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의 새 미래의 삶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14-17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단식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단식의 실천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의 종교성을 규정하고 싶어 했던 당대의 많은 ‘종교인’에게 중요한 문제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아마도 매우 엄격한 단식과 고행을 종교성의 핵심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뿐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예수님께서 단식을 잘 지키시는지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처럼 광야의 고행자가 아니었지만 계명의 철저한 준수가 그들이 이해하는 종교성의 핵심이었습니다. 따라서 단식 규정의 준수 또한 예수님의 종교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즐거이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34)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단식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확신한 종교성의 기준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혼인 잔치로 비유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감지하고 그 초대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달콤하고 편한 것만 찾는 태도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결심을 품고 있을 때 온전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단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기쁨을 표현하고 숙성해 갈 수 있는 단식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새로운 단식이란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와 회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보는 마음이자, 자신의 종교적 ‘업적’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실천에 애쓰면서도 ‘주님은 언제나 더 크신 분’이라는 교회의 오래된 격언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는 종교성의 기준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과 성찬과 삶의 여러 사건 속에서 드러내시는 기쁨의 초대를 섬세하게 알아듣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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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글 드립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모양의 통나무와 칼을 나누어 주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한 학생의 앞에는 멋진 배를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의 앞에는 나뭇조각만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뭇조각만 쌓여 있는 학생에게 무엇을 만들려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옆 친구처럼 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똑같은 것을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는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지요. 그런데 비행기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들기 편할 것 같은 버스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바꾸다보니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깎은 나뭇조각만 쌓이고 말았습니다.”
한 학생은 배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지만, 다른 학생은 계속해서 목표가 바뀐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과 목표가 자주 변하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삽니다. 하지만 목표가 아예 없거나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그 반대의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위대한 사람은 평범한 것에서 위대함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뽐내거나 자신을 위대하게 보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하다(이케다 다이사쿠)>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태오 9,14-17)
花婿が一緒にいる間、
婚礼の客は悲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だれも、織りたての布から布切れを取って、
古い服に継ぎを当てたりはしない。
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革袋に入れるものだ。
(マタイ9・14-17)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No one patches an old cloak with a piece of unshrunken cloth.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
(Mt 9,14-17)
年間第13土曜日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ホニン チャンチ ソンニムドリ シンランカ ハムケ イッヌン トンアネ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スルポハル スヤ オッチ アンヌニャ?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セ ポドジュヌン セ ブデエ タマヤ ハンダ。
(마태오 9,14-17)
花婿が一緒にいる間、
하나무코가 잇쇼니 이루 아이다
婚礼の客は悲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콘레에노 캬쿠와 카나시무 코토가 데키루다로오카
だれも、織りたての布から布切れを取って、
다레모 오리타테노 누노카라 누노키레오 톳테
古い服に継ぎを当てたりはしない。
후루이 후쿠니 츠기오 아테타리와 시나이
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革袋に入れるものだ。
아타라시이 부도오슈와 아타라시이 카와부쿠로니 이레루
(マタイ9・14-17)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No one patches an old cloak with a piece of unshrunken cloth.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
(Mt 9,14-17)
Saturday of the Thirteenth Week in Ordinary Time
MT 9:14-17
The disciples of John approached Jesus and said,
“Why do we and the Pharisees fast much,
but your disciples do not fast?”
Jesus answered them,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No one patches an old cloak with a piece of unshrunken cloth,
for its fullness pulls away from the cloak and the tear gets worse.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the wine spills out,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2024-07-06「花婿が一緒にいる間、婚礼の客は悲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神をたたえよう。神は偉大、すべては神に造られた。
おはようございます。
今日は年間第13土曜日です。
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と天主の母聖マリア、聖母の配偶者聖ヨゼフ、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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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タイによる福音
<花婿が一緒にいる間、婚礼の客は悲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そのとき、9・14ヨハネの弟子たちが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わたしたち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よく断食しているのに、なぜ、あなたの弟子たちは断食し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15イエスは言われた。「花婿が一緒にいる間、婚礼の客は悲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しかし、花婿が奪い取られる時が来る。そのとき、彼らは断食することになる。16だれも、織りたての布から布切れを取って、古い服に継ぎを当てたりはしない。新しい布切れが服を引き裂き、破れはいっそうひどくなるからだ。17新しいぶどう酒を古い革袋に入れる者はいない。そんなことをすれば、革袋は破れ、ぶどう酒は流れ出て、革袋もだめになる。新しいぶどう酒は、新しい革袋に入れるものだ。そうすれば、両方とも長もちする。」(マタイ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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教会の教えです。
今日の福音で、ヨハネの弟子たちがイエス様に断食に関する質問をします。断食の実践はイエス様が公生活を始められたとき、その宗教性を規定しようとした当時の多くの「宗教家」にとって重要な問題であったことが推測されます。
ヨハネの弟子たちは恐らく非常に厳格な断食と苦行を宗教性の核心と見なしていたでしょう。ヨハネの弟子たちだけでなく、ファリサイ人たちもイエス様が断食をしっかり守っているかを注意深く見守っていました。彼らはヨハネの弟子たちのように荒野の苦行者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が、戒律の徹底的な遵守が彼らの理解する宗教性の核心でした。したがって、断食規定の遵守もイエス様の宗教性を評価する重要な基準だったでしょう。彼らは人々と楽しく飲み食いするイエス様の姿を見て、「見ろ、大食漢で大酒飲みだ。徴税人や罪人の仲間だ」と(ルカ7・34)のように冷やかしました。
しかし、イエス様にとって断食は本質的な問題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彼らが確信した宗教性の基準をイエス様は認め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イエス様が人々に本当に望んだのは、婚宴に例えられる神の国の喜びを感じ、その招きに集中することでした。また、神の国の喜びは甘いものや楽なものを求める態度ではなく、主の十字架の道を共に歩む決意を持っているときに完全に保つことができるという事実を悟ってほしいと願っていました。断食はこの視点で初めて意味を持ちます。
イエス様が新しいぶどう酒を新しい革袋に入れるべきであると言われたのは、救いの喜びを表現し、成熟させていく断食について語られたと解釈できます。聖書学者たちはこの新しい断食が単に自分の罪に対する贖いと悔い改めだけを考えることではない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イエス様の十字架の死を通じた救いを見つめる心であり、自分の宗教的「業績」に関心を持つのではなく、隣人への愛の実践であると解釈しています。
私たちキリスト者は宗教的実践に努力しつつも、「主はいつもより偉大な方だ」という教会の古い格言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何よりも、自分自身が考える宗教性の基準に執着してはなりません。主が言葉と聖餐と生活のさまざまな出来事の中で示す喜びの招きを細かく聞き取り、新しい生活を決意し実行する態度を持つことが必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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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々赦しの秘跡を受けて新しくて清い聖なる生活ができ、喜びと平和な生活ができますように聖霊、来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