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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에 업혀진 솔희는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자세로 있었지만 정균의 등 위에서 힘들었던 것은 소리를 내지 않고 흐느끼기 위해 허파를 닫고 호흡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랫배를 요동치게 했고 리퀴드 아이라이너와 마스카라를 녹인 검은 색 눈물이 하필이면 정균이 이날 입은 하얀 골프색 티셔츠깃에 그대로 배이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균은 말없이 솔희를 들쳐 업은채 산책용 도로를, 그리고 나무숲 사이의 오솔길을 걷고 있었고 마주오거나 앞서가는 남녀노소들에 대해선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솔희는 지금껏 딱 네 번 무릎을 꿇어 보았다.
제일 먼저 일은, 정균에게 손찌검을 하고 끝간데없이 맞서다가 간단히 급소를 눌리며 자연스레 하체가 꺾여진 것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에드먼드가 그녀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강요한 것은 굴종을 강제하고, 솔희에게 무릎꿇는 굴욕과 고통을 주어 자존감을 박멸한 이후에 솔희를 욕보이기 위해서였다.
에벌린 앞에서 무릎꿇은 사건은 그저 협박과 매를 벗어나기 위해서였지만, 에벌린은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솔희는 에벌린이라는 더 어린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뺨을 수차례 맞고 머릿결을 잡혀야 했다.
아까 식당에서 정균 앞에서 무릎을 꿇은 진짜 이유는 6년만에 해후한 정균에게서 어떤 범접하지 못할 광채를 느꼈기에 너무나도 자연스레 단지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상상도 못해본 그의 등에 업혀 아름다운 호반을 산책하는 낭만과 안락함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직까지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에드먼드의 강제행위와 에벌린의 협박과 구타는 이 순간 싹 잊어버렸다.
그의 등 뒤에 업혀있는 그녀를 그 누구도 협박하고 때리고 굴종을 강요할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누가 자기를 업고 이렇게 오랜 시간을 아무 목적도 없이 걸어줄수 있을까.
터벅터벅 그의 발걸음의 진동이 솔희의 전신에 쭈욱 전해져오는 시간이 오래되느니만큼 흔들의자나 덜컹거리는 유모차의 아이가 잠들 듯 솔희는 깜빡깜빡 그의 등 위에서 졸았다.
(그래, 솔희야. 혼자 보스톤으로 떠나서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는 묻지 않으마. 친정에서 일년간 안식했듯, 오늘 하루 내 등 위에서 쉬다가라....)
정균은 더 이상 솔희의 과거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자기를 버리고 일방적으로 떠났다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만났을 솔희더러 꼬숩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한 솔희의 전신을 업고 오랜 시간을 머물고 싶었다.
그녀를 다시 미국으로 떠나 보내고 난 뒤의 추억으로 만들고 싶었다.
정균의 두 손에 살짝 올려져 있는 솔희의 허벅지의 예쁠 정도로 부드러운 살결과 근육의 느낌, 단단함과 푹신함이 조화된 두 개의 봉곳한 가슴이 그의 딱딱한 등날개쭉지에 닿았다가 눌렸다 떨어질때의 그 느낌은 친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잠에 빠진 듯 쌔근거리는 솔희의 호흡소리, 바람결에 날리며 가끔 그의 어깨를 넘나드는 솔희의 린스향 머금은 긴 머릿결을 즐기며 정균은 이제 벅차오는 무게를 감당할 힘이 되고 있었다.
솔희를 업은 정균은 호반을 전부 도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했기에 적절한 반환점을 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솔희가 서서히 깨어났을때 그녀의 몸은 여전히 땅과 분리된채 두 장단지가 정균의 허벅지 옆을 그네타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시간을 함께 보냈던 호반횟집이 가까이 보이고 있었는데 솔희가 모텔에서 택시를 잡아 이곳에 도착했을때에 비해 가을 태양의 방향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솔희의 마비된 하반신 근육은 오래전부터 풀려져 있었고 정신을 서서히 차리면서 절대로 내리고 싶진 않지만 내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도 정균이 솔희를 업고 오랜 시간동안 상당히 무리하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희는 내리기 싫어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그의 어깨 위에 걸쳤다.
