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보다 '실리' 택한 댓가로 희생된 선각자
소현세자 1612 ~ 1645 (34세)
소현세자는 왕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능이 아니라 원이다. 518년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는 27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가 있다. 왕, 왕비의 무덤은 능(陵)이다. 세자, 세자빈, 후궁의 무덤은 원(園)이다. 세력이 없는 후궁이나 어린 나이에 죽은 왕자나 공주, 폐서인이 된 자(연산군, 광해군, 폐비 윤씨등)의 유택은 묘(墓)란 이름에 만족해야 한다. 조선 왕조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이다. 그 중 능이 42기(북한 소재 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이다. 세자는 다음 대통을 보장받은 예비 대권주자이다. 그러나 아차 하는 순간에 대권을 날려버린 경우가 있다.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등이 그렇다. 소현세자는 예지를 갖춘 선각자였으나 권력 암투에 희생되었다. 그의 일생이 애석하여 추모의 정을 담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간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을 겪으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갈렸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미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청이 주도하는 영향권 내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상태에서 청과 대립하는 것은 수레를 막아선 꼴, 즉 당랑거철(螳螂拒轍)이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조공이란 이름의 형식적 주종 관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오십보 백보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이 볼모생활을 통해 체득한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몫이었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주중대사였던 셈이다.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8년 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불편한 타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에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소현세자의 귀국 짐 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지구본이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샐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게 되었다.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을 오가며 알게 되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더욱이 인조는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 챈 일부 정치 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낯선 이역만리에서 만 8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낸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 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 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려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부인이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를 죽인이는 누굴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신빙성이 낮다.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을 왕래하던 의관으로 추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고 처벌하지 않았다.
이런 야사도 있다.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와서 인조 앞에서 청나라에서 가져온 물건 늘어놓고 자랑하니 인조의 눈에 광기가 돌았다. 청태종이 하사한 벼루를 자랑하던 찰나 인조는 그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에 던졌다. 직격탄을 맞은 세자는 시름시름 앓았고, 약에다 독을 타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니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세자빈 강씨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나라 조선의 미래가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나고 서구 세계에 눈을 뜬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다. 이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따뜻한 가정(假定)이 없다. 서늘한 교훈만 있다.
소경원(昭慶園)은...
조선 16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원이다. 처음에는 소현묘라고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서삼릉 능역 안에 있다.
사적 제200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 면적 21만7701m(6만 5970평)
원손마마(김진우군)
첫댓글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추노'의 역사적시기가 소현세자의 사후입니다. 극중에 나오는 원손이 어쩜 그리 으젓하진...
옆에서 칼날이 흔들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얼굴모습과 눈빛을 보면 역시 왕가의 핏줄인 원손이구나~~~싶네요.
네, 저도 극을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원손에게로만 시선이 쏠리더군요, 보면 볼수록 ...
인간이 살아가는데 내 의지대로 안되는것이 소현세자가 그러하다 인조 임금이 어떻게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서 희생시킬수 있을까 ~~~~
소헌세자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매우 유동적이다 역사란 만약이 없는것이나 그가 살었다면 개혁된 나라를 만들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마음이나 백성의 마음을 읽지못한 그가 과연 왕노릇은 할수 있엇을까
감사합니다~~저도 추노를 열심히 보고있습니다 ~~저는 광해군이나, 소현세자, 사도세자,~~의 죽음이 애통합니다,
원손마마(이석견)은 후에 효종에게서 경안군이라는 군호를 받아 복위되었고, 22살에 죽었답니다. 역시나~~단명이에요.
석견의 후손{양자}이 결국 정조때 역모에 연루가 되니 인조의 잘못된 판단이 우리 역사를 비뚜러지게 만든 장본인중에 한사람이다
혹시 대한민국에 태여나지 말었어야할 대통령은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