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류기환
금강산을 찾아서
1999년 8월 26일 부터 3박 4일간,강원도 고성군, 회양군, 통천군등 3개군에 걸쳐 동서40km, 남북 60Km, 면적 530 ㎢ 에 달하는 세계적으로 명산인 금강산을 다녀 왔다.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것이 소원이다" 라고 한 중국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가 한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금강산은 우리 민족의 명산으로 시인 묵객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찬탄과 사랑을 받아 왔던 금강산. 그러나 불행하게도남북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으로 인해 50년, 즉 반 세기 동안을 삼천리 금수강산 중의 정수인금강산을 찾아 볼 수 없었던 그곳을말이다.
Ⅰ. 떠나기 전 13일 동안
경북구미교육청으로부터 교원 연수 대상자로 지명을 받은지 수일이 지난 1999년 8월 13일, 경상북도교육청 별관 연수실에서 사전 연수를 받았다.
국민의 정부대북 정책 방향과 과제, 교육과정의 통일 접근 방식, 금강산 연수 안내등에 관한 연수 내용이었다.행여나 북쪽의 땅에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연수생 모두가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연수 과정을 마치고 연수 기별(3기생 공동 연수)로 모여 우리나라 동해항 까지 갈 수 있는 협의를 마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 사전 연수를 받고부터 아~! 이제 그야말로 북녘땅 금강산으로 현장 체험 연수를 떠나는가 보다 생각 하면서 나 나름데로 금강산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사전 지식을 이히기에 노력하였다.
교원 금강산 사전 연수 자료 (경상북도 교육청), 통돌이와 금순이의 금강산 여행(현대 상선 주식회사), 알기쉽게 풀이한 율곡 선생의 금강산 답사기(정항교 해역.이화문화 출판사), 천하 절승 금강산 관광안내(평양 출판사)등 참고 할 책들을 읽어 보면서 금강산에 대한 공부를 출발하기13일전 부터 열심히 공부하였다.
금강산은 천하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인 만큼 불리우는 이름 또한 철에 따라 다르다.
곧 봄은 불보살이 머문다고 해서 '기달', 여름은 신선이 머문다고 해서 '봉래', 가을은 단풍으로 뒤덮여 '풍악', 겨울은 온 산이 허연 바위라 해서 '개골'이라 일걷는 금강산을 향해서 드디어출발의 날이 돌아왔다.
Ⅱ. 금강산을 향하여
1, 첫쨋 날, 부푼 가슴에 희망을 안고....
1999년 8월 26일 제 3차 교원 금강산 연수 대생자로 지명을 받은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오늘 따라 유난히 설레이는 마음으로 동녘의 햇살을 받으면서 연수차 떠나는 여행 준비에 조금은 분주 하였다.
3박 4일의 일정이라 많은 준비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옷가지 몇벌, 등산화, 세면도구몇가지 그리고 연수 전액이 국비 지원이라 약간의 잡비가 고작이었으나 무엇인가 빠뜨린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었다.
조금은 위험한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가족들의 염려스러운 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섰다.
구미지역의 다른 선생님들은 대구에서 출발하는 관광 전세 버스를 이용하여 가셨지만 나는 출발부터 좀 더 차분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가 보고 싶어서 승용차를 가지고 대구를 출발 하였다. 화려한 금강산의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려 보면서 명상에 잠긴 체 동해항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렸다. 지나번 한 여성 여행자의 작은 실수로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풀려 난 사건으로 일시 관광길이 중지되었다가 다시 열리게 된 터라 부모님을 비롯한 자녀들과 형제 및 동료들의 걱정스러운 배웅을 생각 하면서 안강 휴계소를 지나 후포 휴계소에 들렸다.
오늘따라 세차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앞길을 막았고 짙은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운전하는데 꽤 힘이들었다. 그러나 지난 해 8월, 스카우트 활동차 아이들을 데리고 동해안에 있는 통일 전망대에 왔을때 목전에 있는 금강산을 향해 손을 쭈~욱 펴면 잡힐듯 했으나 그저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던 그 금강산을 직접 밟아 볼 수 있는 기회인 지라 조심 조심 목적지인 동해항을 향하여 나아갔다.