“여보, 괜챦아요?”
“솔희야말로 괜챦아?”
솔희는 자기도 모르게 ‘여보’라는 호칭을 아주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썼고 왜 그렇게 불렀는지 놀라지도 않았다.
“이만 내려줘요, 혼자 걸을수 있어요. 당신도 언제까지 절 이렇게 업고 있을순 없쟎아요.”
정균은 산책로에서 조금 벗어난 오솔길로 접어 들어 고개를 숙여 들고 있던 하이힐을 가지런히 놓고 그 하이힐을 한발 건너 솔희가 그의 등 위에서 자연스럽게 내려오면서 하이힐에 발을 넣을수 있는 자세를 만들었다.
솔희는 그의 목을 부여잡은채 다리를 내려 하이힐에 두 발을 꽂아 넣었다.
그 순간 솔희는 너무 오래 지상과 분리되어서인지 현기증을 느끼며 두 하체의 적절한 균형감을 잃어버려 휘청거렸다.
정균이 뒤돌아섰을 때 하이힐을 신은 두 발의 균형이 깨지며 비틀거리는 솔희를 목격했다.
순간 이곳에서 발목이라도 삐거나 해서 그녀가 미국 돌아가는데 지장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앞서서 솔희의 오른쪽 팔꿈치를 확 낚아채고 왼쪽 허리를 꽉 잡아서 그녀의 하체가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켰다.
“아아앗! 휴우우~”
솔희는 순간 넘어질거라는 예감에 두 눈을 꼭 감았지만 이내 그녀의 몸이 저항할수 없는 힘에 의하여 뒤로 돌려지며 강제로 고정되자 비명은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그때 두 사람의 마주선 자세는 그녀의 가슴이 정균의 가슴과 골프공 하나의 차이밖에 안났고 솔희는 다시 정균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옆에, 그의 뒤에, 그리고 그의 안에 있으면 모든게 안전하다는 편안함의 느낌의 담은 솔희의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찬 정균의 눈빛과 만났다.
여전히 정균은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휘어잡고 있었다.
솔희의 눈빛은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사인과도 같았기에 두 사람이 반발짝 더 가까이 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솔희의 적절한 길이와 두께를 지닌 봉곳한 입술과 명확한 입술라인, 진한 벌건디빛 립스틱과 립라이너로 더더욱 빛나고 있었고...........
결국 정균과 솔희는 입술을 포개었다.
쪼오오옥! 쪽! 쪽!
그때까지도 솔희는 정균을 향해 눈을 감지 않았고 서로의 안면이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순간에도, 서로의 입술이 맞닿고 포개어지는 순간에도 눈을 뜨고 있었고 그의 눈빛을 주시했다.
첫 번째로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붙어 오므려졌다 펴지는 순간부터 솔희는 눈을 감았다.
6년만에 해후한 이혼한 부부의 입가에는 서로의 뜨거운 콧기운이 교차하고 있었다.
(키스라는게 이런걸 즐기는거구나. 하지만 여전히 솔희의 타액에는 마약이 발라져 있는 것 맞어)
정균은 서로의 뜨거운 콧김을 나누며 키스의 또 다른 매력을 깨닫고 있는 듯 했다.
타액을 나누는 것은 단순히 쾌락만을 쫓을 때의 이야기고 뜨거운 이산화탄소를 교환하고 받아들일 때 반대편의 정서와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솔희의 왼편 어깨를 붙잡고 있던 정균의 손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 솔희의 힙에서 멈추고 안쪽으로 스며든다.
단단하게 뭉쳐졌지만 그 사이의 계곡은 그의 손길을 수줍게 받아들이고 있다.
정균의 손은 솔희의 힙을 가리고 있는 치마를 쓸어 내렸다.
