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 산 성모 재속 가르멜회 단순1년차 예수의 가비
1. 복음 삼덕(정결 가난 순명)을 어떻게 실천(實踐)하고 있는가?
@. 믿음은 식별하는 첫 자리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은 이미 성령의 활동의 표시이며 더 성숙해 지기위한 빛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고린도1. 12,3)
복음삼덕은 하느님께 가기위한 덕(德)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기에 필요한 길이다. 믿음의 하느님을 체험하는 데는 차이가 크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가 불가능한 것이며 믿음의 방패의 덕으로 모든 악마의 불화살을 방어할 수 없다. 하느님은 당신이 너무 커서 너무 큰 빛이어서 당신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줄 수가 없기에 당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만든 것이 향주덕(向主德(信德; 望德; 愛德))이다. 이성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 믿음으로 당신을 감추신 것을 아는 것이 믿음(信德)이며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기에 너무 커서 희망이란 틀 안에 넣어 주신 것이 희망(望德)이다. 내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나의 의지의 결정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을 맛보는 것이 사랑(愛德)이다 나는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향주덕에 나아가게 됨을 인식하고 포기는 더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을 버리는 결단이라 생각하고 내 존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혹 같은 소유를 내려놓고자 안간 힘을 씁니다. 소유에게 소유당해 버린 나의 존재가 존재자체를 잃어버렸던 삶을 가르멜 산길을 기도로 오르내리면서 그 분께 대한 확실한 신뢰의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합니다.
2. 나의 성격(性格)에 대해서
@. 내성적이며 깊은 신앙의 힘으로 많은 것을 드러내기 보다는 홀로 내적침묵( 內的沈黙)을 통해서 기도하며, 인내심(忍耐心)이 강한 의지(意志)형이다. 삶의 방편으로 시작한 오랜 직장생활의 습기는 나의 삶의 목표를 이끌어 내기위한 강한욕구의 습기가 많이 배어있으며, 여린 마음의 소유자(所有者)로 상처도 잘 받는 편이나 드러내기를 싫어하며 자존의식(自存意識)이 강한 편이다. 세상속의 삶에서는 목표의식도 강하고 성취욕구도 강한 여성 CEO의 저력을 불태울 수 있었던 행운아(幸運兒)이기도 했기에 삶의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제 강한욕구까지도 복음삼덕의 길에 걸림돌이 됨을 인식하며 그 분께 나아가기 위한 열정으로 내려놓고 바꾸고자 노력한다.
오랜 시간 직장인의 삶의 자리에 버팀목 되었던 자존심은, 가르멜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이리 저리 넘어지고 찢기고 다치면서 이제 상처도 많이 아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세심증에 걸려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탈했다고 보아야하는지 살아남기 위한 비겁함인지 카오스(混沌)의 시기를 혹독하게 겪고 있는 시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도 부족한 나의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나도 그 안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짐을 많이 경험(經驗)하게 되는 것은 인생에 반세기를 바라보는 나의 인생의 여정 끝자락에서 하는 자아인식(自我認識)인지도 모를 일이다.
3. 이제까지 가르멜의 영적독서 한 서적을 써 보세요.
* 비교적 정독
야곱의 사다리
4. 가르멜 영성이 이해가 되는지?
@. 김 영문 브르노관구장님의 가르멜 영성강좌를 열 으면서 강의하셨던 가르멜 영성이란 주제의 강의록을 정리해보다.
가르멜(carmel) 영성이란? 영성(靈性)이란? 하느님의 체험이며 체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진정한 하느님의 체험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가? 영적인 체험은 성령(聖靈)의 활동이며 다양한 길과 방법이 많기에 분별과 식별이 필요하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영적(靈的)인 체험 분별(分別)과 식별(識別) 3가지 요소
1) 교회에서의 체험: 교회 안에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현존 체험인가? 2) 교회가 이해하고 지도하고 식별한 체험인가? 아니면 자기가 상상하고 생각 하고 관념적으로 알아낸 것인가? 3) 교회에서 전해주고 있고 설명해 주고 있는 체험인가? 교회 안에서 교회가 식별하고 교회에서 전해주는 체험일 때 영적인 체험으로, 하느님체험의 길로, 방법으로, 영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
가르멜 영성(carmel spirituality )은
가르멜 수도회에서 영적인 체험을 하고 하느님 체험을 한 영성(靈性)이다. 성인 성녀의 체험이며, 가르멜의 평범한 수도자들이 삶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기도 하며 가톨릭교회 안에서 분별하고 식별한 것, 하느님께 나아가는 생활 방식이 승인되고 인증되고 지도되었고 확인된 영성이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같은 스승은 절대로 필요하다. 체험에 대해 지도하고 분별해줄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스승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방법을 전하고 설명하고 있다. 성인들의 작품들,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수도자들의 삶으로 계속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가르멜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했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느님 체험이란 영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이다. 물론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갑작스럽게 예수님을 만나 주님을 알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체험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영적진보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영적진보(靈的進步)과정 영적진보는 하느님을 향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아간다. 영적진보(靈的進步)는 어느 산을 올라가는 이야기, 사다리를 오르는 이야기, 마음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는 듯 한 이야기로 말하기도 한다. 하느님 체험은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것 아니고 정상을 향해 회전하면서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과정으로 읽는다. 어두움과 빛이 다시 어두움의 교대와 반복이 있다. 어느 때는 내가 하느님께 의지적으로 나 아가려고 노력하거나 협조하다가 어느 때는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고 또 어떤 때는 이끌어주셨지만 내가 노력하고 협조해야 하는 이런 능동성 수동성을 통하여 번갈 아 가면서 나타남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旅情)이다. 영적 진보(靈的進步)는 1. 정화기(淨化期) 2. 조명기(照明期 ) 3. 일치기(一致期)의 세과정이 있다.
