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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 揭示版 스크랩 비엔나 중앙묘지, 비엔나 숲의 칼렌베르크와 베토벤 호이리게
교회와 수아람 추천 0 조회 59 12.06.11 17: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저희 여행기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동유럽 부부 렌터카 여행(상, 하 2권)

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책입니다만 보람 있게 커 갈 수 있도록 따뜻한 애정으로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연락처: 통일신문사 02-701-8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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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일. 2006, 05, 29(월) 비엔나 시내관광 제2일

 

 

오늘은 월요일이라 노상에 무료주차를 할 수 없어 새벽에 일어나서 쉼터 아줌마가 주선한 곳에 차를 옮겨 놓고 온다. 깔끔한 백반 아침식사는 구미에 맞는 한국가정의 맛이다. 시원한 맥주까지 한 병 곁들어있다. 중앙묘지(Zentralfriedhof)와 비엔나의 숲(Wienerwald) 등 오늘 찾아다닐 교통편에 대해 설명을 듣다 화제가 비엔나 이민생활까지 옮겨가 식탁에 앉은 시간이 뜻밖에 길어졌다. 애들 음악 공부를 시키면서 아줌마도 피아노를 배우는 중이라고 한다.

어지간히 늦어진 10시에 집을 나선다. 먼저 화가이자 건축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집(Friedensreich Hundertwasserhaus)을 들러 가려고 한다. 그는 1928년 비엔나에서 태어난 유태계 오스트리아인으로 자연과 건축의 조화를 통해 인간성 회복을 추구한 반문명 생태주의 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건축의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고 ‘신은 직선을 모른다‘며 인위적 산물인 곧은 선과 매끄러움을 거부한다. 또 휘어나간 스카이라인은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맺어주는 다리라고 주장한다. 강열하고 화려한 색채, 서로 다른 모양의 창틀, 둥근 탑 등으로 조화를 꾀하고 바닥 천정할 것 없이 거의 굽은 선을 쓰면서 표면은 우툴두툴, 모서리는 비뚤어지게 만든다. 이름을 한자로 풀어 백수(百水)라는 한문 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문명에 회의를 갖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동양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적백으로 칠한 2량짜리 N번 트램을 타고 동남으로 곧장 달려 도나우 운하(Donaukanal)를 넘는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좌석이 하나, 오른쪽으로 두개가 있는 좁은 전차다. 트램이란 비엔나에 36개 노선이 있다는 시가전차(Strassebahn)를 말하며 중간쯤에 달려있는 파란 기계에 차표를 넣어 날짜를 찍는다. 뢰벤거리(L?wengasse)에서 내려 지척에 있는 훈데르트바서의 집을 세 번이나 물어 겨우 위치를 찾는다. 1986년 완공된 공동주택으로 안에 사람이 살고 있어 구경은 못하지만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람이 있다.

 

 

 

첫 눈에 바르셀로나에서 본 안토니오 가우디(Gaudi)의 작품, 특히 구엘(Guel)공원이 연상된다. 건물이라기보다는 화판에 프리핸드로 그린 다채로운 애들 그림 같다. 직선이 아주 없는 줄 알았더니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창들은 별수 없이 곧은 네모를 갖추고 있다. 대신 그 윤곽을 불규칙한 칸으로 구분해 극채색으로 칠해 놓았다. 요는 상식과 규칙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기본적인 철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악이란 자연에는 없고 오직 인간에만 존재하는 것’, ‘집은 벽이 아니라 창으로 이루어지는 것’ 등 일련의 어록을 보면 주거에 자연을 끌어들이려는 그의 한결같은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현관 분수 옆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분위기에 잠긴다.

살짝 솟은 언덕을 지나 크게 굽은 아치 밑으로 굴속같이 들어간 현관, 옥상정원과 양파 모습의 탑, 나무나 도기 유리를 섞어 쓴 다양한 벽체 등 변화무쌍한 구성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따스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일견 무질서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있다. 비엔나에는 이 외에도 개인 전시장인 쿤스트하우스(Kunst Haus), 스피틀라우(Spittelau)에 있는 공 모양의 쓰레기소각장(Fernheizwerk) 등 유명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자연과 연관된 예술을 끝까지 추구한 훈데르트바서는 2000년에 사망했고 본인이 원한대로 대자연 속 뉴질랜드의 한 정원, 튜립 밑에 묻혔다.

다음 목적지는 중앙묘지다. 서북쪽으로 약 300m, 힌테레 졸람트(Hintere Zollamtsstrasse)까지 걸어가서 트램 0번을 타고 지하철이 있는 란트스트라세(Landstrasse)에 도착한다. 걸어도 좋은 거리지만 몇 번을 타도 좋은 승차권이니 이렇게 길을 일러준 모양이다. 지하철역에서 오렌지 색 U3를 타고 동남쪽 교외로 여덟 정거장, 3호선 종점인 짐머링크(Simmering)까지 간다. 옛날 망우리 공동묘지 가던 길, 청량리에서 내려 갈아타던 생각이 나는 비슷한 기분이다. 다시 트램 6번으로 갈아타고 네 번째이자 중앙묘지의 두 번째 정거장인 젠트랄프리드호프 2번 출입문(Zentralfriedhof Tor2) 앞에서 내린다. 12시30분, 꽃가게가 몇 집 있을 뿐 주변은 조용하다.

