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구름나그네
작성일: 2001-09-30
9월 20일 목요일 하루 점도록 햇빛 못봄
사람이란 게 참으로 신통방통한 존재란 말이여.
어젯밤에 그렇게 난리부르스를 치고 비를 맞아 가면서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소나기가 내리고 나서도 가랑비는 계속 내렸는데
비닐로 침낭을 말고 달팽이처럼
그 속에 들어가서는 날 잡아잡수 하고 개겨 버렸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지.
피할 곳도 없지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닐 때는 배째라 하고 개기는 게 약이란 걸 난 알아!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다가 깨어보니 5시30분이나 되었어.
아직도 어두컴컴하고 비는 여전히 조금씩 내리고 있더라구.
그런데 달팽이가 되어보니 엄청 아늑하고 포근한 것이 영 일어나기가 싫은거야.
비닐 한 장이 이렇게도 긴요하게 쓰일 줄은 나도 몰랐어.
어둡기도 하려니와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선뜻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아 가만히 누워서 눈알을 굴리며 어젯밤의 일들을 더듬어 보았지.
말이 좋아 비박이지 이건 정말 인간이 할 짓은 아니야.
그저께처럼 굴이라도 있거나 비바람을 피할만한
최소한의 여건이라도 갖추어 졌다면 그래도 비박을 해볼 수 있지만
허물어진 무덤 앞에서 거적대기 하나 깔고 침낭만 달랑 꺼내놓고
잠을 잘려고 덤비는 짓은 너무 무모한 모험이야.
멧돼지나 늑대같은 숭악시런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면 내가 이길 것 같애?
어제는 시원치 않은 짐승들이 다녀가서
문방구에서 파는 불꽃놀이 화약으로도 약발을 보았지만 만약 멧돼지나
늑대같은 못덴 짐승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면 나는 싸워보기도 전에 기절했을거야.
나 약한 남자잖아!!!
그리고 비가 조금 왔으니 망정이지 무지막지하게 쏟아졌다면 나 우예 됐으까이?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었던 것 같아.
앞으로는 비박을 가능한 한 억제하되, 불가피하여 비박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비바람 막을 장소는 확보해놓고 비박을 해야 되겠더라구.
이런 안전관리 이론을 잘 알면서도 가끔씩 헷가닥 하는 것을 보면
내 짱구도 이제 바이러스가 침투되어 판단력이 마비되어 가는 모양이야.
주위가 조금씩 밝아오기에 일단 순대채우고 패킹을 한 다음
7시가 되어서 희양산을 향하여 오르기 시작하였지.
이곳은 봉암사 스님들의 청소구역 제1호인지
너무너무 깨끗하여 표지리본은 고사하고 그 쪼가리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어.
내 심술보가 슬슬 워밍업 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비장의 왕리본을 꺼내게 되었지.
내가 초창기에 멋모를 때 한빛은행 리본보다
더 큰 표지수건(?)을 몇 개 만들었는데 그걸 쓰자니
환경론자들에게 집중공격을 당할 것 같아서 배낭 한쪽 구석에 짱박아 두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걸 써먹을 기회를 만난거야.
봉암사 스님들에게 욕을 얻어먹기로 작정하고 그동안 짱박아 둔 것 여기저기에다 막 갖다 걸었어.
아마 지금쯤은 봉암사 스님들의 걸레나 발딱개로 쓰이지 않을랑가 모르것네.
그런데 스님들이 아무리 표지리본을 떼어내도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지 그런다고 희양산을 두고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반질반질하여 사실 표지리본은 없어도 될 정도였어.
그런데 산을 조금 더 올라가니 내가 머물렀던 지름티재 부근만 구름이 자욱하지
다른 곳은 옅은 구름이고 비가 온 흔적도 없는거야.
으~이~씨!!! 왜 하필이면 나 있는데만 구름끼고 비가 왔냐 말이여!
내가 구름나그네라서? S총무님 되게 좋아하시것다!!!
그래! 그녀를 만족시키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자!!! 까짓 거!!!
처음 얼마동안은 다른 곳의 암릉과 비슷한 정도의
약간 급경사 오르막이었지만 정상에 가까워지니까 이건 거의 직벽에 가까운 암벽등반을 해야했어.