1) 정화기 (淨化期) 가르멜 영성(carmel spirituality)안에서 살펴보자면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1궁방~3궁방까지를 말한다. 성 십자가 요한은 능동적인 어둔 밤이라고 한다. 죄나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시기이다. 육신과 마귀와 세상 이 세 가지 악이 일으키는 죄나, 악의 유혹에 한 가운데 대항하고 싸우는데 나의 의지 노력과 하느님의 영의 도우심을 받아 혹은 세례 때 받은 은총으로 영의 도움을 받아 싸운다. 마음을 열고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 기도 속에서 우리 안에 새겨주신 하느님의 모상을 찾으려고 정화하는 때이다. 로마서 10장 사도바오로는 내 마음에 해야겠다는 것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합니다. 비참함을 느끼며 죄짓고 악습을 가지고 있고 부족하고 능력이 안 되기에 싸우지만 괴로움과 비참함을 느낀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 비참한 순간이지만 광야에 나아가서 싸우신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의 힘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싸움을 하는 것이다. 싸움은 외적의 적인 상대적인 것이 아닌 나 자신 본능 욕구 욕망을 만나게 된다. 또 하나는 세상사에 우리를 부추기는 가치이념 가치관이 과연 복음적인 가치보다 합리화시키고 미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과의 싸움. 복음적인가 살펴보면서 물리쳐야 하고 의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요한 1서에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결심 속에서 유혹을 피해야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함으로 육체나 죄로 타락한 세상에 억매이지 말아야 한다.
2) 조명기 (照明期 ) 빛의 길 4궁방~5궁방까지를 말하며 빛이신 하느님에 대해 체험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느님 받아드리게 되며 전에는 생각 이성 지식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마음과 가슴 전 존재가 하느님 받아들이는 시기가 빛의 시기이다. 믿음의 싹이 자라고 사랑의 꽃이 피고 빛이 나고 향기가 나서 밖으로 퍼지면서 이웃으로 전해지는 시기로 이웃들에게 빛과 향기를 전해야 한다. 하느님 체험은 말씀에 대해 믿음으로 다가가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음 열고 나 자신 포기하게 되고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봉사하게 된다.
3) 일치기 (一致期) 성녀 예수의 데레사의 7궁방이며, 성 십자가 요한의 변모(變貌)된 일치, 합일(合一)의 때. 영적인 진보(進步)의 단계, 완덕의 절정(絶頂), 성령체험(聖靈體驗),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시게 된다. 영적인 진보가 이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나아가는가?
가르멜 영성(carmel spirituality) 안에서의 영적진보(靈的進步)
* 십자가 성 요한의 영적진보 단계 감각의 밤> 능동적 영의 밤> 감각의 밤> 수동적 영의 밤> 영적 약혼> 영적 결혼> 변모의 합일
저서 ; 영적 찬가. 가르멜산의 등반, 어둔 밤, 살아있는 사랑의 불꽃
나라는 존재(存在)가 전부를 차지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충만한 빛을 향하여 나아 가는 것을 영적진보(靈的進步)라 한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 영적진보 단계
1~7궁방까지를 영적 진보의 단계로 본다. 천주자비의 글에서 물을 얻게 되는 비유로
1. 손으로 직접 푸는 단계 2. 도르레 이용해서 얻게 되는 단계 3. 수로를 통해 얻게 되는 단계 4.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셔서 얻게 되는 단계, 가르멜의 영적진보(靈的進步)의 내용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영적진보와 다를 바 없이 같이 가는 것이다.
가르멜 영성 안의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1. 하느님과 우정의 대화 (기도)
출발점은 하느님이 우리를 찾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 자서전에서 자신이 하느님을 알아보기 그 이전에 자신보다 더 절박하게 자신을 찾고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절실하게 찾고 부르신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주시는 은총 없이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영적진보 불가능하다. 강생(육화 肉化 ; Encarnacion)하시어 우리 찾아 겸손 되이 내려오시는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영적진보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찾으셨고 그래서 “예”하고 출발선에서 서서 걸어가는 진보가 바로 영적진보이다. 사랑하기에 찾으시는 하느님께 나아가면서 나의 슬픔과 고통 두려움 이야기하고 하느님이 원하고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 포기하고 이탈하고 진실한 친구처럼 신뢰하는 대화 나누고 보호해주시고 용기와 도와주심과 치유해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관계이며 이 만남이 바로 기도이다. 영적으로 친밀하게 되므로 그 분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이 용기를 갖고 나아간다. 성녀 데레사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면서 단둘이서 우정의 대화를 나누는것이 기도이다.” 라고 하셨다. 가르멜에서는 하루에 이 기도시간 을 두 시간 이상 한다. 기도시간은 새롭게 기도방법을 찾고 도전하고 부딪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가질 때만이 영적진보를 할 수 있다.
