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다형 출제 예상문제
1) 모란시장의 유래
2) 성남시 향토유적 목록
3) 남한산성 현절사 위패 모신 5위
4) 삼족오
5) 성남지역의 항일 의병장
6) 봉국사 당시의 사회상(두 공주)
7) 남한산성 축성 주요 인물
8) 만세운동의 동기
9) 천림산 봉수터
10) 성남의 집성촌, 세거성씨
11) 성남 사찰관련 문화유적 : 봉국사(대광명전), 망경암
12) 성남지역 문화자원(보완 필요)
13) 강정일당
1. 선다형 출제 예상문제
1) 모란시장의 유래
◦ 재향군인개척단을 조직한 김창숙(金昌叔)은 5·16혁명으로 군(軍)에서 정권을 잡자 광주군수로 특채 되어 1961년에 3개월 동안 재임,
- 군수직을 그만둔 뒤에 당시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의 재향군인개척단으로 돌아옴.
◦ 사람들이 모여들어 신개척지에 마을이 형성되자 지명(地名)이 필요함.
- 김창숙과 대원들은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는 뜻에서 '모란'이라는 이름을 따서 재향군인개척단을 모란개척단으로 명칭을 변경
- 그 뒤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대두되고 대원들의 생활필수품 조달문제, 통신문제 등의 생활여건조성이 문제가 되자, 김창숙은 관계기관의 허가를 받아 오늘날의 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시장인 모란시장을 5일장으로 개설
2) 성남시 향토유적 목록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 : 강정일당 묘역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 : 송산 조견 묘역
성남시 향토유적 제4호 : 금릉 남공철선생묘
성남시 향토유적 제5호 : 경헌 조몽정 묘역
성남시 향토유적 제6호 : 연성군 이곤 묘역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 : 탄천 이지직 묘역
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 신종군 이효백 묘역
성남시 향토유적 제9호 : 청주한씨 청연공파 묘역
3) 남한산성 현절사 위패 모신 5위
◦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김상헌, 정온 5명의 위패를 모신다
-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청(淸)나라 선양[瀋陽]에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삼학사(三學士)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 삼학사와 같이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주전파(主戰派)의 거두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두 충신도 1699년부터 함께 모시고 있다.
4) 삼족오
◦ 연성군 이곤(李坤 1462-1524) 묘비 머리 위에 새겨져 있는 다리 셋이 달린 까마귀 무늬의 금석문
- 파도치는 해 뜨는 모습과 그 해 속에서 삼족오가 힘차게 날고 있어 ‘우리 민족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숭배 상징물로서 고분벽화와 각종 예식과 복장 장식물 등에서 신성시 되었던 인각 디자인
5) 성남지역의 항일 의병장
◦ 남상목(1876-1908), 윤치장(1876-1971)
◦ 1919년 3.1 독립만세 항일 운동의 주동자 한백봉, 한순희, 남태희
※ 성남지역의 항일 전투를 벌인 대표적 인물
- 남상목, 윤치장, 이명하 의병장, 남공필 의병, 이규철, 박성삼, 배천봉, 강복선, 김광희, 김광준, 이춘삼, 정철화
•남상목 : 1907년 7월 용인군 용천곡을 중심으로하는 의병장으로 의병 50명을 지휘하여 구식총 40정, 양총 10정 등으로 무장하여 음성, 안성, 죽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고 전봉규 의병진과 합세하여 천안, 천고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중순국
•윤치장 : 1907년 11월에서 1908년 3월 경기도 광주군 일원에서 휘하 의병 70여명을 소집하여 의병장이 되고 총기로 무장하고 일본 기병대와 전투를 벌이는 한편 탄약 등을 확보하여 군자금 모집에 활동하다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받음.
•남공필 : 1907년 음력 8월에서 10월에 의병진에 참여하여 경기도 양근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며 동도 광주 일대에서 수 차례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유형 10년을 받음
이 명하 의병장-국내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피살되었다
6) 봉국사 당시의 사회상
◦ 두역(천연두)의 창궐
◦ 봉국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말사로, 영장산 서남쪽 기슭에 있다.
