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막 얼굴이 핼쓱해지도록 앓고 하던데
이마를 짚어도 열하나 없고
거울을 봐도 퀭한 눈도 아니다.
늦잠을 잔걸로 모자라서 배까지 고프다.
멸치를 우려서 만든 국물에 냉동실에 있는 만두를 꺼내 넣고
터뜨려서 끓이고 매운고추를 썰어 넣는다.
뜨겁고 매운 국물에 꾹꾹 눌러 담은 밥까지 한 공기 먹고 나니
그제서야 내가 새벽에 저지른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애써 웃고 또 웃었다.
"잘했어.잘했지,잘한거야.
만약 버티기 하다가 채이면 무슨 망신이야.
망신은 당할 수 있다고 쳐도 아마 지금보다 천배는 괴로웠을거야."
희원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정리하고 싶다.
희원이 설명 없이 도망치듯 떠나 버린 동네에 남아 있고 싶지도 않다.
주인 아줌마를 만나 가게는 그대로 두고 원룸만 뺄 수 있는지 물으니
안그래도 월세로 돌리고 싶었다고 선뜻 그러자고 호호호 소리를 내며
승지씨랑 나랑 맘이 통했나봐 하면서 수다가 시작 된다.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속으로 슬며시 심통이 나기 시작한다.
내 사랑에는 온통 딴지 뿐이더니 정리하겠다니 주변의 모든 상황이
돕는다.
하지만 가게는 선뜻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은 희원 때문이었다고 해도 나름대로 내게도 익숙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희원과 잘 안됐다고 해서 전쟁에 진 부대의 베이스캠프 철거하듯
후다닥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돌아 올 수 있을거다.
희원이 있는 동네도 아니고
세영을 불러서 6개월간 가게를 맡기고 싶은데 어떤지 조심스레
정말 혹시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묻는데
금방 얼굴이 환해진다.
"안그래도 엄마한테 우리 동네 하나 내달라구 했는데
누나랑 이야기 해본다구 했거든요."
"6개월간 경험 삼아서 잘 해보고 잘 할 수 있을것 같으면
이모한테 이야기 해줄게. 그대신 수익은 7:3이다."
"누나가 7이죠?"
"왜? 니가 7인줄 알았어?불만 있어?"
"그냥 용돈만 좀 줘도 되는데."
"그럼 대충 하려고 그러는거 아냐? 내가 여기 투자한 돈이 얼만데."
"아니에요. 난 사실 돈 안줘도 상관 없어요."
"또 돈 번다고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말고 명진이도 그시간 그대로 써."
"혼자해도 되는데."
"너 여기 매여 있으면 나중에 지친다 그리고 명진이는 올해 말까지 이일 해야
학원 다닐 수 있거든."
"네."
"음 잔소리 같지만 너무 손님들 잡지 말고."
"네에."
세영의 목소리가 잔뜩 높아져 있다.
큰 숙제를 해결한 것처럼 홀가분 해진 나는
방을 빼고 짐을 옮긴단 핑계로 엄마에게 가서 아랫목에 이불을 펴고 빈둥 거렸다.
엄마는 늘 바쁘다.
마늘을 까거나 청소를 하거나 할 일이 없으면 머리카락을 테잎에 붙이고 먼지를 묻혀내고
정말 계속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방에 게으르게 누워 엄마의 움직이는 소리로 엄마가 하는 일들을 짐작하고
재미 있어 한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 청소를 하는데도 일어나기가 싫어서 배를 밀고
이쪽 저쪽으로 피하기만 한다.
그냥 피해가며 청소를 하던 엄마가 갑자기 걸레질을 멈추고 묻는다.
"왜 이러고 있어?"
"날씨가 너무 추워서."
"젊은게 이만한 날씨가 뭐가 추워."
"엄마!"
"응?"
"마음이 추워.헤헤헤"
"돈이 없어 집이 없어 엄마가 없어? 맘이 왜 추워?"
"엄마!"
"왜?"
"내가 꼭 파리 같아."
"파리?"
"응."