중앙묘지는 단순한 묘지라기보다는 관광명소로 보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영화 제3의 사나이, 라스트신으로 알려진 까닭도 있지만 그에 앞서, 묘지 한편에 역사에 남을 음악가들의 무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까지 비엔나에서 죽은 사람은 주로 교회 옆 작은 묘지에 매장됐으나 1732년 황제 카를 6세가 위생적 이유를 내세워 시내 묘역을 폐쇄했고 이어 요제프2세가 묘지는 성 밖에만 두도록 명령하였다. 비엔나 인구가 계속 증가하자 시의회는 1863년 새로운 공동묘지의 설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부터 시 남쪽 짐머링크에 중앙묘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74년 11월에 개장한 묘지 전체의 면적은 약 2.4평방Km, 330만의 시민이 잠들어 있으며 8Km에 이르는 담장에 3개의 출입문이 있다. 묘지는 가운데 있는 칼 루에거 성당(Karl Lueger Kirche)을 중심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돼있고 그 사이를 대각선 길이 8방으로 연결한다. 루에거 성당 옆에는 대통령 묘역이 있어 2차 대전 이후의 대통령 들이 묻혀있다. 일반 묘역과 구별하여 예술, 과학, 정치 등 유명 인사를 매장한 32A, 32C, 33G, 40 등 네 개의 명예구역(Ehrengr?ber)이 있으며 시민들은 이곳에 묻히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음악가 묘역도 그 중의 하나다.

 

 

 

내부 출입에는 돈을 받지 않는다. 두 개의 하얀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2번 정문을 들어서는데 필 여사가 멈춰선 채 팔을 잡는다. 만면 웃음에 장난기가 역력하다.

 

“여보, 당신 존경해 마지않는 변도변 선생 찾으면서 뭐 좀, 모자란 거 못 느껴?” 변도변은 집에서 자주 쓰는 베토벤 선생의 애칭이다.

“글쎄... 좀 허전하긴 한데. 왜? 좋은 수 있어?”

“화원도 있겠다. 꽃 한 송이 받치면 좋겠구먼.”

“! !... 와! 어떻게 그 생각을 해냈지? 정말 신통하다.”

“그것쯤 기본 아니겠어?” 호랑이라도 한 마리 잡은 표정이다.

 

국화를 한 다발 산다. 별안간 묘지로 향하는 심정이 풍성해지면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철문 뒤로 넓은 묘지가 전개되며 남서 방향으로 가로수 길이 뻗어 나가고 약 500m 멀리 백색, 청록 돔의 칼 루에거 성당이 보인다. 도로 양쪽에 늘어 선 꽃으로 장식된 묘지에는 번호가 적혀있다. 청설모가 들락거리는 깨끗한 길을 걸으며 악성들 묘지가 있다는 제32A구를 찾는다. 정문에서 약 250m 걸어 들어가자 좌측에 음악가묘지(Musiker)라는 흰색 팻말이 나타난다. 비엔나에 화려한 무대를 펼쳤던 음악의 거장들이 쉬고 있는 마지막 안식처다.

 

 

 

보도 옆에 작은 반원의 잔디밭이 있고 그 중심인 묘지번호 55번에 모차르트의 가묘가 있다. 레퀴엠의 악보와 하프를 안고 있는 여인의 청동상인데 아내 콘스탄체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며 묘지에 유골은 묻혀있지 않다고 한다. 이 상을 옹위하듯 그 뒤로 두 개의 하얀 묘석이 둘러서있다. 왼 쪽이 묘지번호 29번의 베토벤, 오른쪽 28번이 슈베르트의 묘다. 그 뒤로는 다시 나무가 둥글게 가려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모차르트의 가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사선으로 길이 나 있는데 슈베르트의 묘 오른쪽 길 건너 26번과 27번이 브람스와 요한 스트라우스의 무덤이고 베토벤 왼쪽 오솔길 너머 31번이 주페(Franz von Supp?)의 묘지다. 쇤베르크(Arnold Sch?nberg)의 묘는 두 블록을 더 올라간 32C의 초입, 21A에 있다.

천재는 죽어서도 외롭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것이 바로 모차르트다. 가난했던 말년, 그는 빚에 쫓겨 살았고 결국 원인모를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 콘스탄체조차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장지인 마르크스 묘지(St. Marx) 까지 동행한 친척도 없었다. 당시 관습으로 성 밖에 나가면 일몰 전까지 반드시 성안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모차르트의 장례가 해 질 무렵 이뤄졌기 때문에 시신을 실은 마차는 인부들만 태우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다른 시체와 함께 가장 하급인 3급 장례로 관도 없이 묻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재 마르크스 묘지, 모차르트가 묻혔을 만한 장소에 고뇌하는 천사의 상이 서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실제 무덤은 아니다.