솔희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았지만 붙들려 있는 입술과 뜨거운 콧김으로 인해 호흡이 곤란한 듯 숨소리가 거칠고 커졌기에 더 이상 키스를 오래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균은 신중하게 입술을 닫고 잠시 그녀의 입술과 딱 붙였다가 서서히 얼굴을 뒤로 했고 고개를 살짝 뒤로 쳐들고 정균의 입술을 받아내던 솔희는 고개를 바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솔희는 무너질 듯 정균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버렸고 정균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두팔로 감쌌다.
다시 두 남녀의 간극이 벌어지자 솔희는 수줍은 소녀의 첫키스 직후처럼 빨개진 얼굴로 정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급히 핸드백을 열었다.
“제발 요령껏 하세요. 여긴 남들한테 다 보이는 곳이쟎아요”
솔희는 티슈를 꺼내어 정균의 입술을 닦아주며 엄마같은 말투로 잔소리를 했다.
무조건 휙하고 티슈를 문질러 대는게 아니라 정균의 굴곡진 입술에 적절한 압력을 가하고 툭툭 쳐내면서 정균의 입술에 묻은 서로의 타액과 솔희의 루즈를 흔적없이 지워준다.
정균은 말없이 솔희의 행동을 받아들이며, 옛 결혼생활 도중의 언제인가 솔희의 연주회가 끝나고 그녀를 차에 태운뒤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자 솔희가 신경질을 내며 선바이져를 내리고 티슈를 꺼내 자기의 입술의 립스틱이 어긋난 부분만 지우기에 여념이 없었었던 일을 떠올린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거지?)
정균의 입술을 닦아주고 메이컵 미러를 꺼내 그때서야 그녀의 입가 언저리를 닦는 솔희를 바라보며 정균은 만족감과 더불어 또 다른 의문점에 휩싸인다.
두 사람은 적어도 이혼 전후의 행적에 대해 어떠한 심각한 고백도 대화도 없었다.
둘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에 대해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 솔희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다.
그 풀려진 눈동자는 그가 뭘 원하던 그대로 따라오려는 태세였다.
그럼에도 솔희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주도하려 하는, 사랑에 대해 진심 적극적이고 당찬 여성임엔 확실했다.
“점심 잘 얻어먹고, 잘 케어받았으니 저녁은 제가 낼께요”
“조오치~~저녁은 어디서 낼건데? 여긴 내 손바닥 안이니깐 뭘 먹고 싶은지 말만 해. 그나저나 저녁시간까지 뭘하고 놀까?”
“제가 직접 해드릴께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사과향 돼지갈비를 할까해요. 조금 달달할거구 여기엔 에일즈 맥주나 백포도주를 곁들이면 좋아요”
“그럼 당신 친구들은?”
“!!.........”
솔희는 한국행 이전에 정균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친구들과 춘천에 와서 놀다가 잠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정균을 만나기 위해 빠져 나올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아까도 친구들과 함께 수도권전철을 타고 긴 여행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탄로날 지경에 이르렀다.
솔희는 똑바로 정균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에게 비친 솔희의 눈빛은 웬지 아련하고 애절해 보였고 그것 자체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여자로서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문제라는걸 직감한 정균은 더 이상 무언가를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다음의 액션을 취해야 했다.
“모텔에 가서 체크아웃하자, 그리고 마트에 가서 재료를 구하면 되지”
“이왕이면 재래시장 어때요? 아주 어렸을 때 엄마랑 가던 희미한 기억이 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이 번개시장이란 곳이야, 거기서 당신이 재료를 골라. 물론 요즘 재래시장은 옛날보다 깔끔하고 정돈되긴 한 대신 그전의 감성은 느끼기 힘들지도 몰라”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손을 잡고 식당 주차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들이 처음 재회했던 일식당과 솔희가 투숙한 모텔은 불과 10분 거리였다.
정균은 솔희를 따라 모텔로 들어갔고 그닥 정리할 것도 없이, 화장실과 화장대에 놓인 몇 개의 기초화장품과 대형 여행가방을 정리하였고 솔희가 퇴실수속을 밟는 동안 정균은 솔희의 대형, 소형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실었다.