후포 휴계소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조금 쉬었다가 다소 약해진 빗줄기가 내렸으나 한참을 달리다가 12시 20분경 동해안을 약 16Km 앞두고 어느 이름 모를 간이 휴계소에 들려 간단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운 다음 오후 1시 05분에 드디어 목적지인 동해항에 도착 하였다.
우리나라 기업인 현대 주식회사에서 경영하는 금강산행 관광 선박 금강호, 풍악호, 봉래호의 입. 출항을 위하여 이곳 동해항에 따로 마련된 항구에는 보기에도 시원한 넓고 큰 주차장이 눈 앞에 들어 왔다.
그곳에 3박 4일동안 15.000원에 차를 맡기고 대합실로 향할 때 전국에서 모여든 교원 연수 단원 약 800명이 오후 2시까지 이곳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리부터 와 서성거리는 인파 속을 헤치면서 출항 수속을 밟기 위하여 출입국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출입국 카-드, 관광증, 탑승권을 받았는데 특히 북한 지역을 관광하는 동안 금강산 관광증은 마치 외국 여행시 여권과도 같이 사용되기 때문에 목에다 걸고 다닐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어서 조금은 우서웠으나 목에 걸었다.
그런데 그 관광증에는 최근에 찍은 3Cm×4Cm의 얼굴 사진과 소속 성명들이 기록되어 있는 마치 신분증과도 같았다.
아마도 북한의 관리자 혹은 안내자들이 알아 보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조치 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속을 모두 마친 다음 환전소에 가서 1인당 1000달러까지 환전 할 수있다는 안내문을 보면서 나는 50달러 (한화 64500원)만 환전 하였다. 그것도 북한에 가면 서커스 관람료를 30달러씩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약간의 잡비와 합하여 환전한 것이었다.
왜, 한 민족이면서도 우리나라 돈을 쓰지 못하고 달러를 쓰야 하는가 ? 하는 서글픈 생각을 하면서 환전을 끝냈다.
출국 사무실에서의 모든 일이 끝 난 다음 몸과 소지품을 심사하는 출국 심사대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 보니 우리들 일행이 타고 가야 할 거대한 봉래호 배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 배의 관리인 전원이 외국인이었고 통역인으로 우리나라 사람 몇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선원들이 우리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환영하였다
나는 가반 9조 8번으로 편승되어 안내에 따라 선실 3층 282호실의 객실을 찾아 갔다.
그 곳에는 2개의 침대가 서로 마주 보고 나란히 놓여 있어 아마도 두 사람이 사용하는 객실인듯 하였다.
나는 베낭을 풀어 간단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며 함께 투숙 할 선생님께서 들어 오셨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나눈 선생님께서는 마침 우리 구미 시내에 있는 구미여자 중학교 권영숙 교감 선생님이셨는데 8월 말에 62세로 정년퇴임을 앞두고 금번 연수에 참가 하셨다고 하였다. 선듯 뵙기에는 아직도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고 앞으로 몇년은 더 교육계에 머물며 2세 육성에 힘을 쏟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소 애석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은 우리 교육계에 손실이라고 생각 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간혹 실내 방송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안내 방송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우렁찬 엔진 소리를 내며 서서히 배가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오후 5시 30분 예정에 따라 호화 관광 여객선인 봉래호 배는 순조롭게 금강산을 향하여 동해항을 뒤로하고 출항 하였다.