 

- 빈의 겨울은 뼛속 깊이 춥고 변덕스럽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비, 진눈깨비, 눈을 번갈아 뿌리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한다. 그날 늦은 오후 빈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 인부들은 대여섯 구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와 구덩이에 내던졌다. 자루에 담긴 시신들은 아무런 표식도 없었고 그 위에 흙이 덮여졌다. 1791년 12월 6일 오후 빈 교외의 공동묘지 생 마르크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그렇게 행려병자의 시신처럼 파묻힌 시체 중에는 불멸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가 있었다. 빈 시는 60년 뒤 모차르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묘지를 파헤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모차르트 팬들은 모차르트의 어이없는 비참한 죽음 앞에 애통해 하고 묘비명조차 세우지 않은 18세기 빈 사람들의 처사에 분노한다. 21세기의 그들은 18세기의 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 - 위클리조선 조성관님 글에서 인용

 

모차르트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삭막한 최후를 맞았다. 다만 그가 가난했기 때문에 빈민묘지에 묻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1784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하여 돈이 있거나 없거나 관은 사용할 수 없었고 모두 공동묘지에 매장 되는 것이 실상이었다는 것이다.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나 23세에 두 번째로 비엔나를 찾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78번을 이사하며 35년을 이곳에서 살았고 1827년 3월 26일 독신으로 지낸 한 평생을 마감했다. 사망한지 3일 만에 거행된 장례식은 나폴레옹 몰락 후 비엔나에 일어난 최대의 사건으로 유해를 따른 2만의 인파가 뵈링거묘지(W?hringer Friedhof)까지 행렬을 이뤘다고 한다. 평소 베토벤을 극진히 존경했던 슈베르트는 유명인사 36명에 섞여 장지까지 횃불을 들고 참여했다. 당시 이미 병이 깊었던 슈베르트는 그로부터 1년 반 만에 세상을 떴으며 베토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같은 묘지에 매장되었다. 1870년대 후반 중앙묘지가 개설되면서 뵈링거묘지가 점차 황폐해지자 1888년 9월, 베토벤 유해를 중앙묘지 내 특별 명예구역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때 슈베르트도 같이 이장하여 소원대로 베토벤 곁에 편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뵈링거묘지는 1890년 폐쇄됐지만 슈베르트공원으로 남아있으며 두 사람의 묘지자리는 아직 기념으로 보존돼 있다고 한다.

 

 

 

베토벤의 묘는 하얀 오벨리스크 중간에 금빛 하프가 양각돼 있고 검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을 뿐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모습이다. 맨 밑에 적혀있는 글은 이 묘석이 뵈링거묘지에 있던 최초의 디자인 그대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 날씨에 음악가 묘역에 있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다. 베토벤 앞에 서서 눈을 감는다. 클래식 음악의 문을 열어주었고 인생 길 굽이굽이에 항상 우뚝하게 서있던 큰 산, 외로울 때나 슬플 때 힘을 북돋아 준 그 많은 심포니와 콘체르토 그리고 소나타, 흘러간 세월에 베풀어 준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시간을 회상하며 한 송이 국화꽃을 바친다.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는 1797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짧은 31년을 비엔나에서 보내고 1828년 비엔나에 묻힌 가장 비엔나적인 음악가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샘솟듯 아름다운 선율의 가곡 600여곡과 교향곡 피아노곡 실내악곡 등 주옥같은 유산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무겁고 장중한 베토벤과는 또 다르게 자연스럽고 풍부한 정서를 지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백색 대리석, 신전풍의 비석에는 슈베르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음악의 여신 뮤즈(Muse)의 모습이 부조돼 있다.

 

 

 

슈베르트의 묘 옆, 오솔길 오른쪽에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무덤이 나란히 놓여있다.