2. 관상적(觀想的)인 생활형태
가르멜의 영성은 관상적인 생활 형태를 갖춘다. 침묵과 고독과 기도는 관상적 생활에서 중요 요소이다. 이 뿐 아니라 관상에서 중 요하게 여기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격리 봉쇄되면서 고독과 침묵가운데서 하느님 찾고 극기 희생 전례 찬미기도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관상수도의 삶이다. 하느님을 향하여 더 진보하려면 우리 자신의 시간을 내어드려 하느님께 협조를 해야 한다. 피정, 고요한 시간, 영적 독서 등의 시간을 가질 때 영적진보로 나아갈 수 있다. 앞문은 세상을 향해 열어놓고 뒷문은 사막을 행해 열어놓아라. 앞문은 세상의 생활, 뒷문은 고독과 침묵의 생활 즉 나 혼자만의 시간,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어야 한다. 봉쇄 수도원 안에서는 이 활동이 꽉 차있어 반복하면서 기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관상생활적인 삶이며 마르타는 활동생활적인 사람으로 주위사람에게 시중드는 사람. 많은 걱정을 하고 부산을 떠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참된 활동도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나오는 결실이며 삶이다. 관상생활도 활동을 소홀히 여기면 문제가 생기고 기도만 하면 비판받는다. 관상적인 삶도 개인적인 기도 개인적인 사랑의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적 사랑, 아가페 즉 사회에 봉사와 사랑의 차원으로 연관되는 생활로, 기도를 하든 활동을 하든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해서 나오는 결실이다. 기도하는 것도 활동하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 그분이 내안에서 충동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그분의 사랑으로 해나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관상적 생활형태, 침묵, 고독, 기도, 영적독서, 모든 것은 시간(時間)과 나태(懶怠)함과 습관(習慣)과 싸워서 얻는 것이다.
3. 정 화 (淨 化)
깨끗하고 맑게 한다는 의미로 정화는 자기 자신의 인식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게 될 때 깨끗하고 맑게 해야 한다는 것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는 더 많은 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세상을 만난다. 그 만나는 세상도 거룩하게 사용할 수도 나쁘게 사용할 수도 있다. 세상은 감각으로 빠지게 하고 감각을 부추기고 이기적이고 개인적이지만 그 세상 자체보다 나 자신이 문제이다. 내가 세상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가?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고, 힘을 쏟아 붓고 있고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가? 에 따라 죄, 악, 교만으로 떨어질 수 있다.
1) 가르멜 영성은 능동적정화(能動的淨化)라는 말을 쓴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면서 죄악을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맑게 되려고 하려하는 것이다. 능동적인 정화(能動的淨化)로서 칠죄종을 분노, 질투, 나태, 교만, 탐욕, 탐식, 인색을 말하는데, 죄는 세상체험에서 일어난다. 좋은 것을 체험할 때도 나쁜 것을 체험했을 때도 죄가 생겨난다.
* 분 노 (anger-憤怒) - 좋은걸 기대했는데 불쾌한 체험하게 되었을 때 화가 나게 되며. * 질 투 (jealousy-嫉妬) - 좋은 체험이 나에게 있기를 바랐는데 저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 질투가 생김. * 나 태 (laziness-懶怠) - 불쾌한 체험이 너무 많아 의욕을 잃게 되고 죄에 이끌리게 되고 영적인 것은 무감각 하게 되는 것. * 교 만 (pride-驕慢) - 만족하고 좋은 체험을 했는데 내가 능력과 재능이 있어서라고 여김으로서 다른 사람의 것 하느님의 것을 무시하고 반항하면서 일어남. * 탐 욕 (greed-貪慾) - 좋은 체험인데 자꾸 끌리게 되고 갈망하고 집착하게 되어 무질서하게 되는 것. * 탐 식 (gluttony -貪食) - 먹어 본 것 중에 좋은 음식인데 무질서하게 또 한 번 찾게 되는 것. * 인 색 (stingy-吝嗇) - 좋은 것을 체험하고 소유했고 그러자 욕망이 생긴 것. 소유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
* 십자가 성 요한은 체험한 좋은 기억까지도 깨끗하게 정화(淨化)하라 한다.