객실에서는 저마다 인사를 나누고 환담하던 일행 전원이 각 층마다의 통행로 혹은 10층 또는 12층 스카이 라운지( 높이 37.5m )등으로 올라와 점점 멀어지는 동해항을 바라보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각 자기 고장의 일행을 만나 반가워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여객선은 하얀 물거품을 일어키며 동으로 ! 동으로 ! ... 공해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어느 실향민의 아들인 선생님은 뱃전에 기대어 북쪽이 고향인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비릇하여 자기네 학교의 이야기, 금강산에 대한 사전 지식을 주고 받는 대화, 핸드폰을 꺼내들고 현재 자기들의 위치를 가족들에게 알려 주는 사람들, 하루의 일과를 보고 받는 교장 선생님, 각양 각색의 대화들을 나누면서 한동안 자유 시간을 갖고 있는데 나도 제일 걱정을 많이 해 주셨던 교장 선생님께 안부의 전화를 드렸는데 이곳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잘 다녀 오라는 정어린 말씀에 한층 더 고마움을 느끼면서 차츰 어두움이 깔리는 밤 바다와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데 감회가 깊었다.
그런 어두움이 밤 바다에 내려 앉자 마자 바다 저~편 우리나라쪽 해안에서 오징어를 잡기위해 출항을 서두는 어선들이 환한 불빛을 밝히면서 하나, 둘,... 켜지더니 삽시간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여러 수십척이 바다 위에 떠 조업을 시작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에 반갑지 않게 찾아 온 IMF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저들 어민들에게 마음으로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속에 묻혀 달리는 뱃전의 물보라를 바라 보고 있는데 조용한 음악 소리와 함께 안내의 목소리가 선상의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18시 30분 부터 6층 뷔페 식당에서 내가 소속된 가 반부터 식사가 시작되고 동시에 나 반은 선상 안전 교육을 실시 하며 19시 30분에 가, 나반이 교대 한다고 안내 하였다.
한방에서 거처하고 있는 권영숙 교감 선생님과 함께 곧장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 앞에는 벌써 먼저 오신 선생님들이 길게 늘어 서 있었고 우리는 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 질서있게 진열된 뷔폐 음식물을 각자의 식성에 따라 배식판에 담아서 첫 날의 저녘 식사를 맛있게 하고 여객선내에 있는 극장으로가서 안전 교육을 받았다.
이미 도 교육청에서 받았던 교육 내용과 비슷한 교육을 선상 안전교육원으로부터 다시 받고 만약을 대비해서 구명복 착용에 대한 실습과 대피 요령을 습득한 다음 20시 30분 부터 모든 일행이 공연장으로 모여 선상 공연을 관람하였다.
러시아인들로 구성된 악단, 한국과 외국인들의 노래와 춤등 공연 모습을 구경하고 21시 40분 부터 취침 및 자유 시간을 갖었으나 모두들 잠자리에 들기 보다는 피로함도 잊은 체 객실 밖으로 나와 여객선의 총 길이 171,65m, 넓이 24,09m의 거대한 봉래호의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있는데 제1차로 떠났던 금강호가 오늘 밤 12시 ~01시 사이에 바다 위에서 만나게 된다는 안내원의 방송에 우리들 일행의 대부분이 객실 밖으로 나와 멀리 북쪽 바다를 바라 보고 있었다.
우리 동해항에서 북측의 장진항까지 직선으로 가면 1시간 정도면 충분한 거리를 분단의 비극으로 인해 공해상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는 번거러움을 ?으면서 항해 하던 중 이윽고 한 밤중의 밤 바다를 가르며 저 멀리에서 화려하고 휘황 찬란한 불빛에 쌓인 금강호의 장엄한 모습이 나타났다. 점차 가까이 다가와서 서로 천천히 비켜 갈때에는 양쪽의 배에서 후랫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기에 여염이 없었고 소형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손을 흔들면 저쪽에서는 답례를 하고 소리치면 들릴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금강호와 봉래호는 서로 무사히 가고 오라는 안녕을 빌며 작별을 하였다.
여객선은 우리나라 영해를 벗어나 공해상에서 북쪽으로 항해 하다가 장전항을 향해 다시 북쪽 영해로 들어가는 뱃길 ! 약 12시간의 항해를 거쳐 새벽 6시경 우리들은 무사히 장전항에 도착 하였다.
2. 둘째날, 구룡폭포를 보려고....
