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먼 불빛을 향하여
"얌마, 너 망치 똑바로 못 대! 너 또 딴 생각하고 있는 거지. 골통 깨지
기 전에 정신차려, 이새끼야."
큰 쇠망치를 치켜들고 있던 사내가 허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아야야......."
작은 쇠망치를 굵은 쇠줄에 대고 쪼그리고 앉아 있던 허진은 옆으로
둥그러지며 아픈 소리를 억눌렀다. 그런데 그의 손은 걷어채인 엉덩이
로 가지 않고 한쪽 옆구리를 감싸잡고 있었다. 쇠먼지를 뒤집어써 더 핏
기 없이 꺼칠하고 메말라 보이는 그의 얼굴은 아픔으로 일그러지고 있
었다. 그러나 그는 곧 몸을 일으켜 작은 쇠망치를 다시 굵은 쇠줄에 갖
다댔다.
"이새끼야, 쇳가루밥 제대로 챙겨 먹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 이 몸
이 지니신 기술은 뭐 나이롱뽕해서 딴 줄 아냐!"
그 사내는 끝말을 기합삼아 큰 쇠망치를 내려쳤다. 그 순간 굵은 쇠줄
은 찬바람 오래 쇤 엿가락이 부러지듯 뚝 끊어졌다. 사내의 말마따나 단
한 번으로 그 굵은 쇠줄을 끊는 것은 대단한 기운이기도 했고, 무시 못
할 기술이기도 했다.
허진은 재빨리 분필이 칠해진 부분까지 쇠줄을 끌어당겨 다시 쇠망치
를 갖다댔다. 그런데 또 옆구리를 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면서 눈
앞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한쪽 옆구리 전부가 욱씬거리듯 결렸다. 허진
은 이를 앙다물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망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또 걷어채이는 것도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일을 잘못한다고 고참들에게
눈총이 박히게 되면 그나마 벌이도 못하고 쫓겨날 판이었다. 옆구리가
왜 그렇게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한 달쯤 전부터 먹먹한 느낌이면서 뜨
끔거리기 시작하더니 아픈 것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허진은 옆구리의 통증에만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쇠
줄을 끌어당길 때마다 매서운 추위에 곱은 손이 더욱 시리고 아려 견디
기가 어려웠다. 입김을 불어 손을 좀 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참
아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또 여지없이 걷어채이게 되어 있
었다. 망치질하는 고참도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고, 공장에서 목장
갑이나마 끼고 있는 사람은 사장 하나뿐이었다. 녹슨 쇠들을 다루면서
금방 더러워지고 망가지는데 장갑을 사낄 형편들이 못 되는데다가, 장
갑을 끼면 손이 둔해진다고 해서 장갑을 금하고 있었다. 허진의 손은 추
위에 얼고 얼어 손등이 갈갈이 터 있었다 살이 벌어져 튼 자리마다 피
를 물고 있는 것이 여간 아파 보이지 않았다.
"이새끼야, 또 얻어터지기 전에 동작 빨랑빨랑 취해."
사내는 무거운 망치를 다루는 데 힘을 돋우기라도 하듯 또 사납게 내
뱉었다
허진은 억울하게 얻어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군대에서 이유
없이 두들겨 패기를 예사로 하듯 이곳의 철공장에서도 욕지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때리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이놈들아, 느네들은 천국에서 산다. 천국. 우리가 왜놈들 밑에서 기
술을 배울 때는 종놈도 그런 종놈이 없었다. 공장에서는 월급도 없이 겨
우 세 끼 밥 얻어먹으면서 날이날마다 얻어터지지, 일이 다 끝나고 나서
도 고참들 사사로운 심부름 다 해내야지, 그 고생 말로 다 할 수가 없었
어. 헌데 느네들은 좋은 기술 배우면서 돈까지 받고 있지 않느냔 말야.
어쨌거나 기술은 얻어 맞어 가면서 배워야 해. 그래야 머리에 쏙쏙 들어
가니까."
심심하면 사장이 되씹고 되씹는 말이었다. 그리고, 시범을 보이듯 사
장은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댔다. 사장에게 얻어맞지 않는 사람은 여섯
명의 직원 중에서 선반을 다루는 기술자 하나뿐이었다.