아주 위험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로프를 설치해도
위험한 곳을 있던 로프까지 모조리 짤라 놓았더라구.
이건 살인행위에 가까운 만행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비인간적 처사야.
빈몸으로도 오르기 어려운 곳에 도둑놈 짐보따리만한 배낭을 메고 오를려니까
무게의 중심이 잡히지 않아 이리저리 쏠려 하마트면 스링을 먹고 절벽 밑으로 추락할 뻔하였어.
두세번 그런 위기를 겪고 나니까 구구단, 개, 놈, 쌍시옷이 저절로 막 나오더라구.
어떤 문디자슥이 사람 목심줄을 다 짤라 놓았노? 칵! 지기뿔라!!!
정말이지 자다가 꿈을 꾸면 가위눌릴 정도로 무서운 절벽이었어.
내가 아는 일년치 욕을 한꺼번에 해치우며
7시50분 드디어 갈림길에 도착.
안개가 자욱한데다 이정표도 표지리본도 없어
어느 쪽으로 가야 정상인지 감이 안잡혔지만
오른쪽에 출입금지 경고판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그쪽이 정상이라는 것을 바이러스 먹은 내짱구가 알아 차린거지.
그렇게 힘들여 오른 산의 정상은 별로 대단하지 않았어.
그냥 앉아서 노닥거리기 좋을 정도의 판판한 바우덩어리가 몇 개 있기는 하더구만.
구름에 가려서 그 대단한 봉암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여기에 못올라 오게 막는 이유가 도대체 뭐냔 말이야?
술주정뱅이들이 가끔씩 한잔 걸치고 봉암사가 떠나가라고 고함을 쳐서
수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무예에 능통한 몽디스님들을 보내어 죽자사자 막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막을 이유가 없을텐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호로 봉암사가 눈에 띄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보였더라면 나도 온갖 육두문자를 다 써서 천하의 잡놈이 될 뻔하였어.
8시10분에 희양산 정상을 출발하여 희양산성을 지나 이화령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였어.
비가 내리지는 않았으나 하루종일 구름이 많이 끼어서
그 빌어먹을 희양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
1시간쯤 가다보니 시루봉 안부라고 하는 곳이 나오는데
야영을 할만한 곳도 있고 비닐천막도 철거하지 않은 체 있어
그 정도라면 아주 훌륭한 비박지가 되겠더라구.
어제밤에 이 정도의 시설(?)만 되었어도 안락한 밤을 보냈을텐데 정말 아깝다.
9시20분 배너미평전에 도착하니 넓은 초원이 있고 서원대학교에서
고 지현옥 산악인을 추모하는 하얀표지목을 세워 놓았어.
그곳에서 쉬다가 또 못볼 것을 보아 버렸네.
"괴산의 명산 시루봉(914m) 여기서 20분소요"
시루봉도 대간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명산이라는데 안 가볼 수가 없지.
몰랐다면 그냥 지났겠지만 알고도 그냥 지나갈 내가 아니지!
내가 귀경하는 걸 얼매나 좋아하는 인간인디!
고상보따리 길가에다 확 집어 내불고 헬기장 위로 난 길을 지나
시루봉 전망대까지 냅다 뛰었더니 10분정도 걸리더구만.
왼쪽으로 빌어먹을 희양산이 구름에 가려 빛나리 반짝대가리만 보여주는데
어떻게나 못생겼던지!
아무리 보아도 정말 못생긴 놈이다!!!
시루봉 전망대에 다녀와서 조금 쉬었다가
10시에 배너미평전에서 출발.
약간의 암릉과 고도오차가 심한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다
10시45분에 이만봉(989m)을 지나서 다시 곰틀봉(915.3m), 사다리재(840m),
981봉 등으로 이동하였는데 가도가도 희양산 그 맨대가리는 시야에서 영 사라지지를 않는거여.
아주 힘들면서도 지루한 구간이었어.
평전치로 가다가 순대가 비어서 합선되기 일보직전에 마지막 남은 도시락 한 개를 해치웠어.
사흘이나 되었는데도 쉬지는 않았지만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 물에다 말아서 불려서 먹었어.