- 고려 현종 19년(1028년) 창건되었으며, 그 뒤 폐허화된 것을 조선 태조 4년(1395년) 왕명으로 담화(曇華)가 중수
•을 빌기 위하여 현종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축존화상(竺尊和尙)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고 절 이름을 봉국사라 하였다.
2차 예송(1674년, 갑인예송)논쟁이 있었고 현종이 남인을 지지했다
전국에 재해가 굉장히 많아 가뭄과 홍수, 전염병 등이 해마다 있었다
7) 남한산성 축성 주요 인물(인조2년 1624년)
◦ 총책임자 총융사 이서 (숭렬전에 온조대왕과 이서의 위패를 모심)
- 동남쪽 이회(모함으로 처형, 매바위 청량당에 이회와 그의 처, 첩 위패모심)
- 서북쪽 각성 벽암대사(청량당에 위패모심)
8) 만세운동의 동기
◦ 10년 동안 일본 무단통치로 조선 백성에 대한 수탈과 국권의 침탈에 항거
-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우리나라의 군대가 해산
-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혔다.
- 토지 조사 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었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일제가 우리나라에 시행한 무단통치, 민족자결주의, 고종의 독살설, 2.8독립선언에 영향을 받았다
1910년 일제는 한일병합을 통해 조선을 무단으로 통치,언론통제, 회사령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의 민족 자본 성장을 억제,본토 자국민을 위해 많은 식량을 빼앗아가는등, 경제적 약탈이 심했다.
1차대전이 끝나며 윌슨이 패전국가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고, 이를 민족해방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외에서 먼저 나타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 특사에게 전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도쿄[東京]에서는 1919년 2월 조선인유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게 되면서 일인(日人)들이 독살(毒殺)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조선인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극에 달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인산일을 거사 날짜로 잡음.
◦ 성남지역 만세운동의 특징
① 봉화 횃불신호로 만세운동 시작하였다.
- 횃불시위는 인근지역과 유기적인 연락체계를 가지고 주민 단합과 동시다발적 시위로 일제의 탄압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음.
② 각 마을의 구장이 주축이 된 연락망과 비밀리에 가동된 인쇄기술자(탄리의 김교석)의 참여로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 경찰에서 신문조서를 받은 주민들은 한결같이 구장들이 만세운동 당일 날에 강제동원하였다고 진술하여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사전에 각본을 짜놓았다.
③ 농촌의 지식인층이 주도하였다.
9) 천림산 봉수터
◦ 서울 남산 봉수와 연결되는 내지봉수의 마지막 코스
- 금토동 옛골 고개마루 낮은 산자락에 위치하여 아직 원형 복원 중
•통신 수단으로, 국가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가까운 관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밤에는 불빛, 낮엔 연기를 이용
•평상시에는 1, 적이 나타나면 2, 위험 경계를 알릴 때 3. 경계선 침략에 4, 전투 중이면 5를 피워 올림.
◦ 봉수의 종류
- 경봉수(京烽燧):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였던 중앙봉수
고려시대는 개경 송악산 국사당(國師堂), 성황당(城隍堂)
조선시대는 한양 남산 목멱산(木覓山) 5소
- 내지봉수(內地烽燧): 극변초면(極邊初面)의 연변봉수와 경봉수를 연결하는 육지내륙지역 소재 봉수
- 연변봉수(沿邊烽燧): 국경과 해안가 및 도서 등 극변초면에 설치되어져 연대(煙臺)로도 지칭되는 봉수
- 권설봉수(權設烽燧): 경봉수로 연결되지 않고 본읍(本邑), 본진(本鎭), 행영(行營), 수영(水營)의 지방적 경보에 한정하여 사용
10) 성남의 세거성씨
◦ 77개
◦ 10대의 성씨
- 전주이씨, 김해김씨, 광주이씨, 남양홍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경주최씨, 순흥안씨, 문화유씨, 파평윤씨, 동래정씨
세거지수는 작지만 큰 집성촌을 이루어 세력을 떨친경우
율동의 청주 한씨
판교의 연안 이씨
금광동,창곡동의 광산 김씨
상대원의 광주 이씨
고등동의 덕수 이씨
태평, 수진동의 의령 남씨
11) 성남 사찰관련 문화유적 : 봉국사(대광명전), 망경암(마애여래좌상)
(1) 봉국사
[정의]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위치한 사찰.