사장이 그러니까 주먹질 발길질은 밥그릇 수에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가장 말석인 '시다'들은 이 사람한테 얻어맞고
저 사람한테 채이고, 동네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허진은 그 이유 없는
구타가 일이 힘드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기
술을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였다.
"기술이란 쇳가루밥 그릇 수 늘려가며 한 계단, 한 계단 등 너머로 눈
치껏 익혀야되는 게야 까짓 자전거 하나 타는 데도 무릎이 열댓 번씩
깨져야 하고, 자동차 운전수가 되려면 휘발유 입으로 빨아대면서 한 말
은 배로 넘겨야 되는 것 아니냔 말야."
사장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니 고참들의 위세는 더 등등해졌다. 시다
들은 기계를 청소하는 것뿐 감히 조작이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용접기
나 선반을 고참들 몰래 조작해 보다가 들킨 시다들은 반죽게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넌 어째 아새끼가 그리 비리비리하냐. 얌마, 한번 쇳가루밥 먹기로
작정했으면 딴 세상하고는 인연을 딱 끊으란 말야. 이새끼, 팔자에도
없는 공부에 미련 두고 있으니까 딴 생각하게 되고, 자주 얻어터지고 그
러지."
쇠줄 자르기를 끝낸 사내가 이빨 사이로 침을 찍 내뱉으며 돌아섰다.
허진은 그제서야 두 손을 모아 입에 댔다. 그의 갈갈이 튼 손과 헐어
빠진 작업복에 감싸인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어. 난 죽어도 공부는 포기 안 해. 이런 데서 평생
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난 어떡하든 공부를 해서 아버지 처
럼 살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허진은 수없이 되풀이해 온 다짐을 또 하고 있었다. 그는 찌들리고 굶
주려온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그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
어 해결할 1차 목표는 가난을 면하는 것이었다. 가난이란 굶주림과 헐
벗음의 끝없는 수렁이었다. 굶주림은 속으로 사무치는 슬픔이었고, 헐
벗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창피스러움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
다음 식구들은 전부 점심을 굶어야 했다.
"너는 안 된다. 그 힘든 일을 하면서 점심까지 굶다니. 네가 실해야 이
집 안이......."
할머니는 꼭 점심을 싸주려고 했다. 그러나 수입은 빤했다. 자신이 점
심을 먹으면 나머지 식구들이 그만큼 배를 곯아야 했다. 그렇다고 할머
니가 동생들에게 밥을 덜 먹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 할머니가 한 끼를
더 굶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하루 한 끼를 먹고......, 그건 큰일날
일이었다. 할머니는 자신들을 위해서 오래 사셔야 했다. 할머니마저 안
계시면......, 그건 상상하기도 끔찍스러운 세상의 마지막이었다. 친구
들이 찾아올 때 점심을 싸온 것처럼 하는 것은 얻어먹기만 하는 미안함
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서러움 중에 큰 서러움이 배곯는 서러움인데......, 내 팔자가 왜 이
리 됐는지 모르겠다. 천석꾼살림 다 없어지고......."
할머니가 봉투를 붙이거나 무슨 일을 하면서 혼자 시름겹게 읊조리고
는 하는 탄식이었다.
천석꾼 살림이 얼마나 큰 부자인지는 실감이 잘 되지 않지만, 서러움
중에 큰 서러움이 배곯는 서러움이라는 말은 절절하게 실감할 수가 있
었다. 밥을 굶어 배가 고픈 것, 그것처럼 고통스럽고 비참한 일은 세상
에 없었다. 배가 고플수록 먹는 생각만 나고, 사람이 없으면 어느 상점
에서고 먹을 것을 훔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불쑥 이는가 하면, 가장
큰 꿈이 '배불리 먹는 것'이 되어버렸다.
공장은 어둑어둑해져서야 끝났다. 허진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공장
뒤채의 사장집으로 가 바가지에 펌프물을 받았다. 그때쯤이면 배가 고
프다 못해 속이 쓰리고 아리면서 쓴물이 올라올 지경이 되고, 허리는 허
리대로 꺾이고 다리는 다리대로 풀리면서 눈앞이 가물거리고 핑 현기증
이 돌고는 했다. 허진은 숨도 쉬지 않고 물로 배를 가득 채웠다.
