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유화 -[煮茶學 = 茶經講說]- 茶經 卷下 七之事 - (p299-305)
[원문]
宋 [江氏家傳](690) “江統, 字應元, 遷愍호 太子(691)洗馬, 曾上疏諫云
(송 강씨가전 강통 자응원 천민호태자세마 증상소간운)
‘今西園賣 醯<초 혜>(692), 麵<국수 면> , 藍子(693), 菜, 茶之屬, 虧敗國體,’ “
(금서원매혜 면 남자 채 차지속 휴패국체)
[국역]
송나라 [강씨가전(江氏家傳)]에 “강통(江統)의, 자는 응원(應元)이고,
민회태자(愍懷太子)의 세마(洗馬)로 관직을 옮겼으며,
그는 일찍이 황제께 올리는 상소에 간언하기를 ,‘지금 서원(西園)에서 팔고 있는
식초, 국수, 쪽풀씨[藍子]. 채소, 차 등은, (유감스럽게도) 나라의 체면을 훼손시킨다.’ “고 하였다.
[강설]
[강씨가전(江氏家傳)]은 [신당서(新唐書)][예문지(藝文志)]에 수록되어 있으며,
모두 7권으로 저자는 강통(江統)으로 되어있다.
이에 [강씨가전]의 저술은 강통부터 시작한 후 후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강통은 서진(西晉) 시대 진류어(陳留어- 지금의 河南 杞<구기자나무 기>縣 남쪽) 사람이다.
처음의 벼슬은 산음령(山陰令)이었으나 훗날 민회태자(愍懷太子)의 세마(洗馬)로 승진했다.
그는 사치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금기사항을 제정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본문의 내용도 그가 상소(上疏)를 올린 다섯 가지의 금기사항을 간청한 문구인데,
[다경]에서 인용된 것은 네 번째 금기 중 마지막 구절이다.
그러나 [진서(晉書]] [강통전(江統傳)]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 서원(西園)에서 팔고 있는 규채(葵菜), 쪽풀씨[藍子]. 닭, 국수 등의 물품은
나라의 체면을 훼손시킨다.(694)”의 내용 중에 ‘차’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는 [다경]에서 인용한 [강씨가전(江氏家傳)]의 내용과 사뭇 다르다.
이로보아 본문의 내용 중, 차에 대한 기록 여부가 사실인지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서원은 서진의 수도 낙양(洛陽)의 서쪽 동산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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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강씨가전(江氏家傳)]: 서진(西晉) 때 강(江) 씨 집안의 전기 7권을 말한다.
(691)민회태자(愍懷太子): 서진(西晉)의 혜제(惠帝)와 도가(屠家)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황태자, 사마휼(司馬휼)을 말한다, 자는 희조(熙祖)다. 그가 자신의 서원(西園)에서
식초, 국수, 쪽씨앗나물[藍子]. 채소, 차 등 물건을 팔아 나라의 체면을 손상을 일으키자
태자세마(太子洗馬)인 강통(江統)이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도록 간언한 내용에서 언급되고 있다.
(692)혜(醯): 식초
(693)남자(藍子): 남자채(藍子菜)를 말하며 곧 쪽씨앗나물, 쪽풀씨.
(694)“今 西園葵菜. 藍子, 鷄, 麵之屬 虧敗國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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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宋錄](695) “新安王子鸞, 豫章王子尙詣曇濟道人於八公山, 道人設茶茗,
(송록 신안왕자란 예장왕자상예담제도인어팔공산 도인설차명)
子尙味之曰, ‘此甘露也, 何言茶茗.”
(자상미지왈 차감로야 하언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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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송록(宋錄):동진(東晉)이 멸망하고 하남(河南)에서 유(劉)씨가 세운
송(宋)나라의 56년간에 걸친 사록(史錄)이다.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송략(宋略)]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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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송록(宋錄)]에 “신안왕(新安王) 자란(子鸞)과, 예장왕(豫章王) 자상(子尙)이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담제도인(曇濟道人)에게 예를 갖춰 방문하였는데, 도인이 차를 대접하였다.
이를 맛본 자상이 말하기를 ‘이것이 감로이지, 어찌 차라고 하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강설]
[송록(宋錄)]은 육우가 옛 문헌을 통해 편집한 [칠지사]에서 승려와 차에 관계되는 세 번째 이야기다.
[송록]은 [수지(隨志)] [경적지(經籍志)]에 수록되었으며,
남조(南朝) 송(宋)-420~ 479)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다경]의 일부 간본에서는 예장왕(豫章王) 자상(子尙)을 신안왕(新安王) 자란(子鸞)의 동생으로 쓰고 있으나(696),
사록(史錄)에 따르면 신안왕 자란은 송(宋) 효무제(孝武帝-453~ 464)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예장왕 자상은 두 번째 아들로 되어 있어 잘못된 필사본으로 보고 있다.
본문 내용 중에 언급된 담제도인(曇濟道人)은 하동(下同) 사람이며,
13세 때 출가해 당시의 명승 도법사(導法師)의 제자가 되었다.
원래 팔공산(八公山)지금의 安微 壽縣 八公山) 동산사(東山寺)에 기거하였으나,
대명(大明) 2년(458)에 양자강 건너 남송(南宋) 송경성(宋京城-지금의 江蘇 南京市)의
중흥사(中興寺) 그리고 장엄사(莊嚴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내용은 [삼론조사전집(三論祖師傳集)]에 기록되어 있다.(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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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6)“新安王子鸞, 鸞弟豫章王子尙.”