대망의 북녘 땅을 한 발 눈앞에두고 우리는 오전 7시 부터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간단한 등산복과 현대측에서 나누어 준 노란 꼬마 베낭에 야외용 도시락과 음료수를 배급 받아 넣은 다음 다시 바지선 배를 갈아 타고 장전항 부두에 첫발을 내렸다.
이곳이 그토록 오고 싶어도 오지 못 했던 땅이며 50여년 동안 장막을 내리고 침묵했던 땅이었던가 ? 야릇한 감회를 가슴에 안고 반 별로 하선하여 09시 부터 입국 수속을 밟고 내 나라 내 땅인데도 외국 여행이나 다름없이 통관 절차를 밟아야했다.
통관 절차를 밟고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미리 준비되어 있는 관광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입산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금강산 관광의 필수 코-스로 정해진 구룡폭포로 향하는데 온천으로 유명 했다는 온정리 휴계소를 거치고 금강산 호텔과 신라 법흥왕때 보운조사가 창건했다는 옛 신계사 절터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 하였다.
등산을 하는 중에는 용변 보는 일과 흡연을 하는 것이 금지 되어 있고 적발되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안내의 말을 북한 안내원에게 듣고 이곳에서 용변과 흡연을 한 다음 0.4Km 목란관, 0.8Km 양지대, 0.7Km 금강문, 0.7Km 옥류동, 0.3Km 연주담, 0.8Km 지점에 금강산 4대 폭포의 하나로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는 비룡폭포, 0.8Km 구룡연, 1.0Km 에 여덟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하는 전설이 담긴상팔담을 돌아 오후 3시경에 하산 하였다.
가는곳 마다 전설이 담긴 이야기를 현대측에서 파견된 안내원으로부터 들으면서 돌아보는 동안 남북한의 분단을 전혀 의식하지 못 할 정도로 우리 산, 우리 땅을 돌아 보는 느낌이었다. 오후 3시, 우리 연수 단원들은 다시 주차장까지 와서 미리 준비 해 가지고 간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온정리 휴계소로 다시 왔다.
그 곳에 있는 금강산 예술 극장에 들려 북한 서커스 공연을 보았다. 카랑 카랑한 목소리로 소개하는 북한 여성,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세계 3위를 자랑하는 서커스를 감상 했는데 단원들은 대부분이 북한 인민 배우의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그 기능이 매우 뛰어 났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어린 여성 단원의 활동은 몹씨 기능이 풍부 하였으나 연습 도중에 실수를 하여 예쁜 얼굴에 상처를 남기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을까 하는 짐작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능을 발휘하는 단원들에게 큰 박수와 환호성으로 극장안의 분위기가 최 고조에 달했고 그로 인해 예정 했던 시간 보다 훨씬 더 많은 묘기를 보여 주면서 공연이 끝났다.
특히 공연이 끝날 때 불러 주는 "반갑습니다."의 노래는 민족을 함께 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정말 그들이 바라는 적화 통일이 아니라 평화 통일을 하루 빨리 이룩하여 함께 저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다시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단들과 헤어짐에 손 흔듬, 단원들의 열열한 작별 인사.그 모두가 민족이 하나 된 듯한 분위기를 연출 하였는데 평양 방송국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찍어 정치적 선전용으로 악용 하려는 속셈을 빤히 엿 볼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잠시 동안의 자유 시간이 있었다.
휴계소 안을 잠간 동안 돌아 본 다음 곧장 버스를 타고 장전항으로 돌아와 출국 수속을 아침에 입국 할 때 처럼 다시 밟아 바지선을 타고 봉래호 선상으로 돌아 왔다.
모두들 피로에 지친 몸으로 각각 객실로 돌아가서 휴식과 샤워를 하고 7시부터 9시까지 저녘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9시 이후에 선내 극장에 다시 모여 선상 세미나를 갖었다. 교육부에서 나오신 장학관님의 사회로 새교육 공동 위원회 이돈희 위원장님이 소개되고 위원장님으로부터 21세기의 교육 계획이란 주제로 특별 강의가 있은 다음 질의 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교육 현장에 대한 절망적인 실태를 역설하는 교사가 있었고 학교 평가제의 도입으로 인한 문제점, 정년 단축으로 인해 입는 교육 손실, 그로 인한 교원의 지위 추락 문제, 중.고등학교의 학습 현장과 생활 지도 문제등 금강산 관광을 잠시 잊기라도 한듯 뜨거운 토론이 오가며 앞으로의 대책과 그 방안에 대한 토론이 심도 있게 전개 되었다.
