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족보에 보면 그 조상들이 신라 때 칠원(현재의 경남 함안)에서 일종의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 하여 끝까지 항거하였으므로 크게 노한
왕건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경기도 광주 지방 노비들 중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 말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이당(唐)이 고을 원님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있고 덕망높은 자손들이 번창하니 한음 이덕형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의 후손들이다.
이당의 다섯 아들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
[1]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멸족에 가까운 풍파를 겪었음에도 가문 자체는 명문가로 유명했던지 본관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거에는 광주 이씨라는 이유만으로 그 셋째 딸을 주곤 했다고.
[15]근데 그건 자랑 할 만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