(697)“?濟,下同人, 十三出家, 爲導法寺弟子, 住入空山東寺. ... 以宋大明二年過江, 住中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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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王微 [雜詩](698) “寂寂掩高閣, 寥寥空 廣厦(699), 待君竟不歸, 收顔(700)今就가,”
(왕미 잡시 적적엄고각 요요공광하 대군경불귀 수안금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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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잡시(雜詩):[잡시]는 2수로 되어있으나 육우가 본문에서 첫 수를 인용하였다.
본 장 [칠지사] 서두에 인용된 수많은 이름 중에 왕미(王微)의 이름은 빠져있다.
(699)광하(廣厦): 넓은 집.
(700)수안(收顔): 어두운 안색, 실망스런 얼굴의 표정을 거둔다는 말,
일부 판본에서 ‘안(顔)자를 ’영(領)‘자로 표기하고 있으나 오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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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왕미(王微)의 [잡시(雜詩)]에
“높은 누각은 교요함으로 덮여 있고,
넓은 집은 쓸쓸하게 텅 비었네,
기다리던 님은 끝내 오지 않으니,
얼굴을 거두어 이제 차[가]를 마시리라.“고 하였다.
[강설]
차를 마신다는 것을 수양의 일환이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거와의 연관 속에 있고 현재 보이는 태도에 근거해서 미래가 열린다.
얼굴은 마음의 초상화이자 정신의 반영물이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그 답이 얼굴에 쓰여 진다.
얼굴을 거둔다는 것은 마음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곧 내 얼굴을 만드는 과정이다.
왕미(王微-415~443)의 자는 경현(景玄)이고 낭야(낭야) 임기(臨圻<경기 기>) 사람이다.
남조 송나라의 개국공신 왕홍(王弘)의 조카로 처음의 관직은 사도제주(司徒祭酒)이었으나
후일 태자중사신(太子中舍人), 중서시랑(中書侍郞)까지 오른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죽은 후 송문제(宋文帝)로부터 비서감(秘書監)의 관직을 얻었다.
그는 문장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으며, 음률, 의학, 점복(占卜)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문의 내용은 [송서(宋書)]권62의 [열전(列傳]]에 보인다.
모두 2수로 되어있으며, 뽕을 따는 여인의 슬픔을 이야기로 적고 있다.
육우는 2수 중 첫 수를 인용하였으나 첫 수의 28구 중 마지막 4구만 발췌하였다.
원문 중 첫 수의 28구는 아래와 같다. <p303 참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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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飽昭妹令暉著 [香茗賦]
(포소매영휘저 향명부)
[국역]
포소(飽昭)의 누이동생 영휘(令暉)는 [향명부(香茗賦)]를 ㅈ었다.
[강설]
시사가부(詩詞歌賦) 속에서의 차는 서정(抒情)을 통해 풍류를 즐기는 하나의 도구였다.
육우는 이러한 부류의 시가를 5수 수집하였는데, 영휘의 [향명부(香茗賦)]도 그 중의 하나다,
[향명부]는 차를 음미하는 문학작품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구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내용은 유실되었다. 다만 여류시인 심청지(沈淸支)가 읊은
[속포영휘(續飽令暉)] [향명부(香茗賦)]에 조각 글만 남아 있다.
포영휘는 동해(東海-지금의 山東 ?城 일대) 사람이다.
서정시(抒情詩)에 능하며 7수의 시를 전하고 있을 뿐 그에 대한 다른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남조 송나라의 저명한 여류시인인 포소(飽昭)의 누이동생이 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남조의 문학비평가인 종영(鍾<술병 종>嶸<가파를 영>)은 자신의 [시품(詩品)]속에서
포영휘의 재능을 가리켜 ‘참절청교(참絶淸巧)’. ‘청승어람(靑勝於藍),’이라 극찬하였다.
언니인 포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포소는 자신을 [삼도부(三都賦)]의 저자인 좌사(左思)에 견주하였고,
누이동생인 포영휘는 당시의 여류작가이자 좌사의 여동생인 좌분(左芬)보다 재능이 뛰어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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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南齊世祖武皇帝 遺詔(701) “我靈座上愼勿以牲爲祭, 但設屛果, 茶飮, 乾飯, 酒脯而已.”
(남제세조무황제유조 아영좌상신물이생위제 단설병과 차음 건반 주포이이)
[국역]
남제(南齊)의 세조(世祖)인 무황제(武皇帝)가 남긴 조서(遺韶<유조>)에서
“나의 제상[靈座] 위에는 살생한 제물을 삼가 올리지 말고,
다만 떡과 과실, 마시는 차, 마른밥, 술과 육포만을 올리라.”고 하였다.
[강설]
남제 세조 무황제(武皇帝-482~ 493)는 소이(??)를 말하며,
남조 제나라 개국황제인 고제(高帝-479~ 482)의 맏아들이다.
등극한 후 연호를 영명(永明-483~ 4930이라 하였고 철저한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다.
본문의 내용은 [남제서(南齊書)] [무제본기(武帝本紀)]에 보인다.
지금까지 발견된 왕실실록(王室實錄)중 제사를 지낼 때 차를 사용했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특히 무황제의 제사에서 차를 사용한 후
영명 9년(491) 소황후(昭皇后)의 제사에도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발견되고 있다.(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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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유조(遺詔): 죽으면서 남긴 황제의 유언, 조서를 말한다.
(702)[南史] (后妃. 齊宜孝陳皇后傳) “永明九年, 詔泰?四時祭, 宜皇帝 ~?起?餠??
孝皇后鸞??卵脯醬炙白肉, 高皇帝?育? 詔皇后?茗?炙魚, 皆生平所?也==<p246(519)南史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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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양유효작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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