약 2시간 동안의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가 피로에 지쳤으며 어젯 밤에 설친 잠으로 힘없이 객실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3. 세째 날, 만물상을 향해 오르며.....
어제 구룡폭포를 오르며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오늘의 목적지인 만물상은 그야 말로 힘겨운 코-스라는 말에 우리들은 미리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
어제 입국할 때 처럼 똑 같은 프로그램에 의하여 입국을 해서 버스를 타고 온정리 휴계소를 다시 지나 금강산 호텔 부근에서 어제와는 반대쪽인 오른쪽으로 버스가 달렸다.
만물상 지역은 금강산의 10대 아름다운 지역중의 하나로 산악미를 대표 하는 지역으로써 깎아지런 듯한 층암 절벽과 형형색색의 모양을 나타내는 기암괴석들로 특이한 경치를 보여 주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곳 만물상 지역을 대개 세부분으로 나누는데 하층부를 넓은 계곡에 안개 낀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한하계라 부르고, 중층부를 금강산의 네거리로서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 가는 곳으로 망상계라고 부르는테 이곳에서 부터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였으며 상층부를 망양대라 부른다고 하였다. 망양대에는 제1,2 전망대가 있으며 바로 그 앞에 하늘에서 선녀들이 오간다는 천선대가 있다.
바로 그밑에 크다란 돌문이 하나 있는데 그 돌문을 하늘문 혹은 천일문이라고도 한단다.
이 돌문을 지나야 하늘 나라로 가는 천선대를 갈 수 있다고 설명 하였다.
우리들이 타고 가는 버스는 온정리 휴계소를 뒤로하고 만물상 하층부에 속해 있는 온정령 고개를 넘어 가는데 관음폭포를 옆으로 끼고 꼬불 꼬불한 산길을 따라 몇 수십구비를 돌아 아슬 아슬하게 올라 갔다. 중국인인 이 버스의 운전사는 중국에서 1급 기사로 운전 실력이 뛰어 나야 이곳에 올수 있다고 하며 이 고개의 구비 수가 102구비 라고 하였다.
깎아 지른듯한 절벽위로 혹은 계곡과 계곡 사이로 아슬 아슬하게 그 높은 고갯길을 돌아 금강산의 네거리라 일컫는 망상계의 망상정 아래 주차장으로 들어 왔다.
이 곳 역시 유일하게 용변과 흡연이 허락된 곳이라 모두들 참았던 흡연과 볼일들을 본 다음 여러가지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의 모양들을 감상 하면서 경사 45도의 험난하고 가파른 산행이 시작 되었다.
올라가는 중간의 요소 요소 마다 북한 여성 안내원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간혹 농담도 주고 받았으나 대부분 말이 없고 대사에 있는 안내 말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 구룡폭포에 다녀 오느라 지친 몸이지만 모두들 최종 목적지인 망양대를 향해 천천히 올라 갔다.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과 상상에따라 천태 만상으로 달리 보인다 하여 붙여진 만물상이 나타 났다 이곳이 금강산에서도 으뜸으로 꼽이는 곳이란다.
만물상의 첫 장관으로 펼쳐지는 귀면암이 보였는데 마치 귀신 얼굴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뒤를 이어 삼선암이 있었는데 이 삼선암은 옛날 네 신선이 이곳에 내려 와 장기를 두었는데 한 신선이 훈수를 많이 하였다 하여 쫓겨 나고 세 신선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부터 상선, 중성, 하선암이 있고 쫓겨난 신선은 홀로 있다고 하여 독선 암이라고 부른단다.
