려졌고, 이에 충숙왕은 1328년(충숙왕15) 원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스님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충숙왕에게서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碍國一大師)라는 법호를 받고 귀국하여 금산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몸가짐은 위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유식학의 교의에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펼쳤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을 설복시켰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천하고 귀함을 가리지 않았고, 한마음으로 맞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자들에게는 향상 백성의 힘으로 이룩된 도량에서 사치와 음식을 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면 미친 짓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 소요태능 : 스님의 법명은 태능(太能), 법호는 소요(逍遙)이며 성은 오(吳)씨이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조선 명종 l7년(嘉靖41, 1562) 임술 9월에 태어났다. 13세 되던 해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물외(物外 : 物外庵)의 선경(仙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출진(出塵)을 결심, 진(眞) 스님을 쫓아 머리 깎고 경률(經律)을 익혀 그 뜻에 통달하였다. 태능은 또 휴정(休靜)이 묘향산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다. 휴정은 한번 보매 태능을 법기(法器)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태능은 휴정의 회상에서 3년여 선(禪)을 참구한 끝에 스승의 명에 따라 당(堂)을 열고 법화(法化)를 편다. 이 때의 나이 20이었다. 서산의 제자 중에서 태능은 편양(鞭羊)과 함께 선(禪)의 두 우두머리로 추앙되었으며 뒤에 태능의 문하가 일파를 이루니 소요파(逍遙派)라고 불리웠다. 태능으로부터 선종(禪宗)을 이은 이는 침굉 현변(枕肱 懸辯)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사람은 해운경열(海運 敬悅)이며 전법(傳法)제자만도 30여 명에 이른다. 현재 금산사에 비석이 있는데,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비석글을 지었다. 보개산 심원사(深源寺),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부도(浮屠)가 있다. 효종이 ꡐ혜감(慧鑑)선사ꡑ 라는 시호를 내렸다. ● 환성지안 : 스님의 성씨는 정(鄭)씨로서 춘천 사렴이며 조선조 현종 5년(康熙 3, 1664)에 태어났다. 15세에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여 머리 깎고 쌍봉 정원(雙峰淨源)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뒤 17세 되던 해에 월담(月潭)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월담은 한눈에 환성의 그릇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의발(衣鉢)을 환성에게 전해준다. 헌헌장부로 성장한 환성은 용모부터 특이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골격이 말쑥하고 엄숙하였으며 음성은 맑고 그윽하여 신비감을 자아냈다. 말은 조리가 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였으며 얼굴 빛 역시 늘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經典)들을 깊이 연구하느라 침식(寢食)을 잊기 예사였다. 27세 되던 해에 환성은 모운진언(幕雲震言) 대사가 금산(金山 : 금릉)의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간다. 모운(1622˜1703)은 부휴(浮休)의 고재(高弟)언 벽암(碧岩)의 제자로 당시 삼남(三南)에 이름을 떨치던 화엄의 대종장(大宗匠)이었다. 모운은 환성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비록 자신보다 20여 년 연하(年下)의 선지식이었지만 그를 공경해마지 않았다. 모운은 대중 수백 인이 모인자리에서 환성에게 강석(講席)을 물려주며 고별 법어를 마치고 ꡒ내 이제 사 사자좌를 거두고 떠나노니 너희들은 스승의 예로써 이 스님을 섬기도록 하라.ꡓ는 당부의 말을 남긴 뒤 남모르게 다른 산으로 훌쩍 떠나가 버렸다. 모운이 강석(講席)을 물려주고 다른 산으로 떠난 뒤 환성은 대중들의 간곡한 청에 못이겨 마침내 설법을 시작하였다. 