[유래]
-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말사로, 영장산 서남쪽 기슭에 있다.
- 고려 현종 19년(1028년) 창건되었으며, 그 뒤 폐허화된 것을 조선 태조 4년(1395년) 왕명으로 담화(曇華)가 중수
•1674년(현종 15)에는 1년 사이에 두역(痘疫:천연두)으로 사망한 명선(明善:14세), 명혜(明惠:9세) 두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종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축존화상(竺尊和尙)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고 절 이름을 봉국사라 하였다.
•절이 완성된 것은 같은 해 8월 15일이었다. 이와 같은 봉국사 창건기는 조선 후기 문장으로 유명했던 백곡처능대사(白谷處能大師)[1617~1680]의 유문집 『백곡대각등계록(白谷大覺登階錄)』에 전한다.
[변천]
- 이후 1924년 두창(斗昌)이 중수하였고, 1932년 주지 춘성(春城)이 서울시 삼청동에 이 절의 부속 암자를 세웠다.
- 한국전쟁 후 절이 퇴락하자 1958년 비구니 법운(法雲)이 중수하였으며, 1967년 혜성(彗星)이 삼성각을 세우고, 1969년 요사채를 신축
•1974년에는 법당을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고, 목조 본존불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1977년 5월 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고, 타이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 중 1과를 수정함(水晶函), 금함(金函), 자기(磁器), 대리석함(大理石函) 등에 차례로 넣어 불경과 함께 3층 석탑에 봉안
[현황]
-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1호인 대광명전(大光明殿)과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일주문(一株門)과 천왕문(天王門), 범종루(梵鐘樓) 등의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된 대광명전은 연대가 분명한 조선 후기의 건물로 문화재적인 가치가 크다.
(2) 봉국사 대광명전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있는 봉국사의 불전.
[개설]
- 1674년(현종 15) 왕명으로 축존화상이 창건한 봉국사 내에 있는 법당.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수법으로 건축된 맞배지붕의 건물로 내부 중앙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 있고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위치]
- 봉국사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의 영장산에 위치하며, 봉국사 대광명전은 봉국사 경내에 남향으로 서 있다.
[변천]
- 봉국사는 1028년(고려 현종 19) 창건되었으며, 그 뒤 폐허화된 것을 1395년(태조 4) 왕명으로 담화(曇華)가 중수하였다. 1674년(현종 15)에는 1년 사이에 요절한 공주 명혜(明惠)와 명선(明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종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금강산의 승려인 축존화상(竺尊和尙)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고 절 이름을 봉국사라 하였다.
•6․25전쟁 후 절이 퇴락하자 1958년 비구니 법운(法雲)이 중수하였으며, 1967년 혜성(彗星)이 삼성각을 세우고, 1969년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74년에는 법당을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고, 목조 본존불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형태]
- 봉국사 대광명전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가장 단순한 맞배집이다.
•풍판(風板: 지붕 밑으로 다는 널빤지)이 있으며, 지붕의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몸체에 비해 지붕이 커서 외관이 장중하다.
•자연석 기단에 놓인 고복형(鼓腹形)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쇠서의 장식적 형태, 연봉과 봉황 조각 등이 18세기 말의 수법을 보이고 있다.
•대광명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나 이 절에서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이 전각의 본래 명칭이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보전(極樂寶殿)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법당의 내부에는 중앙에 불단이 설치되어있고,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불상의 좌우로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현황]
- 봉국사 대광명전은 1980년 6월 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전은 설립 연대가 분명하며 조선 후기의 불전 형식을 잘 간직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3) 망경암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 위치한 사찰.
[역사적 배경]
-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말사이다.
- 망경암의 역사에 대해서는 ‘망경암칠성대중수비(望京庵七星臺重修碑)’에 상세히 기록
•이 비문에 의하면, 망경암은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영장산(靈長山) 중턱 위에 위치하고 있어 망경암이라고 했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임금이 친히 찾아와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수복을 기원한 장소라 한다.