큰봉우리를 하나 넘을 때마다 열심히 주전버리를 하여
그때그때의 허기는 달래었지만 역시 밥이 들어가야 그래도 그게 힘이 되는 것 같아.
산에서는 먹는 것만큼 간다는 말이 어느 정도 진리야.
큰 일꾼 큰 사발이라고 많이 먹는 사람이 많이 가는거여. 내 말 틀렸시유?
시다이 쪼고 12시55분 출발하여 10분쯤 가니 평전치(890m).
여기서 백화산 50분, 괴산 연풍면 분지(안말) 60분이라고 되어 있는 표지목이 있더라구.
고만고만한 능선을 한참 넘어가니까 1012봉이 나왔는데
나는 그것이 백화산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백화산은 저멀리 버티고 있어 좀처럼 정상을 내주지 않았어.
13시50분에야 1063.5m인 백화산 정상에 도착하였는데
앉아서 쉬기 좋은 바위들이 있어 주변이 음식물쓰레기로 약간 더럽혀져 있더라구.
인간이 머무는 곳에는 항상 쓰레기가 따라 다니는구만.
근방에 파리양성소가 있는 지 손가락만한 파리가 날아다니구...... 아! 싫다!!!
헬기장도 있고 주변이 한눈에 보일만한 곳인데도 날씨가 개떡같아
구름밖에는 보이지 않았어.
백화산을 지나고서도 약간의 암릉지대가 나오지만
희양산을 오를 때 비하면 아주 쉬운 것이고 봉우리간의 고도차도 별로 크지 않아
이제 힘든 구간은 어느 정도 지나온 것 같아.
약간의 잡목지대를 지나니 넓은 억새군락지가 나오고 허술한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이 황학산(862m)이라고 하네.
황학산을 지나고부터는 산판길인 듯 고속도로같이
넓은 길이 임도와 같이 이어져 마치 산보를 하는 것 같았어.
15시25분 산판길이 끝나는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백화산 6.5km, 이화령 1.5km, 각서리 1.2km라는 이정표가 있더라구.
이곳에서 이화령으로 가는 길은 출입금지 지역이어서 본의 아니게
법을 어기는 나쁜 놈이 되어야만 했어.
이곳에서부터는 고도오차는 별 것 아닌데
사람들의 출입이 없어서 그런지 숲이 우거져 통과하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아.
군사작전지역이 있는지 수시로 헬기장과 참호, 타이어로 만든 진지 등이 나타나
어디서 군인들이 총이라도 들이댈까 은근히 불안했어.
혹시라도 간첩으로 오인하여 총을 쏘면 우야지?
불안!! 초조!! 긴장의 연속이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거나 적(?)이 출현할지 몰라
사주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앞으로 진행하다보니
발에 뭔가 동글동글한 것이 걸리고 채이고 하더라구.
어! 먹을 거잖아!!!
임자없이 버려진 산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거여.
원래 산밤이란 것이 그렇듯이 쥐부랄만하여 별로 먹을 것도 없기에
기냥 발로 차면서 앞으로 나갔는데
나중에는 그걸 주워서 살림에 보태야겠다는 씰데없는 욕심이 발동하여
그 바쁜 와중에 그걸 주울려고 엎드려 버린거야.
알밤보기를 꿀밤보듯이 하라고 최영장군께서 말씀하셨거늘(맞냐? 맞지!)
나는 그걸 어기고 밤줍기를 한거야.
원래 급한 놈이 일낸다고 서두르다보니 밤같지도 않은 밤 몇 개
주우면서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고 쐐기한테 쏘이고 벌한테도 쏘일 뻔했어.
겨우 두어 주먹 줏으면서 시간도 30분이나 까먹었으니 이거야말로 쪼다지.
좀 빠리빠리한 사람이라야 그런 짓도 하지 나같이 느리처분한 인간이 뭔 일을 하냐?
바쁘게 서둘러 내려오다보니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는 초소가 나오고
나무로 엮어서 만든 조그만 다리가 보이는데 그곳에서 비얌이란
놈이 혓바닥 운동을 하며 일광욕을 하더라구.
길춘일씨의 원수를 갚아줄까 하다가 어제 큰 것으로 갚아 주었는데
오늘까지 갚으면 너무 지나친 호의를 베푸는 것 같아 오늘은 기냥 살려주기로 했어.