종으로 횡으로 주도면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치 강물이 쏟아져 내리듯 거침없는 환성의 설법에 대중들은 막혔던 가슴이 뚫리듯 시원하게 의문점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모운 진언으로부터 강석을 물려받아 명실공히 당시의 대강백이 된 환성 지안은 영조 1년(乙巳, 1725)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를 여니 1천 4백 명의 대중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뤘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역사적 집회는 당시 조정을 긴장케 함으로써 뒷날 환성을 귀앙가서 죽도록 하는 비극의 불씨가 된다. 환성의 고난은 개인적 고난이 아니라 당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던 불교 전체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7일째 되던 7월 7일, 환성은 중생구제를 위한 원대한 서원(誓願)을 펴보지 못한 채 흘연 열반에 든다. 누려온 나이 66세, 법랍 51세였다. 환성의 열반은 곧 국가적 손실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한 사건이 속출하였다. 3일 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등 이변을 보이자 제주도 사람들은 환성을 삼성(三聖)의 예언에 나오는 바로 그분이라고 단정하였다. ● 용명당 각민대사 : 용명당 각민대사는 1846년(조선헌종 朝鮮憲宗 12年) 8월 9일 전주에서 아버지 동래정씨 석노와 어머니 청송심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 지진장노(智眞長老)에게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되었다. 조선말(朝鮮末) 국내외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재직하는 동안 안으로는 금산사의 가람수호를 위해서, 그리고 밖으로는 호남 도승통(都僧統)을 이곳 금산사에 두어 호남지역 전체의 불교발전을 도모하는 등 그의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 무렵 인근 지역에는 금광의 불법채굴이 크게 유행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4年)에는 금산사 사리탑 아래까지 채광(採鑛)을 하고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사는 지방판서(地方判書)와 서울의 중앙내자원(中央內臟院)에 경내의 불법 채광에 대한 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진정(陳情)을 올리는 등 혼신의 노력으로 가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901년(光武 5年) 12월 말에도 공식적으로 불법 채광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光武 6年) 1월 1일 금산사로 모여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채광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이 소란꾼들의 손에 의해서 현재의 경내 가운데 잣나무 아래에서 57세의 나이로 불의에 입적하였다. ● 태공월주 : 태공월주 화상(1935년-현재)은 속성은 송씨(宋氏)이며, 1935년 4월 16일 전북 정주시 산외면 정양리 979번지에서 여산송씨 영조공과 최씨 종을 여사의 5남 4녀중 5남으로 출생하였다. 속명은 현섭(眩燮)이고 월주(月珠)는 법명이며, 법호는 태공(太空)이다. 스님은 21살에 학교 친구인 혜정스님을 보기위해 법주사에 구경가서 법주사의 훌륭한 전각과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발심하여 당대의 대선지식인 금오 선사를 은사로 법주사에서 출가득도 하였다. 월주화상은 구례화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으며, 동국대행정대학원을 수료하였고, 원광대학교에서 1996년에는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스님은 출가 입산 불문에 귀의한 후 수행정진하여 높은 불도의 경지를 얻은 후 종단정화 불사에 진력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 현대화에 선도적인 노력을 하였다. 또한, 80년 후반기부터 사회, 시민 운동의 중추적인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개혁을 위하여 노력한 공덕으로 국민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스님은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동안 주지를 역임하고, 그 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8년동안 금산사 주지직을 두 번 역임하는 등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8대를 역임하고,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종단의 여러 간부직과, 17대, 28대 조계종 총무원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고 금산사의 산중 회주로써 또한, 종단의 대종사로써 크게 종단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스님은 금산사 중창불사추진위원장을 맡아 미륵전 완전 해체보수, 대적광전 해체보수 또는 소실된 후에는 복원공사를 완료하는 등 사천왕문, 금강문, 나한전, 원통전, 보현당, 향적당, 설법전, 상서전, 하서전을 신축하고 성보박물관 등을 새롭게 중건하였으며, 다른 전각들도 해체보수하는 등 금산사의 크고 작은 불사를 중건 중수하였다. 