이러한 가지가지 전설을 가진 절부암, 안심대, 망장, 천선대를 거쳐 망양대에 올랐는데 올라 오는 도중에 포기 하는 일행도 있었지만 나는 망양대에 올라 기어 오르다 싶이 하여 제1, 제2 전망대까지 올라 갔다.
제2 전망대에 오르니 검푸른 동해에 아름다운 해금강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전항도 발 아래에 있었다.
동해를 뒤로하고 돌아서서 올려다 보면 멀리 높이 1263m에 달하는 오봉(우의봉, 무애봉, 천진봉, 천주봉, 천녀봉)산이 한 눈에 보였다.마치 아름다움을 독차지한 자태에 경탄을 금치 못 하였다.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음도 잠시, 곧 바로 하산 준비를 서둘렀다.
미리 간식으로 준비했던 싱싱한 오이가 마른 목을 축이게 하는데는 매우 좋았다.
등산 할때는 꼭 필요한 식품인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하산을 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일행은 주차장 가에 둘러 앉아 어제와 같이 미리 준비한 점심을 먹고 가지고 갔던 물이 모자라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떠 마셔 보니 참으로 물 맛이 좋았다. 마치 약수인 것 처럼....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 왔던 험난하고 위험한 산길을 돌아 온정리 휴계소로 내려 오는데 약 100m 마다 십 칠,팔세로 보이는 애띤 북한 병사들이 햇볕에 그을려 까만 얼굴에 하얀 눈동자로 비 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의 먼지 속에서도 부동 자세를 취하여 우리들의 행열을 바라 보고 있는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반가움을 표시 해도 아무런 반응을 주지 않는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몹시도 궁금한 마음을 간직한 체 온정리 휴계소에 도착 했다.
오늘의 일정이 모두 끝 날 때쯤이라 이곳에서 기념품을 살 수 있는 시간이 마련 되었는데 때 마침 금강호를 타고 와 첫 날의 일정을 보내고 있는 일반 관광객들과 합류하여 자유 시간을 가졌다.
기념품이래야 고작 담배와 술 뿐인데 그것을 기념으로 사기위해 달러를 손에, 손에 들고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차레를 기다리는 행열을 보고 지난 해 IMF때 달러 확보를 위하여 그렇게도 귀중하게 여겨 온 금반지를 빼어 놓던 때를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북한의 어려운 경제를 이런 방법으로 도와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여러가지를 생각케하는 마음으로 다시 버스에 올라 어제 출국 할때와 같은 방법으로 수속을 끝내고 바지선을 타고 본선으로 돌아 왔다.
모두들 객실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쯤, 우리 풍악호는 귀국을 서두르며 갑자기 엔진 소리가 높아 지더니 서서히 배가 움직이기 시작 했다.
저녁 7시부터 약 두시간에 걸쳐 저녁 식사를 끝내고 공연장에서 일행들의 장기자랑 대회와 전속 배우들의 춤과 노래를 공연 하였는데 피곤한 대부분의 일행들은 객실에서 피로를 풀고 있었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아쉬운 장전항의 모습을 보려고 스카이라운지로 올라 왔다.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달빛속에 멀어지는 장전항을 바라 보면서 지금까지의 여행 일정을 정리 해 보았다. 포동 포동하게 살이 찐 안내원의 모습과 새까만 어린 병사들의 얼굴에서 계급 사회의 일면을 보았고, 콘크리트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지 못한 경제의 어려움, 새벽 6시에 싸이렌 소리와 동시에 집단으로 움직이는 주민들과 이제히 낡은 고기잡이 배를 타고 출항하는 어민들의 집단 생활, 마을 부근에 확성기를 통하여 들려 주는 뉴우스, 밤 마다 불빛 없는 마을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장전항 부두 옆에 거대한 규모로 건설중인 현대 건설측의 공사장 모습, 산뜻하고 깨끗한 현대 관광 버스에 비해 오고 가는 북한의 낡은 자동차들, 5-6명이 낡은 어선을 타고 거대한 우리 봉래호를 돌아 바다 일터로 향하는 십여 척의 어선들, 외화 벌이에 몸부림치는 담배와 술의 생산 공장이 있을것 같은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객실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권 교감 선생님께서 올라 오셨다.