•조선 왕실에서는 세종의 일곱째아들로 천연두를 앓다 19세에 요절한 평원대군(平原大君)[1427~1445]과 예종의 둘째아들로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된 제안대군(齊安大君)[1466~1525]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망경암마애여래좌상의 위치에 칠성단을 세워 칠성재(七星齋)를 지냈으며, 이로 인해 이곳을 칠성대(七星臺)라 불렀다고 한다.
- 망경암은 칠성신앙의 주요 도량이었으며, 고려 말기에 봉국사(奉國寺), 법륜사(法輪寺)와 함께 영장산에 지어진 3대 사찰 중 하나
[관련유물]
- 망경암 경내에는 대웅전, 미륵전, 삼성각(三聖閣)이 있으며, 1994년 9월 29일 봉안된 미륵대불(彌勒大佛)이 있다.
•소장 유물로는 망경암 우측의 자연암벽부 상부에 있는 망경암마애여래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두 개의 비, 즉 망경암칠성대중수비[대비(大碑)]와 소비(小碑)가 있다. 망경암과 이곳의 유적은 조선시대 불교신앙과 칠성신앙(七星信仰)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2) 성남의 문화자원 시설(보완 필요)
◦ 성남의 공원은 희망대공원, 율동공원, 중앙공원 등이 있다.
- 특별히 중앙공원은 수내동 고가, 한산이씨 묘역 등 역사적인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고, 야외음악당 등 현대적인 시설물들이 많이 설치되어있다.
•토정비결의 창시자인 이지함이 이 터를 잡았다는 선견지명이 작용한 역사와 현대의 조화가 잘 어울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품 공원이다.
전시관, 박물관, 사적, 공원, 도서관, 공연장
( 성남 아트 센타, 잡 월드, 토지주택 박물관, 신구대학식물원, 책 테마 파크, 사기막골 공원, 나라기록관, 캐니 빌리지, 모란민속5일장, 수내동 가옥, 봉국사등등)
13) 강정일당
[정의]
◦ 1772년(영조 48)~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 정조~순조대의 여성 성리학자이자 문인.
- 충북 제천 출생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고, 사후에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선영에 묻혔는데, 그의 묘소는 성남시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계]
◦ 정일당의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강재수(姜在洙)이고, 어머니 안동권씨는 권서응(權瑞應)의 딸이다. 아명은 지덕(至德)이며,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충주의 선비 윤광연(尹光演)과 혼인하였다. 이때 그의 남편은 불과 14세였다. 윤광연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명직(明直), 호는 탄재(坦齋)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6세손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제자이다.
◦ 그녀의 친가였던 진주강씨는 10대조 강희맹(姜希孟) 이래 시와 문장으로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동생인 권상명(權尙明)의 현손이었다. 그녀는 외가의 친척들과 교유가 많았으므로 외가쪽의 성리학적 학풍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생애]
◦ 정일당 강씨의 친가와 시가는 다 같이 벼슬을 하던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증조부 이후에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였다.
◦ 남편 윤광연은 젊은 시절에 학문을 힘쓰지 않고 생계를 위하여 상업활동을 하다가 적은 재산마저 탕진하였다. 고향에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그들은 서울 근처로 올라와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과천에서 남의 오두막에 살았는데, 어느 해에는 흉년이 들어 3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자녀를 9명이나 낳았으나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죽고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였다.
◦ 후에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 밖의 약현(藥峴)[지금의 중구 중림동]에 살게 되었다. 여기서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하였다.
◦ 정일당은 각고의 노력과 철저한 가정 관리로 상당한 저축을 하게 되어, 만년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토대를 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약현에서 탄원(坦園)이라는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게 되었고, 경기도 광주부 대왕면 청계산 동쪽(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산을 사서 3대 조상 7위의 묘를 이장하였다. 또 형제와 친척들의 혼례와 상례를 대신 치러주기도 하였다.
◦ 그녀는 바느질을 하면서 남편 윤광연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녀는 재능이 탁월한데다가 남편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으므로 학업의 성취가 항상 남편보다 앞서 나갔고 남편의 학업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 윤광연은 강재 송치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히며 많은 노론 명사들과 교유하였고,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와도 일정한 교분이 있었다. 그는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나 큰 학자가 되지 못하였고 벼슬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일당은 그에게 벼슬을 단념시키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윤광연은 부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녀의 격려와 충고에 의하여 학문과 인격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였다.