무화(無化) 또는 정화(淨化)의 작업은 나의 노력과 수고가 집중되는 때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힘으로 할 수 있으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두려움을 갖고 세상과 육체에 대해 극기를 하면서 정화(淨化)를 해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이나 쾌락을 희생하면서 집착(執着) 하려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영적으로 유익한 것에서 맛을 들일 때 완성된다. 영적으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겸손(謙遜)하지 않으면 교만(驕慢) 으로 떨어지며, 세상 끝날 까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백성사 성서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인식 (認識)하면서 겸손(謙遜)하고 참회(懺悔)하며 회개(悔改)할 때 효과적으로 정화(淨化) 할 수 있다.
2) 가르멜 영성은 수동적정화(受動的淨化)라 한다.
영성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능력은 기억(記憶), 이해(理解 =지성, 이성), 의지(意志)인데 이세가지 능력으로 기도생활하고 영적 진보를 해야 한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1궁방 2궁방 3궁방에서는 이 세 가지를 가지고 활용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세가지로 하느님의 이미지 생각하고 하느님의 이미지 간직하고 배우면서 영적 진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로서 상본을 보면서 거룩함 기억하고 묵상과 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성서의 장면을 보면서 묵상과 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성서의 한 구절 떠올리면서 무슨 뜻인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추리하면서 영적 진보를 향해 시작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상본 성경장면 성경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가졌던 하느님의 이미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성 요한도 이런 표상 이미지 기억 이해하고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생활을 하는데 이것을 하나씩 벗어버리고 정화될 때 믿음으로 넘어갈 수 있고 믿음의 어둔 밤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 상본으로 기도할 때 잘 되면 계속한다. 하다보면 거기에 대한 맛과 느낌이 사라질 때가 있다,
성녀 데레사의 말씀은 기억과 이해와 의지의 기능이 멈춰지면서 하느님에 의해서 하느님에 따라서 하느님께로 새롭게 변모되는 단계가 있다. 이때에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때인데 말이나 논리로 상황을 표현할 수 없는 때가있다. 십자가 성 요한도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우리의 능력(能力)이 사로잡히는 수동적인 정화(受動的인 淨化)를 말하고 있다. 가르멜 영성 안에서 하느님체험을 이야기할 때 신비현상 보았다. 들었다. 나타났다. 등이 하느님의 체험, 영적으로 나아간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성인 성녀들의 영성 안에서는 그게 아니고 하느님 체험과정은 그런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능력 의지 지성 이해 기억이 점점 어떻게 사라지고 잠자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로잡으면서 체험하게 되는가? 가 하느님의 체험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십자가 성 요한은 하느님체험은 특별한 은총인데 이런 보화를 줄때는 마음에서 평화와 고요를 누리라고 한다. 다른 것에서 집착하지 말고 내 힘을 가지고 다시 기억하려고 하고 내 지성 의지 이해를 가지고 파악하려고 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불안해지고 허전해지는 것이다 고 함.
수동적 정화는 하느님의 특은인데 내 힘으로도 할 수 없고 이해도 안 되고 내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기에 고통스럽다. 이때 하느님께서 효과적으로 나를 하느님께 이끌어간 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할 수없는 고통 시련 내 의지 내 뜻 데로 안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영적으로 진보될 수 있는 소중한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 가운데 하느님을 원망하고 반대하고 대립하나 그러나 그때가 수동적으로 맡겨드릴 때이다. 내가 포기하고 이탈하고 하느님께 신뢰할 때 오히려 가까이 갈수 있다는 것이다.
- 신앙체험은 글 조각 그림으로 예술로서 표현되기도 하며 우리의 체험 즉 신앙인들의 체험과 는 다르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체험을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체험이 신앙체험이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받아드리지 않으면 체험은 불가능한 것이다.
4. 부정의 길 (부정신학적인 체험의 길) 영혼 안의 하느님 하느님을 만나는 길
첫째는 긍정신학적의 길에서 우리의 체험은 긍정신학적인 바탕에서의 체험이며 우주에 당신을 드러내신 것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 긍정의 길로서의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은 선하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주심, 우주 안에서 우주를 향해서 우주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내신 하느님의 움직임 때문에 온 우주와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 드러내고 있기에 우리가 체험하고 있다는 것. 예로 성체 성령 성수 향유 분향 성화 성음악은 비록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에 있는 것이지만 하느님을 섬기도록 쓰이는 것으로 전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이끌어주고 하느님의 모습을 체험할 수가 있다. 칠성사 준성사 주교, 사제, 부제도 하느님의 빛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기도하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하느님의 빛을 비춰주기도 하는 역할을 한다. 수도자 평신도들도 하느님의 빛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더 정화하도록 빛을 비쳐주는 역할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냄으로서 그 빛을 통해서 정화하고 깨우치기도 하고 영적으로 더 나아가고자 노력 한다. 때로는 부정적인 어두움을 비쳐주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하느님의 빛이 있다 하느님을 보여주고 있다는 긍정적인 길로 나아갈 때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온전히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둘째는 부정신학의 길로서
우리가 하느님 안으로 하느님을 향하면서 부정신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체험 하는 것으로 부정 신학적인 측면에서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로서, 가르멜의 길은 이런 방법의 길이다. 하느님은 밖으로도 드러내셨지만 은밀하고 감춰져 신비 안에 숨어 있어서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서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 안으로 움직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체험을 하려면 감각 물질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뛰어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혼속의 은밀하게 숨어계시는 영혼속의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것이 가르멜의 영성이다. 물질이나 감각 세계를 뛰어넘고 초월하고 부정해야 되고 그러면서 본질적인 우리 영혼안의 하느님 추구하는 것이다. 내 영혼안의 하느님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나는 분명하고 완전하게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드러낼 수가 있어 하느님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죄와 악과 나쁜 생각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에 순수하게 하느님이 사시는 궁전이 있다. 고 하고 십자가 성 요한은 하느님을 만나려면 영혼이 캄캄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부정신학의 길은 하느님이 생각 지식으로 만나는 분이 아니고 알 수 없는 분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작업을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성 디오니시오는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지금까지 만물을 통해서 질서를 통해서 거룩한 모습을 발하는 이미지를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하느님을 만나기위해서는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 뛰어넘어 그분을 탐구할 때 초월자 하느님을 한걸음씩 올라가면서 만나게 된다고 함 교회안의하느님체험을 긍정신학의 길은 성서 성체 성혈 성유 성수를 통해서 만날 수도 있고 부정신학의 길은 그것을 뛰어 넘어서도 만날 수 있다.