1825년 태어난 요한 스트라우스 2세는 당대 최고의 무도곡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왈츠의 황제’라 일컬어진다. 1866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운이 위축됐을 때 작곡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시민들의 활력소로 작용하여 제2의 국가로 불릴 만큼 사랑을 받는다. 춤곡의 왕자라면 어찌 풍류를 마다할 것인가, 스트라우스 2세는 세 번 결혼하고 1899년 폐렴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부와 명성을 남기고 간 그의 장례식은 3일 후 국가적 행사로 성대히 치러졌다.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서있는 스트라우스의 묘석은 눈에 띄게 복잡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천사들이 노니는 윗부분에 타원형으로 작곡가의 흉상이 조각돼 있고 그 밑, 황금 하프를 든 여인이 기대 선 돌에 스트라우스의 이름과 셋째 아내 아델레(Adele)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나이 차가 많았던 아델레는 1930년에 사망하여 이곳에 같이 묻혔다. 검은 삼각형 묘석으로 된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의 무덤도 같은 32A 구역 15번에 있으며 두 동생, 요재프(Josef)와 에드아르트(Eduard)도 44번과 42번에 묻혀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1833년 태어난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는 바덴바덴(Baden Baden)에서 요한 스트라우스를 만나 친분을 맺는다. 스트라우스는 형편이 시원치 않던 브람스에게 권한다. “비엔나로 오시오. 음악가가 살기에는 좋은 곳이오.” 1862년 거처를 비엔나로 옮긴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35년 스트라우스와 두터운 우의를 이어갔고 지금 그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 브람스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연은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부처와의 만남이었다. 특히 비극적인 슈만의 사후, 미망인 클라라(Clara)에 대한 한결같은 순정은 내성적인 브람스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교향곡 제1번 4악장에서 울리는 알프혼의 선율은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 “높은 산에서, 깊은 골짜기에서, 몇 천 번이고 인사를 보낸다.”는 소회를 적고 있다. 풍부한 감정을 내포하면서도 중후하고 견실하여 결코 절제를 잃지 않는 그의 음악은 생애를 통한 진솔한 성품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는 끝내 사랑의 말 한마디 없이 독신으로 지내다 1897년 4월 숨을 거뒀다. 묘석 중앙 기둥 위에는 악상에 잠겨있는 흉상이 놓여있는데 소박하고 근엄한 표정이 그의 천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근처에 있는 ‘시인과 농부’의 프란츠 주페, 가곡의 휴고 볼프(Hugo Wolf)의 묘지까지 몇 바퀴 둘러보며 정성어린 하얀 꽃 한 송이씩을 놓는다. 내일이면 자취조차 없어질 형체이건만 마음속 비엔나 묘지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 감회가 따사롭고 뿌듯하다.

성당 쪽으로 두 구역을 더 가서 쇤베르크의 묘도 찾아본다. 1874년 태어나 무조음악을 도입하고 12음 기법을 창안하여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다. 그의 음악은 전위음악으로 알려졌으나 오늘 날에는 모던클래식으로 불릴 만큼 귀에 익숙해졌다. 1951년 이곳에 묻힌 쇤베르크의 무덤은 그가 만들어낸 기법을 상징하여 하얀 12면체를 모로 세워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묘석을 디자인한 오스트리아의 조각가 보트루바(Fritz Wotruba) 역시 중앙묘지에 잠들어 있다.

음악가 묘원의 순례를 마치고 눈앞에 크게 서 있는 묘지의 중심, 칼 루에거 성당에 들어가 본다. 1910년 막스 헤겔레(Max Hegele) 설계로 건립된 높이 58.5m, 청록 돔이 특징인 아르누보 양식의 커다란 기념 건축물이다. 원래 장례예배를 드릴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비엔나 시장이던 칼 루에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의 기념관을 겸하도록 개조되었다고 한다. 칼 루에거박사는 다섯 번이나 비엔나 시장에 선출된 반유대주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내부는 고딕성당과 달리 기둥이 없는 구조라 허전할 정도로 넓은 느낌이며 정면의 하얀 제단과 사실적인 성화가 분홍색 벽체와 어울려 엄숙하기보다는 화사함이 앞서는 분위기다.

성당 뒤에는 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의 라스트신으로 유명한 가로수길이 있다. 알리다 발리(Alida Valli)는 자신을 기다리고 서있는 조셉 코튼(Joseph Cotten) 앞을 지나며 끝내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롱숏(long shot), 족히 1분은 넘는 가로수 묘지 길의 영상이 영화가 끝나고도 한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던 생각이 난다. 희미하지만 낙엽이 뒹구는 벌거숭이 가로수였던 기억인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그 길인지는 자신이 없다. 사진을 찍고 나오다 보니 좌측으로 비슷한 길이 또 하나 보인다.

13시50분 중앙묘지를 나와 오던 길을 되짚어 71번 트램으로 짐머링크까지 간다. 정거장을 놓쳐 한 스톱을 더 갔다 갈아타고 돌아온다. 시의 동남 외곽에서 다음 목표인 비엔나 숲을 향해 북쪽 끝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로 가려는 것이다.

비엔나 숲은 도심에서 반나절 코스에 있는 구릉의 총칭으로 북과 서남에 걸쳐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데 1,000평방Km에 이르는 면적을 가지고 있어 정상적으로 보려면 2, 3일이 소요된다. 크게 북부와 남서부의 숲으로 나뉘는데 북부에는 베토벤 살던 집이 11개나 있다는 하일리겐슈타트, 선술집 호이리게(Heurige)가 즐비한 그린칭(Grinzing) 그리고 도나우 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언덕 칼렌베르크(Kahlenberg) 등이 있다. 남서부 숲에는 황제의 온천휴양지 바덴(Baden), 12세기 수도원이 있는 하일리겐크로이츠(Heiligenkreuz), 슈베르트의 보리스 테마가 있는 뫼들링크(M?dling), 황태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이어링크(Mayerling) 등 이 있다. 오늘은 북쪽 부분만 돌아 볼 예정이다.