"그냥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혼자 날아 다니다가 여기가서
기웃 저기가서 기웃거리는 파리."
"별 소리를 다해."
"그러게 근데 파리 같아.. 겨울이쟎아. 그래서 더 기운이 없나봐."
"잘 안됐어?"
"뭐가?"
"그 사람."
"응."
"왜?"
"그냥 내가 차버렸어."
"왜?"
"내가 좋아하는걸 너무 잘 알더라구.
김 새쟎아. 안 좋아하는 척 재야 하는데
잘난척도 좀 하고"
"그런게 어디있어?"
"뭐가?"
"사람이 좋으면 지 맘 그대로 다 보여주고
그 사람 마음도 보자구 하는거지."
"엄마가 사랑을 알아?"
"뭐?"
"아 미안. 알겠다 알곘구나 미안미안"
"원래 첫사랑은 안 이뤄진대"
"무슨 첫사랑이야? 내가?"
"내가 너랑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니가 사랑하는거 못봤어."
"몰래 하니까 그랬지."
"몰래 하는 사랑은 하지마."
등을 돌린채 누워서 나는 또 눈물이 난다.
엄마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울었던 시절이 있을거다.
시간이 뭉텅뭉텅 지나가서 나도 사랑 때문에 우는 내 딸아이에게
뭐라뭐라 잔소리나 하고 있으면 좋겠다.
'몰래 하는 사랑은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도 나중에 내 딸애에게
그렇게 말해줘야지 멋진 말이다.
그런데 정말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언제, 어느 세월에 희원을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 나이만큼 키워내나
엄마를 뒤에 두고 나는 자는척 소리를 죽여 한참을 울어야 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것 같은데 그날 +2 일이다.
학원을 빼먹고 엄마에겐 은주네 옥탑방에 같이 살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고시원을 얻었다.
이제 핸드폰만 정지를 시키고 고시원 문을 열고 들어가 누우면
온전히 숨는거다.
한동안은 나 자신을 좀 가둬 두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아주 작고 답답한 방에 나를 가둬 두면
정말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든
내가 하고 싶은걸 온전히 포기하는 마음이 생기든 할거라고
무턱대고 나는 나를 작은방에 몰아 넣었다.
핸드폰 일시정지를 하러 시내에 나온 김에 도진에게 전화를 해서
강남역 앞으로 불러 냈다.
사람이 많은 강남역앞에서 도진을 기다리면서
나는 또 쓸데 없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사람 많은데서 희원을 기다리고 희원을 만나고
그런걸 한번도 못해봤다는 생각 깜깜한 극장에서 손잡고 영화 보는일도
못 해보고...
시계를 보면서 기다리고 저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희원이 손을 흔들고는
막 뛰어 오는 그런 그림을 그리다가 금방 또 울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그림 속으로 촌놈 한도진이 뛰어 온다.
다행히 손은 안 흔들고 긴다리로 겅중겅중 뛰는 도진의 모습에 웃음이 난다.
시끄러운 호프집 안에서
도진은 별 질문 없이 내가 희원과 헤어졌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줄 알았다는거야?"
"뭐가?"
"반응이 그렇쟎아."
"그럼 내가 여기서 춤을 추리 아니면 같이 울상으로
안고 울어주리?"
"이제 그런거 안해."
"뭘?"
"도진아 으엉엉 어떻게 해 으엉엉 그 사람이 으엉엉 이런거 안해."
"제발."
"진짜 안한다니까?"
"그럼 뭐할건데?"
"뭘?"
"나한테 뭘? 어떤 말을 할건데?"
"글쎄. 할말이 없으면 뭐 주님을 믿어보세요. 뭐 그런말 해볼까?"
"컥"
"왜?"
"어떻게 거기서 그게 나와?"
"내가 이제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달리기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렇게 살아볼까 하는 중이거든"
"아 예."
"너도 말해봐!"
"뭘?"
"너의 새로운 다짐 같은거."
"난 그냥 하루하루 잘 살거야."
"그게 어떻게 들릴 수도 있냐면."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거야!"
"어.그게 어울려!"