9. 진표율사의 생애와 신앙 -점찰경을 중심으로- 진표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진표전간 그리고 관동풍악발연수석기가 있고 중국문헌으로는 송고승전의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 신승전의 진표 육학승전의 진표전이 있으나 이중 가장 오래 된 것은 988년 찬영이쓴 송고승전이다. 삼국유사는 고려후기에 된것이고 발연 수석기는 발연사의 주지 영잠이 고려신종2년 1198년에 발연수진표율사골장입석비명을 일연의 제자 무극이 초하여 부기한것이고 삼국유사의 기록이 송고승전 보다는 후기의 것이라고는 하나 국내의 기록이고 또한 진표가 중국에는 한번도 간적이 없다는 점에서 국내 기록에 중점을 두고싶다. ▣ 출가와 수도 진표는 완산주 벽골군 두내산현 대정리 지금의 만경이다. 속성은 井씨로 아버지 진내말 어머니 길보랑 사이에 태어나고 사냥하는 집안이다. 12세 되는해 진표는 사냥을 나가다 개구리를 잡아놓고 다음해에야 놓아주는 일을 당한후로 출가를 결심한다. 금산사의 숭(순)제법사(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도삼장에게 수업하고 그후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의 감응의로 오게를 받음)에게 계를 받고 입문한 뒤 순응으로부터 공양차제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받아 이 게법으로 미륵과 지장의 양성 앞에서 간절히 구하고 참회하여 친히 게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라는 가르침을 받고 명산을 편력하고 참회수업을 계속하여 미륵, 지장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진표27세 경덕왕19년 서기760년 보안현 변산 불사의방으로 수련을 시작했으나 3년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몸을 던졌으나 청의 동자가 손으로 받아 살리고 그후 노력하여 지장으로부터 가사와 발우를 받고 미륵은 두 개의 간자를 주었다. ▣ 교화와 전법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은 진표는 산에서 내려 올 때 뭇 짐승들의 절을 받았다.보살이 온다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 모든 백성들이 그를 영접했다. 금산사를 일으키고난 진표는 속리산을 거쳐 강릉으로 다시 금강산으로 옮기면서 중생을 교화했다.금강산에서 발연사를 창건하고 7년을 머물다 점찰법회도 열면서 중생을 구제하는데 힘쓴다.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도 보고 이무렵 제자들의 양성에 힘써 속리산으로 찾아온 영심, 융종 불타등에게 참회의 법을 전하고 공양차제비법 및 점찰선악업보경을 전한다. 이들 이외 제자들이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 ▣ 진표의 점찰경신앙과 점찰경의 전역과 교설 점찰경은 점찰선악업보경의 약칭이다.(이경은 지장보살업보경, 지장보살경, 대승실의경, 참찰경등으로 불린다) 이경의 역자는 천축삼장 보제등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수나라 시대의 경전 법경록, 언종록, 장방록등에 처음으로 경전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나 본 경은 장경 목록에는 없던 경이다. 이 경은 수대부터 진경이냐 외경이냐로 문제가 많았던 경이다. 오늘날 대부분 위경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보제등의 전기가 미상이며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와 장소가 불명이란점이다. 또한 목륜상으로 점을 친다는 것 자체가 중국적으로 인도의 정서와는 멀고 상의감이 있으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유행하였다. 본 발표자가 석굴암을 발표할때도 이점찰경이 나온다. 김대성의 전생에 흥륜사의 육륜회에서 점찰법회에 시주하는 설화가 그것이다. 본 점찰경은 지장보살이 堅淨信菩薩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에서는 목륜상으로 숙세선악의 업과 현재 고락길흉을 점찰하는 법을 하권에서는 대승의 실의를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자. 부처님께서 왕금성의 기사굴산에서 법문을 설하고 계셨다. 이때 견정신보살이 근기가 둔하고 믿음이 적은 말세의 중생들을 어더한 방편으로 교화 인도 할것인가 물었을 때 부처님은 지장보살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였다. 