짐머링크 지하철역에서 U3를 타고 란트스트라세에서 내려 녹색 U4로 갈아타고 종점 하일리겐슈타트로 향한다. 전차는 곧 지상으로 올라와 도나우운하(Donaukanal)를 따라 여섯 정거장, 시내를 남북으로 뚫고 달린다.

14시30분 종점에 도착해서 내리니 도시를 벗어난 느낌이 든다. 하일리겐슈타트란 ‘성스러운 거리’라는 뜻이다. 역 앞에 있는 대규모 공동주택 칼 마르크스 호프(Karl Marx Hof)가 먼저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은 오스트리아가 제1차 공화제 시절이던 1929년에 건설한 표현주의 건축의 대표적 작품으로 전장이 1Km나 된다는 노동자의 공동주택이다. 한문 높을 고(高)자를 연상시키는 아치의 붉은 패턴이 옆으로 계속 이어지는 구성이 인상적이다. 38A 버스를 타고 비엔나 숲속의 높은 언덕 칼렌베르크로 향한다. 시내 교통수단 중 번호 뒤에 A가 붙으면 버스라는 얘기다. 비엔나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대중교통을 수없이 타다보니 이제 간단한 특징은 식별 할 수 있게 됐다. 숙소에 돌아갈 때까지 계산하면 오늘이 74년 생애 중 차를 가장 많이 갈아탄 날이 될 듯하다. 버스는 그린칭을 거치고 호이리게가 산재한 상점과 주택가를 지나 녹음 짙은 풍성한 숲을 구불구불 돌아 표고 484m의 산 위로 올라간다. 전면 동산 위에 높게 솟은 가느다란 송신철탑이 보인다. 30분 걸려 도착한 정상,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이 쓸쓸하다. 버스를 내려 언덕으로 걸어가니 왼쪽에 하얀 색의 성 요제프(St. Josef)교회가 보이고 전면에 낮은 2층 카페 건물이 있다. 그 옥상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간다.

오스트리아는 1529년 비엔나를 공격한 오스만투르크(Osman Turk)의 25만 대군을 3주에 걸친 방어전 끝에 힘겹게 물리쳤다. 1683년 두 번째로 당한 포위에서도 함락 직전, 이곳 칼렌베르크 언덕에서 돌진해 내려온 폴란드왕 얀 소비에스키(Sobieski)의 구원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대군을 몰고 침입했던 320년 전 투르크의 위세와 EU가입을 열망하는 오늘날의 터키를 생각하며 사투가 벌어졌던 현장에 서서 역사의 무상을 절감한다.

 

 

 

숲 밑, 멀리 뻗어나간 포도밭 저 쪽으로 비엔나 시가가 낮고 넓게 퍼져있다. 짙은 구름 밑에 도나우 강 두 줄기가 반짝일 뿐 시가는 안개에 가려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15시20분 우거진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준비한 음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비엔나 숲속의 피크닉이다. 따끈한 커피로 마무리를 하고 주차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뜻밖에 우리나라에서 온 한 가족을 만난다. 나이 많은 부인과 젊은 부부에 애가 둘인 일가로 진주에서 왔다고 한다. 이 얘기 저 얘기, 화제가 이어지면서 마침 도착한 버스를 타고 레오폴츠베르크(Leopoldsberg)까지 동행한다.

38A를 타고 1.5Km 정도 동북쪽으로 굽어 내려간 곳에 있는 레오폴츠베르크는 표고 425m의 전망대다. 1683년 터키군의 비엔나 침공을 막아낸 레오폴트 1세는 승리를 감사하는 뜻에서 1693년, 본래 있던 바벤베르크 성 안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로부터 이곳 이름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소문난 음악 애호가인 레오폴트 1세는 음악육성 못지않게 스스로의 작품 활동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황제다. 옛날 성채와 성당을 돌아보고 전망대로 나와 가릴 것 없이 탁 터진 남쪽을 내려다본다. 그 동안 구름도 많이 걷혀 칼렌베르크와는 달리 눈 아래 도나우와 비엔나의 장관이 시원하게 전개돼있다. 활처럼 휜 두 줄기의 강이 크게 흐르고 도나우타워(Donauturm), 훈데르트바서의 쓰레기소각장 그 뒤에 있는 슈테판대성당 등 여러 명소가 모형처럼 작게 바라다 보인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비취색으로 넘실대는 한 줄기 흐름이라 생각했는데 거듭된 치수공사로 여러 가닥의 물이 비엔나를 흐르고 있다. 도심을 뚫고 지나는 물줄기는 도나우 운하이고 시 외곽을 따라 넓은 도나우 강과 다시 그 밖으로 약간 좁은 신도나우(Neue Donau)강이 가느다란 띠(Donauinse)를 사이에 끼고 평행으로 흐른다. 그 밖으로는 제방을 막아 호수가 된 구 도나우(Alte Donau)가 있다. 지도를 보지 않으면 곳곳에서 만나는 강에 혼란을 겪게 된다. 푸르다고는 할 수 없는 물빛과 함께 왈츠를 들으며 설레던 감각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이 비엔나의 도나우를 접하며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다.