"숭지!"
"응?"
"내가 가끔 너한테 기분 나쁜거 하나 있는데 말이야."
"어."
"왜 나를 시시하게 보냐?"
"내가 언제?"
"시시하게 보쟎아."
"나한테 희원씨 말고 모든 남자는 다 시시해."
"아 헤어졌다면서 무슨 희원씨 희원씨 희원씨"
"헤어졌지만, 나 사랑해!"
"누구를"
"희원씨를"
"미친다. 정말"
"왜?"
"사랑하는데 헤어졌어요. 니가 무슨 김지미야?"
"아니 내 사랑의 완성은 이별 같아.아무래도
언제나 가슴이 지릿지릿 할 것 같아.
당신을 사랑했던 기억만으로 난 정말 오래오래 행복 할 수 있어요"
내 몸짓이 말투가 아주 나이들고 그냥 시시한 3류 연극 배우 같다.
"정말 뭐라 할말이 없으시다 이승지씨"
"도진아."
"어?"
"내가 너한테 고맙다는 말 한적 있어?"
"아니."
"고마운데 왜 말을 안했을까?"
"뻔뻔하니까."
"응"
"뭐가 응이야?"
"고마운데 뻔뻔해서 말을 못했다구."
"말 돌려서 하는 그 버릇 좀 고쳐."
"어."
정말 고마웠는데 왜 한번도 그런말을 하지 않았을까?
"고맙습니다."
난 정말 고마운 맘이 들어서 벌떡 일어나 도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술이 취한건지 휘청 선뜻 일어나지지 않는데
신발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진다.
"아! 이승지 또 울어? 아 정말 이제 지겹단 소리도 아깝다."
다시는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나는 또 새롭게 해야 했다.
하면서도 정말 지킬 자신이 없어서 웃음이 피식피식 나는 그런 다짐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다.
한 1년쯤 시간이 지난것 같은데 희원과 아침을 먹고 헤어진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고시원이라고는 하지만 공부하려는 사람들보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저녁에 와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낮시간의 고시원은 너무나 조용하다.
소리를 내어 라디오를 들어도 되고 티비를 볼수도 있다.
학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새로 산 일본어 소설을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고
집에서 찾아 내 가져온 수학 정석도 풀고
일본 단편집 한권 번역해 보리라 계획표를 세워 벽에 붙이고
새로 산 차를 한 캔 뜯어 이번엔 중간에 버리지 않고 꼭 끝까지 다 먹어야지
새벽에 추워서 깨지 말고 전기 장판을 꼭 켜고 잠들어야지.
뭐 그런 시시껄렁한 다짐들만 해대면서 작은 방에 나를 가두고 시간이 가기를
마음이 가라 앉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그 좁은 방 안에서 내가 하는 일중 하나는 통화를 할 수 없는 정지된 전화기를 가지고
매일 희원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었다.
번호를 한자리씩 바꿔가며 난 하루 종일 전화를 했다.
"어 거기 서희원씨 핸드폰 아닌가요? 741-9874아닌가요?
아! 네 741-1987이라구요? 731-9874 아니라구요?
그렇게 안 외워지던 번호를 잊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매일 매일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다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면 갑자기
정신병증으로 가는 초기 단계인것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설마 이만한 일로 미치기야 할라구'
언젠가 희원의 말처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밥도 먹을 수 없고 물 한모금 넘길 수 없을만큼 힘들어져서
온몸에 기운이라도 없으면 더 좋을것 같은데
머리는 하루 하루 더 맑아지고 밥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또 그렇게 노력을 해도 희원의 번호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장판도 못 켜고 겨우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는 추위에 떨며 잠을 깨야 했다.
인터넷을 못하면
핸드폰이 없으면 불편해서 죽을 줄 았았는데
나는 점점 익숙해 지고 있었고
희원이 없이는 불행해지고 말거라 생각했지만
사소한일에 나는 행복해 했다.