성체를 영할 때 감각으로는 밀가루 맛인데 밀가루라는 체험만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얻겠는가? 밀가루라는 물질을 뛰어넘어 초월해서 그분이 희생하고 몸 바치면서 제자를 위해 자신을내어 주는 사랑이 있다는 믿음의 세계의 이야기를 알아야 성체영할 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표상, 상층 이미지를 부정하면서 나아갈 때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지만 완전한 하나가 된다. 상본이나 성서장면의 이미지를 뛰어넘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큰 통나무로 조각하는데 작품은 드러나지 않으나 끌 정으로 나무의 겉을 불필요한 부분을 조각하고 버리면서 쳐내고 부정하면서, 점점 중심 안으로 들어가면 깎아내면서 숨어 있던 보이지 않던 작품을 만나게 된다.
영적진보(靈的進步)도 하느님을 만나는데 정화하고 없애버리고 포기하고 이탈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 하느님 뜻이 아닌 것을 벗어버리고 던져버리면서 포기하고 이미지도 삶도 개념도 깨지면서 영혼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가르멜 영성 안에서 하게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세상에서 만나는 하느님 모습이나 일이나 안녕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사랑의 목표는 한마음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이 하느님을 알고 그리워하는 것이기에 내가 직접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서 단순하게 나아갈 때 하느님이 이끌어 주신다. 부정신학의 길은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면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신비체험도 거부하고 벗어나게 되면서 계속해서 그분과 하나 될 때까지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부정신학의 길은 영혼안의 하느님을 찾는 길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다 .머리로서도 아니고 기억의지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지만 믿고 보이지 않지만 희망을 걸고 나를 사랑해 주시는 그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는 것이 영적인 메마름과 어둔 밤이다.
5. 영적인 메마름과 어둔 밤이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진보는 때로는 풍요로움보다는 부족하고 허전하고 모자란 마음을 가지게 되는 때가 온다. 영적 메마름이 오는데 하느님을 향해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으나 나는 아무 위로도 맛도 느낌도 없다.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내가 충실성이 부족하니까 겉으로 열심히 했지만 내 마음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살지 않았을 때이며 또 하나는 정말로 하느님께서 당신과 합일을 이루기(일치)위해 은총으로 주는 경우가 있다. 신앙의 맛도 없고 미사참례, 묵상, 기도 때에 느낌도 없고 잘 안될 때 위로도 없을 땐 대죄가 있거나 자기가 성실하게 살지 못했을 때이며 자기 탓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마름은 십자가 성 요한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하느님의 일에도 무미건조하고 피조물의 일에도 메말라 있을 때이며 성무일도 미사 피정에도 무미건조하고 드라마 스포츠 사람 만남 등 피조물의 일에도 흥미 없을 때. 두 번째 신앙생활에 메마름이 전에 지은 죄 때문일까 하는 부족함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프고 뉘우침이 오고 그래서 하느님을 더 애타가 찾고 목말라하는 상태로 미사 봉사단체 등이 맛은 없지만 계속해서 만나고자 노력하는 애탐이 있을 때이고. 세 번째는 기도 해 오던 방법의 변화로 기억(記憶) 이해 지성(知性) 의지(意志)로 상본이나 성서장면 떠올리며 기도해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머리 쓰는 것보다 평화 속에 그 분 앞에 머무르고 싶어 그래서 관상으로 하느님께서 넘어가게 해주실 때 하느님이 주시는 메마름이 온다. 이런 메마름은 하느님이 주시는 메마름인데 이런 메마름은 또 바뀐다.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 성 요한은 인내하고 신뢰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계속해야하고 관상적(觀想的)으로 바꿔지는 때이므로 하느님 안에서 쉬어야 한다.