"과공은 비례"라 하였거늘 지나친 친절은 예의가 아니지!!!
죽이지는 않고 스틱으로 걷어서 숲속으로 휙 날려 버렸지.
그런데 그거 조그만 해도 독사야!(괜히 살려줬나?)
앞으로 1년 이내에 그 부근에서 뱀한테 물린 사람은 나한테 책임을 물으면
내가 보상해주어야 하는지 어쩐지 모르겠네?
초소를 지나고 나니까 바로 이화령 도로로 내려서는 계단이 있더라구.
계단을 내려서면서 보니 조령산 올라가는 들머리에 뭔가
경광등이 번쩍거리는 차가 있어서 혹시 불법입산자를 체포하러온
특수수사대인가 싶어 겁먹은 표정으로 슬금슬금 접근해보니
119구조대차인데 아마도 누군가 산악사고를 당한 모양이지.
안전산행!!!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거유!
이화령휴게소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마냥 한바퀴 쓰윽 둘러보니 나를 태워줄 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그렇지만 백두대간에서 빈대 4단쯤 되는 내가 포기할 사람이야?
여기는 번화한 도로이고 내려쏘는 곳이라 지나가는 차에게
백날 경례를 붙여 봐야 팔만 아프고 쪽팔리기만 하지 약발이 먹히지 않는 곳이거든.
그래서 휴게소앞 출입구에 서있다가 괴산쪽으로 가는
무쏘(코란도인가? 아무튼 앞에 쇳덩어리 달고 납닥하게 생겼음)
차를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는 폼으로 두손을 들고 다짜고짜 세웠어.
기왕 베린 폼. 깡패같이 좀 쎄게 나간거지!
너무도 당당한 내 무서운 기세에 무쏘차 기사양반이 어서 타라고 하더군.
괴산우체국에 근무하는 직원인데 핀지 한 통 때문에 이곳까지 오셨다는거여.
이것 보세유!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이 정도로 봉사한답니다.
그것도 모르고 공직사회가 비생산적 집단이라고 무조건 공무원을 매도하면 안되것지유?
그 분인들 핀지 한 장 때문에 이 외진 곳까지 오는 것이 비경제적이라는 것을 모르겠수?
공무원이기 때문에 손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차로 밑지는 장사를 한다는 말이지유.
그 친절한 공무원 덕택에 괴산까지는 시간도 벌고 돈도 벌었지.
꿩먹고 알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구.......
괴산우체국 충북 다8599 무쏘(코란도인가?) 차를 가지신 분!!!
정말 고맙습니데이.
2박3일 동안 늘재에서 이화령까지 44km 정도를 걸었으며,
이화령은 지리산에서 301.9km 쯤 되는 지점으로 45% 정도의 진행을 하였다.
하루만에 40km를 주파한 전력이 있어 마음 같아서는
2박3일 동안 60km 정도는 갈 것 같았으나 암릉과 험한 구간,
고도차가 많아 욕심처럼 그렇게 진행하지는 못하였다.
부지런히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40여 km밖에 진행하지 못하였으니
사진이라도 찍으며 노닥거렸다면 그나마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할 뻔하였다.
사진기가 고장나서 비록 좋은 그림들을 담아오지는 못하였지만
그 바람에 다음에 다시한번 그 구간을 가볼 구실을 만들게 되었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지리산 선배님의 말씀처럼 다시 가보고 싶은 구간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훌륭한 구간으로 다음에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사전에 사
진기 점검 철저히 하고 필림 서너통 장만하여 그 못덴 희양산을 원없이 담아와야 하겠다.
내가 희양산에 감정이 많아서 말끝마다 못생긴 놈,
못된 놈이라고 하였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만한 녀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녀석은 미끈하고 눈에 띄는 산중미인이다.
연 이틀동안 구름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희양산의 모습은 꿈속에서도 배경화면이 될만큼 사람을 유혹한다.
그리고 대야산도 그 아우쯤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상기 본인은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희양산과
대야산의 우람한 짱돌들을 단풍과 곁들여 감상하시기를 강력추천 하나이다.
그란디 이런 거 추천했다가 봉암사 스님들한테 몽디 테러 당하는 거 아닌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