일본어 단어를 외우는 일에 기쁨을 느끼고
멋진말을 일본어 단어 사전에서 찾아 내고 적어두며
중급반 친구들과 시시한 이야기를 일어로 나누며
서로 훌륭하다는 손가락질을 해가며 키득거리고
종로거리에서 나눠주는 티슈나 책받침 풍선 같은걸 받으면서 좋아하고
패스트 푸드점에 들어가서 햄버거는 반으로 잘라달라고 하고
음료수는 몇번씩 리필을 해서 마시면서 즐거워 하고 즐거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척 웃어대도 시간은 정말 더럽게 안간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며 투덜대고 책상에 엎드려 다음 수업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날 부른다.
"이승지씨 밖에 누가 찾아왔어요."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콕콕 다지며 나간 곳에
서 있는 사람은 당연히 희원이 아니었다.
그나마 반가웠을 도진이나 은주도 아니었고
사랑하는 하나뿐인 오빠였다.
헤어지자고 한건 나였으면서 나는 그날 이후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 나를 부르면 희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나고 실망했다.
실망만큼 내 목소리에는 심통이 들어 있다.
"왠일이에요?"
"줄게 있어서."
오빠는 별 잔소리도 없고 그냥 다정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게 보인다.
줄게 있다더니 정말 봉투 하나만 건네고 가버린다.
일본어 학습을 위한 홈스테이 일본어 연수 프로그램
매주 월요일 출발 가능
3개월짜리다.
엄마가 대충 내 말에 속아주고 기다려주는 것과 달리
오빠는 그렇지 못하다.
치밀하게 모든 가족의 앞날을 계획 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빠의 생각이 그다지 나쁘게 받아지지 않는다.
슬슬 내가 만들어서 가둔 작은 방에서 벗어나고 싶은건지
아니면 달려가고 말지도 모르는 나를 어떻게 할 자신이 없어지는건지
갑자기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어느 순간 정신이 들고 보니 희원의 옆에 있거나
아니면 어디 아주 멀리 가 있는 나를 떠올리기도 한다.
승우처럼 회계사 시험 준비 명령을 받고
학원에 다니고 한달에 한번씩 학습 진행 상황을 상담 받는것 보다는
훨씬 폼나고 고통은 약하다고 고소해 하면서
나는 정말 고마운 맘으로 오빠의 선물을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종로를 걷고 또 걷는다.
보신각 옆 파파이스에서 시작해서
서울극장을 지나 길을 건너고 또 단성사 옆 파파이스를 지나서
탑골공원을 지나고 인사동으로 들어가 사먹지도 않을
긴야채호떡줄에 서서 기다리는 척 시간을 보내다
바쁜척 정말 아쉽지만 더는 못 기다리는 척 다시 줄에서 빠져 나오고
인사동을 빠져나와 걸어서 교보문고 까지 간다.
다시 되짚어 걸어와 영풍문고로 또 길을 건너서 보신각 이렇게
왕복을 하면서
길에서 사지도 않는 악세사리를 만지작 거리고
인형 리어카에서 매일매일 같은 인형의 같은 부위를 만져 때를 묻히는걸로
한시간쯤은 보낼 수 있다.
지난번에 시작한 소설책은 너무 어려워서 진전이 없다.
작은 문고판 책을 하나 사서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까지 나니
정말 뭔가 해 낼 것 같은 기분에 씩씩해진다.
서점에 들어가 책을 고르고
색색깔의 펜을 사고 맘에 드는 노트를 사는걸로
한시간 쯤은 더 보낼수 있고 그렇게 오늘 하루를 보내려고 하는데
형광펜을 고르다 무심히 건너다 본
음반 매장에
눈에 익은 그림이 있다.
눈으로 한참을 보고 거기에 적힌 얼마 안되는 글자들을 읽고 나서야
머릿속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내가 그렸던 희원의 수배전단이다.
그 그림 그대로 그 글씨 그대로.
비스듬히 전주에 붙여서 다시 찍은 사진이다.
수배 전단이라는 말은 지워져 있고 아래 쪽에 예쁜 글씨로
extremely private affair 라는 제목 아래
키 176정도
아주 말랐음
여리한 목소리에 조금 떨림
남자들이 잘 쓰지 않는
하나요? 인가요? 의 말투를 씀
그리고 희원의 얼굴 그림이 있다.