"선생님이 여기 계시는데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하시며 자리를 함께 하였다.
권교감 선생님께서는 담배 한 개피를 피워 물고 한숨을 길게 내 쉬시면서 " 정년퇴임을 이틀 앞두고 감회가 깊습니다 " 라고 말씀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힘들고 어려웠던 외길 40년, 교직을 마감 하시려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 힘 내십시오. 그리고 남은 여생 즐겁게 보내십시오. 지금까지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라고 하며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 이 후배의 마음도, 음성도 어느 듯 목이 메이고 있었다.
그 교감 선생님께서는 수학을 전공하셨는데 아직도 4~5년은 아무런 무리함이 없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 하실텐데..... 망양대를 제일 먼저 정복 하시는 것을 보니까 말입니다. 라고 했더니 아직도 건강에는 자신이 있다고 말씀 하셨다. 정말 우리 교육계에 손실이 아닌가 느껴 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쯤 금강산을 향하는 또 다른 불빛이 찬란한 한척의 배! 풍악호가 우리를 스쳐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카메라 후랫쉬의 불빛이 한동안 반짝이며 소란을 피웠다.
우리는 점점 밤이 깊어 오므로 잠시라도 눈을 붙이자고 하며 객실로 내려와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4. 마지막 날, 아 ! 대한민국
어제밤 늦은 시간에 살짝 잠이 든 사이 어느새 멀리 동해안이 보이는지 일행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잠옷 바람으로 스카이라운지에 올라오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어민들의 오징어 잡이 배들이 밝은 불빛을 잃고 희미 해진 새벽이었다.
잠시 후, 동쪽 하늘에 붉은 아침 노을이 퍼져 환하게 밝아 오는듯 하더니 빨간 햇살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저 멀리 바다 수평선에서 붉은 해가 장엄하게 물위로 솟아 올랐다.
갑자기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라도 불러 보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금강산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무엇하랴,! 자유가 보장 된 살기 좋은 대한민국 이곳이 우
리의 삶의 터전이리라. 고도로 발전된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는 저 밝은 얼굴들, 남북 분단으로 인해 살아 생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북녘땅 하늘 아래를 무조건 가 보기라도 하자.라는 심정으로 찾아드는 저 실향민 이산가족들, 그들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북한의 위정자들.....
아! 살기좋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오도하는 그들에 속아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북한의 주민들, 우리는 한 민족인 그들을 하루속히 구출하기 위하여 온 국민이 힘을 모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가는 동안에 비록 3박 4일간이지만 그 동안 정이 들었던 봉래호가 동해항 부두에 닿았다. 힘차게 만세라도 소리치며 외쳐볼까. 하는데 여객선 내의 방송에서 아침 식사 시간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끝낸 다음 각자 소지품을 챙겨 둘러매고 객실 열쇠를 반납한 다음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입국 수속을 밟았다.
나는 동해항 대합실에서 몇가지 기념품을 사들고 밖으로 나왔다.
각자 고향으로 가기 위해 출발 준비를 서두르는 관광 전세 버스를 찾아 다니는 일행들과 그 동안 정들었던 선생님들께 간단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공항 공동 주차장으로 와서 내 승용차를 찾아 해변 도로를 따라 천천히 돌아 오면서 이번 금강산 연수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몇년 전에 홍콩-중국-일본으로 국외 연수를 다녀왔을때와 비교하여 생각 해 보니 그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그 어느 연수 보다도 값진 연수 였음을 느끼면서 해질 무렵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 전 교원이 한 번쯤 이 연수를 다녀와서 통일 교육에 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더욱 효과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어느 여성 안내원의 말처럼 앞으로 묘향산, 백두산도 개방하여 함께 즐기면서 관광 할 수 있는 그 날이 하루 속히 돌아 오기를 기대 하면서 연수의 모든 일정을 끝 마쳤다.
(동해항 공동 주차장 앞에서) (금강산 입구, 옥류관 앞 다리위에서) (승용차를 타고 출발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