16시20분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귀로에 오른다. 직행하는 한국 가족과 서로 행운을 빌며 작별하고 우리는 그린칭에서 내린다. 지나가는 길에 이 작은 마을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일리겐슈타트와 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그린칭은 호이리게(Heurige)라는 선술집이 많은 곳으로 오스트리아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호이리게는 원래 ‘새로 담근 술’이라는 뜻으로 그 해에 만들어진 포도주를 의미했으나 현재는 와인을 즐기며 간단하게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19세기 후반 프란츠 요제프 치하에서 포도 재배 농민들이 와인 판매권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이를 황제가 수락하자 포도 농가가 많던 그린칭이 자연스럽게 호이리게 마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매년 11월 11일, 성 마틴 날(St. Martin's Day)을 기해 호이리게에서는 첫 와인을 출시한다. 이 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슈람멜(Schrammel)이라는 소편성의 전속악단이 테이블을 돌며 귀에 익은 경음악을 연주한다. 새 술이 있는 호이리게는 솔 나무 가지를 문 위에 걸어 쉽게 알 수 있도록 표시하고 전등을 켜서 영업 중임을 알린다.

시간이 이른지 많은 호이리게의 문이 닫혀 있고 다시 내리기 시작한 안개비 속 마을에는 쓸쓸한 정서가 감돈다. 붉은 각뿔 지붕과 청동색 양파 탑이 잘 어울리는 교구성당을 돌아보고 나오다 굵어진 비를 피해 상가 추녀 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다. 500m 정도 남쪽에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가 아내 알마(Alma)와 함께 잠들어 있는 그린칭묘지가 있는데 빗속에 다녀올 생각이 아득하여 생략하고 오늘 놓쳐서는 안 될 대상인 베토벤의 선술집을 찾아보기로 한다.

상점에서 쇼핑하던 기품 있는 노부인에게 베토벤이 살았다는 호이리게의 위치를 물었더니 마침 자기가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며 일 끝내고 태워다 주겠다고 한다. 십 분이나 기다렸을까, 할머니가 차를 몰고 와서 우리를 태운다. 한국과 오스트리아로 화제가 오가던 차중 환담도 잠깐, 이내 도착한 베토벤 호이리게 앞에서 내려주며 옆 골목에 있는 ‘유서의 집’까지 자세히 일려 준다. 무엇보다도 집을 쉽게 찾은 것이 고마웠지만 그 못지않게 서양 노인의 우아한 언행에 마음이 끌리고 오랜 풍토에서 무르익은 소양, 쉽게 흉내 낼 수없는 몸가짐에 시샘 섞인 부러움을 느낀다.

 

 

 

와인은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집(Heiligenst?dter Testament Haus)을 보기로 한다. 앞에 있는 교회 작은 광장에서 서편으로 뻗은 프로부스가(Probusgasse) 좁은 골목을 약 150미터 들어간 곳, 왼쪽 6번지에 길고 하얀 2층집이 있다. 기다란 적백기가 네 개 꽂혀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국기를 상징하는 희고 빨간 이 삼각형 기는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비엔나 관광국이 제정하여 역사적 의의가 있는 건물에 달아놓은 것으로 두 개씩 끝을 묶어 Wien의 W자를 나타낸다고 한다.

청각을 잃어가는 베토벤은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쓴다. 미술이 시각의 예술이라면, 음악은 청각의 예술이다. 음악을 삶의 전부로 살았던 한 인간에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귓병이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싸이자 그는 두 명의 동생 앞으로 장문의 유서를 쓰고 생을 마감하려는 자신의 심경을 고백한다. 내용은 절망적이고 비통하여 그의 음악만큼이나 진지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크게 말해. 소리 질러. 난 귀머거리야.” 라고 말하지 못 했다. 아아! 어떻게 청각이 손상됐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시민사회와의 신뢰부족에 대해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선다면 불타는 분노로 나의 현재 상태가 노출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리고는 음악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을 토로하며 죽음이 앞에 있음을 암시한다. ‘나를 지탱해준 유일한 것은 음악이다. 내게 떠오르는 곡을 모두 작곡하기 전에 이 세상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참으로 가능 할 것인가?’ ‘말 하건데 나는 나의 여행안내를 위해 지금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너 죽음이여 언제든지 오라. 용기를 가지고 맞이할 것이다.’ ‘안녕,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나를 완전히 잊지는 말아다오.’

자살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고 그는 25년을 더 산다. 발송되지 않은 유서는 죽은 후 발견되었다. 심오한 고뇌를 이기고 넘어선 굳은 의지는 그 후 위대한 작품 속에 살아나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격정으로 타오르고 성숙한 생의 철학으로 승화해 간다. 이곳에 베토벤의 영웅적 위대함이 있다.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바이올린협주곡, 피아노소나타 열정, 고별 등 주옥같은 명곡이 다 유서 이후의 작품이다.