◦ 정일당은 가난했던 외에도 몸이 허약하여 평생을 고생하였다. 1822년 7월에는 큰 병으로 사흘 동안 기절한 후에 소생하였는데, 이때 평생 저술한 『답문편(答問編)』, 『언행록(言行錄)』 등 수십 권을 모두 잃어버렸다.
◦ 이처럼 만년에 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1832년(순조 32) 9월 14일에 타계하였으니, 향년 만 61세였다. 10월 30일 광주군 대왕면 둔퇴리 청계산 동쪽[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작품]
◦ 정일당의 저술은 원래 수십 책이 있었으나, 그녀의 생시에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 남아 있는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는 남편 윤광연이 그녀의 사후 4년이 지난 1836년에 남은 시와 편지 및 잡문 등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 여기에는 시 38수, 서(書) 7편, 척독(尺牘: 쪽지 편지) 82편, 서 별지(別紙) 2편, 기(記) 3편, 제발(題跋) 2편, 묘지명 3편, 행장 3편, 제문 3편, 명(銘) 5편, 잡저(雜著)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서 그녀의 학문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심성 수양과 도학적 경지를 읊은 시와 남편과 주고받은 척독, 별지, 기, 명 등이고, 나머지는 대개 문학적 영역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 정일당은 도학(道學)뿐만 아니라 시와 문장, 그리고 글씨로도 유명하였다.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라고 할 수 있다. 38편의 시를 대략 정리해 보면 오언절구 24편, 오언율시 4편, 칠언절구 7편, 사언시 3편으로, 대부분이 간단한 사구체의 절구 특히 오언절구들이다.
- 초기의 작품들은 대체로 자신의 학문과 수양에 관한 내용이 많고, 후기의 작품들은 남편을 대신하여 증답(贈答)하거나 찬양, 송축하는 시 혹은 손아래 사람들에 대한 훈계의 시들이 많다.
◦ 전체적으로 보면 정일당 시의 주제는 거의 대부분 학문에의 집념, 심성 수양, 자신과 남들에 대한 도덕적 훈계, 안빈낙도의 생활, 자연 속의 관조, 달관의 체험과 같은 도학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고, 타인에 대한 사례, 칭송과 축원 등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 따라서 음풍영월류에 속하는 한가한 서경시나 애증과 이별, 연모 등을 노래한 서정시는 일체 없다.
- 정일당의 산문 역시 문체가 질박강건하고 도학적인 취향이 있다. 척독을 포함한 서간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묘문, 행장, 제문 등의 공적인 글들인데, 이러한 유의 글이 가지는 일정한 형식을 준수하면서도 진솔한 감정이 질 나타나 있다.
◦ 정일당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서체가 매우 강건하고 단정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부단한 연습과 강인한 심성수양에서 온 것이다.
- 현재 남은 글씨는 문집 부록에 판각된 8자가 전부이지만, 자획이 굳세고 바르며 순수한 고풍이 있어 부드러운 미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학문과 사상]
◦ 정일당은 학문 연원은 첫째, 남편의 스승이었던 강재 송치규와 평생을 사숙하였던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에게서 찾을 수 있다.
- 그녀는 공부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남편의 사우들에게 질의하였고, 특히 남편을 대신하여 강재에게 『중용』과 상례를 문의하기도 하였다.
- 남편을 강재의 문하에 보낸 것도 그녀였으므로, 그녀는 강재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율곡-사계-우암을 잇는 노론 정통 기호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정일당은 윤지당보다 50여년 후에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녀를 몹시 흠모하였고『윤지당유고』를 자주 인용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사숙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특히 윤지당이 말한 “남녀의 품성은 차이가 없고,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은 정일당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신념이 되었다.
- 정일당도 임윤지당의 지론을 인용하여 “하늘이 명부(命賦)한 성품에는 애당초 남녀의 다름이 없다. 부인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태사(太姒)와 태임(太任)과 같은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면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다”고 말하여 여성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강조하였다.