영혼의 어둔 밤
무한하신 알 수 없는 성체 성혈을 통해서 오시는 분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으로 들어가서 알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러 들어가는데 하느님은 너무나 멀리계시고 나의 한계를 넘은 무한 속에 들어가 계시기에 내가 애쓸수록 괴로워지고 아파지고 유한한 인간존재로서 힘에 넘치는 경험이기에 어두움을 경험하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자하고 정화하고 하느님을 찾아 나아가는데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왜 어두워져야하고 괴로워져야 하고 아파야 하는가?
십자가 성 요한은 질문하고 대답한다. 첫째는 하느님의 지혜는 높아서 인간의 역량을 초월하기에 어두운 밤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하느님을 향해서 나갈 때 나는 오히려 더러움과 낮아진 것과 비참함을 만나기 때문에 괴롭고 아프고 캄캄하다. 어두운 밤은 인간이 한계가 있고 죄에 가득 차 있기에 생긴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내 죄가 깊이 더 생생하게 깨닫기 때문에 아프다. 가장 밝은 빛 태양가까이 갈수록 눈이 아프고 보이지 않는다. 돌아서서 나 자신을 보게 되면 그림자가 까맣게 보인다. 밝은 빛 전구 에 가까이 갈수록 그림자가 짙어진다.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사는 사람들은 죄가 어둡게 느껴지지 않으나 하느님 가까이 갈수록 죄가 더 까맣게 보이기에 괴롭다. 십자가 성 요한 은 어둔 밤의 경험은 유익하고 좋은 거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알고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더 편안하고 겸손해진다고 한다.
봉사에 대한 칭찬 등 보상으로 열심히 할 때는 교만해져 있을 때다. 하느님께서 그런 맛을 끊어버리신다. 비난이 들어올 때 비참해지지만 하느님께 진보하는 영혼이라면 겸손해지기 시작한다. 순해지기 시작 한다 내 뜻대로 다 되는 게 아님을 알고 순수해지고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하느님께 바치고 말씀대로 사는 순명의 삶 살게 된다. 어둔 밤의 길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 만나기 전 밤을 지나 새벽빛이 오기 전 가장 고통스러운 때라고 성 요한은 말한다. 견딜 수 없는 허무함, 긴 세월을 하느님을 위해서 찾으면서 살았는데 만나기전 허무감, 인간으로서 죄인으로서 남아있는 것이 있고 하느님의 보화, 하느님을 받아드릴 수 없는 이런 사실이 느껴져서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완전히 내어 주지 않는 삶이 아니면 어렵다고 말한다.
6. 하느님의 황홀 (관상 觀想) -하느님과 마주한 단계
성 디오니오스는 황홀한 상태를 영혼이 자기 밖으로 나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탈혼, 관상에 이르는 것이라 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 이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 순간이지만 이것을 경험한 우리는 진리를 그분을 그리워하면서 한순간이 영원히 그분을 관상하고 살아간다. 히말라야 등반 시 정상을 향해 가는데 어느 정도 까지는 자기 능력으로 올라가나 한참 가다보면 8천 미터 이상은 하느님의 땅 영역이다. 그분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내려와야 한다. 악천 우, 안개, 정상에 올라갔더라도 황홀함이 아니고 사진하나 찍고 어떻게 내려가나 걱정 때문에 아무생각도 안 난다고 한다. (내려오다 죽을 수도 있으므로). 정상에 선다는 하느님이 해주신다. 하느님의 영역. 성녀 예수의 데레사도 이런 은총은 하느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만 주신다. 고 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포기할게 아니라 협조하고 준비하면 어느 때라도 주신다. 영적진보 정상에서는 십자가 성녀는 성령의 열매를 말한다. 환희 기쁨 만족 평화 지혜 정의 굳셈 애덕을 체험하게 된다. 이야기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합일을 이룬 영혼은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으로 돌아와 교회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 고 한다.
7. 영혼의 관상생활 (觀想生活)
합일을 이룬 영혼은 정상에서 체험했던 하느님을 체험한 영혼들은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큰 체험을 했다 하드래도 아내 자녀 함께 사는 가족형제들이 있고 세상에서 살기에 만나고 싶은 그리움만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안에서 쉬게 될 때까지 휴식이 없다. 계속해서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고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괴로움 불안함, 본향이 아닌 이곳에서의 외로움 속에 살아간다. 만족이란 없으며 하느님 그 분 만이 만족이다 이런 영적진보 정상에서 성 십자가 요한도 목말라 하고 그리워하고 괴롭지만 하느님을 찾는다. 환희 기쁨 만족 평화 지혜 정의를 느끼고 하느님과 합일을 이룬 영혼은 세상으로 되 돌아와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노력한다. 영혼의 괴로움을 성 아우구스티노는 조명이 바다 건너편에서 비치는데 건너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건너갈 수 있게 하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나무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바다를 건너서 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강생(육화 肉化 ; Encarnacion)을 통해서 눈으로 보았고 만나기도 했고 아는 예수그리스도 중재자에게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분의 인성(人性)을 사랑하고 예수에게 희망을 두고 예수님의 말씀 진리에 믿음을 가지면서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희생하고 구원의 사도가 되어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는 이 세상에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긴 여정이다.