찬물을 먹고 나자 추위가 더 심해져 허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집
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쇳가루와 쇠먼지 투성이인 얼굴과 손을
씻고 싶었지만 찬물로 씻었다가는 온몸이 더 얼어붙고, 손등은 쓰라리
면서 더욱 심하게 텄다 기왕 연탄을 때고 있는 김에 공원들을 위해 뜨
거운 물을 한 솥 끓여줄 수도 있건만 사장네는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
았다. 담배도 반 토막을 내서 물부리에 끼워 피우는 사장은 물을 끓이면
연탄 불길이 방고래로 덜 들어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거였다.
"야, 너 왜 영어는 등록 안 하고 수학만 등록했니? 첨엔 둘 다 한다고
했잖아. 영어는 자신 있다 그거야?"
"자신 있긴, 내 실력 뻔히 알면서 우선 더 급한 수학부터 한 거지. 아
이고, 고민이다."
"이것 봐라, 너 무슨 일 있지? 영어도 학원비 타내 가지고 딴짓 한거지?"
"새끼, 냄새 한번 귀신같이 맡네. 어쩌냐, 그 기집애하고 쓰는 게 급
한걸."
"이새끼 이거 정신나갔네. 실력 보충할 기회는 이번 방학뿐인데 기집
애하고 놀아나? 너 그러다가 눈치 빠른 느네 아버지한테 걸려들면 골로
가게 되잖아."
"병신, 그 정도야 다 방어를 하시는 거고. 하여튼 그 기집애하고 빨리 빠
구리를 터야 되겠는데, 그게 줄 듯 줄 듯하면서 사람 애를 태운단 말야."
"이새끼야, 정신차려. 빠구리를 텄다가 덜컥 임신을 시키면 어쩔 거
야. 그땐 너 생일날이잖아."
"이새끼, 넌 왜 그렇게 유치하게 순진하니? 그 많은 산부인과는 어디
다 써먹을래? 맘놓고 빠구리 트고 임신하면 찾아오시오 하는 데가 산부
인과들 아니냔 말야."
"이새끼 이거 겉으로는 모범생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아주 형편없는
불량학생이라니까. 이거 아주 위험 인물이야."
"얌마, 그게 무슨 위험 인물이냐. 철이 든 거지 너도 이 형님을 본받
아 어서 철 좀 들어라. 인생은 짧고 청춘은 빠르게 지나간다. 한번 가버
리면 다시 오지 않는 청춘을 즐겨가면서 공부도 해야지. 이 철학을 알아
들으셔?"
"그래, 청춘 즐기다가 대학 떨어져 인생 망가지면 그때 가서 후회나
말아라 난 청춘 즐기는 거 사양할 테니까."
허진은 고등학생 둘이 앞서가면서 떠들어대고 있는 말에 언제부턴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허진은 한층 더 추위를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들이 살아가는 것은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학교 공부로 모
자라 수업료보다 훨씬 비싼 학원비를 두 과목씩이나 내고 있었다. 그러
나 자신은 독학생을 위한 강의록도 받아볼 형편이 못 되었다. 친구들이
가져다 주는 시험지가 유일한 참고서고 선생이었다. 그런 풍족한 아이
들과 경쟁을 해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아버지처럼 그렇
게 가난에 찌들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될 것인지......., 다시금 자신의 앞
날이 두렵고 가위눌렸다.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다 망조 든 나라야. 죄진 놈들이 더
큰소리치며 득세를 하는 세상이니 옳은 일 한다는 게 바보짓인 게지. 이
런 막된 세상에서 자식들한테 옳은 일 해라, 바르게 살아라, 하고 가르
치면 또 바보 만드는 것이니 어째야 좋을꼬. 어찌 이런 세상이 될지 알
았나......"
풀릴 길 없는 할머니의 탄식이었다. 할머니는 천석꾼 재산에서 아버
지를 가르칠 것을 빼놓지 않고 전부 할아버지에게 맡긴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나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배운 것이 없어서
시계 수리공으로 근근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독립투사였던
할아버지는 아무런 자랑도 긍지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생전에 할아
버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아버지 없는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이 세상에 대해 할머니보다 더 큰 원한
을 품고 살다 돌아가셨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참으로 딱하고 불쌍한
분이었다.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병도 어쩌면 그 원한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장하다 참 장하다. 이 애비가 아무것도 못 해뒀는데......."