잠깐 얼어 붙은 듯 그 그림을 본다.
가게로 들어가 희원의 음반을 사고
포스터를 한장 얻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가서 말아 쥔 포스터에 손자국이 생긴다.
어디든 앉아야 곘다 싶어서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고 보니 앞쪽에 돈암동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710번 버스가 돈암동엘 가는 버스구나.
바보처럼 헤헤 웃어보지만 자꾸만 침이 마른다.
차에 앉아 시디를 뜯는데
종이가 한장 떨어진다.
2001 서희원 새앨범 발매 기념 팬사인회일정
11/17 영풍문고 7시
11/19 안양 평촌 신나라 레코드
11/21 타워레코드
시간을 보니 이제 막 네시가 넘어 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급히 고시원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슬리퍼를 신고 신고 나가 한 켤레 뿐인 신발을 고시원 건물 앞 쓰레기장에 버렸다.
7시까지는 아직도 두시간이나 남아 있지만
그렇게 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안심이 된다.
음반을 뜯어 플레이어에 시디 한장을 넣는다.
반주도.가사도 들리지 않고 희원의 목소리가 말소리 처럼 들린다.
내게 하는 말 같아서 나는 또 한참을 베게에 머리를 파 묻고 꺽꺽 거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엉엉 울다가 이제야 생각 났다는듯이 벌떡 일어나 쓱쓱 눈물을 훔치고
시디안에 든 가사지를 꺼내서 맨뒷장을 편다.
맨 마지막 줄을 읽는다.
내게 자꾸 자꾸 다짐하고 약속하게 하는 사람에게
내 멋대로 그것이 나를 향한 말이라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모두 지난 일들인게다.
희원이 저걸 쓸 때 나도 한껏 행복 했었고 적어도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제는 내게도 희원에게도 과거형의 지나간 일이다.
이제 와서 어머 저에게 어떤 약속을 하실건가요? 물을수도 또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다.
시디가 다 돌아가고.
나는 가사지를 펴 놓고 18곡의 노래중 나와 상관이 있는것 같은
노래들을 다시 골라 낸다.
나는 가사가 없는 희원의 개인적인 일에서 무언가 자꾸 느끼려고 한다.
제목만으로 나는 지나간 일을 더듬는다.
하지만 그냥 지나간 일로 느껴질뿐 아무것도 가슴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을 이해 하기에 나는 너무나 얄팍한 사랑을 하고 있었던걸까?
모든걸 내 탓으로 미루고 또 미룬다
그리고 irasia에서 들리는 희원의 허밍에 맞춰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아주 많이 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잠을 깬 시간은 겨우 열한시였다.
갑자기 불면이 시작되었다.
슬리퍼를 신고 뛰쳐 나간 시간은 열두시였지만
그 한시간이 끝도 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택시를 타고 내가 간 곳은 돈암동이었다.
이제 내가 희원에 대해 알고 있는건 돈암동에 작업실이 있다는것 그것 뿐이다.
희원에게 들었던 대로 더듬고 더듬어 나는 희원이 말하던 건물을 찾아 내긴 했다.
편의점 안에 공중전화에서 나는 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번도 넘게 걸었지만 희원의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고
음성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려 올 때의 마음이 가라 앉는다.
희원이 나를 사랑했었다는것으로
내가 행복해했던 시간들에 대해 희원도 같은 마음이었다는걸로 자꾸 나를 위로하기 시작한다.
택시를 타고 집에 아니 내 작은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또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한다.
혼자 있다가 또 어디론가 뛰쳐 나갈지도 모르는 내가 두려워 진다.
"도진아!"
"어?"
"안잔거야?"
"어 밖인데..너도 밖이야?"
"어."
"어딘데?"
"돈암동"
"20분이면 가겠다. 나 술 마셔서 차 못가지고 간다."
"응"
"춥더라도 택시 잡기 힘드니까 길에 나와 있어."