•윤지당이 『중용』에 주력하여 장편의 『경의(經義)』를 남긴 것과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의 학문에는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정일당은 『윤지당』의 성리학을 계승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 정일당은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유교의 13경을 두루 읽고, 깊이 침잠하여 연구하고 암송하였다. 또한 여러 전적들을 널리 보아 고금의 역사와 정치 변동을 밝게 알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례(周禮)』, 『이아(爾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근사록(近思錄)』,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탐독하였다.
◦ 그녀는 많은 독서를 통하여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리하여 천지, 귀신, 주역, 정전제(井田制)로부터 곤충, 초목, 경전 및 역사의 어려운 이치와 일상생활에서 의심나는 모든 것을 남편과 함께 궁리하고 토론하였다.
- 정일당이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중용』이었다. 그녀는 평생토록 천지와 사람의 이치를 탐구하였고, 성품과 천명의 근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젊은 시절 『중용』 연구에 침잠하여 주자의 오묘한 뜻을 체득하였고, 특히 계신장(戒愼章)의 분석에는 일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 정일당은 평생 동안 성(誠)과 경(敬)의 실천에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만년에는 성품의 본래 면모를 체득하였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 그녀의 시문들 중에는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것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그녀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 안분자족할 수 있었다.
- 그녀는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적인 자연 환경과 혈육이 전멸하는 비극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 절대자에게 의존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으면서 의연하게 자기 성실을 다하고 남을 위로하는 정일당의 모습에서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와도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가]
◦ 정일당의 철학이나 문학은 조선시대 여성사회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여성계 보급과 점증하는 여성들의 학문활동 및 의식성장을 이해할 수 있다.
- 비록 여성들의 사회활동이나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제약은 심하였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학술과 문예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고, 윤지당이나 정일당처럼 높은 수준의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을 위하여 실천한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들의 의식성장은 이 시기에 사회 및 경제의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근대적 맹아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윤지당과 정일당은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남성과 다를 바 없으며,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강한 자아의식을 표방하였다.
-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수련한 드문 여성들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학자 혹은 철학자들이었다.
- 성리학의 본질적 원리 안에서 남녀평등의 이념을 찾아냈고,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수양하고 실천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 후기 유학사나 여성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정일당 강씨는 전통시대의 많은 질곡 속에서도, 스스로 입지를 세우고 분발하여 여성들이 품성을 계발하고 자아를 완성해간 모범을 보여주었다.
- 그녀가 추구한 것은 사람이 가진 무한한 잠재능력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요순과 같은 지혜와 도덕을 겸비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 이것은 도덕실천의 단호한 결단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그들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녀의 독실한 학문과 수양의 자세는 오늘날에도 커다란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다.
14) 청백리에 뽑힌 성남의 인물
◦ 이경석(李景奭), 이지직(李之直), 이병태(李秉泰), 이자(李澬), 이세화(李世華), 이원식(李元植), 이방좌(李邦佐), 정대년(鄭大年), 정성근(鄭誠謹)
15) 성남(城南)의 지명 유래(보완 필요)
◦ 제2강 성남의 지명 및 전설설화 : 한동억(교재 읽기)
창곡동: 한성백제 때부터 군사용품 들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던 곳.
세자동: 창곡동 281번지에서 295번지 일대의 큰 골짜기이다. 백제의 다루왕이 태자시절에 태자궁을 짓고 전국의 장정과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백제 문화의산실 이었던 곳이다.
영장산: 율동 산 50번지와 야탑동 산 71-1번지 그리고 광주시 직동과 연결된 산이다. 온조 임금의 착한 선정이 계속 하게 하여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장산하 48대 장상지지요 십승지라는 명당의 산이다.
일곱삼거리: 율동 산 76, 산77번지에서 신현리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지성으로 부처에게 빌어 지극한 정성이 부처의 마음을 움직이면 극락왕생하는 극락세계로 가는 길을 얻게 되지만, 지극정성이 부족하면 육간지옥으로 떨어지는 여섯 갈래의 길이 있다는 곳이다.
동막골: 율동 산 13-1번지 일대의 넓은 골짜기이다. 옛날에 죽을 병(病)이 든 자들이 임시로 거처하면서 스스로 병을 치유하던 격리된 거처가 있던 골짜기인데 지금은 국군의무사령부가 들어서 있다.