세상이 알아주는 일류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가 목이 잠기며
한 말이었다. 그건 아버지가 해준 처음이고 마지막인 칭찬이었다.
그러나 그 고등학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다닐 수 없게 되고 말
았다. 아버지가 자살하기 전에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치료할
길 없는 중병을 앓으며 집안을 더 망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
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버지의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
해서라도 자신은 공부를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이새끼야, 아가리 닥쳐. 친일파를 편드는 놈들은 다 신종 친일파들
이야!"
친일파에 대한 언쟁이 벌어졌을 때 유일표가 터뜨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는 친일파를 편드는 아이들이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하고 말
았다. 그건 바로 자신이 해야 될 말이었는데 어째서 그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평소에 독립투사의 집안이라는 게 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이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자신이 유
일표보다 주먹이 세지 않은 탓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유일표와 싸움이 벌어질 뻔했던 홍성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의 아버지는 일제 때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노릇을 하다가 지금은 치
안본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오재도 검사 아래서
빨갱이를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아이들
은 그의 아버지가 흉악한 빨갱이들을 잘 잡는 용감한 형사라는 것에 감
탄할 뿐 일제시대에 고등계 형사 노릇을 한 골수 친일파라는 사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또한, 그도 자기 아버지가 못된 친일파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아버지가
현재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떠들어대며 곧잘 뻐기고는 했다.
아이들은 말만 들어도 으스스한 치안본부의 권세에 기죽거나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홍성기가 그러는 것은 아직 고등학생이라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사
리 분별을 못하는 탓인지, 대학을 다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평생 그러기가 쉬웠다. 친일파들이 계속 득세하
고 있는 세상에서 그는 그런 태도로 얼마든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다. 그리고, 아버지의 덕으로 남들보다 먼저 출세도 할 수 있을 거였다.
홍성기나 장경식이 친일파 편을 드는 것은 그나마 '자기네 아버지들
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 아이들
의 태도였다. 언쟁이 벌어졌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거 다 지나간
옛날얘기 아니냐' '이제 와서 따져서 뭐 하자는 거냐', '우리도 그때 살
았으면 별수 있었겠냐',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 것 아니냐' 이런 반응들
을 보였다. 그런데 그건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세
상에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아이들은 마치 제 생각인 것처럼 그대로 되
뇌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친일파 세상에서 친일파들이 좋도록 꾸며낸
말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어떤 아이는 '그런 걸
따지는 건 촌놈 짓'이라고도 했다. 그 '촌놈 짓'이란 '촌스러운 짓'일 수
도 있었고, '촌놈들이나 하는 짓'일 수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친일파들
을 공박하고 나선 유일표나 이상재의 고향이 지방이었다. 어쨌거나 촌
놈이란 좋지 않은 욕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유일표나 이상재 같다면 홍성기나 장경식이 그렇
게 뻔뻔하게 기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주변 사람들이 계속 그 모양인
한 홍성기나 장경식 같은 애들은 더욱 낯두꺼워지고 당당해질 수밖에
없었다.
허진은 너무 배가 고프고 피곤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북풍이 몰아
치는 효창운동장 옆의 비탈길을 오르기가 너무 힘겨웠다. 그는 되짚을
수록 부질없을 뿐인 그런 생각을 떼치려고 했다. 그런 생각은 배고프고
피곤에 찌든 몸을 더욱 고달프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고 해서 머리에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공장에는 계속 다닐 수 있을까.......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있
을까.......
허진은 옆구리가 결리는 묵지근한 통증 속에 이런 걱정을 하며 공덕
동 언덕배기로 올라섰다. 추위를 무릅쓰며 걸어다녀야 하는 그 길이 너
무 멀고 멀게 느껴졌다.
"아이구, 이제 오냐. 얼마나 힘들고 추웠누."
허진의 할머니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으로 울상이 되어 손자를 맞아
들였다.
허진은 어깨를 펴며 기운 있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허진의 할머니는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퍼내
왔다.
"에그, 그 손을 어째야 좋누. 날이 추우니 점점 더해가는구나, 얼마나
쓰라리고 아프겠어, 그래. 오늘은 이 할미 말 좀 들어라. 오줌에 담그면
훨씬 나아진다니까."