 

― 억세게 힘을 주어 감각이 굳어진 듯한 얼굴, 끊임없이 발산하려는 음악을 용서 없이 붙들어 응결시킨 것 같은 얼굴, 잡음이 만드는 혼탁과 허망에 빠져들지 않도록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리만 듣도록 신이 청각을 막아버린 얼굴. 세계의 완성자여, 은혜로운 비가 되어 이 땅을 적시고, 바다 위에 내리고, 온갖 만물 위에 떠올라 다시 하늘을 형성하는 자… ―

- ‘말테의 수기’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사망 장소에서 잘라왔다는 베토벤의 모발을 소장하고 있던 유태인이, 숨겨준 보답으로 제공한 머리카락을 초고속 입자 가속기로 분석했다는 최근의 TV 프로를 보니 그의 병이 납 중독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납에 중독되면 귀도 먹고 화를 잘 내는 모양이다.

“존경 하려니 괴팍하고, 사랑하려니 돈이 없지, 무시하려니 위대하다.” 당시 비엔나 사람들이 베토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심정이라고 한다. 베토벤 스스로도 병으로 인한 증상을 고백하며 세상과 화해하기를 빈다고 유서에 적고 있다. 고결한 기개, 권위에 꺾이지 않던 불굴의 인내력, 위인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위대한 인물... 그가 고뇌에 잠겼던 집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홍진에 파묻혀 보낸 지나간 세월, 내내 겸허하기를 애써왔건만 이제 그의 오만도 한번 닮아 보고 싶어진다. 오늘은 월요일, 유서의 집은 휴관이라 문이 닫혀있다.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대신 골목 끝에서 남쪽으로 돌아 하일리겐슈타트 공원에 있는 베토벤의 석상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린칭거리(Grinzinger Strasse)를 넘으면 숲으로 난 길 모퉁이에 외투를 풀어 헤치고 뒷짐으로 모자를 잡은 채 산보하는 대리석 조상이 서있다. 반원으로 된 아치 안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다가오는 운명을 응시하는 이 전신상은 횐라인(Fritz H?nlein)의 조각으로 1910년 제작된 것이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는 처음 차에서 내린 베토벤의 와인 집으로 발을 돌린다.

 

 

 

파르플라츠(Pfarrplatz) 2번지에 있는 베토벤하우스, 마이어 암 파르플라츠(Mayer am Pfarrplatz)는 320년의 역사를 지닌 호이리게로 베토벤이 1817년 5월부터 약 2개월, 2층에 세 들어 살면서 제9번 합창교향곡의 일부분을 작곡했다는 곳이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오려면 38A버스를 타고 셋째 정거장에서 내리면 된다. 박공지붕 두 개가 연결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테이블이 여남은 개 놓여있는 중정을 가운데 두고 3방향으로 술을 파는 건물이 있다. 오른쪽 식당으로 들어가서 길게 늘어선 맨 구석 식탁에 안내된다. 젊은 일본 아가씨 두 사람이 옆 좌석에서 와인을 들고 있을 뿐 17시 40분인데 아직도 이른지 좌석이 거의 비어있다. 와인은 테이블에 가져다주며 햄 소시지, 샐러드, 슈니첼 등 안주는 쇼케이스에서 골라 셀프로 가져온다는 글을 읽은 터라 종업원을 찾는데 빈 식당에 아무도 없다.

 

 

한참 만에 나타난 뚱뚱한 웨이트리스가 일본 손님 두 명을 데리고 와서 텅 비워있는 좌석 놔두고 우리 테이블에 합석을 하라고 한다. 동양 사람을 우습게 보는지 불손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베토벤이 좋아도 참을 수 없었던지 일본 손님이 언짢은 얼굴로 거부하고 나가자 주문한 백포도주를 두 잔 가져온다. 옆의 일본 아가씨들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베토벤 산책로에 다녀오는 길이라기에 방향을 물어 익혀둔다. 안주를 사려고 입구까지 가보아도 다시 사람이 없어 우리도 술만 마시고 이 집을 물러나기로 했다. 백포도주 다음에 적포도주를 시키고 슈람멜악단이 오면 1유로정도 팁도 주어가면서 하일리겐슈타트를 얼큰하게 즐겨 볼 생각이었는데 기대가 어긋나 기분이 개운치 않다. 와인은 한 잔에 2.4유로다.

호이리게 앞에서 북으로 뻗은 2층 주택가가 에로이카소로(Eroicagasse)다. 베토벤이 교향곡 제3번 영웅을 구상하며 걸었다는 녹음 짙은 조용한 거리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을 200여m 걸어 5거리를 지나니 눈앞에 나타나는 경사면 일대에 포도밭의 파란 평행선이 전개된다. 이어지는 주택과 포장된 도로, 주차하고 있는 자동차, 그 시절과는 전혀 다른 경치겠지만 웅크린 등에, 뒷짐 지고 땅을 굽어보는 자세로 옛날 그 길을 한번 걸어본다. 애들 장난 같지만 한번 해보고 싶었다.