번개시장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솔희는 그리로 가는 도중에 정균에게 사무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피놋누아르와인이나 백포도주, 에일즈 맥주랑 사과는 필수적으로 집에 있을거고, 올리브유랑, 드라이럽은 있나요? 당연히 없겠지요?”
“어떻게 알았지? 까먹었을줄 알았는데”
“.......까먹을수 있었을까요?”
솔희의 그 반문은 그에게 울림이 있었다.
예전 결혼생활에서 그녀는 정균의 모든 취향에 대해 전혀 관심을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심한 것 같았던, 절대로 무관심한줄 알았던 정균의 취향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고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어쩌면 당시 정균의 취향과 모든 것이 솔희의 제 2 기억저장소로 보내졌다가 어느 시점에서 1 저장소로 꺼내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균은 면밀하게 식재료를 고르고 상인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솔희를 한발짝 뒤에서 지켜보았다.
거기에 개입했다가 솔희의 엄청난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림에 대한 솔희의 억척스러운 모습을 본 것이 신기해서였다.
어지간한 물건들이 구비되자 이들을 실은 차는 약간의 경사가 있는 지역으로 올라갔다.
솔희는 바깥 광경들을 내다보며 연신 미소를 짓고 중간중간 탄성을 질렀다.
민둥산이며 바닷바람을 맞는 팔로스버디스와는 달리 이곳은 종류가 다른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즐비했고 그 굽잇길조차 아름다울 정도였다.
한 2층짜리 대형 주택 앞에서 차가 서행하며 멈출 준비를 하자 솔희는 이곳이 정균의 집임을 직감하고 집모양과 주변을 살폈다.
[채정균]이라는 새겨진 문패가 눈에 들어오자 솔희는 웬지 가슴이 아련해졌다.
정균이 들고온 그녀의 여행가방을 솔희는 응접실 구석에 세워두었다.
“안쪽으로 가져가지?”
“아뇨, 일단은 여기에 놓도록 허락해 주세요”
솔희는 그말을 마치고 쏜살같이 주방으로 달려가 방금 전에 사온 물건들을 풀어 정리했고 냉장고와 주방설합을 열어 번개같이 현황파악을 하고 있었다.
정균은 말없이 솔희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이 비현실적인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나오는 순간 솔희는 시차적응도 안되었고 긴장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하품을 해버린다.
정균은 솔희더러 2층의 침실에 가서 눈을 붙이라며 그동안 자신은 사무실에 가서 일정리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희는 쇼파 위에 눕고 싶다고 말했다.
정균은 1층의 서재 옆의 다른 방문을 열며 퀸사이즈 침대가 있는 곳을 보여주었다.
“부모님이 가끔 오시면 쉬다 가는 곳이야, 여기에 눕도록 해”
“아니요! 전 이집의 침실 어디에서도 잘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그냥 쇼파에 눕게 해주세요”
정균은 솔희와 더 이상의 실갱이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설마 그녀와 만나 그녀가 이집까지 따라오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뭔가 오버를 하지 않길 원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모시는 방에서 쿳션과 벼게와 담요를 꺼내 쇼파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솔희의 손을 잡아 끌고 집안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었다.
특히 2층 마스터 베드룸의 창문을 열어주었을 때 멀리 보이는 산야가 눈에 들어오자 솔희는 큰 소리로 탄성을 질러댔다.
“그럼, 나 사무실에 다녀올게. 지금 세시가 넘었으니깐 일 마무리하고 오면 8시가 넘을거야”
“네,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빨리 들어오시고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나 문자주세요”
솔희가 정균이 세워둔 차에 있는 곳으로 이동할 때 따라나가서 안전과 빠른 귀가를 당부하는데 마치 여느 부부의 출근 장면과 다를바가 없었다.
거실 쇼파에 앉은 솔희는 아무런 장식도 그림이나 사진도 없는 이 황량한 공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쇼파에 누웠다.
어떻게 하다가 정균이 기거하는 주택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도저히 그녀의 머리로 정리를 할 수가 없었고 우연한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저 순간순간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쇼파에서 깨어난 솔희는 정균이 준비해 주었던 담요와 쿳션을 가지런히 정리해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았다.