허진의 할머니는 손자의 튼 손을 곧 잡으려고 했다.
"그런 거 다 미신이라니까요. 오줌이 더러워 더 심해지고 덧날 수 있
어요. 아프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허진은 할머니를 단념시키려고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 배운 사람들은 그런 걸 다 미신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는 다그리 하고 살았는데 그걸......."
허진의 할머니는 '......사다 바르면 금방 나을 텐데' 하는 말을 삼켜
버렸다. 약국에서 글리세린을 사다 바를 수 없는 형편에 말을 하면 더
속이 상할 뿐이었다.
칠이 다 벗겨지다 못해 여기저기 패이고 흠이 생긴 둥근 나무밥상에
다섯 식구가 둘러앉았다. 보리가 훨씬 더 많이 섞인 밥에 시래깃국 한
사발씩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반찬이라고는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그
것도 갖은 양념이 잘된 배추통김치가 아니라 배추잎과 무잎이 뒤섞인
덤불김치였다.
핏기라고는 없이 삐쩍 마른 허진의 어린 두 동생이 얼른 숟가락을 집
어들고 덤볐다.
"또, 또! 윗사람이 숟가락을 든 다음에 들어야지."
허진의 할머니는 아랫입술을 물며 두 손주에게 엄한 눈길을 보냈다.
윗사람이란 허진이었다. 부모 없는 어린것들에게 예절을 가르치는 것만
이 아니라 맏손자에게는 장자의 체통과 책임을, 아래 손주들에게는 장
자에 대한 예의와 복종을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자아, 먹자."
허진은 숟가락을 들었다. 뿌루퉁해져 있던 그의 두 동생이 허겁지겁
밥을 떠넣기 시작했다.
"너 이거 먹어라."
허진의 할머니가 등뒤에서 접시를 집어 허진의 밥그릇 옆에 살그머니
놓았다. 접시에 놓인 것은 계란 부침개였다. 그 순간 네 개의 눈길이, 아
니 그동안 없는 듯 앉아 있던 허미경의 눈길까지 일시에 접시로 쏠렸다.
과일이 명절 때나 입에 대볼 수 있는 것처럼 계란 부침개도 아무때나 맛
볼 수 없는 귀한 먹거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눈길이 쏠린 것을 부끄러워하며 허미경은 고개를 숙였
다. 그러나 군침 도는 얼굴로 다른 두 동생의 눈길은 그대로 접시에 박
혀 있었다.
"어서 밥 안 먹고 뭘 그리 쳐다보고 있어. 오빠하고 형은 공장일이 너
무 힘드니까 보약으로 먹는 게야."
허진의 할머니는 두 손녀와 손자를 꾸짖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손녀
는 눈길을 떨구며 울상이 되었고, 손자는 입을 쑥 내민 채 할머니를 맞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허진은 숟가락을 모로 세워 계란 부침개를 토막토막 자르고
있었다.
"얘야, 너 지금 뭘 하는 게냐? 어서 그냥 먹어라. 두 개도 모자라는데."
"괜찮아요. 콩 하나도 열이 나눠 먹는다잖아요."
허진은 다섯 쪽으로 나눈 계란 부침개를 막내동생부터 차례로 밥 위
에 놓아주기 시작했다.
"그런 철든 말은 어찌 아누."
허진의 할머니는 목이 메이면서도 마음 든든한 것을 느끼며 치마 끝
을 뒤집어 코를 훔쳤다.
저녁을 먹은 허진은 책상 옆의 벽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온몸이
가눌 수 없이 나른하고 무겁게 처져내리며 눈이 절로 감겼다. 전신이 녹
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물속으로 끝없이 잠겨드는 것 같기도 한 착각
에 빠지며 허진은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마치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몰골로 잠이 드는 손자를 측은하게 바
라보며 허진의 할머니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녀는 손자를 눕혀 재우
는 것을 진작 그만두었다. 손자는 한사코 누워서 자려고 하지 않았다.
누워서 자면 다시 일어나기 어려우니 그렇게 앉아서 한숨 잔 다음 공부
를 하려는 것이었다.
"오빠, 오빠, 시간 다 됐어. 오빠, 공부할 시간이야."