너무나 추워서 죽을것 같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한갑 사서 피우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보면 처음 피는 담배는 다들 콜록 거리던데
그냥 부드럽게 피워진다
연기를 마시는것도 아니고 입안에 그냥 잠깐 온기를 품었다가
연기로 내보내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
"이제 담배도 피냐?"
도진은 내 모습을 보고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은주도 같이 있었는지 택시 뒷좌석에 은주가 손을 흔는다.
"어 승지야 신발이?."
옆에 타는 나를 보고 은주는 눈이 커진다.
"어 그렇게 됐어."
내가 신발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도진은 앞에서 계속 궁시렁 거리고 있고
은주는 푹 한숨을 쉰다.
"동대문 들려서 신발부터 사야겠다 도진씨."
갑자기 내가 거지가 된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새 신발 까지 얻어 신고 셋이 간곳은 도진의 집이었다.
"나 너무 춥다. 우리 술 마실래?"
도진은 주섬주섬 안주를 챙기고 방에서 양주를 꺼내온다.
"술 끊었다더니 양주는"
"끊었으니까 술이 남아 있지 바보냐?"
"근데 너희 둘이 이 밤중에 어디서 모하고 같이 있었어?"
"뭐 그런게 궁금해?"
"이상한데서 나쁜짓 하고 있었던거 아냐?"
은주는 웃으면서 나쁜짓은 할줄 모른다고 하고 도진은 계속 눈과 눈 사이를
잔뜩 찌푸리기만 했다.
은주는 얼마든지 새벽까지 같이 마셔준다면서 술을 마시고 푹 자야 할것 같다고
자꾸 술을 따르고 또 따른다.
나는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내가 하는 말들이 천장에서 벽에서 들리는 것 같다.
"너무 재수 없어.
이제 막 노래 나오겠지? 딴여자랑 찍은 뮤직 비디오도 막 나올거구.
아 정말 짜증나겠다. 아 또 자기 사랑이 멋진척
잘난척도 할거 아냐? 아 정말 짜증나네."
"근데 왜 헤어진거야?"
은주는 정말 걱정 스런 얼굴이다.
"아 왜이렇게 물어 보는 사람이 많지?
정말 이유가 없어 근데..
그냥 헤어진거야.
나도 멋진 이유가 있었음 좋겠는데 없어. 쪽팔리게"
도진은 내내 아줌마처럼 말 없이 은주와 내가 흘리는 술을 닦고 마른안주를 찢늗다.
"한도진! 너 못생긴 마담 같아.얼굴로 안되니까 고개 푹 숙이고 주눅 든 마담"
"네 경북 칠곡에서온 한마담입니대이."
"푸하하"
은주는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데
도진은 진짜 마담 처럼 몸을 배배 꼰다.
"마담이 뭐 이렇게 빈약해. 더듬을 때도 없네."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너 술 진짜 끊었어?"
"응."
"왜?"
"이승지 7차까지 가서 또 엄한 놈 덮치면
말려야지"
갑자기 민망해진다.
화장실에 가는 척 일어서서 나는 도진의 방문을 열었다.
그날 아침이 생각나서 자꾸만 웃음이 또 눈물이 난다.
허락도 안 받고 남의 침대에 누워
그 날 아침 보았던 천장의 무늬를 세고 또 셌다.
"승지씨! 그만 좀 일어 나봐요.지루할라구해."
어느새 밖이 환하다.
그리고 내 앞에 희원이 앉아 있다.
"왜 안놀라요?"
"......"
너무 놀라서 별 할말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나쁜놈 한도진!
"승지씨 아직도 나 미워해요?"
"미워한 적 없어요."
겨우겨우 놀란 마음을 달래고 일어나 앉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럼 나 승지씨 한번만 안아줘도 되요?"
"그렇게 물어보는거 굉장히 재수 없는거 알아요?"
"왜 또? 아! 승지씨..재수까지 없어요."
"니가 안아도 괜찮다고 하면 내가 한번 안아주고
아니면 관두자 이거니까"
"그런거 아닌거 알면서."