덕지덕지 붕괴된 화장과 헝클어진 머릿결, 외출용 원피스 차림으로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돼지갈비와 재료들을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에어컨 대신 주방 테라스와 거실 창문을 개방하니 온 몸에 배인 땀이 가을 바람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돼지고기를 오븐에 넣고 중불로 굽기 시작하며 야채를 씻고 테이블을 셋팅하고 와인셀러에서 피놋누아르 와인 하나를 꺼냈다.
와인잔이나 양주잔도 여러개 있는 것으로 보아 정균은 가끔 이곳에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던 것 같다고 솔희는 판단했다.
그녀는 아까 정오에 정균을 보았을 때 그녀만이 느꼈던 카리스마와 그녀를 절대로 적대하거나 증오하지 않는 온화함, 무릎을 꿇었던 후유증으로 고통받을 때 아무 조건없이 그녀의 온 몸을 들쳐업고 감당하며 아름다운 호숫가를 거닐은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돼지갈비가 완전히 익으려면 50분은 더 있어야 한다.
솔희는 아래층 화장실에서 화장을 완전히 지우고 머리를 감고 세안을 한뒤 스킨제품 맛사지를 하며 다시 한번 오븐의 돼지고기를 뒤집었다.
“이거 너무 야한가? 혼자 입으려고 가져온건데...........어차피 옛날에 서로 볼 것 다 보고 해볼 것 다 해봤는데, 입지 뭐 까짓거”
솔희는 여행가방을 풀어 보았지만 적당히 입을 옷이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슬립형 원피스를 입었다.
그러다가 급속도로 솔희는 그녀가 얻은 병환 탓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우울해지기 시작하여 쇼파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있었다.
돼지고기 익는 냄새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오븐을 열어 뒤집고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고는 솔희는 다시 메이크업 도구를 꺼내 화장을 다시 시작했다.
얼굴의 색상이 파운데이션과 블러싱으로 덮이고 눈두덩이 컬러풀해지고 눈썹이 진하게 길어지고 입술이 붉어지는 등 화장이 서서히 완성되어가자 그녀는 이제야 마음이 진정되는 듯 했다.
사무실로 재출근하는 정균은 예상하지 못하고 믿기지 않는 상황을 맞이했지만 마음은 담담했다.
“저녁 식사 후에 뭔 일이 벌어지더라도 의미는 두지 말자. 솔희에게 그렇게 추억이나 만들어서 보내면 되니깐....어차피 자기 밖에 모르는 여자야, 변했을리가 없어”
정균은 예전의 솔희만큼이나 그 상황과 분위기에 충실한 남자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에 대한 냉소와 닫힌 마음은 열리질 않았다.
그녀가 쓰러질까봐 순간적으로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낚아챈 것이 자연스레 기나긴 키스신으로 연결되었지만 그 지나간 키스신에도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아까전에 솔희를 업고 한참을 돌며 그녀의 가슴과 배에서 울어나오던 뜨거운 열기를 느꼈고 그녀의 흐느낌에 파묻혔지만 더 이상 솔희에게 끌려다니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회사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국에 있을 때 Apple Bee라는 식당 가보셨죠? 거기서 나오는 돼지갈비로 준비중이에요. 출발할때쯤 문자 주세요]
이렇게 날아온 솔희의 방금 개통된 카톡에 정균은 마음이 묘해졌다.
뭐라 딱 집어 말할순 없지만 편안함 속의 한 일상같은 일을 처음 맞이하는 느낌이다.
정균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차에 급히 올랐다.
지나다가 홈플퍼스가 보여서 무작정 그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여성용품 매장을 둘러 보았다.
화장품은 그녀의 취향에 맞아야 했지만 그녀가 어떤 화장품을 쓰는지 알지도 못해서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솔희가 과거에 T 팬티를 즐겨 입었던 것을 떠올린 정균은 속옷 매장으로 가서 다섯 개의 컬러로 된 티팬티가 하나의 팩으로 묶여진 것을 구입하고 저녁때 집안에서 실내복으로 사용할만한 적당히 섹시한 가을용 드레스를 하나 골랐다.