허미경은 한 시간쯤 지나 오빠의 어깨를 조심조심 흔들었다. 그건 그
녀에게 맡겨진 고역스러운 임무였다. 오빠가 잠 깨기를 힘들어한다고
그냥 넘겼다가는 이튿날 오빠한테 생야단을 맞았다. 허진은 그 일을 할
머니에게 부탁하지 않고 여동생에게 맡겼던 것이다.
허진은 끈적끈적하고 찐득찐득한 잠의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
다. 전신을 친친 동이고 있는 것 같은 잠의 포승은 너무 검질겨 단숨에
끊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이 서너 차례 깨워서야 가까스로 눈을 뜬 허진
은 온몸이 조각조각 금이 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마음은 분명 일
어나려고 하는데 마디마디가 금이 가고 부서진 것 같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밤마다 그런 몸을 '조립'하는 데는 한참씩이 걸렸다.
아아......, 그만 공부를 포기해 버릴까.......
흐릿한 의식 속에서 이 유혹이 또 손짓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 토한
아버지의 시신이 떠올랐다. 허진은 이를 악물며 천천히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가누기 어려운 몸을 조립'하는 거였다.
허진은 살얼음 낀 물로 세수를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튼
손은 견디기 어렵게 쏙쏙 아렸다.
"에구, 찬물로 세수를 하면 그 손이 어찌 되누 어서 닦아라."
언제 나왔는지 허진의 할머니가 수건을 내밀었다. 허진은 말없이 수
건을 받아들었다.
할머니, 기다리세요. 제가 이 가난 물리치고 꼭 호강시켜 드릴게요.
허진은 수없이 다짐해 온 말을 또 속으로 뇌었다. 세상을 향해 할머니
가 품고 있는 원한을 풀어드리는 길은 이 춥고 배고픈 가난에서 어서 벗
어나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지긋지긋해 하는 것이 가난해서 당해야
하는 '추운 것'이고 '배고픈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춥고 배고
픈 것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고, 그 올가미는 앞으로도 언제까지 식구
들을 괴롭힐지 모를 일이었다.
"눈이 올라나, 어째 별이 하나도 안 보인다. 춥다. 어서 들어가자."
허진의 할머니는 가녀린 한숨을 지으며 손자의 등을 감쌌다.
허진은 앉은뱅이책상에 앉으며 벽을 응시했다. 벽에 붙은 에디슨의
말 아래 새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극복되지 않는 역경은 없다."
허진은 앉음새를 단단히 하며 수학책을 펼쳤다.
허미경은 할머니를 거들어 봉투 붙이기에 손을 재게 놀렸다. 봉투 붙
이기만큼 일손이 많이 가면서 짠 돈벌이도 없었다. 일일이 접고 풀칠을
해서 한 장씩 만드는 것인데도 받는 돈은 몇 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벌이마저도 서로 하려고 하는 형편이었고, 할머니로서는 다른 일거리를
구하기도 어려워 허미경은 틈만 나면 할머니를 도왔다. 겨울이면 으레
자리끼도 잉크도 얼 만큼 방에 외풍이 세서 풀이 묻어나는 손가락 끝이
시렸다. 그러나 허미경은 아무 내색 없는 할머니를 따라 손놀림 빠르게
봉투를 접어나갔다.
허진은 깜빡 졸다가 소스라치며 눈을 부릅떴고, 또 깜빡 졸다가 머리
를 짤짤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그는 잉크 찍지 않은 펜대로 왼쪽 팔뚝을
찔렀다. 날카로운 펜촉 끝이 옷을 파고들어 팔에 예리한 아픔을 일으켰
다.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펜촉을 찔러대 왼쪽 팔뚝은 마치 주삿바늘을
수없이 꽃은 것 같았다.
허진은 밖이 시끌시끌해서 잠이 깼다.
"아 뭣들 하고 있어. 빨리 동치밋국들 떠와, 동치밋국!"
"아니야, 숨 다 넘어가는데 어서 병원으로 옮겨야지."
"무슨 소리야. 병원에 간다고 별수 있어. 연탄까스 취한 데는 동치밋
국밖에 약이 없어."
"어른들은 가망 없을지 몰라도 애들은 아직 정신이 있으니까 동치밋
국을 먹여야 해."
"아이고, 첫눈이 사람 잡았네."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세 들면서 왜 방바닥 단속을 안 했나 그래."