북쪽 내리막길로 계속 발을 옮기면 베토벤 산책로(Beethovengang)의 표지가 나타나고 계류가 흐르는 실개천 슈라이버(Schreiberbach)를 만난다. 왼쪽으로 꺾여 냇물을 따라 베토벤이 전원교향곡 (Pastoral) 2악장의 테마를 착상했다는 오솔 길로 들어선다. 숲속 시원한 나무 밑으로 휘어나간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다. 길의 포장과 냇가의 쇠 난간이 눈에 거슬리지만 졸졸거리는 여울과 새들 울음소리, 냇물의 반짝임이 산들바람과 어울려 그런대로 부드럽게 마음을 달래준다. 귀가 멀어 그의 마음속에만 영글었을 숲의 선율이 지금 머리를 감돌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본 전원교향곡의 귀여운 다람쥐, 토끼가 곧 튀어나올 것만 같다. 100m나 걸었을까, 우두둑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차 빗줄기가 거세진다. 짐작에 한참은 더 걸어야할 앞길이 망막하여 황급히 에로이카소로로 후퇴한다. 산책로를 끝까지 가면 베토벤 흉상이 있는 작은 쉼터(Beethoven Ruhe)가 있다는데 추녀에서 비를 피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파란 많은 56년의 생애를 마감한다. 비엔나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이고 요란하게 벼락이 치는 순간 베토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치켜들고 수초동안 허공을 노려보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고 전한다. 임종의 자리에서 “박수를 치게, 친구들이여, 희극은 끝났다네.”(Plaudite, amici, comedia finita est.), 한마디를 남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말에서는 즉흥보다 어떤 작위가 다분히 느껴진다. 베토벤 같은 거인에게도 죽을 때 남길 말을 미리 생각해 둘 자잘한 신경이 있었던 것일까? 산책로에서 구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임종의 말은 한평생 가꾼 품격에 한 가닥 장식을 더해주는 절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명사들은 죽음의 한마디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일까?

“창을 열어다오. 빛을... , 더 빛을... ,”-괴테의 구절은 그의 작품 닮아 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성실성이 돋보이는 말을 남긴다. -“나는 진실을 사랑한다.... , 무척! 진실을 사랑하고 있다.” 미국 작가 오 헨리(O. Henry)의 한마디는 눈물이 날 만큼 측은하다. -“불을 밝혀다오.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런 가운데서 칼 마르크스는 적당한 말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임종의 한마디를 부탁한 가정부에게 내뱉는다. -“저리 가, 나가버려! 임종의 말 따위는 할 얘기를 못 다한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잘 알려진 묘비명은 넘치는 해학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너드 쇼의 구절이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가장 감명 깊은 글귀는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묘비에 적혀있다. -“별이 총총한 드넓은 하늘 아래, 무덤 하나 파고 나를 눕게 하소서, 바다에서 고향 찾은 뱃사람처럼, 산에서 고향 찾은 사냥꾼처럼.”

영국의 시인 바일론은 죽으면서 말했다. -“내 시간이 됐다. 죽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것이 얼마나 마음에 걸리는지! ... 자, 그럼 잠 좀 자볼까?”

 

 

 

그렇다면 이런 한 마디는 어떨까? - “한 바탕 좋은 꿈 꿨으니... 자! 슬슬 깨어나 볼까? 뜬 구름 한 세상, 일장춘몽인 것을,”

여담이 길어졌다. 비가 뜸한 사이 에로이카소로 5거리에서 길을 물어 D번 트램을 타고 하일리겐슈타트, 지하철 U4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 슈피텔라우(Spittelau), 다시 U6로 환승하여 집 근처 드레스드너로 돌아온다. 도움 없이 지하철, 트램, 버스를 자유자재로 타게 된 것을 보니 이제 이 도시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쉼터에 도착한 시간은 19시 40분, 잠깐 숨을 돌리고 아침에 맡겨 논 자동차를 찾으러 나선다. 오늘도 어제 이상 걸었다. 도나우운하의 다리를 건너는데 훈데르트바서의 유명한 작품 슈피텔라우 소각장(Fernheizwerk Spittelau)이 물 위로 건너다보인다. 지역난방도 겸하고 있는 쓰레기 소각장이다. 외벽의 그림은 잘 보이지 않지만 황금 양파와 청색 굴뚝의 독특한 형태가 분홍 노을에 비쳐 이색적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차를 몰고 와 내일 아침 08시까지 무료인 노상에 주차를 한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스위스를 떠난 후 찍은 사진을 CD로 옮겨구워 두 번째로 메모리카드를 비운다. 앞으로 남은 기간의 사진은 메모리카드 용량만으로도 충분하리라는 계산이다. 내일은 정들어가는 비엔나를 작별한다. 오스트리아와도 이별이다. 괴테가 말했다.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함이 아니요 다니기 위한 것이라고.

고로 떠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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