삼천병마골: 이매동 산62-2번지에서 404와 406번지 일대의 골짜기이다. 백제시대에 군사훈련을 할 때면 헤일 수 없이 많은 병마들이 쉬어 갔다는 골짜기이다.
명막암: 태양신조인 삼족오에서 갈라져 남방민족의 신조인 초명새가 살다가 너무 좋아서 그만 돌아갈 때를 놓쳐 바위가 되었다는 분당동 산 11번지에 있는 전설의 바위.
숯내: 백제 때부터 군사훈련을 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밥과 국, 그리고 우마에게 죽을 쑤어 먹일 때 나오는 숯을 냇물에 버리고 가서 숯이 내에 가득하여 붙여진 시내의 이름이다.
군주(君呪)터: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재증걸루에게 잡히고 저주를 받은 장소로 복정동 산 55번지 일대에 있다.
쌀나무: 백제 대의 어느 스님의 일화가 얽혀 있는 동원동 산22번지에서 산 33번지 일대의 골짜기에 있었다는 나무이름이다.
성남의 지명 교재를 읽으시면 내용과 지명이 일치합니다. 반드시 교재를 다 읽으세요.
청계산: 성남의 사대명산중의 하나인 청계산(淸溪山)등산로가 있고 이수봉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다.
판교원: 조선 초기에 윤안정과 종림이라는 스님과 조훈흘 이라는 사람이 중창한 원의 이름이다. 이곳에는 효녀 도리장의 효심에 대한 일화가 전해온다.
낙생행궁: 낙생행궁(樂生行宮)은 실록에서 나타난 것은 성종 8년 10월 4일, 6일, 8일 뿐이나 10월 3일에는 낙생역 앞들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들이 행궁에서 머물면서도 군사정보상 들 또는 전교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
성내미: 태종대왕의 능을 내곡동에 모시고 풍수학이 삼남에서 올라오는 길목인 달네 내 고개를 막아야 한다고 하여 성9城을 쌓고 길을 막았다가 다시 박석을 깔고 보토를 한 다음 다시 길을 열었다. 성의 남쪽이라고 성남마을에서 변음이 되어 성내미 마을로 불린 이름이다.
망경대: 고려국 충신이며 두문동 칠십이 현 중에 한사람인 조견이 고려의 서울이던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곳이다.
둔전교회: 100년이 지난 교회인데 초대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씨가 숨어살던 교회이다.
16) 수정구(壽井區)의 유래
◦ 수정구의 명칭은 수진동(壽進洞)에서 수(壽)자와 복정동(福井洞)에서 정(井)자를 취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17) 우리고장의 민속놀이
◦ 판교 쌍용거 줄다리기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오리뜰 농악
18)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성남출신 인물
◦ 이경류(李慶流), 권징(權徵), 각성(覺性), 송언신(宋言愼), 이승열(李承說), 이승윤(李承尹), 이진(李晋), 윤돈(尹暾), 윤엽(尹曄), 윤재오(尹載五), 이수(李睟), 정립(鄭岦), 이홍로(李弘老), 한술(韓述), 한효순(韓孝純) 등
19) 성남(城南) 관련 지명
◦ 성남(城南): 성의 남쪽을 의미하는 지명으로 1946년 명명(命名)
-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되어 도시화가 진행하였고,
- 1989년 분당(盆唐:분점리와 당우리의 조합) 신도시 건설
20) 윤달의 풍습
◦ 부모님 수의 준비
◦ 산소 단장
◦ 집수리
◦ 이사를 한다.
◦ 먼 길을 떠난다.
※ 윤달의 속담
- 시체를 거꾸로 매달아도 괜찮다.
- 빚은 윤 동지 달에 갚아라.
14) 청백리에 뽑힌 성남의 인물
15) 성남과 관련된 지명 유래(보완 필요)
16) 수정구(壽井區)의 유래
17) 우리고장의 민속놀이
18)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성남출신 인물
19) 성남(城南) 관련 지명
20) 윤달의 풍습
첫댓글 선생님들 덕분에 무사히 교육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