허진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여동생이 방으로 들어서다가
말했다.
"저쪽 끝방 사람들이 연탄까스 마셨어. 이상한사람들이야. 왜 겨울
되기 전에 방바닥 도배를 안 했는지 몰라."
허진은 밖으로 나가볼 마음이 없어졌다. 살인가스인 연탄가스 단속은
각자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겨울을 맞을 때마다 좋지 않
은 종이로나마 어김없이 방바닥 도배를 하고는 했다. 변을 당한 사람들
은 서너 달 전에 세를 들면서 도배를 놓고 주인하고 다투었었다. 주인네
가 도배를 안 해주자 자기들도 안 해버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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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小說漢江)
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2권)ㅡㅡㅡ 25. 먼 불빛을 향하여
소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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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31 19:44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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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죄송 합니다.. 어제 갑자기 병원에 가느라 예고없이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오셨던 님들 .. 무슨일인가 궁금 하셨지요? 또.. 걱정해 주시며 오늘 전화 주신님들.. 감사드립니다. 그냥 검사 받을게 있어 잠시 병원 신세를 좀 졌답니다. 오늘부터 다시 열심히 올려드리겠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퇴근하고 들어와 먼저 읽고 갑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 연탄불 갈아내는 꿈을 꿉니다 참 무서운 일이었지요 연탄가스는... 건강은 어떠신지요 염려스러운 마음 두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소슬바람님 ...
접속창에 잠깐 보인듯 한데 다시보니 아니계시네요.. 염려 고맙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아무일 없기를 저도 바란답니다. 담담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지요. 늘 고맙습니다. 새로운 9월은 님의계절이기를 바랍니다.^^*
읽어면 읽을 수록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그때 그시절 그 참상들 연탄까스 마신일이며 기술하나 배울려면 눈물인지 콧물인지도 모르고서...그래도 꼭 배워야겠다는 신념 그 신념을 지금이라고 배워야죠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늘 행복하시고요 나날이 좋은날 되소서...
그랬지요 굴렁쇠1님~~ 저도 연탄가스에 놀란적이 있답니다. 다름아닌 결혼식 전날에요. 에효..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한 날 이었답니다.하하.. 구월이 활짝 문을 열었습니다. 좋은 계절에 늘 좋은일만 생기시길 바랍니다. 건강두 함께요..^^*
다행입니다. 무조건 건강 하셔야죠 ~~~고등학교 다닐때 자취생들이 연탄까스 중독으로 꽃다운 나이에 생명을 잃는 사고가 많았었는데..........요즘 기름값 폭등으로 다시 연탄수요가 늘어 난다는 뉴스에 가슴이 아파옵니다.
어느날인가.. 자고 일어나니 앞집 할머니와 아들이 같이 가스를 마셨는데 건강한 아들은 죽고 연로하신 어머니는 살아계셨지요 결혼식을 한달 앞둔 아들이었는데.. 건강한 사람이 가스를 더 많이마셔 그렇다는 얘기였지요. 그래서 젊은 사람이 더 많이 희생 되었다더군요 가슴아픈 세월을 살아낸거지요 우린... 좋은날 되셈
극복되지 않는 역경은 없다.".............오늘의 제게주는 명언인듯 싶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소슬님!!
가인님~~ 아주 좋은 명언을 님의것으로 만들었군요. 잠깐의 데이트? 반가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어요..^^*
연탄가스에 대한 안좋은 기억들 하나씩은 누구나가 다 갖고 있을거에요...... 건강 헤치지말고 쉬엄쉬엄 하세요..^^
울 이쁜아우.. 창에 보였는데 없네. 독서 하는거 방해할까봐 아는척 안했더니 ㅎㅎㅎ ... 구월이다.. ㅎㅎ 노래가 생각나네. '구월이 오는소리 다시 들으며... ' 몸조리? 하느라 집에 있다. 나가고 싶은데 허리가 여엉....
연탄만들때보니까 석탄에 황토를 섞어서 연탙틀에 넣고 커다란나무망치로치던데..한장씩만들던..어릴적에 도시에서 본모습은.......기계로공장에서 자동으로 만든거도봤구..지금은 연탄이 어디로갓을가..요즘.비닐하우스에서도 보이긴하드만...난방비아낀다구기름에서 연탄으로...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