그 뒤 차에 올라 솔희에게 퇴근한다는 톡을 넣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갈비는 당신 도착할때쯤 완전히 익을거에요. 하지만 안전하게 오세요]
“이렇게 빨리 답장해준적이 있었나?”
기대도 안했건만 1분도 안되어 솔희로부터 답장을 받은 정균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예전의 결혼생활을 돌이켜 보았다.
솔희는 본인이 급한 일이 아니면 정균에게 해주는 답장이 매우 느렸고 대부분 연습중이었던 것으로 핑계를 댔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솔희가 연습이 없고 집에만 하루종일 머무는 날에도 그녀의 카톡답장은 매우 늦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정균은 솔희의 이런 변화가 분명 일시적인 것이거나 뭔가를 얻기 위한 연기에 불과하다고 애써 마음을 다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유가 뭔지 몰라도 신호대기를 하는 도중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와아~~”
정균의 차가 집앞에 도착했을 때 늘 어둡거나 미등 하나만 형식적으로 켜져 있던 1층 전체와 주방 방면까지 환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정균은 가슴이 뛰면서도 안도감에 젖어들고 있다.
차에서 그냥 뛰어내려 집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든다.
차를 그라지에 주차하고 내리자 정말 적당히 껍데기가 탄 달달한 돼지갈비 내음에 그는 취할 것 같았다.
선물꾸러미를 챙겨 문을 열며 정균도 모르게 소리쳤다.
“여보~ 나 왔어!~”
놀랍게도 어디서 꺼냈는지 식탁에는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고 잘익고 풍성한 돼지 갈비가 가운데 놓여 있었고 옆에는 예쁘게 데코레이션된 샐러드와 바베큐 빈즈와 옥수수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끼던 피놋누아르 와인, 하지만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잠옷인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짧고 섹시하고 노출이 심한 슬립차림에 풀메이크업을 한 채 와인잔을 놓고 있다가 그를 돌아다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솔희였다.
“방금......저보고 ‘여보’라고 하셨나요?”
솔희의 말투는 기쁨보다는 놀라움을 표현했고 뭔가 재확인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정균은 이 순간은 그녀가 원하는대로 맞춰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도 감격하고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보! 나 왔다니깐!”
‘그래 방금 여보라고 불렀어’라는 대답보다는 그렇게 다시 한번 솔희를 불렀다.
정균은 자기도 모르게 감격하고 기뻐할줄 알았던 솔희의 모습을 기대했건만 솔희는 의외로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반응한다.
그녀는 자신이 준비하던 저녁테이블을 완전히 잊은채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서 섰고 정균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당신한테 물어볼 것을 바꾸었어요.”
“듣고 싶어”
솔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고의적으로 뜸을 들이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였고 뭔가 하고픈 말은 많은데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솔희는 그 예쁜 눈, 아름다운 색상으로 주변이 장식된 눈을 껌뻑이며 그에게 물었다.
“솔희를, 솔희를 지켜주실수 있나요? 저, 보호받고 싶어요.”
정균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정균이 완전히 이해할수 없는 솔희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파서 그래요,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 이대로 미국 돌아가면 저 죽을것만 같아요, 여, 보.......!”
솔희는 예고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마치 어린아이 울음처럼 그 빨갛고 광택나는 입술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여보!”
정균은 대답 대신 솔희를 강한 팔로 끌어당겼고 솔희는 온 몸이 힘없이 그의 팔에 이끌려 그의 상체에 푹 파묻히듯 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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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일관되게 감상해주심 존경 표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쓸께요.
부부란정 인연이라는정을 느끼며
잼있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부부의 정이란 오묘하죠. 인연도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되는 부분이 있나봅니다.
죄와 화해와 용서, 자녀없는 부부의 사랑과 행복, 정균이라는 남주에게 가장의 책임과 관용을 담는 것이 저의 의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