8. 세상에서 활동 (사도직 ;司徒織)
세상에서 활동사도직 도달했든 도달하지 않았든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고자하는 영적진보는 나와 맺어진 이들과 함께 나아간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사도직 활동은 은사들이 된다. 사도직 은사는 활동을 해야 되기도 하지만 그냥 물처럼 샘처럼 흘러 나가는 것이다. 내가 성화되는 것과 영적으로 진보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보살펴줄 수 있도록 그 들이 성화되도록 활동해주는 분위기에서 해준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도직으로 활동으로 나아간다.
십자가 성 요한은 하느님께 향해서 나아가는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는데 순수하다면 조그마한 일이라도 아무 일 안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위해서나 인간을 위해서나 다른 모든 일을 합한 것 보다 더 소중하고 유익한 것이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강물이 흘러 바다로 내려갈 때 물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것을 끌고 내려간다고 말한다. 장마 때 비닐 깡통 스티로폴 병 온갖 쓰레기를 끌고 간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은 죄인들 불쌍한 영혼들을 마음에 품으면서 하느님께 끌고 간다. 영적진보가 하느님을 향해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관된 사람들을이 끌고 나의 가족 자녀 내가 만나는 사람들 기도해주기로 한 사람들과 내가 봉사하고 도와주는 사람들 잊어버리지 않고 하느님께 끌고 데려간다. 이런 영성생활을 할 수 있는 비결과 핵심은 질문을 가져야 한다.
영적인 삶을 살기위해 가져야 되는 질문
1,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라. 죽음이 나에게 얼마나 가까이 와있는지 살펴라. 2, 무슨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는 가를 살펴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가? 3, 나의 종교가 얼마나 깊이 있게 내가 살고 있고 얼마나 넓게 사람들을 포용하면서 살고 있는가? 살 펴라. 본당만 왔다 갔다 하느냐? 영적진보를 위해서 정화하고 하느님 의 빛을 받으면서 살아가느냐? 나의 종교가 내가 아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 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봉사하면서 포용력 있게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좋 아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느냐? 4, 이웃에게 해(害)를 주거나 오염(汚染)시키거나 고통을 주는 일은 없는지 살펴보라. 5,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 풍조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6, 살다보면 어려움과 시련에 좌절하는가?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고 그쪽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자율성은 가지는가? 무슨 의미인가? 7, 나의 신앙생활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 내 마음의 소중한 힘을 주는 어떤 보화 (寶貨)가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가르멜의 성인 성녀가 이야기 하는 길에서 그 분들이 만났던 유혹도 만나고 악습도 만나고 절연? 중에 만났던 고뇌와 어둠과 빛을 만난다. 그러나 나는 매일 새로운 길이다. 희망이 있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발자취가 아닌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는 믿음의 길이다. 그분의 발자취로 남았으면……. 정화 이탈 고독의 작은 오솔길이 보여 지면 도움이 된다. 기억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하느님 사랑이 은총의 물결이 다가갔으면 나 자신의 비참을 만나서 이 세상의 가치관과 사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결딴을 내는 의지의 싸움이다. 나를 강타하면서 흔들어 줍니다. 선택하고 의지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어느 날 꽃잎은 지고 바람 불어 세상 떠난다 해도“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보고 싶어 했던 그 분의 품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끝.
5. 정신기도 30분은 충실히 지키는지? 묵상(黙想)에서 느끼는 문제는 무엇이 나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지요?