이에 지장은 여러 가지 장애로 고통을 겪은 사람은 목륜상법으로 과거의 선악업과 현재의 고락길흉을 점찰하여 의심스러운 일에 결단을 취해야한다. 이어 지장은 삼종의 목륜상 점찰법을 설하고 악업이 많고 두꺼운 이라면 선정과 지혜를 배우기 앞서 참회의 법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 또한 하권에서는 견정신보살이 大乘을 구하는 사람에게 무슨 방편을 보일까 물어 보았을 때 대승으로 향하고자 하는 중생이 있다면 반드시 일실경계에 의지하여 信解를 닦아야 한다. 신해를 닦고자 하는 사람중에서도 좋은 근기를 가진 사람이면 진여실관을 배우고 둔한 근기의 사람이면 심유식관을 배워야 한다. 이 법문이 선악업보를 점찰하는 법이며 겁약을 떠나 결정된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이다라고 부처님이 설하셨다. 참고 : 대승이란 - 소승의 반대의 뜻으로 마하연나의 음역 사람을 싣고 이상경에 이르게 하는 교법 가운데서 교리, 교설과 이상경에 도달하려는 수행과 그 이상 목적이 모두 크고 깊은 것 이므로 이것을 받는 근기도 도한 큰 그릇인 것을 대승이라한다. 곧 보살의 큰 근기가 佛果의 대 열반을 얻는 법문, 여기에 권대승과 실대승이 있다. ▣ 점찰법과 그 의의 전장에서 설한바와 같이 장애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선악업과 고락길흉을 점쳐 스스로 마음을 달래고 의심스러운 일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답하면서 그 방법을 설명했다 ▣ 목륜상의 종류와 그 제작법 목륜상이란 던져서 잘 구를수 있는 나무로 만든 점대를 말한다. 특히 과거세의 지은 업의 선악 차별을 점치는 십륜상, 업의 구,근,강, 약, 대, 소를 점치는 삼륜상, 과거, 현재, 미래 삼세중에서 받는 과보의 차별을 점치는 육륜법등 세가지가 있다. 10륜상 - 10개의륜에 각1면에 십선의 이름을 쓰고 그 반대편에 십악의 이름을 쓴다 3륜상 - 3개의 륜에 신,구,의 1면에만 쓴다 6륜상 - 각륜에 123 456 이렇게 쓴다 지금의 토정비결 보는 방법이고 윷놀이의 기초가 됐다 전한다. 이 점찰법은 진표 이전에도 상당히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발표자의 생각으로는 못사는 중생 즉 백성들이 내세에서라도 편안한 삶을 누리고자 바라는바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다. 지금 못살고 권력이 없고 지위가 낮은 것은 전세의 업 대문이고 앞으로 내세에 잘 되기 위해서는 현세에 덕을 쌓되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하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깊이 배어있다. 그러나 진표의 신앙의 대상은 지장이라기 보다는 미륵이다. 지장으로부터 정계를 받은 이후에도 뜻은 미륵에 있었고 금산사에 미륵장륙존상을 주불로 모신것이며 미륵 보살이 계법을 전수하는 모습을 금당 남쪽벽에 그린것도 그렇다. 그래서 진표는 점찰경에의한 참회법과 점찰을 행하면서도 점찰경에 나오지도 않은 미륵을 더 신망하고 있었는냐가 문제다. 다만 점찰경의 묘계가 자씨 보살과 서로 흡사하다는 것 말고는 - 10. 미륵신앙의 근거 범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다.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라고 한다. 인도의 바라나국 어느 바라문의 가정에서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그곳의 천인(天人)들을 교화한다. 그러다 56억 7천만 년을 지나면 다시 사바세계로 내려와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으로 3백억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를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뒤를 미륵불이라 부른다. 미륵보살이 천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하는 신앙을 미륵상생신앙 (彌勒上生信仰) 이라 하고, 지금 당장 미륵보살이 사바세계로 내려와 중생을 제도하기를 바라는 신앙을 미륵하생신앙 (彌勒下生信仰) 이라고 한다. 과거 한국인들이 미륵보살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종교적 상상과 열망들은 대개 미륵하생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통일신라기와 고려 초기에 등장하였던 궁예(弓裔)나 묘청(妙靑) 등의 신앙운동이나 고려 말 신돈(辛敦)의 개혁운동, 그리고 구한말의 천도교나 증산교에서 이런 미륵신앙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미륵보살은 모든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부처님이었으며, 언제나 기층 민중들이 갖고 있는 뜨거운 신앙열의 대상이었다. 석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賢劫 천불의 제5佛. 이 법회를 龍華三會라 한다.. 11. 금산사에는 석불이 없는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