"나 잘 몰라요."
"승지씨, 나 다 이야기 할게요."
"뭘?"
"어디서부터든 승지씨가 물어보는거 다."
"이제 궁금한거 없어요."
"아.승지씨 미안해요 정말 그렇다고 이사 가버리고 핸드폰도 없애버리고
너무하쟎아. 나 잘못했어요 한번만 봐줘요."
"왜 갑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어요?"
"그 땐 상황이."
"됐어요. 난 그런거 싫어요 상황에 따라서 필요하기도 하고
아님 한쪽에 비켜 있어야 하고 그런 사람 싫어."
문을 열고 나와 아무리 찾아도 빈 집에 있는건 희원과 나뿐이다.
"다들 출근했어. 승지씨."
"일단 나가요. 남의 집에서 뭐하는거야.
아무리 둘다 바보지만 너무하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인사를 하고 가야할지 난감하다.
얼마나 한참을 서있었을까
희원이 뒤에서 손을 잡는다.
언제부터 이사람 손이 이렇게 따뜻해진걸까
낯설다.
낯설고 또 낯설다.
"승지씨, 일단 어디가서 이야기 좀 해요 우리."
"희원씨!"
"응?"
"나는 싫어요."
"내가요?"
"아니. 내가 희원씨를 어떻게 싫어하겠어요.감히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근데 싫어요. 우리가 잘 말하던 대로 이 연애가 싫어요.
희원씨라면 백년이고 십년이고 일년이고 기다릴 수 있을줄 알았는데
일분도 기다리기 싫어졌어요.
그것도 이유도 모르면서 처분만 기다려 주십시요 하는 기분으로
기다리는거 그거 좀 웃겨요.
난 순수하고 거리가 멀어서 자꾸 배배 꼬여서 자꾸 더 심각해져요."
"그런게 아니라 승지씨."
"아니다. 그렇게 애매한 이유로는 헤어질 수 없는거니까
희원씨가 나한테 잘못한걸 굳이 묻는다면
그날밤에 한 번 정도만 대답 해 줬더라면
아니 대답하기 힘들었음 그냥 고개만이라도 한 번 들어줬음
좋았을텐데.
그럼 나 참고 견디고 기다릴 수 있었을지도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승지씨 그날 나 너무 술이 취해서 실수할까봐"
"그게 제일 큰 실수였어요. 아니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했어.
나는 힘들면 희원씨가 생각 나는데
나는 희원씨가 힘들면 제일 먼저 제쳐 놓는 사람이더라구
그냥 그만 할래요.
이제 생각하는것도 머리 아프고 가슴 졸이고 하는것도 너무 힘들어.
희원씨는 멋진척 쓸쓸한척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지옥 같아.
담에 다른 사람 만나서는 그러지 말아요.
물론 도진이나 은주 희원씨가 생각 한대로
사랑하는 남자가 연락도 나를 멀리 해서 그냥 화가 난거라면
여기서 못이기는 척 희원씨 손 잡고 싶어요.
그런데 안 그럴래요. 나 화난거 아니거든요. 나는 그냥 이제 그만 하고 싶어
복에 겨웠나봐."
얼굴을 보지 않고 뒷머리만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라
나는 잔인하게 솔직해 지는 중이다.
그 말이 아프게 하는건 희원 뿐만이 아니다.
내 마음도 아프기만 하다.
슬며시 희원이 손을 놓는다.
왜 손을 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말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난감해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느라 그런건지
알 수 없다.
한번쯤 그를 돌아보고 웃어주면 좋을텐데 볼 자신이 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는건지 아주 잘 달려진다.
달려가는게 아니라 그냥 달려지고 있는 그런 기분
희원이 따라 뛰어 오는 발소리가 얼마간은 들렸던 것 같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고 뒤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아주 한참만에 뒤를 본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바보"
그게 희원이 잡지 못할만큼 뒤도 안 보고 내달린 나를 향한 말인지
나 하나 잡지 못하고 뒤쳐진 희원에게 한말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냥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길바닥에 앉아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정말 다시는 안된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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