@. 정신기도시간은 성무일도와 매일 복음묵상을 포함하면 1시간정도 깊은 묵상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저녁시간 10시를 묵상시간으로 정하고 예수의 테레사 성녀와 십자가 성 요한의 흉상(胸像)을 보고 앉자있노라면 나를 이 카르멜의 완덕의 길을 향한 여정으로 이끌어주신, 그 분의 자비로움에 깊은 감사함이 가득입니다. 스페인 알바데 또로메스 - 성인의 나라, 태양의 나라, 시인의 나라로 초대하신 그 분과의 첫 만남에서 그분의 심장소리가 간직되어 있는 성녀 예수의 테레사상과 세고비아의 수도원 원장으로 계시던 수도원 기도동굴에서 만난 성 십자가의 요한 그 분의 흉상(胸像) 앞에, 하루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모두 꺼내어 놓고, 이 시간 그분 앞에 깊이 머물다 보면 어느 새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분함과 억울함, 견딜 수 없었던 고통과 모욕, 나를 조금씩 병들어가게 하는 멸시받음이 카르멜 산길에서 이리 저리 뒹굴다 보면, 무겁게만 느껴지던 삶의 무게가 조금은 빛도 바라고 그 무게를 덜어내는 느낌입니다. 이 소중한 시간에 오성(悟性)의 여행을 ........ 보잘 것 없는 나의 심연에서 오늘의 나를 기다려 주신 주님께 오롯한 만남을 청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성령과 함께 가르멜 성인 성녀가 주시는 위로(慰勞)라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더 낮은 곳에 머물기를 묵상합니다. 그분을 찾아 늘 떠나 헤매 찾던 기도여정을 카르멜 산길을 들어서고 난 뒤에야 내안에 잔잔하게 머무시는 그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묵상시간은 참 자아(自我)와 대면하는 만남의 시간인 것입니다. 내 안에서 광야의 예수님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악마와 만났듯이, 이러한 타인과의 만남이 사실 내 안에 억압되었던 자아(自我)가 다른 이에게 투사된 내 자신과의 만나는 투쟁을 지켜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또 이시간은 참 자아(自我)를 만나는 시간이며 그것은 그 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혼자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인식하기에, 가장 큰 인생의 만남인 참된 진리를 만나는 지금시간이 묵상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래 모습이시기에 그분을 만나 그분을 닮아 가는 것이 참된 자아(自我)를 찾는 길이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1. 나는 내일 태양을 향해 일어 설수 있는 힘이 여기서 충전됨을 느낍니다. 성 십자가 요한의 영성을 만날 수 없었다면 이제 인생의 다함의 아름다운 노을을 준비하는 여정에 심한 자괴감과 모욕감의 상처로 궁성(宮城)안의 영혼의 빛을 얼마나 흙탕물로 뒤범벅 시켰을까? 얼마나 많은 아픔을 시간을 과거로 후퇴하며 살아냈을까? 이 어둠과 두려움의 시간에서 소중한 묵상기도를 통하여 나를 이끌어 내신 주님! 오늘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토니오 브라보 신부님의 고백을 저도 함께 고백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6. 재속 가르멜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
@. 아직은 내가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의 시간이라 생각됩니다. 훌륭한 가르멜의 성인 성녀의 영성을 따라 그 안에서 주님을 찾고자 하는 학습의 길과 인식의 길, 그리고 삶의 길이 아직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때로는 많이 두렵고 때로는 늦게 찾은 가르멜 산길을 오르려는 용기에 힘겨운 부분이 많은 것 같지만, 완덕의 산을 향한 등반에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가르멜 등반길에서 좌절하지 않게 선배들의 사랑스런 이끌어줌이 있기를 희망하면서 .......
7. 수련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 가르멜 재속회에 첫입회해서부터 가장 가깝게 다가가보고 싶은 종신서약 선배의 모습이었습니다. 첫 양성담당이었으면 하는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난 뒤였지만........내적. 외적인 드러냄이 서울 가르멜산 성모의 수련장은 재속 가르멜회의 준비된 수련장의 대표적인 상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갈한 갈색에 스카풀라의 깔끔함까지 지닌, 열심히 준비하고 하나라도 더 이해시켜 주려는 마음과 정성이 가득 넘침을 봅니다.
가르멜의 기도의 정원에 입문자에게 삶과 기도의 내면화에 애쓰시는 모습과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가 넘 좋습니다. 내면의 마음을 볼수있는 수련과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이 감사합니다. 가르멜의 영성을 가르치는 양성담당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큰 힘이라 생각됩니다. 귀한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양성기간은 더 기다려주고 번데기가 살아남을 만한 환경만 지켜주며 스스로가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나올 때 까지 지켜주는 시간이라 생각됩니다. 부족한 번데기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고 지켜보며,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는 어려운 시간 - 애벌레가 나오기 쉽게 껍질을 인위적으로 벗겨주면 그 몸에서 진액이 나와야 미끄러져 이탈이 되어 나비가 되므로 진액이 없어 죽는다고 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동안 입고 있던 세속의 재미스런 껍질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 분이 주시는 가르멜의 갑옷으로 갈아 입기위하여 고통과 모욕과 멸시의 삶의 진액을 내 놓으며 거듭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배우는 자”라는 뜻의 “제자(disciple)”라는 단어의 고전적 의미는 수련(discipline)이라고 한답니다. 가르멜 정원에서 그 크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는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중한 수련과정에 좋은 만남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수련 2년차 과정은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지도 부탁드립니다.
8. 성무일도는 잘 하고 있는지요.
@. 매일하는 성무일도의 방법은 부족하지만 끝없이 스터디해야 될 것 같고, 성무일도 목표를 수련기간 2년차 중 독서기도를 모두 정독하려 했는데 양적으로 많이 부족했습니다.
고유 축일표를 찾아하지 않고 연중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성인축일 기념일에 성무일도가 혼돈될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성강좌 다녀와서 정성으로 다시 가르멜 고유축일표 뽑아 카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 성무일도를 시작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차분히 기도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직 정화되지 않은 어둠이 짖은 영혼에게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지난시간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
첫댓글 잘 다듬어서 글을 올려야 된다는 마음에
그동안 자료집에 쌓였던
글을 올리면서
부족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끄러움이...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것....
뒤 돌아보면 볼수록
덜읶은 신선함이 머물러 있기에
더디하는 바람이 되어준다.
뒤 돌아봄은 겸손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